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밝은 달밤에 밤늦도록 노닐다가 들어와 잠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구나.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누구의 것인가. 본래 내 것이지만 빼앗겼으니 어찌하리.
『삼국유사』에 나오는 「처용가(處容歌)」다. - P13
이 같은 처용설화의 전체 문맥을 종합해보면, 크게 3가지 주제로나눌 수 있다. 그 첫째는 흥미소가 다분한 처용-처-역신(姦夫) 간의 애정적 갈등을 내용으로 한 민담적간의성격의 주제이고, 둘째는 왕과 처용의 신이한 힘과 무속적 효험을 과시하는 신화적 성격의 주제이며, 셋째는 사찰의 영험을 확산하는 불사연기(佛事설적 성격의 주제다. 이렇게 처용설화는 민담과 신화,전설의 서로 다른 3가지 주제가 융합된 복합설화라고할 수 있다. - P15
이러한 복합성은 신라사회 자체가 무속과 불교가 혼재한 무불습합(巫佛習合) 사회라는 데서 비롯된다. 바로 이같은 복합적 성격으로 인해 처용설화는 노래와 춤, 주술과 가면 등다양한 기능을 공유하면서 오랫동안 전승되어왔으며, 또한 다각적인논의의 소지를 낳게 되었다. - P16
요즘 해마다 울산에서는 처용문화제를 열어 처용을 기리는 문화 한마당을 흥겹게 펼치고 있다. 자칫 그 주인공이 외래인이라고 해서 탐탁찮게 여길 수도 있는데, 이것은 한낱 단견이고 기우이며 닫힘이다. 전승을 포함해 모든 문화현상은 어디서 왔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슬기롭게 받아들여서 제 것으로 만들었는가가 더중요하다. 건국신화들을 비롯해 우리네의 많은 문화전통 중에는 그뿌리에 외래적인 요소가 적잖게 묻어 있다. 처용설화가 오랫동안의변이과정을 거쳐 전승으로 굳어져서 오늘로 이어진 경우가 그러하다. 이것이 바로 문명의 만남이고 수용이며 열림이다. - P20
지금으로부터 약 1,200년 전에 지어진 석굴암石窟庵)은 동서문명이시·공을 초월하여 서로 만나서 이루어낸 귀중한 결과물이다. 고대서양의 헬레니즘문화를 진취적으로 수용한 불교문명은 인도에서부터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거쳐 멀리 여기 신라땅에까지 전파되어 증세문명의 찬란한 한 장을 열었다. 그 가운데서도 석굴암은 건축구조에서부터 내용물의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문명교류의 화신으로 석굴미술사에 우뚝 서 있다. - P21
문명이 교류하는 것은 문명이 지니고 있는 근본속성의 하나인 모방성 때문이다. 문명이란 일단 생겨나면 주위에 퍼질 뿐만 아니라, 주위의 문명과 어울리면서 필요한 것은 본받아 자기 것으로 만들어 문명전반을 살찌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조적인 베낌이 아니라 창의적인 모방이다. 이 점에서 석굴암은 독보적인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 P22
이것은 석굴암 자체가 불법의 소산이기 때문일 것이다. 원래 석굴암은 암자가 아니라 석불사(石佛寺)라는 독립된 절이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불국사에 소속되었다가 1910년경부터 일본인들이 석불암 대신 석굴암으로 불렀다. 그것이 오늘날까지 그대로 쓰이고 있다. 이 이름에 대해 한번쯤 재고가 필요할 성싶다. - P25
그 후 주먹구구식으로 대여섯 차례 보수공사를 하면서범한 잘못들은 그 보존에 심각한 후유증을 유발하고 있다. 1913년 일본인들이 돔 외부를 보강한답시고 덧칠한콘크리트는 내부의 공기 흐름을 차단해 이슬 맺힘 현상을 낳았고, 그 후 그들이 이런 현상을 없앤다면서 두 차례 보수하면서 마구증기세척을 해댄 것이 결국 석재의수명에 치명타를 가하고 말았다. - P29
석굴암의 이상세계를 추구하는 불교와 그에 바탕을 둔 복합적 문명체인 불교문명은 예나 지금이나 살아 숨 쉬는 문명이다. 그런데 미국의 안보전략가인 헌팅턴은 이른바 ‘문명충돌론‘에서 기상천외하게도일본은 하나의 문명권으로 설정하면서도, 불교문명은 아예 문명권에서 제외시키고 있다. 불교가 탄생지 인도에서 이미 소멸되었고, 중국과 일본 등지에서 ‘토착문화에 통합되어 그 실존성을 잃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P30
동남아와 동북아의 넓은 지역에 깊이 뿌리박고, 오늘도 여전히 생기를 잃지 않고 있으며, 유럽인들마저도 심취되어가는 불교문명을 주제넘게 거세하는 것은 ‘눈감고 아웅하는 식의 어불성설이다. - P31
자고로 한 나라의 위상은 그 나라가 세계성을 지닌 세계인을 얼마만큼 배출했는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성을 지닌 세계인이 많으면 소국도 강국이 되며, 세계에 대한 기여도도 그만큼 높아진다. 세계성이란 세계에 대한 앎을 추구하고 세계와 삶을 함께하는 정신을 말하며, 이런 정신을 지니고 실천하는 사람이 곧 세계인이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정신을 지닌 첫 세계인이 바로 신라 고승 혜초 스님이라고 말할수 있다. - P32
달 밝은 밤에 고향길을 바라보니 뜬구름은 너울너울 돌아가네. 내 나라는 하늘가 북쪽에 있고 누가 소식 전하러 계림으로 날아가리. - P37
月夜瞻鄉路월야첨향로 浮雲颯颯歸부운삽삽귀 我國天岸北이국천안북 誰爲向林飛수위향림비 - P37
그리고 여행기에 나타난 대식 관련 기사는 특별한 문명사적 의미를 지닌다. 혜초는 사상 최초로 여행기에서 아랍을 ‘대식‘으로 명명하고 한(漢)문명권에서는 처음으로 대식 현지에서의 견문을 여행기에 담아 전한 사람이다. - P39
바다는 강이든 물결은 어느 지점에서 수직으로 딱 멈춰 서지 않고잔잔한 여파를 남기면서 서서히 가라앉는다. 종교의 전파도 마냥 그러하다. 고대 동방기독교의 동전 물결은 중국에서 중단되지 않고 멀리 한반도까지 그 여파를 몰고 왔다. 아직은 사료와 연구의 부족으로전파 시기와 내용, 성격, 영향, 결과 등 실상을 구체적으로 밝힐 수는없지만, 그 개연성을 넘어 초전(初傳) 단계의 유입으로는 볼 수 있을것 같다. - P44
경주 불국사 경내에서 기독교의 상징물인 돌십자가가 발견된 사실, 즉 불교와 기독교가 한곳에서 어우러진 사실을 과연 어떻게 설명할것인가? 불상과 예수상이 한곳에 모셔졌다면 청천벽력이 일어날 오늘의 현실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이상야릇한 일이다. 선이 악으로 변한 세상에서 다시 선으로 돌아가기에는 인간의 지혜가아직 너무 모자라는 현실에선 그저 그 선을 염불처럼 되될 수밖에 없다. 종교들의 어울림이라는 ‘선‘ 앞에서 말이다. 이것이 현대의 퇴행이자 고민이다. - P49
오늘도 분처상은 그 무언가를 증언하면서 그 자리에 오도카니 서있다. 무언 중의 유언, 그것이 바로 역사이다. 이 역사를 알아듣지못해 생긴 것이 이른바 ‘역사의 비밀‘이다. 역사의 비밀은 역사의 심연 속에 일시 가려진 것일 뿐, 영원한 것은 아니다. 그 심연을 파헤치다보면, 어느 날엔가는 그 비밀이 허무해지는 법이다. 분처상의 비밀도 종당에는 그러할 것이다. - P59
고선지는 우리 겨레 고유의 기개를 떨치면서 중세 동서관계사와 전쟁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영걸이다. 그는 망국의비운을 삼키며 이국 땅 당나라에 강제로 끌려간 고구려유민(遺民)의 후예다. 아버지 고사계(鷄)는 고구려가 망한 후 성인으로 당에 끌려가 처음에는 하서군(河西郡, 현 깐쑤성)에서 중급장교로 있다가 점차 공을 세워 안서군(安西郡, 현 쿠처)의 사진교장(四鎭校將)으로 승격된 군인이었다. 이처럼 무인 집안에서 태어난 고선지는 어려서부터 무예를 연마하면서 아버지를 따라 안서군에 들어갔다. 그는 용모가 빼어나고 활을 잘 쏘며 말을 잘 탈 뿐만 아니라, 용감대담하고 인품이 출중해 20대에 벌써 유격장군(游擊將軍)에 올랐다. - P61
이 같은 급속한 승격은 그 자신의출중한 자질 덕분이었겠지만, 당시 파쟁에 휘말려 있던 한인 장군들과는 달리 쉽게 통제할 수 있는 ‘빈천하고 무식한 번장(藩將, 이민족장군)들을 끌어들이는 이른바 ‘장기용정책‘과도 관련이 있다. - P63
드디어 751년 7월 고선지가 인솔한 7만 대군과 석국-이슬람 연합군과의 격전이 톈산산맥의 서북단에 있는 탈라스(현 올리아타)에서 벌어졌다. 이것이 당의 서역경영의 운명을 판가름하고 중세 동서관계사에획기적 의미를 지닌 탈라스전쟁, 즉 고선지의 제5차 서역원정이다. 불과 닷새밖에 걸리지 않은 이 전쟁에서 고선지는 전략·전술상의 착오로 패전의 고배를 마신다. 그는 상승일로에 있는 이슬람군의 위력을 과소평가함으로써 대비책을 소홀히 했으며, 당과 동맹을 가장한카를루크족의 배반을 예견치 못하고 방심함으로써 결국 카를루크족과 이슬람군의 좌우협공을 받아 전멸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당군은대부분이 사살되고 일부(2만 명)는 이슬람군에게 포로가 되었으며 고선지를 포함해 구사일생으로 패주한 자는 몇천 명에 불과했다. - P64
인간은 존재양식에 따라 크게 순수 생물학적 존재로서 자기만을 위해 살아가는 ‘단순 인간과 사회관계 속에서 남을 위해 남과 더불어살아가는 ‘사회적 인간‘의 두 부류로 대별된다. 그런데 역사인으로서의 이 사회적 인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사건적 인간‘과 남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사건창조적 인간‘으로나누어진다. - P73
이 ‘사건창조적 인간‘이 바로 역사에서 말하는 위인 (혹은영웅)인 것이다. 이러한 위인은 대체로 역사의 격변기에 나타나 그 격변을 타개하는 데서 선도적 역할을 한다. 그러나 위인도 어디까지나사회관계 속의 인간인만큼 역사와 시대의 피조물일 수밖에 없다. - P74
그러나 정치의 유혹은 이 의롭고 현명한 위인을 무모한 정치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는 자의 반 타의 반 중앙귀족들의 왕권쟁탈전에 휘말리면서 딸을 46대 문성왕(文聖王)의 두번째 비로 바치기로 한다. 그러나 청운의 꿈도 잠시, 그의 세력 확대를 우려한 중앙귀족들의 사촉을 받은 부하 염장(長)에게 술자리에서 피살되고 만다. 해상왕국 건국 18년 만인 846년의 일이다. 장보고 피살 후 청해진은 염장에 의해 한동안 관장되다가 851년에 해체되고 주민들은 벽골제(碧骨堤, 현 김제시)로 강제이주되면서 찬란했던 장보고의 해상왕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만다. - P79
신라인들의 도움 속에서 재당 9년 반 중 2년 반이나 신라인들의 도량인적산법화원에 기거한 천태종 3대조 엔닌도 귀국해서는 신라명신(新羅明神)‘에게 사은하는 예를 올렸으며, 그의 제자들은 스승의 유지를 받들어 적산선원을 세워 ‘적산대명신‘ (적산신라신)을 모셨다. 얼마 전 방영되었던 한드라마에서 장보고와 신라선단의 신묘한 활동을 ‘해신(海神)‘에 비유한 것은 이래서 일리가 있다고하겠다. - P81
고려는 우리 겨레사에서 첫 자주적 민족통일국가다. 그 역사적 위상에걸맞게 고려는 세계를 향해 선진해양국다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3면이 바다로 에워싸여 있는 우리나라는 늘 대륙문명과 해양문명이 만나 조화를 이루는 속에서 역사를 개척해왔고, 특히 바다를 잘 경영할때는 국운이 흥해 나라가 강성했다. 고려가 바로 그 선례다. - P84
우리 겨레의 문화유산 가운데서 세계적인 자랑거리를 들라면 으레고려청자가 빠질 수 없다. 왜냐하면 고려청자야말로 우리나라를 세계 도자기사의 선구로 자리매김하게 한 독창적인 문화유산이며, 우리 선조들이 창조한 세계적 수준의 자랑스러운 예술품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코 우리들의 자화자찬이 아니고 유수의 전문가들이 이구동성으로 평가하는 바다. - P92
조선도자기에 매료되어 도예가의 길로 전향한 영국의 세계적도예이론가인 버나드리치(Bernard Leach)는 백자에 엷게 비치는 청색을 보고 "이 색을 낸다면 사람들을 얼마나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라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면서 감탄했다고 하며, 영국의 한 박물관 도자기 부장인 허니 (W. B. Honey)는 중국 및 극동 각국의 도자기』 (1945) 란 저서에서 "최상급의 한국도자기는 세계 도자기 중에서가장 우아하고 진실하며 도자기가 가지는 모든 장점을 구비하고 있으니, 그것은 행복한 민족의 소산임을 첫눈에 말해주고 있다"고 격찬을 아끼지 않는다. - P93
그러나 같은 송대 사람인 태평노인(太平老人)은 『수중금(袖中錦)』이란 책자에서 천하제일론 (天下第一論)」이란 글을 쓰면서 천하의 제일가는 것을 쭉 열거하는 가운데 "고려 비색(즉 청자)이 천하제일이다"라고 사실을 실토하고 만다. - P9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