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름을 가득 안은 하늘이 낮게 드리웠다. 스산한 바람결이 흙먼지를 일구며 땅바닥을 핥고 지나가고 있었다.

청산댁이 밑이 촉촉이 젖은 것을 알기는 무릎이 깨진 만득이가 공책 세 권을 타가지고 온 다음이었다.

"존 일 헌다고 문이나 닫고 갈 것이제. 엔간히 급했구먼 그랴."

그날 밤 늦도록 청산댁은 송편을 빚었다. 손자 돌잔치에 쓰려고 장만했던 쌀로 아들 장례에 쓸 송편을 온 정성을 다해 빚고 있었다.

모레 국군 묘지에서 장례식을 올리기 때문에 내일 떠나야 된다고 읍사무소에서 병원으로 알려왔던 것이다.

"전생에 무신 악헌 죄를 짓고 나서 요리 복 쪼가리도 웂는고. 한평생 살기가 요리도 험허고 기구헐 수가 있당가. 이 새끼 땀새 죽어뿔지도 못허고……."

잠이 든 손자의 볼을 쓰다듬는 청산댁의 두 볼에 눈물이 골을 파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래서 여주인공의 죽음은, <무기여 잘 있거라>를 본 다음 헤밍웨이를 둘도 없는 잔인한 냉혈 동물로 일축해 버린 아내의 나약한 감상주의 속에서 동정과 연민의 정을 듬뿍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리라.

역시 영문과 출신인 듯싶은 점원은 어지러운 손짓까지 겸하고 있었다. 아마 부전공은 발레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여보, 이거 어때요?"
"응, 아주 근사해."
형태는 새삼스레 아내가 예쁘다고 느끼고 있었다.

"쓰리예요, 쓰릴 당했다니까요."
아내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 자리에서 뱅글뱅글 돌았다. 열린 핸드백을 추켜든 채였다. 그러다가 팔딱팔딱 뛰기 시작했다. 그런 아내를 멍하니 바라보고 섰던 형태의 입에서는 이런 소리가 터져나왔다.
"허참, 기막힌 보복이구먼."

"도라꾸 수학 여행이 뭐냐. 도라꾸로라도 넓게나 앉아 갔으면 좋을걸." 교장 선생님의 나직한 이 말을 들은 학생은 몇 명이 안 됐고,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손을 흔드는 교장 선생님의 눈물이 고인 성싶었던 눈을 또다시 본 것은 그 후 졸업식장에서였다.

17년 전 ㅁ읍을 떠나 ㅎ시에서 야간 열차를 바꿔타고 서울로 향할 때 그의 가슴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왜 그렇게 뜨거웠던지 딱히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서울로 유학을 간다는 것만으로 충분했을 것이고, 초행인 서울에 대한 두려움과 넉넉지 못한 학비 걱정에다 무난히 합격이 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불안, 이런 것들이 뒤범벅되었을 것이다.

초가 지붕에 핀 박꽃의 여름 밤이라거나, 자지러지는 매미의 울음 소리에 삭아드는 더위라거나, 봇물을 막고 미꾸라지를 잡는 재미라거나, 소쩍새가 목이 타는 보릿고개의 우울 같은 것이 이해될 리가 없었다.

그런데 기철이 녀석이 광을 낼 때가 있었잖았나. 수학여행 때문에 벼 베기를 할 때였다. 녀석은 낫자루를 잡은 손에 퉤퉤 침을 두어 번 뱉고 나서 허리를 굽히면 논 한 마지기 벼를 다 베고 나서야 허리를 폈었지.

"여깄어요, 부채. 뭘 드시겠어요?"
"부채?"
그는 눈에 익은 여배우가 웃고 있는 타원형 부채를 집어들며 반문했다.

부채―? 그 생소한 기분과 거리감,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더위, 정말 시골에 와 있다는 실감, 이런 것들이 부채를 보는 순간 밀려들었다.

"이런 시골에 와서 서울 것만 찾으면 어떻게 해요. 괜히 미안해 죽겠는데."
뒤에서 들려오는 아가씨의 원망스러워하는 목소리였다.
그는 멈칫 그 자리에 섰다. 그렇구나, 아가씨 네 말이 맞다.

그들은 어둠살이 퍼지기 시작해서야 자리를 떴다. 그러면서 저녁을 먹고 다시 오겠다는 말들을 남겼던 것이다.

뒤틀린 판자 사이로 밖이 내다보이고, 어어…… 엉덩이에 곧 닿을 것처럼 차오른 똥하며, 허연 구더기가 똥에는 말할 것도 없고 발을 딛고 있는 판자에까지 꾸물거리며 기어다니고 있지 않은가.

맙소사, 배는 쥐어뜯는 것처럼 아픈데 아무리 힘을 줘도 항문은 오그라들기만 하고 구더기는 곧 발로 기어오르고, 그는 배를 움켜잡은 채 변소를 나올 수밖에 없었다. 술을 마신 데다 찬물을 끼얹은 탓이라 싶었다.

그는 얼마를 가다가 차를 세우게 했다. 도저히 더 견딜 수가 없었다.

밭으로 뛰어들어 바지를 내리고 앉자마자 좌악 설사였다. 그는 한참을 끙끙대다가 자신이 목화밭 속에 앉아 있는 것을 깨달았다.

아내를 생각해 본다. 이마, 입술, 귀…… 차츰 더듬어 내려간다. 배꼽, 애 셋을 낳고 나서 완연해져 버린 아랫배의 터진 살갗, 불두덩…… 발톱. 더 이상 더듬을 게 없다.

어찌된 일인가. 순간 그의 머리를 때리는 것이 있었다. 고요, 깊이나 넓이를 헤아릴 수 없는 그것. 겹겹으로 쌓인 산중의 어둠 속에 웅크린 고요, 그것이었다.

우리는 가끔 생시에 이루지 못하던 일을 꿈에서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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