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건가. 아빠이면서 아빠가 아니다. 남편이면서 남편이 아니다. 게다가 발기조차안 된다. 즉 남자이면서 남자도 아니다.
한심해서 마음이 파르르 떨렸다.

"현장 일을 오래하다 보면 괜히 승진할 거 없다는 생각이 들지." 나카오가 말했다. "승진이라고 해봤자 기껏해야 팀장이잖아. 거기서 더 올라가면 잔업 수당도 없어지고 업무는 갑작스럽게 홱 바뀌고, 좋을 게 하나도 없는 거같아."
"응, 맞는 말이야." 헤이스케는 솔직히 말했다.
"근데 그건 어쩔 수 없어." 나카오는 종이컵 안을 빤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회사라는 게 인생 게임이더라고. 회사에서 승진한다는 건 인간이 나이 드는 것과 똑같아. 승진하고 싶지 않다는 건 나이 들고 싶지 않다는 거야."
"그런가"

"누구든 언제까지나 어린애로 살고 싶지. 그냥 바보인 척하고 싶은 거야. 하지만 주위에서 그걸 인정해주지 않더라고. 너는 이제 아빠니까 정신 똑바로 차려, 너는 이제 할아버지니까 점잖아져, 라는 식이야. 아니요, 나는 그냥 한 남자일 뿐이올시다, 라고 해봤자 아무도 봐주지를 않아. 아이가 생기면 아빠고, 손자가 생기면 할아버지야.
그 사실에서는 도망칠 수가 없어. 그렇다면 오로지 나는 어떤 아빠가 될 것인가, 어떤 할아버지가 될 것인가를 생각해보는 수밖에 없는 거 아니겠어?"
내가 이런 소리를 하는 것도 주제넘지만, 이라고 나카오는 덧붙였다.
"나카오 씨, 항상 그런 걸 생각해?"
"에이, 설마. 언뜻 생각나서 해본 말이야. 장남으로서."
"장남?"
"응, 팀장은 장남, 계장은 아버지, 과장은 할아버지야. 그보다 윗자리는ㆍㆍㆍㆍㆍㆍ 뭔지 잘 모르겠으니까 그냥 죽은 사람이라고 할까?" 나카오가 비어버린 종이컵을 쓰레기통에획던지며 말했다.

"세계가 달라." 별수 없이 헤이스케는 말했다. "나와 우리 딸이 사는 세계와 네가 있는 세계는 완전히 다르단 말이야. 그래서 사귄다고 해도 잘될 수가 없어."

"그이가 나한테 그랬어요. 지금 후미야에게 필요한 것은 아버지다. 엄마 형편이 어렵다는데 아버지인 내가 어떻게든 해줘야 할 거 아니냐………. 그래도 당신이 친아버지도 아닌데, 라고 했더니, 그러면 후미야 입장에서 더 행복한 건 어느 쪽이냐고 묻더라고요."

"친아버지가 내가 아닌 게 더 행복한가. 아니면 아버지는 나라는 것으로 해두는 게 더 행복한가. 그 둘 중에 어느 쪽이냐는 거예요. 내가 한참 생각해보다가 그야 당신이 아버지인 게 더 좋다고 대답했어요. 그랬더니 그이가말하더군요. 거봐, 그렇잖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앞으로도 나는 후미야의 아버지로 남기로 했다. 후미야가 힘든 상황이라면 아버지로서 그 고비를 넘도록 도와주고 싶다…………. 예전에는 후미야가 내 핏줄이 아니라는 말

나오코………….
당신, 아직 사라지지 않은 거야? 단지 사라진 척했던 것뿐이야?
헤이스케는 처음으로 모나미가 나왔을 때의 일을 떠올렸다. 그 전날, 헤이스케는 한 가지 결심을 했었다. 그녀를 모나미로만 대하고 나는 오로지 아빠가되자고 결심했었다. "모나미"라고 부르는 것으로 그런 자신의 의지를 표했었다.
그런 의지를 마주하고 나오코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남편이 어떤 각오를 했는지 깨닫고 분명 그녀도 한 가지 결단을 내렸던 게 아닐까.
모나미가 살아 돌아온 것처럼 하고, 앞으로 계속 모나미로 살아가자, 라고,
하지만 그건 갑작스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한 가지 방법을 선택했다. 그것이 나오코를 조금씩 지워간다는 것이었다.
9년 동안…………. 그녀가 연기를 계속해온 햇수다. 그것을 그녀는 죽을 때까지 이어갈 마음인 것이다.

야마시타 공원에서의 일이 생각났다. 그날은 나오코가 사라진 날이 아니라 그녀가 나오코로서 사는 것을 완전히 포기했던 날이었던 게 아닐까. 모나미로서 눈을 뜬 뒤에 큰 소리로 엉엉 울었던 것은 자기 자신을 내버린 슬픔의 눈물이었던 게 아닐까.
나오코, 당신은 아직 살아 있는 건가………….

"와아, 예쁘다! 예쁘다는 말밖에 달리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어." 그리고 헤이스케를 보았다. "그렇죠, 아버님?"
"그딴 건 30년 전부터 알고 있었어." 헤이스케는 말했다. "그보다 후미야, 잠깐 이리 와봐."
"네, 무슨 일이신지."
후미야를 다른 대기실로 데려갔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헤이스케는 이제 곧 모나미와 결혼할 놈의 얼굴을 보았다. 바짝 긴장한 얼굴이다.
"내가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네, 말씀만 하십쇼."
"별로 어려운 거 아니야. 흔히들 얘기하잖아. 신부아버지가 신랑에게 꼭 하고 싶다는 거. 그걸 나도 하게 해줬으면 하는데."
"예? 그게 뭔데요?"
"이거야." 헤이스케는 주먹을 후미야 앞에 내밀었다. "좀 맞아줘."
"예?" 후미야의 몸이 흠칫 뒤로 젖혀졌다. "지, 지금 여기서요?"
"안 되겠나?"
"아, 아뇨, 이것 참, 어떻게 하지, 지금 사진도 찍어야 하는데." 후미야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이윽고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저렇게 아름다운따님을 데려가는데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요. 한 대, 기꺼이 맞겠습니다."

"아니, 두 대야."
"두 대요?"
"한 대는 딸을 빼앗긴 몫이고, 또 한 대는………… 다른 한 사람의 몫이야."
"다른 한 사람……...."
"뭐든 됐어. 눈 꽉 감으라고."
헤이스케는 주먹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하지만 그 주먹을 휘두르기도 전에 눈물보가 터져버렸다. 그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얼굴을 가리고 목이쉬도록 꺼억꺼억 울었다.

《비밀》을 쓰기까지 나는 장편을 1년 넘게 출간하지 못했다. 당연히 서평가들은 한동안 나를 다뤄주지 않았다. 하지만 《비밀》은 오랜만에 내는 장편소설이고 내용도 내용인지라 서평가들이 언급해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라는 내 나름대로의 계산이 있었다. 실제로 여기저기서상당히 이 작품을 얘기해주었다. 결과적으로 많은 독자들에게 받아들여져서 나에게는 자타 공히 인정하는 터닝 포인트 작품이 되었다. 방향을 전환해서 인간의 마음을 써보자, 라고 내내 고심했던 것이 <비밀>에서 결실을 맺었다. 솔직히 다행이다. 라고 생각했다. ‘
-<야성시대> 2006년 Vol.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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