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 P126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두름의 굴비 한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모두들 알고 있었다 - P126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 P128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 P128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 P130
산유화 김소월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이 지네 꽃이 지네 갈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 P230
잘린 체게바라의 손에서 지문을 채취하던 CIA 요원 홀리오 가르시아도 지금쯤 할아버지가 되었을 것이다 - P233
벚꽃 아래 누우니 꽃잎마다 그늘이고 그늘마다 상처다 다정한 세월이여! 꽃 진 자리에 가서 벌서자.. - P235
방문객 정현종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 P236
바짝 붙어서다 김사인
굽은 허리가 신문지를 모으고 상자를 접어 묶는다. 몸뻬는 졸아든 팔순을 담기에 많이 헐겁다. 승용차가 골목 안으로 들어오자바짝 벽에 붙어선다 유일한 혈육인 양 작은 밀차를 꼭 잡고. - P132
늦은 밤 그 방에 켜질 헌 삼성 테레비를 생각하면 기운 씽크대와 냄비들그 앞에 선 굽은 허리를 생각하면 목이 멘다 방 한구석 힘주어 꼭 짜놓았을 걸레를 생각하면. - P132
며칠 내 바람이 싸늘히 불고 오늘은 안개 속에 찬비가 뿌렸다. 가을비 소리에 온 마음 끌림은 잊고 싶은 약속을 못다 한 탓이리. - P136
누이야 무엇 하나 달이 지는데 밀물 지는 고물에서 눈을 감듯이
바람은 사면에서 빈 가지를 하나 남은 사랑처럼 흔들고 있다. - P138
오 하얀 수면이여, 너 참 아름답구나! 가벼운 추위가 내 피를 덥게 하고 있다! 못 견디게 내 몸뚱이에 꼭 그러안고 싶어지누나 자작나무의 드러난 가슴을
오, 숲의 조는 듯한 뿌연함이여! 오, 눈에 덮인 밭의 쾌활함이여! 못 견디게 두 손을 모으고 싶어지누나 버들의 나무 허벅다리 위에서. - P142
저녁눈 박용래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 P140
이웃이거니 생각하고 가만히 그냥 누워 있었는데 조금 후 창문을 두드리던 소리의 주인은 내가 이름 붙일 수 없는 시간들을 두드리다가 제 소리를 거두고 사라지는 것이었다 - P146
이방 창문에서 날린 풍선 하나가 아직도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을 겁니다 어떤 방을 떠나기 전, 언젠가 벽에 써놓고 떠난 자욱한 문장 하나 내 눈의 지하에 붉은 열을 내려보내는 밤, 나도 유령처럼 오래전 나를 서성거리고 있을지도 - 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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