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렇게 우수한 도자문화의 전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때우리보다 뒤처졌던 사람들도 해온 일들을 미처 따라잡지 못했다. 그것은 우리만의 울타리 안에서 맴돌다보니 우리의 도자문화를 보편화·세계화시키지 못한 탓이다. 단언컨대, 자포니즘 도자기의 어디엔가는 조선백자의흔적이 묻어 있을 것이다. 다만 우리가 등한시하다보니 발견하지 못했을 따름이다. 우리가 그것을 발견했을때, 우리는 세계에 대고 우리의 도자문화가 유럽에 영향을 미쳤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P194
이제 우리는 자신을 세계사적 지평에 올려놓고 우리가 가졌던 것과 갖지 못했던 것을 반듯하게 가려내면서 이어가야 할 것은 또한 무엇인가 깊이 사색해봐야 할 것이다. - P195
유용한 수산지원이나 광물자원이 풍부하다. 그러나 제대로 개발해 활용하고 있지못하다는 것이 그들의 일치된 평가다. "한국은 가난한 국가가 아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국민의 잠재된 에너지는 거의 사용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 비숍의 지적이다. - P199
조선인들의 성정(性情)이나 생활관습은 언제 어디서나 이방에서온 서양인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조선인들의 건전한 도덕과따뜻한 인정은 서양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음을 곳곳에서 찾아볼수 있다. 한반도를 8년간 12번이나 여행하고 『한영대사전』을 편찬해우리나라 영어교육에 큰 족적을 남긴 캐나다 출신의 선교사 게일(J.S. Gale)은 저서 『전환기의 조선』 (1909)에서 한국인은 정직해서 신뢰할 수 있고, 신용을 중시하며 문서가 아니라 구두로 한 약속도 철저히 지키는 등서양인보다 더 훌륭하다는 호평을 내린다. - P201
조선에 대한 서양인들의 이해나 이미지는 이토록 다르다. 이러한편차는 근원적으로 보면, 동양에 대한 서양의 지배주의적 · 우월주의적 사고방식인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의 인식지평에서 바라보는가 아니면 남을 있는 그대로 발견하고 이해하려는 타자의 인식지평에서 바라보는가 하는 근본입장에 따라 다를 것이다. 여기에 더해 그들의 조선체류기간이나 체험의 심도, 그리고 정보수집대상과 경로의 차이도 그러한 편차를 낳게 한 객관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 P203
서양인들이 본 조선을 떠올리노라면 비분강개하기도 하고 애상이나 회한에 젖기도 하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그것을 피하지하게 되돌아봐야 한다. 왜냐하면 공자가 "논어"의「학이(學而篇)」에서 말하듯이 "어디로 가려는지 알고 싶거든 어디서 왔는지 되돌아봐야 하기 [往而知來者]" 때문이다. - P204
고구마가 알려지면서 재배된 시기는 1760년대다. 당시 예조참의였던조엄(趙)이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와 쓴 기행문인 『해사일기 (海事日記)』에 의하면, 그가 일본으로 가던 길에 쓰시마섬[對馬島]에서 고구마를 발견해 들여왔다고 한다. 그는 이 책에서 쓰시마섬에 감저(甘藷)라는 것이 있는데, ‘효자‘ 혹은 ‘고귀위마‘로 부른다고 하면서, 이것을 가져다가 심으면 문익점의 목면처럼 백성들을 매우 이롭게할 것이라고 말한다. - P219
1905년에 국내 최초의궐련으로 ‘이글‘이 생산되었으며, 일제시대에는 30여 종의 담배가 출시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문화로서의 담배 도입은 당초부터 적지 않은 저항을 받아왔다. 우리나라에서는 담배에 인이 박인다는 이유로1650년경에 인조가 금연령을 내렸다. 그러나 오래가지는 못했다. - P224
조상들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때에도 그것을 통째로 삼키는 것이아니라 우리의 기호와 실정에 맞게 고치고 새김질하여 완전히 소화함으로써 전통문화로 승화 고착시켰다. 이것은 문명교류에서 보기드문 순기능적 수용의 본보기다. - P225
끝으로 『표해록』의 행간마다에서 저자 최부의 높은 소양과 도도한기질을 엿볼 수 있다는 것도 이 책만의 특성이라 말할 수 있다. 최부는 조선의 문사로서 포학지사(範學之士, 박식한 인사)다움을, 조선의 사람으로서 정도직행지사(正道直行之士, 바른길을 꿋꿋이 걸어가는 인사)다움을 조선의 관리로서 충군애국지사(忠君愛國之士)다움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 P233
최부의 표해록』이 3대 중국기행문의 하나라면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은 4대 세계기행문의 하나로 꼽힌다. 이렇듯 우리는 자랑스러운 세계적 문화유산을 다수 가지고 있으며, 그만큼 세계적 문명교류에도 기여해왔다고 당당히 자부할 수 있다. - P234
우리 겨레의 5,000년 문명사를 되돌아보면, 어느 순간도 세계와 동떨어져 살아본 적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늘 남들과의 어울림 속에서무언가를 서로 주고받으면서 살아왔다. 예나 지금이나 그 주고받음은 공간적 매체인 길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문명사에서는 문명을 소통시키는 길을 통틀어 씰크로드(Silk Road)라고 한다. 씰크로드를 제쳐놓고 문명의 교류나 세계성을 논할 수 없다. - P237
요컨대 씰크로드는 문명의 유대이고 세계로의 이음길이다. 그런데 이 본연의 유대와 이음길이 무시당해왔으니 실로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P238
한 나라의 세계성은 비단 보편적 가치의 공유, 즉 보편성에서만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독창적인 가치의 창출, 즉 개별성에 의해서도 보장된다. 사실 모든 보편성은 교류를 통한 개별성의승화다. 개별성을 떠난 보편성이란 있을 수 없다. - P251
‘문명교류기행‘은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교류사적 이해에서 시동을 건긴 여정으로서, 그 지향점은 ‘한국 속의 세계와 그 세계성을가늠하는 데 있다. 비록 영욕이 엇갈린 역사지만 그것이 우리와 운명을 같이해온 역사이고, 또 그 연장선상에서 영원히 살아가야 하기에, 우리는 더 냉철하게 어제를 성찰하고 오늘을 점검하며 내일을 설계 -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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