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에서 유람 온 사람으로서는 참으로 갑갑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런통제는 그 나름의 강점도 있었다. 금강산을 다녀온 사람들이 너나없이어떻게 금강산이 그렇게 깨끗이 보존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이구동성의 표현을 들을 때마다 내가 대답할 수 있는 말은 유람의 낭만과 서정을 맘껏 즐기는 우리와 ‘탐승질서위반‘을 처벌규정으로 만들어관리해온 그네들의 삶의 방식 자체에 너무도 큰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다. - P63

금강산려관 
금강산에 있는 유일한 관광호텔로 객실이 240여개 있다. 그러나 내가 5박6일을 머무는 동안 이곳에묵어간 손님은 거의 없었다. - P70

내가 금강산에 와서 가장 맛있게 먹은 것은 명태국이었다. 명태의 원산지는 함북 명천으로 본래 함경도 요리의 자랑인데 그 솜씨가 원산을거쳐 강원도 금강산까지 내려왔다. 같은 동해바다에서 사는 명태라도 꼭명천에서 잡힌 것이 맛있는 이유는 서해바다 조기가 법성포 칠산 앞바다에서부터 연평도 사이에서 잡힌 것이 맛있는 것과 같다. 어떤 사람은 신토불이를 인정하지만 같은 서해바다 조기인데 왜 중국 배가 잡은 조기는중국산으로 값이 싸고, 한국 배가 잡은 조기는 비싸냐며 신토불이론을부정하는 것인지 지지하는 것인지 의구심을 표명한다. - P71

명색은 "백성의 고통을 알고자 지방을 순행하는 것"이었지만 속내용은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그중 가장 큰 목적은 그가 평생 고생한 피부병을 치료하기 위해 온정리온천에 가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가는 길에 금강산도 구경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 P75

한편 이에 따른 부차적인 목적은 대단히 정치적인 것으로 사대부 신하들에게 왕권을 과시하기 위함도 있었다. 그는 조카를 죽이고 왕이 된만큼 쿠데타 독재자들이 갖고 있는 불안과 횡포를 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자신의 위용으로 왕권의 정통성을 수시로 확인시킬 필요가 있었으니, 행차 도중 많은 신하들이 본보기로 걸려 곤욕과 수모를 당하여 기가 꺾였다. 또다른 목적은 불교의 중흥을 몸소 실천함에 있었다. 그는 행차 도중여러 방식으로 불교를 지원했다. 세조는 이런 제반의 개인적·정치적 목적을 품고 온정리온천을 향하여 금강산으로 떠났던 것이다. - P75

오랜 세월을 같이 있어도
기억 속에 없는 이 있고
잠깐 만나도 잠깐 만나도
심장 속에 남는 이 있네.
아, 아! 그런 사람,
나는 귀중해, - P87

아, 아름다워라, 금강송이여
외금강 탐승의 양대 코스, 만물상과 구룡폭 어느 쪽을 먼저 가든 우리가 금강산 초입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놀라움과 기쁨은 아름다운 솔밭이다. - P91

금강송(金剛松), 흔히 금강산 미인송으로 칭송되는  이 소나무는 이제까지 우리가 보아온 소나무와 너무도 다른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하늘을찌를 듯 곧게 뻗어올라간 줄기는 붉은 기를 머금은 채 짙은 나뭇빛을 발한다. 곁가지도 없이 족히 20미터를 치솟은 미인송은 하늘가에서만 연둣빛 솔잎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을 뿐이다. 한여름 습기를 잔뜩 머금어 붉은 줄기에 윤기가 흐를 때면 늘씬한 각선미를 자랑하는 미인이 알몸으로부끄럼을 빛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그 고고한 귀티엔 한 점 속기(俗氣)도 없으니 청신하다고는 할지언정  요염하다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 P91

이것은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와 전통의 문제인 것이다. 아무 까닭 없이 산길을 따라 금강산 바위와 계곡의 수려함과 기이함만 바라보고다니는 것과 산과 더불어 역사의 자취를 느끼며 탐승하는 것은 엄청난감동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 P102

금강산 관광을 다녀온 사람들 가슴에 무엇인가 허전하게 느껴지는 것은 탐승길에 그런 문화유산이 없기 때문이다. 빈터일망정 신계사에 들르는 일도 없고, 이 세상을 바로잡고 아름답게 가꾸려고 애썼던 인간의 이야기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 P102

"어디서 오셨는고?"
"유점사에서 왔습니다."
"그래, 유점사에서 여기까지는 몇 걸음에 왔는고?"
"예?"
"유점사에서 여기까지 몇 걸음에 왔냐고 물었네." - P104

"아, 예・・・・・・ 바로 이렇게 왔습니다."
그러고는 효봉은 방을 한 바퀴 삥 돌아 앉았다. 느닷없는 질문에 서슴없는 행동으로 답한 것이다. 이에 석두스님은 흡족해하며 이렇게 말했다.
"어쭈, 제법이다. 그대는 오늘부터 내 웬수로다." - P105

"잘들 놀았군, 금강산 귀뚜라미들!" - P107

오선암 유감
해방 전, 금강산 탐승에서 옥류동·구룡연(九龍淵) 코스는 신계사를 기점으로 해서 오선암(五仙巖)까지를 등산의 초입으로 삼았다. 신계사에서신계천을 따라 송림을 헤치며 걷다보면 ‘배소고개‘라는 낮은 언덕을 넘게 되는데, 언덕마루에서 신계천을 내려다보면 마치 배 모양 같은 큰 못이 있어 이를 배소, 선담(潭)이라고 했다. - P109

글발의 내력은 그렇게 이루어진 것이지만 ‘지원‘이라는 말 자체의 내력은 그보다 더 옛날로 올라간다. 이 말은 삼국지(三國志)』에 나오는 제갈량(諸葛亮)이 자신의  서재에 써서 걸어놓은 글에서 따온 것이다. 그 원문은 "담박명지(澹泊明志) 영정치원(寧靜致遠)"이다.  "맑은 마음으로 뜻을 밝히고, 편안하고 고요한 자세로 원대함을 이룬다." - P118

이 글귀는 이후 큰 뜻을 품은 사람, 비장한 각오를 한 사람들에게는 항시 마음에 새기는 글로 기억되어 안중근(安重根) 의사가 뤼순감옥에서쓴 글씨도 있고,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이 쓴 글씨도 남아 있다.  한때 비디오가게에 가면 빌릴 수 있었던 삼국지 40부작 중 ‘삼고초려(三顧草廬)‘편을 보면 제갈량의 서재에  이 글씨가  씌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글의 정확성을 위하여 이 글의 원문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P118

맑은 마음이 아니면 뜻을 밝힐 수 없고
마음이 편하고 고요하지 않으면 원대함을 이룰 수 없다.
非澹泊 無以明志 非寧靜 無以致遠 - P118

우리는 그만 상팔담으로 가자고 했다. 상팔담은 금강산 탐승의 절정으로 교과서에 나오는 전설 「나무꾼과 선녀의 고향이다. 구룡폭에서 상팔담을 내려다보는 구룡대(九龍臺)까지 800미터, 철사다리 14개에 370계단을  올라야 한다. - P120

금강문을 나서며 눈을 들다가는 문득 ‘에쿠‘ 소리를 질렀습니다. 석두(石竇) 하나를 지내 나온 것일 뿐이어는  광경이 어찌 이다지도 틀렸으리까? 얼른 말하면 문밖까지의 그것은 꺼풀 금강산임을 깨닫고 놀라는 줄 모르고 놀란 것입니다. 금시에 좋아져도 무척 더 좋아졌습니다.
아주 평범한 글 같지만 이렇게 서슴없이 "에쿠" 소리를 문장 속에 쓸수 있는 것이 역시 대가의 솜씨인 것이다. 그는 삼일포 봉래대(蓬萊臺)에올라서는 그 경관이  너무 시원해서 "이히 소리를 질렀다"고 천연덕스럽게  쓰기도 했다.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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