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에서 ‘신이 주신 목숨을 스스로 버리는 행위’인 자살은 가장 커다란 죄악 중 하나다. 따라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들은 죽음의 순간에 성직자의 축복을 받을 수도 없었고, 교회가 관리하는 묘지에 묻힐 수도 없었다.
일꾼들이 유해를 운반했습니다. 성직자는 한 명도 동행하지 않았습니다.
이 소설은 오로지 한 젊은 멍청이의 자살에서 수치스러운 것들을 닦아내는 것과 주인공의 파렴치한 짓을 영웅적인 행동으로 꾸며 보여주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 저주받아 마땅한 이 책을 읽은 젊은이들은 영혼에 흑사병의 궤양을 얻게 될 것이며, 그것은 언제고 분명 갈라져 터지고 말 것이다. 게다가 검열이 이런 사탄의 유혹 같은 책의 인쇄를 막지 못했다니!
괴테는 기독교 틀을 완전히 벗어나진 않지만 범신론적이고 자유로운 종교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작품과 작가에 대한 정보를 찾고, 이를 바탕으로, 또 기존에 알고 있던 지식들을 함께 동원하여 작품을 해석해보고, 처음 읽을 때 해독할 수 없었던 내용을 하나씩 알게 되어갈 때 느끼는 즐거움은 무척 크다. 최종적으로 작품 전체의 의미가 보이고, 작가의 의도를 깨닫게 될 때 느끼는 기쁨은 정서적 감동과는 전혀 다른, 지적인 울림이 큰 즐거움이다.
수수께끼 풀듯이 읽기 소설이 수수께끼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파악할 수 있는 줄거리는 매우 빈약하고, 의미를 알 수 없는 사건들과 묘사가 이어지며, 대체 작가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경우다.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인 후고 폰 호프만스탈의 단편소설 「672번째 밤의 동화」도 그런 작품이다.
인간이 자연현상의 일부라는 인식의 전환은 무엇보다도 인간을 바라보는 두 가지 새로운 관점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첫 번째는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결정론적인 인간관이고, 다른 하나는 성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이다.
자연과학적 사고방식하에서 인간을 자연현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인간 존재와 삶이 예외 없이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특정한 인간 개체의 존재와 삶은 그를 둘러싼 유전적, 환경적 조건들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뜻하며, 그 결과 ‘자유의지’나 ‘신의 뜻’과 같은 형이상학적 개념들은 개입할 여지가 사라지고 만다.
이제 인간은 신과 자연 사이에 위치하는 특별한 존재에서 유전과 사회ㆍ경제적 조건에 따라 운명이 결정되는 자연현상으로 그 위상이 변화하게 되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은 이드, 자아, 초자아로 구성되어 있다.
이때 이드는 정신의 가장 본질적인 영역으로서 성 욕망과 성 에너지로 이뤄져 있다.
초자아는 교육과 사회화 과정에서 생겨나는 것으로서 성 욕망을 억압하고 통제하려는 의지를 뜻한다.
그리고 우리가 ‘나’라고 인지하는 자아는 성 욕망과 이것을 통제하려는 슈퍼에고 사이에서 방황하는 불안한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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