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일은 전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의 평화롭고도 만족스러운 일상(日常)의 조화를 깨뜨리고 느닷없이 전신을 드러냈다.

불놀이 | 조정래

또 하루가 무사하게 지나갔구먼.

아니면, 늙은 마누라가 아니라 아직 설익은 애송이와 그 일을 치르고 나긋나긋한 손길에 서투른 안마를 받으며 잠에 빠져들 때의 그 비릿한 충족감이라고 할까.

나는 승리자다.
그는 실눈을 뜨고 12층 아랫세상을 내려다보며 매일 목청을 돋우어 외치고 있었다.

"배점수 씨, 저 시퍼렇게 타오르는 불꽃을 보시오. 그리고 저 속에서 맥을 못 쓰고 녹아내리는 쇠를 보시오. 바로 저것이오. 양반이니 지주니 하는 것들은 저 쇠붙이고 우리는 저 쇠붙이를 맘대로 녹여 버릴 수 있는 불꽃인 것이오."

"우리의 투쟁이 밝은 햇빛 아래 영웅적으로 찬란하게 빛날 날도 머잖았소. 그날이 올 때까지 우리는 다 같이 철통같이 뭉쳐 만반의 준비를 하는 데 게을러서는 안 될 것이오."

그 여선생은 이웃 도시에서도 알 만한 사람들은 아는 지주의 딸이었다. 지주네 딸이 지주들을 쳐없애고 새 세상을 만드는 일에 나서다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건 해방이 되자마자 친일파 쳐없애자는 바람이 일어났을 때 그 일에 왜놈 형사질한 놈의 자식이 앞장서기를 바라는 것만큼이나 상상이 안 되는 일이었다.

죄는 무엇인가. 세월이 이렇게 길게 흘렀는데도 죄는 그대로 남게 마련인가.
― 배점수 씨, 당신 너무 오래 살았다고 생각하지 않소?

"점수 씨는 바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본보기며 영웅적 기수인 것이오. 출신 성분이 그렇고, 지금까지의 생활 자체가 곧 빛나는 투쟁이었소."

"항시 죽어지내야 허는겨. 나대봤자 계란으로 바위 치기니께. 알겄냐?"
아버지는 가끔 점수에게 이런 다짐을 하곤 했다.

한(恨)이라는 게 있다고 했다. 그건 어떻게 해서 생긴 것이고,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까. 도저히 삭일 수 없이 억울하고 분한 꼴을 당할 때마다 가슴 깊이에 피멍이 잡히고 그것이 뭉치고 또 뭉쳐져 돌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진 피멍의 덩어리가 한이 아닐까 싶었다.

점수는 한숨도 자지 못하고 밤을 밝혔다. 그동안 저질렀던 온갖 일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를 막막함, 허깨비만 쫓아온 것 같은 허탈, 그런 것들이 뒤범벅되어 지샌 하룻밤이었다.

말이라는 것이 이렇게 숨 막히는 무섬증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은 실로 최초의 경험이었다.
그건 사실일지도 모른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