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 탐사는 틴 성당에서 시작했다. ‘구시가‘ 한복판 언덕에 있어서 첨탑이 시내 어디서나 보일 뿐 아니라 여행안내서에 나오는 명소들이 근처에 몰려 있기 때문에 달리 선택할 여지가 없었다. 외관은고딕 양식이고 내부는 화려한 바로크 스타일로 치장한 틴 성당은 프라하의 자랑이다. 바티칸의 베드로 성당에 비하면 오래되고 아담한시골 성당‘에 지나지 않지만, 그 옛날 프라하에서는 그 정도 규모 성당을 짓는 일도 버거웠다. - P172

그런데 천문학자 티코브라헤(Tycho Brahe, 1546-1601) 의 관은 특이한 존재였다. - P174

브라헤는 덴마크 사람이고 또 과학자였는데 왜 여기 묻었을까? 그가 합스부르크제국 황제 루돌프 2세의 초대를 받고 프라하에와서 생애의 마지막 두 해를 보냈기 때문이었다. - P175

브라헤는 망원경이 없던 시대에 천문학자로 활동하면서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정교한 관측 자료를 작성했다. 브라헤의 조수였던 요하네스 케플러 (Johannes Kepler, 1571-1630)는 그 자료를 활용해 태양계 행성의 타원형 궤도, 공전속도, 공전주기에 관한 이론을 정립함으로써 보편적 물리법칙을 세운 뉴턴 (Isaac Newton, 1642-1727)의 시대를 예비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었던 가톨릭의 세계관을 무너뜨린 외국인 과학자를 왕실 성당에 안장했으니, 프라하 사람들은 확실히 남다른 데가 있었다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 P175

체코공화국은 인구는 2020년 기준 1,100만 명에 조금 못 미친다.
국민 대부분이 체코인이며 소수의 모라비아인과 슬로바키아인, 독일인과 집시가 거주한다.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연방공화국을 형성했으며 사회주의체제가 붕괴하자 슬로바키아가 분리 독립했다. 종교는로마 가톨릭이 강세이지만 무신론자가 국민 절반이나 된다. - P178

슬로바키아(동), 독일(서), 오스트리아(남), 폴란드(북)에 둘러싸인 내륙 국가로 국토는 대한민국의 3/4 정도이고 1인당 국민소득은 2만 5천 달러에 육박한다. 화폐는 ‘코루나‘이지만 프라하에서는 큰 불편 없이 유로화를 쓸 수 있었다. 체코의 전통산업은 농업과 목축업이었으나 19세기부터 철강·기계·전기·자동차·화학·의류 등 제조업이 꾸준히발전했다. 인구 130 만 명인 프라하는 제조업과 관광업·문화산업의중심으로서 국내총생산의 25%를 차지하며 1인당 역내총생산(GRDP)이 5만 달러나 된다. 맥주와 유리공예품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경제적으로 중요하진 않다. - P179

나는 얀 후스를 존경한다. 후스를 모른다고 해서 프라하 여행에지장이 생기진 않지만 알면 프라하의 공간과 체코 사람들의 정서를더 깊게 이해할 수 있다. 고등학생 시절 세계사 교과서에서 얀 후스(Jan Hus, 1372-1415) 라는 ‘종교개혁가‘의 이름을 처음 보았다. 그렇지만후스가 그저 종교개혁가로서 프라하의 광장에 서 있는 건 아니다. 후스의 동상은 보헤미아 민족주의와 더 나은 세상에 대한 민중의 열망을 담고 있다. 그는 스스로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았고 죽음 앞에서도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그럴 의도가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의 삶과 죽음은 보헤미아와 유럽의 역사를 바꾸었다. - P181

후스는 프라하를 떠나 시골에 머물며 논문을 쓰다가 함정에 빠져독일 남부 콘스탄츠에서 붙잡혔다. 지하 감옥에서 고문을 당했고 종교 법정에 끌려나갔지만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1415 년 마지막 숨을내쉬는 순간까지 큰 소리로 기도하면서 화형을 당했다. - P183

후스의 영향력은 죽은 뒤에 더 커졌다. 보헤미아에 ‘후스파‘라는정치결사가 출현해 낡은 질서에 반기를 들었다. 1419년 7월 30일 유명한 사건이 일어났다. 급진 후스파 군중이 시청사에서 시장과 판사를 포함해 보헤미아왕의 신하 일곱 명을 창밖으로 던지 죽인 것이다.
천문시계를 보려고 온종일 관광객이 모여드는 바로 그곳에서 벌어진 그 사건을 ‘제1차 프라하 창문투척사건‘이라고 한다. - P183

"영성체 의식때 일반 신도들이 신부와 같이 빵과  포도주를 먹게 하라. 설교의 자유를 인정하라. 교회 재산을 몰수하고 정치 개입을 금지하라. 사제도범죄를 저지르면 처벌하라." - P184

전쟁의 성격을 규정하기 어려운 탓에 그저 ‘30년전쟁‘
이라고 하는 그 국제전은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으로 끝이 났고 유럽의 봉건체제는 막을 내렸다. - P185

베스트팔렌조약은 종교 선택의 자유를 인정했다. 루터파와 칼뱅파를 비롯한 개신교가 국제적 공인을 받았고 신성로마제국에 속했던국가들이 저마다 영토주권과 외교권을 확보했다. 독일의 패권이 무너져 프랑스가 알자스 지방을 차지했고, 스웨덴은 발트해 연안 지역을 획득했으며, 네덜란드와 스위스가 독립했다. 유럽에 국민국가의시대가 열린 것이다. 보헤미아 민족주의에 불을 질렀던 얀 후스의 사상은 공화국의 시대가 된 지금도 보헤미아 민중의 가슴에 흐르고 있다. 눈길 주는 이가 별로 없는 얀 후스의 동상 앞에서 나는 잠시 옷깃을 여미고 예를 갖추었다. 부당한 특권을 누리며 민중을 억압하고 부패를 저질렀던 종교권력을 향해 날 선 비판을 퍼부었고 민중과 소통하려고 체코 말로 설교했던 그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 P185

프라하 구시가는 ‘성(聖)과 속(俗)의 칵테일‘이다. 사람이 지닌 모든 종류의 욕구와 소망과 신념을 다 품어준다. 종교건축물이 많아서겉보기에는 ‘성스럽다.‘ - P188

그래서 ‘보헤미안‘이라는 말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보헤미아인에 해당하는 체코 말은 ‘체키‘인데 뜻은 정반대에 가깝다. ‘체키‘는 슬로바키아인이나 모라비아인 같은 소수민족을 제외한 보헤미아의 체코인을 가리키는 체코 말이고, ‘보헤미안‘은 독일인과 집시를 비롯해체코인이 아닌 보헤미아 사람을 지칭하는 외국어였다. 그런데 19세기 후반 보헤미안의 뜻이 달라졌다. - P188

유럽 사회의 주류로 지위를 굳힌부르주아 계급의 틀에 박힌 도덕 규범이나 행동 양식을 거부하고 스스로 선택한 가치관에 따라 자유분방하게 활동하는 지식인과 예술가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주로 시인·소설가. 화가. 음악인이었다. - P189

보헤미안은 사회의 지배적인 규범과 관습을 추종하지 않았다. 스스로 옳고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에 대한 열정을 표현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일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 했다. 생계 불안과 사회적편견에 굴복하지 않는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였다. 1960년대 서구사회에 강력한 문화적 충격을 주었던 히피(hippie)는 긴 머리카락과제멋대로 기른 수염, 미니스커트, 맨발, 샌들, 대마초 같은 것으로 자신의 내면을 드러냈다. 다음 세대인 여피(yuppie, Young Urban Professionalhippie)는 고학력 고소득 전문직에 종사하면서 명품과 사치품을 과시적으로 소비했다. 디지털혁명 시대를 선도해 엄청난 부와 명성을 얻었지만 색바랜 청바지와 낡은 가방을 들고 다녔던 이들은 보보스(bobos, Bourgeois Bohemians) 라고 한다. 모두가 보헤미안의 새로운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 P189

프라하성지구에는 해마다 관광객이 2백만 명이나 오는데 이 골목을 그냥 지나치는 이는 드물다. 뭐 대단한 게 있어서가 아니다. 파리의 몽마르트르 언덕처럼 이곳도 주거환경이 나빠서 임대료가 저렴해 가난한 사람들이 살았는데 예술가 또는 예술가의 지인이 더러 섞여 있었다. 황금골목을 관광의 핫플레이스로 만든 사람은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다. 1916년 카프카의 누이 하나가 골목의22번 집에 세를 들었는데 그해 겨울 동안 카프카가 머물면서 글을 썼다. - P220

카프카가 오늘의 황금골목을 본다면 뭐라고할까? 당황스러워서프아무 말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의 인생을 생각하니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을 볼 때보다 더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독일어를 쓰는라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난 카프카는 평생 불운과 고독에 짓눌리며 살았다. - P221

다. 한때 연인이었던 도라 디아만트에게 맡긴 원고와 편지는 나치 비밀경찰이 빼앗아 없애버렸다. 전기작가이자 절친이었던 막스 브로트가 카프카의 글을 출간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의 존재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 P221

카프카는 《변신》·《유형지에서》·《심판》·《성》 같은 작품을 삼십 대에 썼다. 그는 자신의 글이 인간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부수는 도끼가 되기를 바랐다. 카프카의 작품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가 자신의 의도를  초지일관 밀고 갔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 P221

위대한 작품을 남겼으나 외로움과 고통으로 얼룩진 인생을 살았던 사람, 그 사람이 머물렀다는 것 말고는 아무 특별함도 없는 곳에서 지구 곳곳에서온 관광객들이 해맑게 웃으며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카프카가 옳았다. 우리의 삶과 우리가 만든 세상은 역설과 부조리로 가득하다. - P223

강탈한 범죄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보헤미아 민중은 그를 농민들을지켜준 의인으로 평가했다. 탐관오리 조병갑, 고부 민란, 동학혁명,
녹두장군 전봉준이 떠올랐다. 이 사건이 두고두고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는데, 드보르작과 더불어 체코의 국민음악가로 사랑받는 스메타나 (Bedrich Smetana, 1824-1884)의 오페라 <달리보르>가 대표 사례라할 수 있다. - P223

달리보르카에 전시해둔 고문도구,
달리보르와 직접 관련되었는지 여부는 모른다. - P224

스트라호프 스타디움 사이클 경기, 군인체육대회를 열었다. 체제 전환 직후였던 1990년의 롤링 스톤즈 콘서트에는 10만 관객이 모였고 본조비, 핑크 플로이드, U2도 공연을 했다.  - P238

프라하 자체는 대단했다. 프라하는 역사의 상처를 감추지 않았고, 그상처 때문에 고통스러워하지도 않았다. 지난날의 상흔은 지난 일로정리하고 오늘은 오늘의 즐거움을 추구한다. 그렇게 하려고 성과 속의 공존을 허락한다. 프라하의 공기는 자유와 관용의 정신을 품고 있는 듯했다. ‘심하게 지나치지만 않다면 뭘 해도 괜찮아. 사람들이 프라히를 좋아하는 것은 이렇게 말하는 도시여서가 아닌가 싶었다. - P241

가해자의 상처
드레스덴은 한국에 널리 알려진 도시가 아니었다. 2014년 3월 박근혜 대통령이 드레스덴 공대에서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구상>이라는 강연을 했을 때 이름을 처음 들은 이가 많을 것이다. 그 선언의 내용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달리 할 수 있겠으나 장소 선정만큼은 이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좋았다고 생각한다. 전쟁을 종식하고평화를 이루자는 호소를 하기에 드레스덴만큼 적절한 도시를 찾기는어렵기 때문이다. - P247

영국과 미국 공군은 1945년 2월 13일 밤부터 사흘 동안 네 차례번갈아 드레스덴을 ‘융단폭격‘했다. 그때마다 고열의 화염폭풍이 도심을 집어삼켰다. 군수품 공장과 기차역뿐 아니라 주택 · 상점 · 호텔 · 술집 · 교회 · 성당. 병원 · 오페라하우스 · 영화관 · 동물원 · 학교 · 엘베강의 선박까지 도심 반경 3킬로미터 안에 있던 모든 것이 터지고 녹고 부서지고 불탔다. 사망자만 20만 명이라며 연합국을 비난한 나치 정부가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다. 그 폭격의 사망자와 부상자가 몇인지는 정확하게 말할 수 없다. 전쟁이 끝나고 여러 해가 지난 뒤에도 무너진 건물에서 시신이 나왔고 지하 방공호 한군데서 1천여 명의 시신을 찾은 일도 있었다. 체코 접경지 수데텐란트(Sudetenland, 보헤미아의 독일 국경 인접 지역)에서 쫓겨나 드레스덴에임시 거처를 마련했던 피난민들은 거주자 통계에 잡히지도 않았다.
당시 시신을 수습한 사망자만 3만5천 명이 넘었다. 독일이 ‘엘베의 피렌체‘라고 자랑했던 드레스덴에는 공장 몇 개 말고는 전쟁과 관계있는 시설이 없었는데도 연합국 공군은 엄청난 양의 폭탄을 투하했다. - P248

드레스덴 폭격 50주년인데도 독일 정부는 희생자 추모 행사를하지 않았고 텔레비전 방송은 짤막한 뉴스만 내보냈다. 기사를 보여주며 물어보았더니 독일 친구가 나지막이 말했다.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내놓고 말하지 않는 사건이야. 우린 그보다 더 못된 짓을 훨씬많이 했거든. 홀로코스트만 있었던 게 아니야. 코번트리(Coventry) 같은 곳도 한두 군데가 아니었어. 혹시라도 그 사건 가지고 막 떠드는사람 만나면 조심해야 해. 올드나치거나 네오나치일지 모르니까." - P248

코번트리는 잉글랜드 내륙의 작은 도시다. 재규어를 비롯한 고급 승용차 공장이 있어서 전쟁 때 군수물자를 생산했다. 1940년 11월 14일밤 독일 공군이 코번트리를 폭격해 수천 명의 민간인을 살상했다. 코번트리 시민들은 그때 완전히 무너진 중세 성당을 그 상태로 보존하고 바로 옆에 새 성당을 지었다. 드레스덴은 ‘가해자의 몸에 남은 상흔‘이었다. 독일 사람들은 그 상흔을 남몰래 만질 뿐 드러내 보이지않으려 했다. - P249

속도는 공간을 말살한다 - P252

집은 건축주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한다. 종교 건축물도 마찬가지다. 건축양식은 건축기술의 발전, 활용할 수 있는 건축자재의 변화,
건축주가 동원할 수 있는 재정의 규모 등 여러 요소의 영향을 받는다. 건축주의 철학과 욕망도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 - P258

원래 성당이었던 이스탄불의 아야소피아 박물관은 웅장하고 아름답다. 그러나 중세유럽의 대세였던 고딕 양식 성당들은 그렇지 않다. 높고 날카로운 첨탑과 장중한 스테인드글라스로 ‘경외심‘ 또는 ‘공포감‘을 강요한다. 고딕 양식은 가톨릭교회가 세속권력과 결탁하거나 스스로 세속권력을 능가하는 권력이었던시대의 지배적 건축양식이다. 그들이 그런 집을 지은 것은 민중이 그곳에서 두려움을 느끼며 복종하기를 원해서였을 것이다. - P258

성모교회, 벽면의 검은 점은 폭격을 맞은 돌이다. - P261

그 집들은 사회주의체제의 문화 유전자를 지닌 ‘화석‘이었다. 집은 지은 사람의 철학과 건축 시점의 사회경제적 상황에 관한 정보를담고 있다. 동독의 사회주의자들은 ‘계급 착취의 철폐‘ ‘만인의 평등‘
‘인민의 주거 안정‘을 중요한 가치로 여겼고 ‘자유‘ ‘개성‘ ‘예술적 취향‘ 같은 것은 없애야 할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로 취급했다. 게다가소련군의 보호를 받으며들어선 동독 정부는 돈이 없었다. 이런 철학과 환경은 동독의 모든 도시에서 동일한 ‘건축학적 변화‘를 강제했다.
최소 비용을 들여 인민에게 최대 주거 공간을 제공하는 데 적합한 고층 아파트를 지은 것이다. - P267

두 번째 밤을 지내고 드레스덴을 떠나왔다. 빈·부다페스트 · 프라하처럼 아름답거나 볼거리가 많지 않았는데도  드레스덴은 오래 마음에 남았다. 독일 변방의 작은 도시지만 문명사의 여러 시대와 그시대를 이끌었던열망, 그 열망이 부른 참혹한 비극, 그 참극을 딛고이루어낸 성취를 품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게 보면드레스덴은 작지 않다. 어마어마하게 크다. - P312

성모교회는 종교적 신념과 열정이 삶의 동력이 되었던 시대의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자유를 허락받았던 바이마르공화국 시대의 드레스덴은 문화예술을 꽃피웠지만 나치의 전체주의 폭력에 숨이 막혀 쓰러졌고연합군의 폭격에 생명이 끊어졌다. 공산주의자들이 그 폐허 위에 세운 공동주택과 문화궁전은 신념의 무모함과 열정의 허망함을 증언하고 있었다. 재통일을 이루어 독일연방공화국 작센주의 수도가 된 드레스덴 시민들은 성모교회를 재건함으로써 부활의 서사를 완성했다. - P312

성모교회는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말을 믿지 마. 너희는 완전한 진리를 알 수 없어. 너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관용뿐이야. 나와 다른 사람, 나와 다른 생각, 나와 다른 삶의 방식을 존중하는 것이지. 그러면 모두가 자유로워질 거야.‘
다시 가면 또 촛불 하나 켜고 기도하고 싶다. 인간의 부족 본능이 과학과 손잡고 저질렀던 야만의 상처가 다 아물기를 관용의 정신이 더욱 널리 퍼져 인간은 더 자유롭고 세상은 더 평화로워지기를! - P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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