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형성되는 과정은 세 가지로 나뉜다. 우선 기억의 바탕이 되는 정보를 뇌에서 부호화하는 ‘암호화‘, 다음으로 그 정보를 축적하는 ‘저장‘, 마지막으로 저장된 정보를 검색해 재생하는 ‘회수‘. 그러니까 가나에의 기억장애는세 번째 ‘회수‘ 단계에서 발생한 문제였다.
외국 어딘가 같아 보인다. 한 남자가 마을 아이들을 이끌고 앞장서서 걷는 그림, 남자는 피에로 분장을 하고 피리를 불고 있다. 아이들은 피리 소리에 이끌리듯 걷고 있다. 마키시마는 그 옛날 어린 시절 기억에 남아 있는 너무나도 유명한 동화를 떠올렸다.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 그림이었다.
1284년, 하멜른은 쥐로 인한 피해에 시달렸다. 도시에 쥐 퇴치자를 자처하는 남자가 나타나 도시 사람들과 쥐 퇴치 계약을 맺는다. 남자는 피리를 연주하며 쥐떼를 베저강으로 유인해 전부 빠뜨려 죽인다. 그런데 주민들이 보수를 지불하지 않자 화가 난 남자는 어느 날 주민들이 교회에 간 틈을 타 쥐떼를 유인한 것과같은 방법으로 피리를 불어 도시의 아이들 130명을 유인한다. 그러고는 앞장서서 아이들을 동굴 안으로 몰아넣은뒤 동굴 안에서 입구를 막아 버렸다. 피리 부는 사나이와 함께 사라진 130명의 아이들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는 민간설화였다.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라면 나도 알아.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유괴범의 아버지 같은 존재잖아."
이누카이는 예전에 연기학원에서 연기 공부에 매진했던 시기가 있었다. 그 무렵에 표정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이나 무의식중에 보이는 행동으로 상대의 거짓을 꿰뚫어 보는 기술을 배웠다. 이 기술은 형사로 직업을 바꾸고 나서용의자의 거짓말을 간파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현재 경시청 내에서 검거율 1, 2등을 다투게 된 이유 중 하나도 이기술 덕분이었다.
다만 문제도 있었다. 이 기술은 여자를 상대로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연기학원 시절, 배역을 따려고온갖 남자들의 버릇을 끊임없이 관찰했다. 애당초 여자는 대상이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그것이 원인인 듯했다. 여자의 마음에 무지한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학창 시절 남자답게 잘생겨서 굳이 애쓰지 않아도 여자들이 먼저 다가왔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알아서 다가오니 깊이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고 헤어져도 금세 새 상대가 다가왔기에 반성과 학습의 기회도 없었다. 삼십대 중반에 이혼 두 번이라는 불명예도 전부 여자의 심리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하려고 하지 않은 태도 때문이었다.
"아빠, 제발." 날카롭게 주시하는 사야카의 시선에 이누카이는 꿈쩍할 수 없었다. "꼭 가나에를 무사히 구출해 줘." "평소대로 전력을 다할 거야." "전력을 다하기만 해서는 안 돼." 사야카의 말은 가차 없었다. "나중에 블로그를 보면 알겠지만 가나에와 엄마는 병마와 싸우는 사람들의 희망이야. 만약 가나에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모두가 절망할 거야."
예방 접종은 후생노동성의 후원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후생노동성이 2010년부터 백신 접종 긴급 촉진 사업을 실시하며 자궁경부암 백신을 포함한 해당 백신 접종 사업에 보조금을 지급한 것이다. 보조금을 지원하는 이 접종 사업에 각 지방자치단체가 달려들었다. 접종 대상자인 초등학교 6학년부터 고등학교1학년 여학생은 무료 또는 저가로 접종할 수 있게 됐다. 2013년 4월부터는 예방접종법에 근거해 정기접종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러나 이 백신을 접종한 소녀들에게서 발열이나 아나필락시스쇼크 등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수는 2013년 3월까지 약 1천 2백 건. 그중 백여 건은 장애와 같은 중증 후유증이 남았다. 그리고 2013년 3월에 피해 소녀의보호자들이 모여 ‘전국 자궁경부암 백신 피해자 대책 모임‘을 결성했다. "가나에의 기억장애도 짐작이 가는 원인은 그것밖에 없었어요."
"그 사람은 딸을 위하는 순수한 마음에서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걸지도 몰라.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제약회사를 고발하는 운동으로 번졌잖아. 그런 운동에는 반드시 반대세력이 존재하지." "그 반대세력이 가나에 양을 유괴했다는 말입니까?" "아직 몸값을 요구하지 않았어. 애당초 그 집은 막대한 몸값을 낼 형편도 안 되고, 돈이 목적이 아니라면 그밖에추측할 수 있는 목적은 가해 또는 음란행위지. 하지만 애 어머니가 사회 고발을 한 인물이라면 또 다른 동기가 떠오르잖아." "고발 저지・・・・・…." "현재 쓰키시마 모녀에게 밀려드는 건 동정과 걱정이야. 자궁경부암 백신에 대한 비판은 조용하지. 만약 범인이딸을 인질로 잡고 제약회사를 향한 비난을 멈추라고 요구하면 그 어머니가 거절할 수 있을 것 같아?"
"목소리가 작은 사람들은 종종 신중해. 그리고 신중한 사람은 자신들의 적을 속속들이 알고 있어."
"딸이요. 살아 있었으면 가나에 양과 동갑이었겠군요. 아야코 씨에게 들어 아시겠지만 제 딸도 넓은 의미에서 자궁경부암 백신 희생자였습니다." "그런 걸 백신 부작용이라고 한다더군요. 하지만 백신 부작용으로 사망자가 나왔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습니다." "직접 사인이 부작용이 아니니까요. 미사키는・・・・・ 딸은 백신 접종 후 사지 기능 장애를 겪었습니다. 테니스부서 활약하던 아이였는데 안타까운 일이었죠."
약해 에이즈 사건 * 1980년대에 일본에서 혈우병 환자들에게 HIV 바이러스에 오염된 비가열성 혈우병 치료제를 투여해 수많은 에이즈 감염 환자를 낳은 사건.
"제약회사와 후생노동성과 의사. 이 삼각 구도의 유착은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그들이 또 약해 에이즈의 전철을 밟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우선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압살하는 일이겠죠."
무라모토의 온화한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약해 에이즈 사건 때, 최초 보고 사례를 철저히 묵살하고 피해자 한 사람 한 사람 확실하게 입막음해 두었다면 후생노동성과 제약회사, 의사를 둘러싼 소송전으로 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부 관계자는 여전히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패거리들에게는 블로그 투병 기록으로 세간의 이목을 끌어 자궁경부암 백신 피해의 상징이 된 쓰키시마씨 모녀가 위협적인 존재일 겁니다."
-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떨어진 돈을 주머니에 슬쩍 주워 담는 사람도 많겠죠. 만약 유괴된 가나에가 건강한 사람이라면 범인의 행동은 자연히 제한된다. 인질을 살해하려면 그 작업과 사체 처리에 많은 시간과 수고가 든다. 인질을 살려둔다면 범인과 장소를 특정할 수 없도록 정보를 차단해야 한다. 어느 쪽이든 대단한 수고가 필요한 일이다. 이 기여가
"예를 들어 가정 폭력이든 리벤지 포르노든 죄상은 그냥 상해죄나 명예훼손이지만 피해자는 죄상 이상으로 상처받고 두려움에 떨어요. 지금의 법은 약자에 대한 배려가 충분하지 않습니다. 마치 강자의 시선으로 만들어진 법 같아요. 만약 이번 사건이 장난이나 충동의 연장선에서 계획된 범행이라도 극형에 처해야 해요."
아소처럼 오랫동안 범죄 수사에 몸을 담은 사람조차 인터넷의 악의에는 익숙해지지 않는 모양이다. 일상에 숨어 있는 혼탁한 앙심. 사교적인 미소 뒤에 깔린 잔학성. 그것들이 어떠한 계기로 표출되어 이러한 범죄로 이어졌을 가능성을 끊어낼 수 없다. 언뜻 머리를 스친 범인상에 이누카이는 몸서리칠 뻔했다.
"자궁경부암 백신 부작용 사례는 현재까지 1천 2백 건 보고됐을 뿐이지만 저는 빙산의 일각이라고 생각해요. 물밑에 가려져 안 보이는 부분이 드러나는 건 2년 후나 5년 후, 아니면 10년 후………. 그때가 되면 피해자는 도대체 몇만 명으로 늘어날까요. 그리고 그들에게 누가 어떤 형태로 보상할 수 있을까요? 생각할 때마다 같은 의료인으로서부끄럽습니다만, 약해 에이즈 사건 때 제약회사나 비가열성 치료제를 승인한 후생노동성나 사건에 관여한 의사나모두 추악한 행태가 만천하에 드러났습니다. 권력과 욕심에 찌든 자는 어리석어요. 어리석으니 몇 번이나 같은 잘못을 반복하고 몇 번이나 같은 추태가 까발려지죠."
"이런 약물 피해 사건은 오래되고도 새로운 문제입니다. 몇 년 주기로 발생하고 의사와 제약회사와 후생노동성의유착이 밝혀지며 관계자가 체포되고 재판이 오랫동안 진행되면서 환자 몇 명이 희생되고 나서야 마침내 구제가 시작되죠. 그러나 그때가 되면 이미 또 다른 약물 피해 사건이 물 밑에서 진행되는 실정입니다. 즉 해결되는 듯 보여도근본적인 부분은 전혀 개선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제약회사는 부작용 있는 백신을 계속 만들고, 의사는 의료 수가를 받으려고 의심스러운 백신을 환자들에게 계속 투여하며, 후생노동성은 낙하산 욕심에 백신을 순순히 허가하고접종을 권장하는 구조가 사라지지 않고 이어집니다. 그러나 의사로서 말씀드리면 이상이 있는 약은 즉시 사용을 중단하고 경고해야 합니다. 이런 당연한 말이 입찬소리 같이 들리겠지만, 의사와 후생노동성의 사명은 국민의 건강을지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효성이 보증되지 않은 백신을 충분한 설명 없이 권장하는 것은 범죄 행위나 마찬가지입니다. 환자의 이익과는 무관한 논리로 백신 접종을 권장하는 후생노동성과 의료기관은 망국의 무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또 그놈의 인터넷인가. 빌어먹을, 마약이니 권총이니 요즘에는 일반 시민들이 인터넷에서 그런 위험한 물건을 살수 있다니. 조만간 인터넷에서 핵미사일도 팔게 생겼어."
"우선 출산이라는 게 시간을 미리 정해 놓는 일이 아니니까 의사가 한밤중이나 꼭두새벽에 호출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연스럽게 근무 시간이 불규칙해지죠. 게다가 산부인과는 다루는 범위가 매우 넓습니다. 대학이라면 산부인과 안에서 업무를 세분화할 수 있지만, 일반 병원에서는 여의치 않죠. 근무 환경이 그렇게나 혹독한데 대가는 너무작습니다. 의사도 성인군자는 아닙니다. 먹고살아야 하니 노동에 상응하는 합당한 수입이 없으면 근로 의욕도 줄어들죠." "확실히 출산은 시간을 가리지 않죠."
"그리고 출산은 새 생명을 다루는 일이라서 관계자들은 당연히 크게 기대합니다. 무사히 태어나는 것이 당연하다는 분위기죠. 하지만 현실은 출산에도 위험은 존재합니다. 근대의학 이전 시대에는 그야말로 수많은 태아가 사산됐으니까요. 그런데 오늘날 그런 인식은 없습니다. 그래서 태아나 산모에 타격이 있으면 자칫 의료과실로 소송에 걸려 버립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산부인과 의사는 전체 의사의 5퍼센트밖에 안 되는데 소송 비율은 전체의 12퍼센트를 차지합니다. 불합리하다는 생각 안 드십니까?"
마키노 회장의 목소리가 조금 상기되자 이누카이는 몹시 동정심이 일었다. 이누카이는 딸이 입원 치료를 받고 있기도 해서 치료하는 입장에서 생각해 본 적은 좀처럼 없지만, 사람의 목숨을 맡으면서 소송 위험까지 짊어진다는 사실은 확실히 가혹하긴 하다.
"산부인과 의사는 글자 그대로 임부를 포함한 여성의 건강과 생명을 지키는 직업입니다. 그런데 고작 보험 점수따위의 당치도 않은 걸 우선시한 나머지 산모나 미래에 어머니가 될 아이들의 몸에 장애를 남길 만한 약물을 투여하고도 수치를 모른다니 산부인과 의사로서 상종 못 할 인간들입니다. 따지고 보면 모든 여성의 적이죠. 달리 표현하면 모든 어머니, 모든 여성이 그들을 증오할 겁니다."
도쿄의 중심가에서는 불법 주차를 볼 일이 적다. 2006년 도로교통법 개정으로 탄생한 주차감시원의 꾸준한 활동으로 해마다 감소하고 있다. 그런데 오사카에서는 불법 주차 차량이 당당하게 늘어서 있고 보행자들도 신호를 거의지키지 않았다. 도로에 차가 달리지 않으면 신호등이 빨간불이어도 아무렇지 않게 길을 건넜다. "뭐, 반권력이랄까, 옛날부터 나라님이 정한 일 따위 내 알 바냐, 하는 정서가 있어서요." 구게가 변호하듯 덧붙였다.
"분명 오사카만큼 시민이 경찰을 싫어하는 곳도 얼마 없을 겁니다. 저도 갓 순경이 됐을 때 길을 걸어가던 초등학생 여자애에게 ‘짭새‘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을 정도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구게는 또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방 공공 단체. 일본의 행정 구역은 총 47개 도도부현(都道府県)으로 나뉘며 도쿄도(都), 홋카이도(道), 오사카부(府), 교토부(府), 43개의 현(県)이 있다.
옛날 어느 위정자는 인명은 지구보다도 무겁다고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정치적인 고려를 호도하려는 궤변에 불과했다. 사람의 목숨보다 무거운 것 따위 현실에 얼마든지 존재한다. 아니, 종교나 정치에서 그것은 먼지만 한 가치도 없지 않은가. 이 나라도 그렇다. 정부 기관의 이익과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자신과 자신의 가족 외에 다른 사람의 목숨 따위 길바닥의 돌멩이처럼 여기는 인간이 썩어날 정도로 많다. 그렇지 않고서는 약물 때문에 발생하는 피해문제가 몇 번이고 되풀이되는 현실을 설명할 수 없다.
"관리관뿐 아니라 건물 위층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인간들의 생각이란 늘 똑같아. 새삼스럽게 내 입으로다시 설명해야 해?"
"그래, 저게 바로 네가 직감으로 알아챈 쓰키시마 아야코가 숨기던 진실이자 무라모토가 내뱉던 거짓말이야. 계획의 세부내용을 짠 사람은 무라모토였어. 협조자를 모은 사람은 쓰키시마 아야코였고, 하지만 이 계획을 처음 제안한 사람은 마키노 아미였지. ‘하멜른의 피리부는 사나이‘는 그녀였어."
자신을 바라보는 가나에의 눈이 여느 때와 다른 빛을 내뿜고 있었다. 불안한 기색은 여전하지만 곤혹스러운 감정도 느껴졌다.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가 가나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엄마?" 아야코가 아크릴판에 손을 대자 가나에도 맞은편에서 손을 맞댔다. 이윽고 아크릴판 너머로 가나에의 온기가 전해졌다.
1796년 영국의 의학자 에드워드 제너는 소젖을 짜다가 우두에 감염되었던 사람들은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는사실에 주목했습니다. 그래서 우두 환자의 고름을 채취해 동네 농부의 어린 아들의 팔에 주입했고, 6주 후 천연두농을 주입하는 실험을 했습니다. 우두접종으로 면역력이 생긴 소년은 천연두에 걸리지 않았고, 이렇게 여러 실험을거치면서 우두 균으로 천연두를 예방할 수 있다는 인류 최초의 백신인 종두법이 만들어졌습니다. 이후 제너가 발명한 종두법은 천연두 사망자를 줄이는 데 크게 공헌했고, 세계보건기구(WHO)는 1980년에 천연두 종식 선언을 했습니다. ‘백신(Vaccine)‘이라는 용어도 ‘소 천연두‘를 의미하는 라틴어 ‘바리올라에 바키나에(Variolae Vaccinae)‘에서유래됐죠. 사회파 미스터리의 대표주자 나카야마 시치리, 이번에는 백신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