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클레어의 성장이 의미하는 것 헤세가 보낸 전환기적 유럽의 시대적 상황은 『데미안』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데미안』은 지나간 시대와의 완전한 종결이자 현대적 세계질서의 고통스러운 탄생을 의미했던 1차 세계대전 중에 집필되었고, 1919년에 발표되었다.
싱클레어의 성장은 선과 악의 구분, 윤리, 종교, 관습에 따라 규정되는 전통적인 가치체계에서 벗어나 ‘나’의 내면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삶의 기준으로 삼으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데미안』은 전통적인 기독교적 세계관을 극복하고 새로운 인간관과 세계관, 새로운 가치체계를 만들어나가야만 했던 당대의 시대적 상황에 대한 충실한 대답인 것처럼 보인다.
내 스스로의 안에서 밖으로 나오려 하는 것, 오로지 그것만을 살아보려 했다. 왜 그것이 그렇게 어려웠을까?
그런데 "내 스스로의 안에서 밖으로 나오려 하는 것"이 바로 그런 꿈을, 현실적인 문제로 인해 우리 내면 깊은 곳으로 숨어버린 순수한 소망을 의미할까? "내면"에 대한 『데미안』의 다른 구절들을 살펴보면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내 책상 위에는 니체의 책 몇 권이 놓여 있었다. 나는 니체와 함께 살았다. 그의 영혼의 고독을 느꼈고, 그를 쉼 없이 몰아친 운명의 냄새를 맡았으며, 그와 함께 괴로워했다. 그리고 그토록 가차 없이 자신의 길을 갔던 사람이 있었다는 것에 행복해했다.
인간 개체는 세계의 근원적 의지, 즉 세계의 근원을 이루는 거대한 욕망이 그 실현 과정에서 개별화된 존재로 분화된 것이며, 따라서 우리를 지배하는 욕망 역시 세계의지의 개별화된 발현에 불과한 것이다.
『데미안』을 읽는 동안 우리는 모두 이렇게, 비록 한순간일 뿐일지라도, 우리 내면에 무한한 가능성이 있음을, 우리가 유일무이한 소중한 존재이며, 동시에 세상의 중심임을 느낀다.
바로 그것이 『데미안』을 통해 헤세가 보여준, 진정으로 인간적인 ‘인간’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얼마나 오해를 했든 『데미안』이 우리에게 남겨준 감동과 위안은 언제나 옳다.
일반적으로 독일문학은 줄거리가 재미있기보다 사색적이고 철학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요 작가들을 놓고 보면 이러한 평가가 딱히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기도 어렵지만, 다른 나라의 문학과 마찬가지로 독일문학도 수백 년의 역사 동안 무수히 많은 다양한 작가들을 배출한 만큼, 모든 시대, 모든 작가들을 아우르는 특징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헤세는 한 인터뷰에서 『데미안』이 늙은 삼촌의 고리타분한 이야기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싱클레어를 작가로 발표했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헤세는 당시 『수레바퀴 아래서』 등을 통해 이미 이름이 많이 알려진 작가였기 때문에, 『데미안』이 ‘헤세’라는 작가에 대한 선입견 없이 읽히기를 바랐던 것이다.
단 한 문장도 허투루 쓰인 것은 없다 -젊은 베르터의 고통
『젊은 베르터의 고통』에서 놀라운 것은 각각의 층위에 숨어 있는 이야기들이 서로 방해하거나 모순을 일으키지 않으며 하나의 조화로운 전체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소설은 양파껍질을 벗기듯 한 꺼풀씩 벗겨가며 즐길 수도 있고, 전체를 하나의 이야기로 감상할 수도 있다.
‘슬픔’이 아닌 ‘고통’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데미안』 못지않게 우리에게 잘 알려진 독일 소설이다. 그런데 이 제목은 조금 잘못된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는 제목은 일본식 표기와 영어 번역의 영향이 뒤섞인 혼란스러운 제목임에는 틀림없다.
다행히 ‘젊은 베르터의 고통’이라는 올바른 번역을 제목으로 가진 번역본들이 하나둘씩 나오고 있으니, 익숙하지만 잘못된 번역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점점 사라지지 않을까 생각된다.
물론 ‘베르테르 신드롬’이라는 개념이나 괴테의 작품을 원작으로 하는 뮤지컬 및 오페라의 제목 ‘베르테르’까지 바뀌는 데에는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기는 하다.
나는, 물론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탓에 그렇게 많은 친구들을 뒤로 하고 살아남았다는 것을 그런데 지난 밤 꿈속에서 그 친구들이 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더 강한 사람들이 살아남는 거야." 그리고 나는 나 자신을 증오했다. 이것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는, 독일의 유명한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가 쓴 시 「나, 살아남은 자Ich, der Überlebende」이다.
나치에 저항하여 싸우던 시적 자아는 어느 날 전투에서 운 좋게 홀로 살아남았다. 뜻을 같이한 동료들은 모두 목숨을 잃었다. 이 생존은 시적 자아에게 기뻐할 만한 일이었을까? 나라도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동지들이 모두 기뻐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더라도, 과연 나는 혼자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기뻐할 수 있을까? 살아남았기 때문에 오히려 처절한 절망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이 이율배반적인 상황을 브레히트는 단 세 개의 짧은 문장만으로 잘 묘사해내고 있다.
실제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많은 젊은이들의 희생과 눈물을 발판 삼아 이뤄진 이 땅의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80년대에 널리 읽혔고, 수많은 이들의 가슴에 뜨거운 눈물이 맺히도록 만들었다.
그들은 이 시를 읽으며 자신의 친구가, 선배와 후배가 다치고 죽어가는 사이에 자신은 무사히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느꼈던 자괴감과 괴로움, 안타까움이 되살아남을 느끼며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여전히 극복해야 할 부조리가 차고 넘치긴 하지만 어쨌든 곤봉과 방패, 최루탄과 싸우는 것이 더 이상 일상은 아닌, 오늘날의 평화로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젊은 독자들은 80년대의 젊은이들이 브레히트의 시를 읽으며 느꼈을 그 감정을 똑같이 느끼기는 어려울것이다.
독일어로 Klassik, 영어로는 classic인 ‘고전’은 classicus라는 라틴어에서 온 형용사로, 원래 ‘상류층의’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가, ‘최고 수준에 속하는, 모범적인’으로 의미가 확장된 것이다. 이 단어는 이후 유럽 문명의 출발점이자 전범인 고대 그리스의 예술을 뜻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으며, 근대에 와서는 고대 그리스의 예술을 전범으로 삼는 최고의 예술이 꽃을 피웠던 시기를 지칭하는 예술사조의 명칭으로도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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