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환의 시를 위한 몇 개의 회상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존재할 것 같으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꽃 향기, 열리지 않는 미륵의 세상.
그 아쉬움 속에서 재스민차를 마셨다.
먼 지평으로 몇 마리 낙타가 걸어갔다.
딱딱하게 굳은 빵이 차 향기에 풀어져 나갔다. - P196

마리서사는 스무 살의 박인환이 해방된 삶을 향하여 고개를 내밀고자 했던 이른바 전초기지였다. 당연히 이 전초기지에는 당대의 전위, 시인·소설가·화가·언론인, 혹은 그들의 어린 싹들이 모여들었다. 김광균, 김규동, 김기림, 이한직, 이시우, 김수영, 최재덕(화가)·····….  기타 이름을 알 수 없는 뭇 전위들이 무시로 서점을 출입하였다. - P201

김사인과는 인사동의 ‘평화만들기‘에서만나기로 했다. 그는 한동안 박노해의 어떤 관련성 때문으로 잠수함을 타야만 했다. 사람이 사람과 세상을 사랑하고 아파한 때문으로박해를 받는 시절은 아름답다.  - P203

삶의 양대 본질. 절망과 희망 곁에서 해일처럼 밀려오는  그리움과 슬픔, 분노와 억압의 감정을 고스란히 경험할 수 있으므로, 인간이, 인간성이 무엇인지 뼈끝으로 찍어 바르는 눈물을 경험할 수 있는 절박한 시절이므로. - P204

축복받을진저 모든 새로운 것들이여, 그 탄생이여. 좌익과 우익으로 갈라진 문단이피박 터져라 싸울 때 이들의 선택은 죄가 아니었다. - P205

어떻게 하여서든지 팔리지 않는 잡지와 책을 만들어야지. - P205

불가사의한 것은 언젠가 전쟁은 필히 끝난다는 것이다. 끝나지 않는 것은 전쟁이 아니다. ‘전쟁은 끝난다‘는 명제는 곧 ‘인간은 살아남는다‘ 는 명제로 이어진다. - P208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박인환 <목마와 숙녀> 부분 - P210

‘전차삯 2원 50 전, 칠면조뼈다귀가 들어 있는 꿀꿀이죽 10원, 그야말로 양키 쓰레기 돼지죽이5월 일 때 인환 또한 처음으로 미국이란 존재를 깨우치기 시작했다. - P212

시대성은 명분 이상의명분을 축적할 때가 있다. 그 시대성이 오류로 판명되는 것은 전적으로 뒷날의 일일 뿐.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아름답고 쓸쓸하지 아니한가. 아름다움과 쓸쓸함을 이야기하는것이 꼭 오류이며 퇴폐인가, 우리들의 삶이 역사가 그토록 진한 도덕성과 건강성으로 점철되어 있는가. - P213

나는 걸음을 파고다 극장 쪽으로 옮겼다. 그곳은 3년 전 기형도가 세상을 뜬 곳이다. 그의 나이 서른 살. 그가  죽기전까지 아무도 그의 시 작업을 눈여겨보아주지 않았다. 문화부 기자로서 그는 외롭게 시를 썼다. - P215

박인환은 서른한 살에 세상을 떴다. 과음에서 비롯된 심장마비였다. 죽기 1년 전, 그는 ‘남해호‘ 라는 배의 사무장 자리를 얻어 꿈에 그리던 미국을 다녀왔다. - P216

나는 극장으로 들어가는 계단을 밟았다. 습한 바람 한 줄기가 어디선가 휙 불어왔다. "조지 거슈인의 음악을 듣고 싶어. 그놈의 음악을 들으면 미칠 것 같아." 어디선가 인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선생님, 집에는 아무도 없어요. 가정 방문은 오지 마세요. 저희 집은 너무 멀어요." 기형도의 어린 시절 목소리도 떠올랐다. 문득나는 박인환과 기형도 사이에 어떤 은밀한 연결고리가 존재한다는생각을 했다. 그것이 무엇일까. 피곤하다. 차츰 생각하도록 하자. 나는 심야 프로의 좌석 위에 몸을 푹 주저앉혔다. 3년 전 3월 어느 날의 새벽 기형도처럼. - P217

윤이상의 고향 충무를 찾아서

그리운 통영 바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고기를 잡는 게 아니라
거기에 앉아 있는 일이었습니다.
오로지, 혼자서, 별하늘 아래, 여름 밤하늘에는
무수한 유성이 떨어져 내렸습니다. - P174

모든 여행이 혼자라는 것은 여행의 기본수칙이다. 둘 혹은 그 이상이 함께 떠들고 자고 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여행은 아니다. 고독, 우수, 열정, 신비, 설레임, 그리고 자신과의 만남, 그 속에 여행의 진짜 의미가 있다. - P176

그 당시 이곳의 이름은 지금의 충무시가 아닌 통영이었다. 수군통제사가 머문 통제영이 바로 이도시 이름의 연유였다. 임진왜란 당시 가장 큰 한산대첩이 바로 이바다 언저리에서 일어났다. 통제사 이하  많은 수군들이 북적거리면서 자연스레 많은 군수물자의 납품이 필요했는데 나전칠기를 비롯한 유명한 통영12공방은 바로 이 군수공예품 발달의 소산이다. - P181

이곳의 부드러운 공기와 유려한 송림, 맑은 바다 풍경은 루이제린저의 회고에도 잘 나타나 있다. 그녀는 1975년 남한을 방문하고남한 방문기를 썼으며 80년대에는 또한 북한 방문기를 썼다. 서두에서 잠시 이야기했거니와린저와 윤이상의 대담 《상처받은 용》은 예술과 자연과 문화가 지닌 의미가 어떤 것인지 한 편의 섬세하고 눅은 수묵화처럼 우리들의 가슴에 닿아 온다. - P185

공재 윤두서와 다산 정약용을 찾아서

변혁기 지식인의두 초상

백련사의 동백꽃들이 우리를 마중했다.
따뜻한 바람 속에 이따금 떨어지는 붉은 꽃잎들이 감미로웠다.
존경하는 스승을 위해 계율을 팽개치는 물고기를 잡은옛 스님의 자취는 이제 알 수 없다. - P102

첫 곡 들으시겠습니다. 뉴 키즈 온 더 블록, 스텝 바이 스텝, 그리고는 곧장 환호성이 이어졌다. 열광 또 열광, 한 소절이 끝나자 음악이 잠시 멎고 여자 아나운서의 멘트가 이어졌다. 청취자 여러분 중이들의 음악 싫어하는 분 있겠죠? 소동의 원인은 어디 있었을까요?
음악에는 죄가 없습니다. 말이 끝나자 노래와 환호성이 다시 이어졌다. 소동의 원인은 어디 있었을까요? 여자 아나운서의 물음이 귓전을 스친다. - P103

윤두서(1668~1715)는 정약용(1762~1836)의 외증조부가 된다. 윤두서의 손녀가 바로 정약용의 어머니인 것이다. - P109

모기는 일어나고 파리는 잠드니 날이 더울까 두렵고
설익게 누른 보리는 아직 밥 끓일 수 없누나
이웃집 개는 짖고 외상 술빚은 급한데
고을관리 세금독촉하며 깊은밤 대문을 쿵쿵 두드리누나.
- 윤두서 <전가서사> - P112

그것이 윤두서의 ‘초월의지‘ 라는 단정을 내리고 있었다. 마치 오늘날 문학 작품 속의 ‘새‘의 이미지가 그러하듯이 말은 그 당시의 ‘자유의지‘의 상징일 수 있다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보다 광활산 세계 현실적으로는 연경같은로 나아가기 위해서 말은 필요한 존재였으며 특히, 출세길이 막힌 선비로서 그 자신의 꿈을 ‘광활한 초원을 달리는 백마에 비유할 수 있음은 충분히예견되는 일인 것이다. - P116

<시구편>은 <시경>의 한 편명으로 뻐꾸기가 새끼 일곱 마리를 먹여 키울 때 한 마리도 거르지 않고 공정하게 먹이를 주어 기른다는내용으로 ‘분배의 공정성‘을 강조한 것이다. "같은 백성인데 빈부의차가 왜 생겼느냐? 분배의 공평성이 절실하다." 이러한 발상은 봉건왕조의 상황 인식 속에서는 가히 혁명적인 것이라 할 것이다. 소련이 해체되기 전 모스크바에 있었던 동구 경제학자들의 한 연구 단체가 ‘다산학회‘ 였다는 사실은 다산의 이런 관점을 동양 사회주의의한 원형으로 파악하려는 그들 나름의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 P119

한림원 예문관 검열과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언과 홍문관 교리, 성균관 직강, 비변사 낭관, 경기도 암행어사, 승정원 동부승지,
병조참의 등이 그가 살아낸 벼슬살이의 이름들이다. - P120

옆에 놓인 플라스틱 바가지를 들고
다산이 차달일 때 썼다는 약천물을 뜬다.
샘 안에 눈길을 주자 두꺼비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다.
버리려던 물을 그냥 들고 마신다.
참 달군!

-황동규 <다산초당> 부분 - P122

김환기의 고향을 찾아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여름이 가기 전, 고향에 가는 시간을 그애는 그렇게 표현했다.
언제 어디서 다시 어떻게 만나자는 그런 약속은 어차피 아름다움이 아니었다.
하늘의 별들이 사라지고 대신 지상의 풀밭 위에
해일처럼 촉촉한 별들이 몰려왔다. - P126

시가 네게 준 게 뭐니?
평화.
넌 참 철저히 헤세를 사랑하는구나.
그애는 헤세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그애의 깊고 아늑한 눈, 나는 조금 부끄러워졌다. 그러나 이내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그애가 헤세를 읽어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 P131

진도 소리를 찾아서 1

소리가 밥이고
소리가 사랑인 사람들

주위는 모두 꽃밭이었다.
내가 바라본 골목길 중 가장 아름다운 골목길이었다.
모든 부락 사람들이 내 맘 같다면 온 마을을 온통 꽃으로 뒤덮고 싶으요.
집 주인은 그렇게 말하며 얼굴이 부서지는 웃음을 웃었다. - P148

된장 속에 묻은 고춧잎, 혹은 마늘종마냥. 소리 명창 따로귀 명창 따로라는 말이 있거니와 그의 소리의 미덕은 귀 명창이라는다소 현란한 수사의 말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소리를 듣는 순간 그소리가 노니는 들과 강과 산으로 우리의 귀를, 시간을, 신명을 저절로 끌고 갔다. - P157

흥타령 특유의 비애와 한이 밀물처럼 밀려왔다가 다시금 쓸려 나갔다. 여기가 어디일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도대체 어떤 곳일까. 삶의 의미는, 그 가치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노래는 소리는,
문명은, 한은 어디에서 비롯되고 어디에서 끝나는 것인가. 꽃은 왜피고 별은 왜 반짝이며, 구름은 왜 흘러가는가 안 할머니와 김 할아버지의 주고받는 흥타령과 육자배기 가락 속에서 우리는 아예 갈길을 잊고 말았다. - P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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