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인간다운 것인가
‘70년대 말은 근대화의 이념과 방법을 둘러싼 일대 변혁의 시대였다. 조정래의 문학은 이러한 시대적 변화에 적극 대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70년대 말 그의 문학에서는 몇 가지 특징적인 면모가 엿보인다. 자본주의적 근대화의 허구성에 대한 비판, 유신 체제에 대한 우회적 비판, 밑바닥 민중에 대한 깊은 관심이 그것이다.
1970년대 말, 유신의 탄압은 더더욱 가혹해지고, 잘 살고자 하는 욕구를 먹이 삼아 노동 착취는 갈수록 심해지고, 아파트로 상징되는 도시의 밀집된 삶은 서로 서로를 버리고 외면하며 몰인정한 세상으로 치달아가고……, 참 살벌하고 적막한 세월이었다.
백골섬은 육지로부터 2킬로 남짓 떨어져 있었다. 추월도(秋月島)라는 엄연한 이름이 있는데도 그 섬은 백골섬으로 은밀하게 불려졌다.
—여보, 어디든 면횔 가겠어요. 건강하셔야 해요. 울부짖던 아내의 모습이 선하게 떠오른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여기는 해변이 아니라 섬인 것을 그는 직감으로 알았다. 면회 불허가 아니라 면회 불가능이 되었다. 그는 다시 숨을 길게 내쉬었다.
느리긴 했지만 계속 걸음을 옮겼다. 차츰차츰 더 깊은 냉기 속으로 침몰하고 있었다. 아내와의 거리에, 세상과의 간격에, 목숨과의 유대에 점점 두꺼운 벽이 둘러쳐지고 있었다.
기약 없는 시간과 친숙해지고, 상대 없는 대화에 친숙해지고, 박수 없는 인내에 친숙해지기 위해 걷고 있는 것이다.
그놈과의 싸움에서 이기려면 무관심이 최상의 방법이다. 소가 여물을 씹듯, 뱀의 성교처럼 그렇게 징그럽도록 질기게 버팅기는 방법밖에 없다.
"저게 무슨 소리야?" "사람이 죽은 거 아냐?" "아니, 어느 집이야, 어느 집?"
그 산골 마을에서는 밤마다 귀신의 울음 소리가 번져나왔다. 발길을 더듬거려야 할 만큼 어둠이 짙어지기만 하면, 그 습하고 음산한 울음 소리는 영락없이 마을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것이었다.
"그렇담, 굿을 해얀단 말이렷다." 처음 말을 꺼냈던 노인이었다. "그렇지요. 굿을 해야죠." "원귀 달래는 데야 굿 말고 더 신효한 처방이 어디 있나요."
"이년아, 모략허지 말어. 공치는 날이 굶는 날이었으니 그꼴 당하지 않으려고 내 깐엔 을마나 연굴 했겠니. 내 꺼라고 날 때부터 무슨 금테 둘렀다더냐."
"……그러나 아직 이들에게는 큰 시련이 남아 있다. 이렇게 돼지와 닭을 온 정성 다하여 길렀지만 시장을 제대로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이 그 점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외면하듯 그들이 기른 가축도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사무실, 거기는 사무실이었다. 유흥장이나 사교장이 아니라 사무실이었다. 거기에서 모두는 사무를 보도록 되어 있었다. 그래서 아무런 어색함도 불편함도 없었다. 오히려 이것저것 서로를 알게 되면 사무를 수행해 나가는 데 번거롭고 불편하게 될지도 모른다. 거기서는 오로지 정확하고 신속한 사무 기능만 갖추면 그만인 것이다.
설마설마 했던 소문은 설마가 아니었다. 참말로 전기가 들어오게 된 것이다. 밤골의 밤이 대낮처럼 밝아질 날이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전기 가설 공사 소식은 삽시간에 온 동네에 퍼져나갔다. 누구나 처음엔 설마 했고, 나무가 아닌 시멘트 전신주가 길가에 번듯번듯 누워 있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감격 어린 안도의 숨을 내쉬게 되었다.
그래서 밤골 사람들은 이장(里長)이 시키는 대로 줄줄이 서서 똑같은 기호 밑에다 정성스레 붓대롱을 눌렀다.
그네들의 수다는 하나같이 텔레비전 예찬론이었고, 전기가 들어온 바에야 사람같이 살아보려면 텔레비전은 꼭 있어야 한다는 필연적 명분론에 귀착했고, 그게 값이 수월찮을 것이라는 경제의 허약성에 부딪혔다가는 반으로 싹 깎아준다는 청년의 말을 상기하며 다시 기운을 회복했고, 어쨌거나 공짜 구경이니 저녁밥 일찍 해먹고 회관 마당으로 나가자고 의견 일치를 보았다.
내일 당장 텔레비전을 사겠노라고 당당하게 외치지 못한 가장(家長)들은 거의 이런 궁색한 꼴을 면할 수가 없었다.
지난해와는 달리 무더운 밤인데도 당산나무 밑에는 모깃불이 지펴지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담뱃불이 빠알갛게 타고, 어른들이 나누는 이야기 소리가 개구리 울음 소리에 섞여 두런두런 들리던 밤이 없어졌다.
그뿐만 아니라 앞개울의 어둠 속에서 물창을 튀기는 소리와 함께 여자들의 간지러운 웃음 소리도 들을 수가 없었다.
반딧불을 쫓는 애들의 왁자한 외침도 자취를 감추었고, 감자나 옥수수 추렴을 하는 아낙네들의 마실도 씻은 듯이 없어졌다.
집집마다 텔레비전 앞에 매달려 있는 탓이었다.
평소에 앙큼한 짓 잘해서 미워지던 딸년이 텔레비전 때문이라고 일깨워서야 그렇구나 싶었고, 텔레비전 없는 집만 골라 일손을 모았고, 잔치 준비를 하는 데 생전 처음 품삯을 지불하기로 한 주인은 마당 감나무 잎에 내려앉기 시작한 가을의 썰렁함이 그대로 가슴에 옮겨지는 것을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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