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67년에 걸친 할아버지의 생애는 참으로 위대하고 위대하시며, 거룩하고 거룩하시며, 자랑스럽고 또 자랑스럽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찬란하게 빛나는 업적을 어찌 자손 만대에 남기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잠을 깨자마자 손자 원규놈의 편지 구절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노트종이 다섯 장에 앞뒤로 빼곡하게 쓴 편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야유와 조소로 차 있었다. 손자놈의 어금니 다져 문 고집스러운 얼굴이 떠올랐다.
영특함이란 나이와 상관없이 어른의 소견을 갖추는 것이라는 옛말을 정 부자는 실감하고 있었다.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목적 하나만을 위해서 이국 땅에서 헐벗고 굶주리는 고생을 필사적으로 감수하고 있는 조선인들이 예상보다 많았던 것이고, 그들은 하나같이 일본이 망하고 기필코 조국 독립이 오리라는 것을 확고하게 믿고 있었다.
상황 변화에 따른 가치 전도가 얼마나 무섭고 냉엄한 것인가를 그는 아프게 실감하고 있었다. 그 실감은 예측할 수 없는 앞날에 대한 불안이나 두려움의 변형이었다.
미군정은 조선총독부란 절대 권력의 이름 바꿈에 지나지 않았다. 그의 파견 근무란 그 절대 권력의 말초 조직에도 직접 포함되는 것이 아니었지만 그 거대한 생명체의 심장부에 자리 잡고 앉아 그 심장이 정상 가동하는 데 세균 역할 정도는 해내고 있었다.
욕심 많은 뱀이 몸통 작은 생각 안 하고 입 큰 것만 생각해서 족제비를 덥석 문 채 죽어가야 하는 식의 어리석은 자살 행위를 범할 수는 없었다.
임진강이 멀지 않은 그 산마을은 눈으로 하얗게 덮여 있었다. 계절의 변화에도 무감하게 언제나 한적한 마을이긴 했지만 거센 눈발의 난무 속에서 보니 마을은 그 자취마저 없어진 듯싶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수명이나 운수의 길흉을 논하는 말의 주술성에 신경을 쓰게 마련이었다.
"동규 어마니도 자식을 키우는 어른이니 다 알갔지만, 부모가 편안히 눈감게 하려믄 임종 지키는 자식들이 의젓하고 단단한 모습을 보여야 하는 기야. 그게 자식 된 도리고, 마지막으로 하는 효도니끼니."
이산 가족의 추상적인 숫자가 현실적인 숫자로 확인되는 것이 사건이었고, 상봉 불가능의 비현실이 날이 갈수록 상봉 실현의 현실로 늘어난 것이 사건이었고, 제 살기에 바빠 이웃의 아픔쯤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서로서로가 비로소 텔레비전 화면 앞에서 공동의 아픔으로 눈물을 흘렸던 것이 사건이었다.
"아무 걱정할 거 없어. 초조해 할 것두 없구. 예술이란 평생을 걸어 하는 것이고, 그러구두 이루는 사람보다 이루디 못하는 사람이레 더 많은 법이니끼니. 그리구, 미술대학교를 다녔다구 해서 꼭 화가가 돼야 한대는 책무두 없는 것이디. 그림에 대한 바른 니해를 갖추는 것만두 훌륭한 성과구, 실은 그것두 어려운 일이야. 조급하게 생각 말구 아무때나 그리구 싶을 때 그리믄 되는 기야."
"조급하게 생각 말구 아무때나 그리구 싶을 때 그리믄 되는 기야." 아버지의 음성이 선명하게 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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