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정이란 가장 어렵고 위험한 균형이며, 혼돈위에 얹힌 순간적인평정이지. 한쪽이 조금만 더 무거워도 찰나에 기울어져버리거든."
‘혼돈 위에 얹힌 순간적인 평정‘이라………. 랜턴을 비춘 순간 빛바랜성화에서 느낀 평온 그의 말마따나 그것이 곧 ‘절정‘이었다. - P189
아무리 곱씹어보아도 이곳의 유적은 야만에 대한 이성의 끝없는도전이 이뤄낸 결과물이다. 그리스 문명은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차가운 이성과 뜨거운 열정 그리고 단련된 육체가 어우러져 피워낸 꽃이며, 정신과 육체의 조화로운 균형을 추구하던 현장이기도 하다. 건강한 육체의 승리자에게는 월계관이 씌워졌고, 위대한 서정시인의 시가 낭독되었으며, 승리의 기쁨은 신화와 함께 은유가 가득한 조각상으로 남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이런 고대의 조화는 무너졌고, 오늘날의 경기는 육체적 기능의승리자로서 스타디움의 불꽃놀이처럼 명멸하는 영광 속에 갇히고말았다. - P194
"바로 이 시기에 피어난 그리스문명은 결코 향기도 촉감도 없는 초자연적인 개화가 아니었다네. 그것은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진흙을빨아먹으며 꽃을 피운 나무였던 게야. 실제로 진흙을 많이 빨아먹을수록 꽃은 더욱 아름답게 피어나는 법이라네." -35 - P233
아르고스는 스파르타에 맞서 공화정을 유지하려 한 펠로폰네소스반도 내의 거의 유일한 도시였다. 따라서 펠로폰네소스 내에 고립된성과 같았고, 조상들의 그런 기질은 지금도 여전히 아르고스 사람들에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헤르메스의 시링크스에 쉬 잠들지 않았던 100개의 눈을 가진 ‘아르고스‘처럼, 그들의 자존심도 그리 쉽게는 잠들 수 없는 모양이다. - P250
까페 문을 열고 들어서며 "크리스토스 아네스티 (Christos anesti, 주께서 부활하셨습니다!" 하고 먼저 인사를 건넸더니, 까페 안의 사람들이일제히 모자를 벗으며 "알리또스 아네스티 (Alithos anesti,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하고 합창했다. 그렇게 인사를 건넨 이유는 그날이 부활마지막 주일이었기 때문이다. - P254
"완전한 균형은 보는 이에게 두려움을 준다네. 예술가가 추구하는 것이 건축을 통해 신의 느낌을 표현하는 것이라면, 그 ‘신의 느낌‘ 즉 ‘영감‘은 건축가가 신적 균형과 조화를 구현함으로써만 표현할 수 있을테지. 그리고 그 조화가 신앙의 본질인 성스러운 두려움을 창조하는것 아니겠는가." - P265
신전에서 되돌아 나오는 길에 다시 매표소에 들렀다. 이번엔 10유로짜리 가이드북을 사기 위해서였다. 역시 20유로짜리 지폐를 내밀며 혹시나 해서 ‘10유로의 잔돈은 있느냐‘고 물었더니, 조금 전의 그가 싱긋 웃으며 책 한 권과 10유로의 잔돈을 거슬러 주었다. 그가 연 서랍에는 5유로짜리 지폐와 1유로짜리 잔돈이 가득 차 있었다. 그 순간 그가내게 눈을 찡긋해보였다. 아까 잔돈이 없다는 것은 저 멀리 동양에서이곳까지 찾아준 여행자에 대한 그의 호의였던 것이다. 내 가슴에 맺힌 그리스인의 또 하나의 모습이다. - P269
말이 나온 김에 한마디 하자면, 그리스의 도로에서 흔히 만나는 이정표는 연구의 대상이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옛날 길손을 괴롭히던 신화속 괴물이 오늘날에 되살아난 것이 바로 그리스의 이정표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 P270
이렇게 볼 때 여기 인용한 부분은 《역사》라는 책을 통틀어 헤로도토스가 얼마나 탁월한 역사가였는지 단박에깨닫게 해주는 부분이다. 여기서 보듯 그는 최초의 역사서를 저술한것을 넘어, 자기 민족의 입장뿐 아니라 적대국에서 듣고 본 이야기들까지 객관적으로 서술했다. 우리는 그 덕분에 그리스인들과 페르시아인들의 아슬아슬한 감정선과 그에 얽힌 신화의 전개 과정까지 알게 되었으니, 역사가의 객관적 진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여기서 다시금 깨닫게 된다. - P279
"바로 그런 시대였다네. 원래 그리스어에는 ‘바다‘라는 단어가 없었을 정도로 그리스인들은 바다를 두려워했지. 멀리 북쪽에서부터 밀고내려와 원주민을 복속시킨 도리아인들이 바다를 구경했을 리가 만무했을 테니까. 이에 비해 일찍이 바다를 주름잡던 페니키아인들이 이런 미개한 그리스인들을 상대로 무역도 하고 더러는 약탈도 하는 일이야 특별한 일도 아니었을 게야. 그러다가 그리스인들이 바다로 나서면서 제해권을 두고 서로 충돌이 일어났겠지. 그 압권이 바로 ‘트로이 전쟁‘이었던 게야 - P281
였던 게야. 그 이전에 일어났던 사건들은 약탈이나 납치 등 돈으로 해결하거나 서로 돌려주고 돌려받으면 끝나는 일종의 국지적 사건이었지그러나 스파르타의 왕비이자 전 그리스 남성들의 로망인 헬레네를 납치한 사건은 단순하지 않았어. 결국 그 사건이 빌미가 되어 그리스 연합군이 대대적으로 트로이를 공격해서 폐허로 만들어버린 것이지." - P282
흑해의 조류가 거꾸로 흐르는 터라 배를 타고 곧장 넘어가지 못한그리스의 선박들은 트로이를 경유해야만 했다고 한다. 이러한 약점을노려 트로이가 비싼 통행세를 물리며 폭리를 취하자. 전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이 생존 차원에서 당시의 묵계를 깨고 연합하여 덤빈 것이 바로 ‘트로이 전쟁‘이다. - P283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에는 주인공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을 마치고 돌아오는 귀향길에 갖은 고생과 모험을 하는 동안 구혼자들의 끈질긴 구애를 물리치며 남편을 기다려준 왕비‘페넬로페‘ 앞에 거지꼴로 나타나 이렇게 찬양한다.
부인! 끝없는 대지 위의 어떤 인간도 그대를 비난하지못할 것이오. 그대의 명성이 넓은 하늘에 닿았기 때문이오. 신을 두려워하며 수많은 강력한 인간들을 다스리고법을 준수하는 나무랄 데 없는 왕의 명성처럼 말이오. 42 - P287
즉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오디세우스는 모두에게 선물을 남겼지만, 아가멤논은 모두의 것을 앗아간 셈이었다. - P290
어쨌든 아르고스는 스파르타에 맞서 민주정을 유지하려 한 펠로폰네소스 반도 내의 거의 유일한 도시였다. 따라서 펠로폰네소스 내의 고립된 성과 같았고, 조상들의 그런 기질은 지금도 여전히 아르고스 사람들에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헤르메스의 시링크스에 쉬 잠들지 않았던 100개의 눈을 가진 ‘아르고스‘처럼, 그들의 자존심도 그리 쉽게는 잠들 수 없는모양이다. - P294
그들은 현실적이었고, 신을 숭배했으되 무조건 따르지는 않았다. 신이 정해준 운명에 끝없이 도전하며 스스로가 신의 반열에 오르길 목숨을 걸 만큼 간절히 바랐다. 그 결과 그리스의 많은 영웅들은 마침내 신의 자리에 앉았다. 그리스인들에게는 인간이 곧 신이었고, 신이 곧 인간이었다. 이렇게 사상과 종교적 제약으로부터자유로웠던 그리스인들은 일찌감치 인간에 눈을 떴던 최초의 인간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것을 ‘탁월함‘이라 불렀다. - P298
"당신들이 스파르타의 흔적을 찾으려 해도 찾지 못하는 날이 올 것이다." 제아무리 빛나는 영감이나 높은 이상도 누군가가 시로 쓰거나, 돌에새기거나, 그림으로 남기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허공으로 증발해버릴것이라는 뜻을 담은 이 말은, 시대를 빛나게 할 높은 이상도 받아들일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자들에 대해서는 절대 팔을 벌리지 않는다는뜻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스파르타에는 호메로스의 시가 영원성을 부여한 헬레네 외에는 실제로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어보인다. - P300
실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가 단순히 애정전쟁을 기록한 것이었다면 오늘날까지 우리에게암송될 리 없다. 이 이야기는 신의 정체, 본질, 인간의 숙명과 한계, 그러나 그것을 뛰어넘으려는 장엄함이 실타래처럼 얽혀 있다. 이런 인간의 부조리와 한계는 파리스가 헬레네의 전 남편 메넬라오스와 결투를벌이다가 패배 직전 아프로디테의 도움으로 살아 돌아온 직후, 헬레네와 주고받는 다음의 대화에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 P305
하지만 헬레네는 전쟁이 끝난 후 전남편 메넬라오스가 그녀를 죽이기 위해 목덜미를 움켜쥐었다가도 칼을 버리고다시 품에 안을 만큼 신의 아름다움에 필적하는 여인이었다. 이 여인은쌍방의 수많은 희생을 뒤로 한 채 어떤 처벌도 받지 않고 다시 스파르타로 돌아갔으며, 훗날 그녀를 기리는 신전이 세워지고 숭배의 대상이되기에 이르렀다. - P307
이러한 아이러니는 터무니없는 설정이 아니다. 나는오히려 바로 그 때문에 일리아스의 정통성이 아킬레우스가 아니라 헬레네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양립하고 수용할 수없는 것을 수용하며, 지극히 비현실적인 것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그리스 혹은 그리스인들의 특질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헬레네이기때문이다. - P308
"인간사에 일어나는 일들을 두고 굳이 목적을 알려고 할 필요가 있을까? 신도 우리들과 함께 살아가고 함께 추구하며 때로는 위기를 맞고 스스로도 투쟁에 휘말리니 말일세. 어느 누구도, 심지어 신조차도알지 못하는 것일 테지. 짙은 안개처럼 본성은 우리도 모르는 깊은 심연 속에 존재한다네. 우리가 보는 세상은 허깨비가 아니어서, 제아무리바람이 분다 할지라도 그 안개가 걷히지는 않을 것이네. 그것들은 뼈와살이니………. 한번 만져보시게 존재할 테니까. 신이 우리를 부른다고보나? 아니면 우리가 신을 부르는가? 도와달라고 말이지. 하지만 우리의 임무는 그렇게 신에게 요청하는 대신 자신의 주먹을 불끈 쥐고상승의 길, 오름길을 묵묵히 올라가는 것일 게야." - P308
스파르타 신이 곧 인간이요, 인간이 곧 신이다 스파르타는 ‘그‘가 펠로폰네소스를 여행하면서 가장 많이 머문 곳이라고 한다. 또한 ‘그‘가 사려 깊은 문장으로 짙은 애정과 아쉬움을 서슴없이 표현했던 바로 그곳이기도 하다. 고대 이래로 스파르타는 그 이름만으로도 사람들을 설레게 하는 곳이었던 셈이다.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전사들의 도시. 고금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완벽한 법치와 법의 정신을 구현했던 도시, 세상에서 가장강력한 공동체 연대를 구축했던 나라. 죽음으로 영생을 얻은 레오니다스Leonidas 300명의 전사가 전설로 살아 있는 곳. 스파르타에 대한 첫인상은 이렇듯 강렬하기만 하다. - P310
전역 어느 기념품 가게를 들러도 ‘I Love Greece!‘ 보다 ‘와서 빼앗아보라‘라는 뜻을 가진 스파르타 전사의 구호 ‘Molon Labe! 모론 라베 가 찍힌 티셔츠가 더 많이 걸려 있을 정도로 스파르타는 사람들의 가슴속에불도장으로 새겨진 로망 그 자체이다. - P311
저 멀리서 레오니다스의 외침이 들리는 듯하기 때문이다. "와서 빼앗아보라!" 이 언덕에 올라선 침입자들은 정녕 저땅을 빼앗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스파르타는 보무도 당당하게 이렇게 외쳤다. "자신 있으면 오라!" - P311
추구했던 ‘탁월함‘에 대한 상징적 장면이다. 바로 이러한 ‘탁월함이야말로 고대 그리스 정신의 고갱이라 할 수 있다. 그 이전까지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 Muphates 강 유역의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Babylonia, 인더스강 유역의 인도, 나일강의 이집트, 황화의 중국 문명으로 꼽히는 4대 고대 문명은 모두 동양의 것이다. 다시 말해 그리스 문명 이전에 존재했던 세상의 법과 질서는 모두 동양에서 비롯되었다. 그리스 이전의 서구는 야만의 땅이자 야만의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 정지해버린 야만의 땅에 갑자기 한줄기 번개가 들이치고 문명의 불꽃이 점화되었던 것이다. 처음 이곳 그리스로 떠나올 때부터 가졌던 가장 본질적인 질문 가운데 하나가 다시금 떠올랐다. 왜 하필 그리스였을까? - P314
"그리스에서는 신이 사람의 자리로 혹은 사람이 신의 자리로 가기위해 끊임없이 도전했다고 할 수 있지. 천하의 난봉꾼 제우스는 세상의 어느 인간도 해보지 못한 비뚤어진 사랑에 몰입했고, 친부살해, 친자살해까지 예사로 일삼지 않았던가. 그리스 신들은 틈만 나면 마셨고, 아름다움을 거루있으며, 질투와 시기의 놀음에 빠져 있었던 인간보다 비윤리적일 뿐 아니라 반인간적인 모델이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게야. 그리스인들은 인간의 모든 약점을 신에 투영했으며, 신들이 내린규율 중에 살인이나 배신과 같은 종류 이외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지. 신이래야 길거리 시정잡배의 행동보다 별로 나을 바가 없었는데 인간이 그 신의 지시를 따를 리가 없잖은가." - P316
316그 결과 그리스의 많은 영웅들은 마침내 신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스인들에게는 인간이 곧 신이었고, 신이 곧 인간이었다. 이렇게 사상과 종교적 제약에서 자유로웠던 그리스인들은 일찌감치 인간에 눈을 떴던 최초의 인간이었던 셈이다. 그리고그들은 이것을 ‘탁월함‘이라 불렀다.
《일리아스》를 펼치면 아킬레우스와 헥토르가 최후의 일전을 겨루기직전에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에서 헥토르는 이렇게 제안한다. "둘 중 누가 죽더라도 패자의 시신을 모욕하지 말고 정중히 돌려주도록 하자." 이에 아킬레우스는 단호하게 대답한다. - P317
"헥토르여, 잊지 못할 자여! 내게 합의에 관해 말하지 마라. 마치 사자와 사람 사이에 맹약이 있을 수 없고늑대와 새끼 양이 한마음 한뜻이 되지 못하고시종일관 서로 적의를 품듯이, 꼭 그처럼나와 그대는 친구가 될 수 없으며 우리 사이에맹약이란 있을 수 없다." ―52 - P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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