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90스무 살의 나는 김광규 시인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를 좋아했다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김광규4·19가 나던 해 세밑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반갑게 악수를 나누고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하얀 입김 뿜으며열띤 토론을 벌였다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우리는 때 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노래를저마다 목청껏 불렀다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겨울밤 하늘로 올라가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회비를 만 원씩 걷고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떠도는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몇이서는 포우커를 하러 갔고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부끄럽지 않은가부끄럽지 않은가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하고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