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루는 자기가 부담이 되면 곧 가겠다고 말했다. 자기에게 가장 부담스러운 건 자기 자신인데, 타인에게까지 부담을 주는 건 싫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생각일랑 갖지 말라고 충고했다. - P137

그날 밤 릴루는 맥주를 더 마시고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나는새벽이 밝아오도록 벽에기대어 잠이 오지 않았다. 릴루는 고른숨소리를 내며 깊이 잠들었다. 가끔 뭐라고 잠꼬대를 했지만 무슨뜻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 P137

고독한 여인의 영혼! 고독하기 때문에 근접할 수 없고, 신비감과 허무감이 교차하는 한 영혼이 릴루에 대한 나의 오랜 기억이다. 그리고 세월이 흐를수록 그 기억은 더 뚜렷해져서 릴루가 더욱 고독하고 신비하게만 다가온다. - P137

다음날 아침 헤어지면서 릴루는 내게서 강고트리의 여행 안내팸플릿을 가져갔다. 그녀는 말했다.
"주변을 정리하고 강고트리로 가겠어요. 어렸을 때의 그 성자도찾아보구요. 만날 수 있을진 모르지만요. 성자를 만나지 못한다해도 떠나야 할 것 같아요." - P137

그 기운은 바로 릴루가 내게 준 선물이었음을, 흔들리는 기차에앉아 멀리 인도 대륙을 바라보면서 나는 깨달았다. 그토록 젊은나이에 생의 고통을 체험한 뒤, 홀연히 내면의 목소리에 따라 여행을 떠나기로 한 그 용기가 내게도 힘을 주었던 것이다. 그 생명력이 어느새 내 안에도 옮겨와 있었다. - P138

릴루는 잘 있을까. 그녀는 정말로 강고트리의 그 성자를 만나러떠났을까.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자기 안에서 찾아냈을까. - P139

한번은 연극 공연중에 어떤 남학생이 무대 뒤로 날 찾아왔다.
그는 히피처럼 장발을 하고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대뜸나더러 학교를 때려치우고 인도에 가지 않겠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 P140

나 또한 슬슬 인도로 가야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되는 것이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그렇지 않은데 세상이 자꾸만 날 비현실적인 인간으로 만들어갔다. 그럴 때마다 나는 올해엔 반드시 인도로사라지는 거야, 뒷골목으로 말야, 하고 중얼거리곤 했다.
그러나 난 떠나지 않았다. 자꾸만 미뤘다. 이 지구의 동식물들중에서 ‘미루는 것‘을 발명한 것은 인간뿐이다. 어떤 나무도, 동물도 미루지 않는다. 인간만이 미룬다. - P141

"그때 갔어야 하는 건데! 이미 때는 늦었어!"
그들의 말처럼 이미 때는 늦었다. 그들은 고개를 숙인 채 가스실 문으로 끌려 들어갔다. 그리고는 영화가 끝이 났다. 관객들이다 나간 뒤에도 나는 한참을 혼자서 앉아 있었다.
영화관을 나온 뒤 난 곧바로 집으로 전화를 걸었고, 1주일 뒤 밤열두 시에 인도 뭄바이 공항에 내렸다. - P143

그게 뭘까. 자다말고 눈이 떠졌다. 새벽 두 시였다.
자이살멜,
인도 북서부 타르 사막에 있는 작은 도시. 호텔 스와스티카(卍)에서 나는 문득 잠이 깼다. 뭔가 잃어버린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게뭔지 알 수가 없었다. - P144

나는 다시 눈을 감았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여전히 뭔가 잃어버렸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사람은 이따금 어떤 상실감에시달리기 마련일까. 영혼의 상실감은 흔히 이국땅에서 새벽 두 시경에 여행자를 방문한다고 하지 않는가. - P145

똑똑.
누구세요?
난 당신의 영혼입니다.
웬일이세요?
당신은 뭔가 잃어버렸군요.
내가요? 뭘 말인가요?
글쎄요. 혹시 영혼을 잃지나 않으셨나요? - P145

바다바그에 앉아서 나는 황혼을 구경했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인도의 황혼은 아름답다. 타고르는 "나는 황혼녘에 지상의모든 것을 버려두고 당신의 품안으로 돌아갑니다"라고 노래했다. - P146

이윽고 바다바그에 도착했다. 개는 지쳤는지 내 옆에 와서 풀썩쓰러졌다. 바다바그에 이르러 시계를 보았더니 여전히 새벽 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걸어오는 사이에 또 큰 바늘과 작은 바늘이빠져버린 것이다. - P147

나는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갔다. 아무것도 없는 황야를 걷는 것이 나는 좋았다. 바람도 없고, 나무도 없고, 사람들도 없었다. 오직 나와 개와 태양뿐이었다.
개는 지쳤는지 나와의 거리가 점점 멀어졌다. 나중에는 백 미터정도 간격이 벌어졌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개가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 P151

개는 언덕이 보이지도 않는지 헉헉대며 뒤로 처졌다. 나는 기다렸다가 한쪽 팔에 개를 안아들고 걸어갔다. 개는 생각보다 가벼웠다.
가벼운 존재.
나는 한참을 걷다가 개를 도로 내려놓았다. 가벼운 것도 오래들고 있으니 무거웠다. 마치 인생이 그런 것처럼. - P152

그날부터 나는 그 늙은 개가 그립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겨드랑이와 사타구니 등 온몸이가려워 견딜 수가 없었다. 개한테서 이가 옳은 것이다. 사막에서 머무는 동안 내내 나는 다른 여행자들이 지켜보는 중에도 온몸을 벅벅 긁고 다녀야 했다. - P152

"그래, 다 가져가라. 내것이 아니고 내가 잠시 갖고 있는 것에불과하니까 다 가져가라구."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나머지 화장지를 또다른 인도인에게빼앗기기 전에 얼른 배낭 안에 감춰버렸다. 어쨌든 화장지가 내배낭 안에 있는 한 그것은 내꺼였다. - P155

"그런가? 넌 도대체 무슨 근거로 이 자리를 너의 자리라고 주장하는가? 이 자린 네가 잠시 앉았다가 떠날 자리가 아닌가? 넌 영원히 이 자리에 앉아 있을 것인가?" - P157

또다시 훅하고 뜨거운 바람 같은 것이, 현기증 같은 것이 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도대체 기차표 한 장을 사 갖고 지정된 좌석에 앉아서 가는 것조차 이렇게힘들단 말인가.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이 남자의 말이 대단히 옳지 않은가. 잠시 앉았다가 떠나갈 자리를 놓고 나는 왜 어리석게 내 자리라고 소리높여 주장한단 말인가. - P157

그때였다. 내 등 뒤에 대고 그 청년이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아유 해피?"
너 행복한가? 그런 뜻이었다. 물건을 그렇게 싸게 사서 넌 행복한가? 행복하다면 얼마나 행복한가? 그리고 그 행복은 얼마나 오래갈 행복인가? 그런 뜻이었다. - P158

"당신이 행복하다면 나도 행복하다. 하지만 당신이 행복하지 않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당신의 문제다."
인도인 청년은 말을 마치고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는 그시선 앞에서 감히 내 자신이 행복하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었다. 내 영리함을 한껏 발휘해 물건을 이토록 싸게 샀으니 참으로행복하다, 그렇게 말할 수가 없었다. - P159

그 후로 많은 여행을 하고 많은 가르침을 접했지만 나는 인도에서의 이 세 가지 체험을 잊을 수 없다. 그때 머릿속으로 훅하고 불어들어온 뜨거운 바람 때문에 한동안 내가 나 같지 않았고, 내 삶이 내 삶인 것 같지 않았다. 어느 곳을 갈 때나, 어떤 것을 수중에넣었을 때나, 그 말들이 내 귓전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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