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라는 존재는 과연 무엇일까, 참으로 신기하고도 간사스럽게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었다.

"커피를 사세요."
"커피요? 글쎄요, 솔직히 말해서 그런 돈이 제겐 없습니다."

혜주는 언뜻 놀랐다. 커피 살 돈이 없다고 말해 버리는 용기도 용기였지만, 어떻게 해서 이런 말을 하면서 저렇게 태연하다 못해 당당해 보일 수가 있을까, 참 묘한 남자가 아닐 수 없었다.

"제가 빌려드릴 테니 가세요."
이번에는 어떻게 나오나 보자 생각하며 혜주는 이렇게 말했다.
"글쎄요, 밥값이라면 몰라도 커피값을 빚지고는 갚기 어려울 겁니다."

아마 그 말을 하면 진섭은 "이 친구 영 엉터린데. 그래 그 기분이 어땠어, 나하고 하는 것보단 못했겠지" 하며 왈칵 입술을 덮어올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가난 그리고 고생이라는 건 센티멘털이 아니야. 얼음판에 맨발로 서 있는 것 같은 고통, 그것이 가난인데."

그때부터 엄동설한 같은 가난과 고생이 시작되었다. 눈만이 형형하게 살아 있는 남편 진섭은 법관이라는 드높은 탑을 가난의 빙판 저 끝에 세워놓고 세월을 정지시킨 사람이었다.

행복이라는 정의만큼 모호하고 아리송한 것도 없을 것이다. 지난 1년 동안 겪은 고생은 결혼하기 전의 24년 동안 겪은 것의 갑절도 넘을 것이다. 그런데도 어느 때 한시도 불행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고, 동생의 눈에도 행복하게 보인 것이었다.

나는 지금의 남편인 형우에게 얼을 빼앗기기 전까지만 해도 퍽 시건방지고 되바라진 미술학도였다. 퍽 시건방지고 되바라진 계집애라는 건 물론 주위 사람들의 겉만 훑은 평이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너두 별수 없는 고무신의 후예였더랬어."
"네가 밥 먹듯 떠들어대던 여자의 자존심은 어디다 팽개치구 물컵 속에 들어간 각설탕처럼 볼품없이 허물어지니 그래. 비참해서 못 봐주겠다, 얘."

추상화 앞에 선 소련 수상 후루시초프는, 쇠꼬리에 붓을 매달아 휘저은 저따위 것들이 무슨 그림이냐고 제법 유식한 평을 하셨다던가.

"한국엔 이 나이에 아직도 처녀가 있었구먼."
그는 시트를 낚아채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는 직감적으로 그의 말끝이 생략되었다는 걸 느꼈다. 내 머리에 선명하게 새겨지는 그 생략된 말은 ‘재수 없게’였다.

"이 새끼야, 똑바로 엎드려."
준열이는 형구 등에 올라서서 소리쳤다. 형구가 힘에 부쳐 약간 흔들린 모양이었다.

동일은 소스라치며 잠을 깼다. 꿈이었다. 갈증이 심했다. 아내가 잠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찬물을 한 사발 가득 들이켰다. 꼭 갈증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건 허황되거나 아무 근거 없는 소년기의 꿈이 아니었다. 있었던 일이다. 겪었던 일이다. 깊은 상처가 남긴 없어지지 않는 흉터처럼 마음속 저 어딘가 깊은 곳에 판화처럼 선명하게 박혀 있는 기억이었다.

나는 석호가 숨을 거두었다는 연락을 받고도 아무런 충격 같은 것을 받지 않았다. 그는 이제 마흔둘일 뿐이고, 두 아이의 아버지며, 나와는 감정의 간격이 한 치도 없는 불알친구인데 말이다.

"지난번에 술을 싹 끊었어야 합니다. 아시겠어요?"

우리는 도둑담배도 함께 피웠고, 도둑술도 함께 마셨으며, 심지어는 등산을 가서 비 오는 텐트 속에서 수음이라는 것도 함께할 지경으로 깊게 엮어져 있었다.

"임마, 잔소리 말고 어서 먹어. 건강한 신체에 튼튼한 방위다."

"니미럴, 무역 회사에서 돈 벌어 대학 하나 세우고 말 거다."
석호의 술 취한 이 한마디가 그의 심정이나 기타 상황을 충분히 설명해 주고 있었다.

"시체 안치실로 가보시죠."
간호사의 간단명료한 대답이었다. 강석호의 행방이 시체 안치실로 직결되다니. 나는 이 어처구니없는 허망감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동생들은 엄마가 돌아가신 그날부터 꼭 마술에나 걸린 것처럼 갑자기 어른이 되어버렸습니다. 말썽을 부리는 일도, 게으름을 피우는 일도 씻은 듯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대신 눈치껏 할 일을 찾아서 하게끔 된 것입니다.

아빠가 계속 이러시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빠는 우리의 등대고 사령관이십니다. 등대에 불이 꺼지고 사령관이 지휘를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