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를 다 마시고 슬슬 일어설 즈음에 그는 남몰래 털어놓듯이 말했다. "다니무라 씨, 내가 지금 가장 두려운 건, 그리고 나를 가장 혼란스럽게 하는건, 내 안에 있는 일종의 분노예요."

강제수용소. 그렇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는 정확한 예견을 했던 것이다. 나는 대체 무엇인가, 요즘자주 그런 생각을 합니다.

"죄송합니다. 한심한 꼴을 보여드렸네요."
누군가를 위해 우는 것은 한심한 일이 아니라고나는 말했다. 특히 세상을 떠난 소중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고토 청년은 내게 감사인사를 건넸다. "고맙습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조금은 마음이 풀립니다."

모든 여자는 거짓말을 하기 위한 특별한 독립기관을 태생적으로 갖추고 있다, 는 것이 도카이의 개인적인 의견이었다.

하바라와 성교할 때마다 그녀는 흥미롭고 신기한이야기를 하나씩 들려주었다. 『천일야화』의 왕비 셰에라자드처럼. 물론 그 이야기에서와는 달리 하바라는 날이 밝으면 그녀를 참수하겠다는 생각 같은 건털끝만큼도 없다(애초에 그녀가 아침까지 그의 곁에머물렀던 적도 없었다).

유능한 주부인 듯 그 과정 내내 무척 능숙했고 불필요한 동작이 없었다. 일을 끝낼 때까지는 거의 말도 하지 않고시종 진지한 얼굴이었다.

그녀가 작업을 마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해류에 실려가듯 두 사람은 자연스레 침실로 이동했다. 셰에라자드는 아무 말 없이 빠르게 옷을 벗고 하바라와 함께 침대에 올랐다.
두 사람은 거의 말하는 법 없이 서로를 안고, 마치 주어진 과제를 협력하여 해치우듯이 일련의 절차를밟으며 섹스를 했다. 생리중이면 그녀가 손을 써서 목적을 달성했다. 그 능숙하고도 조금은 사무적인손놀림은 그녀가 간호사 자격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했다.

"나는 전생에 칠성장어였어." 언젠가 셰에라자드는 침대에서 말했다.

"로마 시대에는 사방에 칠성장어양식장이 있었다. 말 안 듣는 건방진 노예들이 산 채로 그곳에 내던져져서 칠성장어의 먹잇감이 되었다던데."

칠성장어는 매우 칠성장어다운 생각을 해

현관문은 물론 잠겨 있었다. 셰에라자드는 시험 삼아 현관 매트 밑을 뒤져보았다. 열쇠는 그곳에 있었다. 평화로운 지방도시 주택가에는 범죄 같은 게 거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문단속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열쇠를 깜빡 잊고 나간 가족을 위해 현관 매트나 근처 화분 아래 열쇠를 감춰두는 일이 많다.

이상하게도 헤어진 아내나 그녀와 동침한 옛 동료에 대한 분노와 원망은 일지 않았다. 물론 처음에는큰 충격을 받았고 한동안 제대로 뭔가를 생각할 수없는 상태가 이어졌지만, 이윽고 ‘뭐 어쩔 수 없는일이지‘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에는 이런 날을맞닥뜨리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원래부터 아무런성취도, 아무런 생산도 없는 인생이다.

어쩌면 그 고양이가 행운을 가져왔는지도 모른다.
이윽고 조금씩이나마 ‘기도‘에 손님이 들기 시작했다.

머릿속으로 미리 동작의 순서를매긴다. 상대가 채 준비하기 전에 잽싸게 때려눕힌다. 상대가 쓰러지면 망설임 없이 마지막 일격을 가한다. 그대로 사라진다. 아마추어에게 승산은 없다.

인간이 품는 감정 중 질투심과 자존심만큼 골치 아픈 것도 아마 없을 것이다. 그리고 기노는 왜 그런지그 양쪽 모두에서 심심찮게 곤욕을 치러왔다.

"당신과 잘 지낼 수 있는 여자가 어딘가에 있을 거야. 그렇게 찾기 어렵진 않을 거고. 나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없어서 못할 짓을 해버렸어. 그건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우리 사이는 처음부터 잘못끼운 단추 같았어. 당신은 좀더 평범하게 행복해질수 있는 사람이야."

잘못 끼운 단추, 기노는 생각했다.

"그래도 뱀은 무척 지혜로운 동물이야." 이모는 말했다.  "고대신화에서 뱀은 곧잘 사람을 안내하는역할로 나와 신기하게 전 세계 어떤 신화에서나 공통되는 점이야. 다만 그것이 좋은 방향인지 나쁜 방향인지는 직접 목적지까지 가보기 전에는 알 수 없어. 아니, 대부분의 경우 선한 것이면서 동시에 악한것이기도 해."

가미타는 말했다. "기노 씨는 제 스스로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건 잘 알아요. 하지만 옳지 않은 일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한경우도 이 세상에는 있습니다. 그런 공백을 샛길처럼 이용하는 자도 있어요.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눈을 떴을 때, 그는 침대 위에서 그레고르 잠자로변신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이봐요, 나한테도 분명히 가슴 두 짝이 달려 있고, 그걸 브래지어로 잘 고정해줄 필요도 있어요. 무슨 젖소도 아니고, 덜렁거리면서 돌아다니고 싶진 않다고요."

"등이 앞으로 굽었으니까 뒤에서 넣기에 딱 좋겠다고 생각했죠?" 아가씨가 말했다. "그런 변태 같생각을 하는 인간이 세상에 꽤 많더라니까. 그리고 그런 놈들은 나 같은 여자는 금세 대줄 거라고 생각하지.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마음대로 되진 않을걸."

"아까도 말했지만, 원래는 아버지나 오빠가 오기로 했었어요." 아가씨는 현관 앞에서 말했다. "하지만 온 시내에 총을 든 병사들이 우글거리고, 곳곳에 엄청 큰 탱크가 진을 치고 있어요. 다리마다 검문소가 생겼고 수많은 사람들이 어딘가로 끌려가고 있다니까요. 그래서 우리집 남자들은 밖으로 나올 수 없었어요. 일단 끌려가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까. 정말이지 위험해요. 그래서 내가 대신 온 거예요. 나혼자 걸어서 프라하 거리를 가로질러 왔죠. 나한테는 분명 아무도 관심 갖지 않을 거래요. 가끔은 나 같은 여자도 써먹을 데가 있어요."

"뭐, 그건 됐어요. 신은 분명 며칠 전에 프라하를 떠난 모양이에요. 다른 중요한 볼일이라도 이나보죠. 그러니 신에 대해서는 잊어버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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