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로 깊이로 살을 섞는 부부의 애정의 밀도와, 바꾸려야 바꿀 수 없는 피를 나눠 가진 부자(父子)의 애정의 밀도는 어느 것이 더 강할 것인가. 형민은 불현듯 떠오른 이 생각을 짧은 시간에 서너 번을 이리 뒤집고 저리 뒤집으며 따져보았다. 그리고 절망적인 불행을 느꼈다. 그것은 비교도, 선택도 안 되는 별개의 애정 형태였다.
그건 대장장이라는 직업에 대한 사무친 저주고 한(恨)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장장이는 삶의 수단인 직업이거나 기능인으로서의 자리가 아니었다. 그건 사람의 값을 결정지어 버리는, 노예의 어깨나 등짝에 찍힌 화인(火印) 같은 것이었다.
"양반, 거참 허수아비꼴 된 지 오래 아닙니까. 가문이다, 족보다, 그런 게 밥 먹여주던 세월은 까마득한 옛날이지요. 양반 대신 돈, 족보 대신 주민등록증이면 족한 세상이니까요. 돈만 잘 벌린다 하면 옛날 양반들 식당 아니라 정육점은 안 하겠어요?"
한이라는 것 ― 그것은 무엇일까. 마음의 깊은 상처라고만은 할 수 없는 것, 거기에 무언가가 더 보태져야 될 것 같은 그것, 형민은 알 듯 말 듯한 감정으로 한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니가 말을 알아들을지 모르겠는디, 그 병은 한(恨)이 서리서리 엉켜 생긴 병잉께, 팔다리에 난 종기맹키로 보이지도 잽히지도 않는다 이것이여. 그렁께 의사가 고칠 병이 아니라는 말이제. 이모의 말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학골댁은 건강하게 살아 있는데 어머니는 먼저 눈을 감았다. 왜 그랬을까 하는 의문이 생김과 거의 동시에 그 답이 떠올랐다. 점쟁이 때문이었다. 학골댁은 끝없는 기다림의 세월을 살아온 것이고, 어머니는 한 맺힌 분노의 세월을 살아온 것이었다.
어머니의 평생을 괴롭혀왔고 끝내는 저 세상에까지 이끌어간 한이라는 것. 그것은 도무지 무엇이었을까. 모양이 있을까. 형체가 있을까. 부피가 있을까. 그것은 원한이 뭉쳐서 만들어지는 것일까. 아니, 원한만이 뭉쳐서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학골댁의 가슴에도 한이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다고들 했다.
"건강하게 지내도록 해요. 부모님 말고도 당신 때문에라도 꼭 살아서 돌아올 테니까." 학병을 떠나기 전날 밤 그녀를 안고 남편이 했던 말이었다. 사투리를 쓰지 않는 나직하면서도 굵은 목소리에 젖으며 그녀는 관능의 꿈틀거림을 느꼈고 다음 순간, 그 감정을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전신이 바르르 떨리는 부끄러움에 싸였다.
대장장이 ― 동네의 끝, 읍내 시장으로 이어지는 길가의 다 헐어빠진 대장간에서 쇠나 다루어먹던 그런 사람이 공산당을 했으리라고 누가 짐작이나 했을 것인가.
그녀는 갑작스러운 혼란에 빠지고 있었다. 선생이 무슨 이유로 빨갱이짓을 하는 것일까. 겉으로는 애들을 가르치면서 속으로는 ······ 대장장이의 겉 다르고 속 다른 모습을 깨달았을 때보다 몇 갑절 큰 충격이었다.
그런 그녀의 억척스러움은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사람들은 그녀가 얼마 못 가 지칠 것이라고 했고, 누군가는 그녀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한(恨)풀이를 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약간쯤 모자라는 것처럼 보이려고 애썼다. 모자라는 사람한테 인심 야박한 세상 없는 법이었고, 모자라는 인간의 과거에 관심을 쓰는 성한 사람 없는 법이었다. 그 판단은 적중했다. 그 누구도 자신을 의심하거나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난리 통인지도 모르고 아무 데나 떠도는 기운 좋은 팔푼이쯤으로 취급해 주었다.
배불리 잘사는 사람들한테는 수월하게 쉬이 가는 세월일 것이고, 염불이나 외며 남들이 주는 쌀로 힘들이지 않고 배 채우는 스님네들한테는 인생 만사가 뜬구름 같은 것일지 몰랐다. 그러나 푸성귀도 제대로 먹을 수 없는 배고픔에 시달려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루하루가 질기고 질긴 삼줄 늘이기였다.
"보래, 술 한잔 묵은 김에 속 씨원케 알아보고 말자 그만."
"예? 맏상주요? 누구신데요? 아니 지금 바쁘시니까 성함을 말씀해 ······."
형민은 빠르게 돌아섰다. 이상한 예감이 스쳤던 것이다. "그 전화 이리 줘." 형민은 수화기를 낚아채듯 했다. "여보세요, 전화 바꿨습니다." "······."
말이 없었다. 형민은 저쪽이 누구인지를 직감했다. "······." "······."
저쪽에서는 계속 말이 없었고, 형민도 침묵을 지켰다. 저쪽에서 긴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더니 전화가 끊겼다. 형민도 천천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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