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내 가슴이 말하는 것에
더 자주 귀 기울였으리라
더 즐겁게 살고, 덜 고민했으리라 - P227

지금 알고 있는걸그때도 알았더라면
나는 분명코 춤추는 법을 배웠으리라
내 육체를 있는 그대로 좋아했으리라
내가 만나는 사람을 신뢰하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신뢰할 만한 사람이 되었으리라
입맞춤을 즐겼으리라
정말로 자주 입을 맞췄으리라.
분명코 더 감사하고,
더 많이 행복해 했으리라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 P228

안녕, 피츠버그 그리고 책

안녕, 아빠,
지금 나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어.
마치 시 같다.
버스를 기다리고 서 있는 모습이
한그루의 나무 같다. - P246

폭풍을 기다리는
고요와
적막을
견디어내지 못한 시간들이
앞으로 돋아나지 못할 거야.
나는 가지런하게 서서
버스를 기다려야 해.
이국의 하늘, 아빠,
여기는 내 생의 어디쯤일까? - P248

구름처럼 지나가는
책이 되어.
한장을 넘기면
한장은 접히고
다른 이유가 다른 이야기가 거기 있었지.
책을 책장에 꽂아둔 것 같은
내 하루가 그렇게 정리되었어. - P250

내 생각은
멈추었다가 갑자기 달리는 저 푸른 초원의 누떼 같아.
그리고 정리가 되어 아빠 시처럼 한그루 나무가 된다니까.
아빠는 시골에서 도시로 오기까지 반백년이 걸렸지.
난 알아, 아빠가 얼마나 이주를 싫어하는지.
아빠는 언제든지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겠지. - P252

아빠, 삶은 마치 하늘 위에서
수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는 바람 같아.
안녕, 피츠버그,
내 생의 한 페이지를 넘겨준 피츠버그,
그리고 그리운아빠. - P254

방창 方暢

산벚꽃 흐드러진
저 산에 들어가 꼭꼭 숨어
한 살림 차려 미치게 살다가
푸르름 다 가고 빈 사정이 되면
하얀 눈 되어
그 산 위에 흩날리고 싶었네 - P256

등 시린 잉걸불 속에서 휘파람 소리를 내며
고구마가 익는다.
비가 오려나보다.
차는 빨리도 달린다. 비와
낯선 마을들,
백양나무 흰 몸이
흔들리면서 불 꺼진 차창에 조용히 묻히는
이 저녁
지금 이렇게 아내가 밥 짓는 마을로 돌아가는 길, 나는
아무런 까닭 없이 - P258

혼자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지금의 이 하찮은 이유가 있을 리 없는
이 무한한 가치로
그리고 모자라지 않으니 남을 리 없는
그 많은 시간들을 새롭게 만들어준, 그리하여
모든 시간들이 훌쩍 지나가버린 나의 사랑이 이렇게
외롭지 않게 되었다. - P260

저문 산 아래
쓸쓸히 서 있는 사람아
뒤로 오는 여인이 더 다정하듯이
그리운 것들은 다 산 뒤에 있다
사람들은 왜 모를까 봄이 되면
손에 닿지 않는 것들이 꽃이 된다는 것을 - P262

내 곁에 앉은
주름진 네 손을 잡고
한 세월 눈감았으면 하는 생각,
너 아니면 내 삶이 무엇으로 괴롭고
또 무슨 낙이 있을까.
매미가 우는 여름날
새벽이다.
삶에 여한을 두지 않기로 한,
맑은
새벽에도 움직이면 덥다. - P264

번개가 천둥을 데리고
지상에 내려와
벼락을 때려
생가지를 찢어놓듯이
사랑은
그렇게 왔다 간다. 노래여! 어떻게
내리는 소낙비를 다 잡아 거문고 위에 다 눕히겠느냐.
삶이 그것들을
어찌 다 이기겠느냐. - P266

연분홍 살빛으로 뒤척이는 저 산골짜기
어지러워라 환장하것네
저 산 아래 내가 쓰러져불겠다 시방 - P268

찔레꽃

내가 미쳤지 처음으로 사내 욕심이 났니라
사내 손목을 잡아끌고
초저녁이슬 달린 풋보리잎을 파랗게 쓰러뜨렸니라
둥근 달을 보았느니라
달빛 아래 그놈의 찔레꽃, 그 흰빛 때문이었니라 - P268

산나리

인자 부끄럴 것이 없니라
쓴내 단내 다 맛보았다
그러나 때로 사내의 따뜻한 살내가 그리워
산나리꽃처럼 이렇게 새빨간 입술도 칠하고
손톱도 청소해서 붉은 매니큐어도 칠했니라
말 마라
그 세월덧없다 - P270

서리

꽃도 잎도 다 졌니라 실가지 끝마다 하얗게 서리꽃 피었다마는, 내 몸은 시방 시리고 춥다 겁나게 춥다 내생에 봄날은 다 갔니라 - P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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