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강
누르하치가 후금을 건국하고 1618년 명에 선전포고를 하자, 명은 조선에 파병을 요구한다.  도원수 강홍립 등 1만 3,000여 명의 병사가 압록강을 건넜으나, 후금과 적대할 의사가 없다는 광해군의 뜻을 잘 관철한 강홍립은 조선군을 끌고 후금에 투항한다. - P150

광해군묘
광해군은 1641년 7월 유배지인 제주도에서  사망하여 그곳에 묻혔다가 1643년 지금의 묘소에 천장되었다. 문성군부인 유씨는 광해군보다 앞서 1623년 10월 강화도에서 사망하여 양주군 적석에 장사하였다가광해군이 죽은  뒤 같은 묘역에 천장되었다. 사적 제363호 - P170

세자 시절의 아픈 경험으로부터
조금만 자유로웠다면
빛나는 외교에서 보이듯
도그마에 사로잡히지 않은 열린 이성과
현실감각, 그리고 유려한 솜씨로
내치도 성공을 거두었으리라.
그런 상황을 만든 부왕 선조의
책임이 크겠지만누굴 탓하랴.
극복하지 못한 자신의 몫인 것을. - P200

철령 높은 봄에 쉬어 넘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를 비삼아 띄워다가
임계신 구중심처에 뿌려본들 어떠리

이항복 - P204

셋(이원익, 이덕형, 이항복) 모두 당파 간 정쟁에 거리를 둔 무당파적인 인물들이었다는 것. 그리고 재상으로서 결정적으로 필요할 때 할 말을 했다는 데 있다 하겠다. - P205

정세를 바로 볼 줄 아는 혜안과 옳다고 믿는 바를 끝까지 밀어붙일 줄 아는 추진력을 겸비했음에도광해군이 실패했던 것도 바로 경험 때문이다. 경험을 활용하지 못하고 경험에 사로잡혀버렸기 때문이다. 광해군 자신뿐 아니라 조선과 조선 백성에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 P218

폐모론 당시 대북파의 한 유생은 ‘소북은 서궁이 화근이 된다는 걸 알면서도 대북과 다르다는 걸 보이기 위해 침묵하고, 남인은 은밀히 서인과 한패가 되고 있으며, 서인은 줄곧 서궁에 마음을 두고 있다.‘ 는 상소를 올린 일이 있다. 결과적으로 이 상소는 인조반정에 대한 놀라우리만큼 예언적인 분석이 되었다. 인조반정은 선조 시절 북인에게 패배한 이래 30년 가까이 권력에서 배제되어온 서인에의한 회심의 한판 뒤집기라 할 것이다. - P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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