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세상일은 대중이 없고 사람 일은 맘같이 안되는 법인 줄 익히 알고 있지만 내가 이렇게 금강산 답사기만으로 ‘나의 북한 문화유산답사기 두번째 권을 펴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본래 이 책은 앞권에 이어 지난 1998년 7월에 있었던 보름간의 나의 두번째 방북답사기로 엮어낼 계획이었다. 그 내용은 이미 중앙일보』 1998년 8월 15일자부터 1999년 2월 27일자까지 총 28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그러나 이 글을 다듬고 보완하는 과정에서 나는 금강산 답사기를 새로 집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 P10

천하의 금강산도 역시 "아는 만큼 보인다"는 법칙에서는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금강산에 대한 예비지식이 없는 분들은 지금 우리에게 열린금강산 탐승길이 금강산의 22개 명승구역 중 3, 4코스에 불과하고, 옛사람들의 금강산 탐승 자취는 아직 공개되지 않은 내금강 만폭동(萬瀑洞)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 그것은 그분들을 위해서도 금강산의 명예를 위해서도 안타까운 일이었다. - P11

그러나 예부터 금강산은 "서부진(書不盡畵不得)"이라고 해서 "글로써 다할 수 없고  그림으로도 얻을 수 없다"고 했으니 걱정이 앞선다. 하지만 바로 그 이유로 나는 적이 안심도 된다. - P11

금강산을 통하여 우리들의 가슴속에 국토에 대한 자랑과사랑을 더욱 드높이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리고 나처럼 금강을 예찬하는 사람이 많이 나왔으면 정말 좋겠다. - P13

금강산은 ‘조선심(朝鮮心)‘의 상징
꿈에나 가본다는 것조차 꿈같이 생각되던 금강산에 우리가 정말로 가고 있다. 이런 것을 일러 꿈같은 현실이라고 하는 것인가.
분단 50년간 막혀 있던 금강산이 우리에게 이렇게 갑자기 열릴 것이라고 예상했던 사람이 몇이나 될까? 또 이런 방식으로 남북이 협력 교류하면서 북녘 땅의 일부분이 남한사람의 일상 속으로 돌아올 수 있으리라상상이라도 했던 사람이 과연 있기나 할까? 모든 것이 얼마전만 해도 꿈도 꾸지 못한 꿈같은 현실인 것이다. - P19

나는 무엇이, 무엇이 이런 민족사적 대전환을 가능케 하였는가를 곰곰이 생각해본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자본의 논리에서 시작되었다. 북한은북한대로 남한은 남한대로 금강산을 남쪽에 개방하여 얻어낼 직접, 간접의 경제적 이득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아니었다. 그것을 가능케 한 충분조건은 금강산의 전설적인 아름다움이었다. 금강산이 아니라면 이 프로젝트는 애당초 발상조차 나올 수 없었던 것이다. - P20

금강산! 그것은 한민족으로 태어난 자의 가슴속에 거의 유전적으로 전래된 동경의 대상이다. 금강산의 아름다움이란 그저 미답(未踏)의 세계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라 민족의 역사와 함께 조상들의 끊임없는 순례와예찬이 거듭되면서 마침내는 생래적으로 간직하게 된 한민족의 가장 큰사랑이고 자랑인 것이다. - P21

그러다 금강산에 대한 동경심을 더욱 키운 것은 정비석(鄭飛石, 1911~91)의 산정무한(山情無限)에서였다.  대학입시 국어시험 공부를 위해 반강제로 읽히던 이 낭만의 기행문은 아주 어려운 한자들로 수험생들을 어지간히 골탕먹였지만 딱딱한 교과서체 문장에 지쳐 있던 젊은이들에게청신한 바람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 P23

미문(漢文)은 독자로 하여금 그 글이 노래한  대상을 더욱 사랑스럽게느끼게 만드는 미덕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 글에서 내 기억에 강하게 남은구절은 이상하게도 금강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것보다도 그 아름다움을보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말한 것이니, 역시 금강에 대한 그리움이란 볼수 없는 대상에 대한 동경 때문인지도 모른다 - P23

정선의 금강전도 
종이에 수묵담채, 130.7×94.1cm, 1734년(53세), 삼성미술관 Leeun 소장, 마치 헬리콥터를타고 항공촬영하듯 금강산 1만2천봉을 한 화폭에 포착한 이 그림은 그림이 사진보다 더 감동적인 예술일 수 있음을웅변으로 말해준다. - P24

결국 진경산수는 국토에 대한사랑 없이는 나올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고 겸재와 단원의 금강산 그림은 "아! 아름다워라, 조국 강산이여!"라는 조국애의 다른 표현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그래서 조선후기금강산 그림들이 보여준 사실주의는 곧 ‘민족적 사실주의‘였다고 말할수 있는 것이다. - P26

일찍이 송나라 시인이 노래하기를 원컨대 고려국에 태어나 한번만이라도 금강산을 보았으면‘이라고 했답니다.

그것이 금강예찬의 백미라는 그 유명한 ‘원생고려국(願生高麗國) 일견금강산(一見金剛山)‘이다. 여기서 일견(一見)이  『조선왕조실록』에는 친견(親見, 직접  보았으면)이라고 씌어 있었는데, 훗날 어느 문사가 이렇게멋지게 바꾸어놓은 것이며, 이 문구를 소동파(蘇東坡)의 글로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 P28

1926년 당시 스웨덴의 황태자인 구스타프(Gustav VI Adolf, 1882~1973)가 신혼여행으로 일본을 거쳐 한국에 왔을 때 고고학에 관심이 많은 그는 경주의 서봉총(瑞鳳塚) 발굴에  참여하여 왕관을 직접 꺼내는 영광과 행운을 얻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금강산의 비경을 탐승하고는 감격하여 "하나님이 천지창조를 하신 엿새 중 마지막 하루는 오직 금강산을 만드는 데 보냈을 것 같다"고 찬미했다. 이를 능가하는 찬사가 또 있을까? - P29

"얘, 얘, 이제까지 우리가 본 산은 그저 돌덩이 흙덩이였더라. 너도여름에 늬 신랑하고 가봐라." - P36

"금강산의 아름다움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다." - P36

금강산은 통일산, 동해항은 통일항
금강산 관광선의 역사적 첫 출항을 기다리는 동해시 곳곳에는 "금강산은 통일산, 동해항은 통일"이라는 표어가 붙어 있었다. 그리고 현대금강호의 첫 출항은 북녘 하늘, 북녘 땅에 갈 수 있는 날만을 기다려온 ‘실향민의 배‘였다.  50년 만의 금강행이란 단순한 관광이 아니라 분단으로 인해 넘어갈 수 없던 땅에 내딛는 첫걸음이라는 엄청난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으며, 그것을 몸으로 실감케 하는 것은 실향민의 마음이었다.
첫 출항의 승객을 보면 실제로 취재, 글, 그림, 사업정보차 온 승객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실향민이었고, 모든 이의 관심 또한 금강산 못지않게실향민들에게 있었다. - P37

경북대 불문과 임진수 교수는 생각을  달리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어쩌면 사회주의체제가 낳은 문화현상인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고대 그리스의 유머라는 것을 보면 아테네가 아니라 오히려 스파르타에서 많이 나왔답니다. 질서가 꽉 짜여 있을수록 카타르시스를 위한 농담과 유머가 발달하는 법이니까요." - P45

"어머니, 저희가 왔습니다. 지금 살아계십니까, 돌아가셨습니까? 살아계시면 살아계신 대로 돌아가셨으면 돌아가신 대로 절 받으십시오." - P51

"어머니, 저 갑니다. 어머니, 이제는 오고 싶으면 또 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명년 봄엔 손주도 데리고 오겠습니다."
그러고는 하늘이 꺼져라 "어머니를 부르며 내 발아래로 주저앉았다. 그것은 내가 현대금강호에서 마지막으로 들은 ‘어머니‘ 소리였으며또 첫날 복도에서 들은 어머니 소리와 같은 것이었다. - P52

그러니까 이칠순 실향노인들이 50년 만에 어려서 뛰놀던 빈 고향에돌아와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는 오직 ‘어머니‘ 한마디뿐이었다.
나는 할머니를 부축하여 모시고 갑판을 돌아 선실로 들어왔다. 이윽고장전항밤바다에는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었다. - P52

동해시는 묵호와 북평
옛말에 "금강산 가듯 한다"는 속담이 있다. 벼르고 벼르면서 정작 시행하지 못하는 모습을 이르는 말이다. 그 속담조차 분단 50년간 우리의 뇌리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었는데 모르면 몰라도 지금 ‘금강산 가득‘ 좀처럼 금강산에 가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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