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가족은 두 지붕 두 가족 - P377

온돌 대신에 봉덕과 굴목이
제주도 살림집의 구조와 집안의 공간을 찬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제주도 건축의 주요 특징은 무엇보다 기와집이 드물다는 점이다. 바람 때문이다. 그 어떤무거운 기와도 능히 바람을 당해낼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화산토로 기와를 구워내기도 쉽지 않았다. 제주도 땅은 점액이 없어 도기와 기와를 만들기 어렵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기와집이 매우 적고 모두 띠로 덮었다고 김석익은 《탐라기년》에 기록했다.
- P379

오늘날 복원해놓은 관공서는 대부분 우람한 기와집이다. 육지의 흉내를 낸것일 뿐이다. 과거에 제주도 관공서들이 그러했을 것이란 믿음은 완벽한 오름다. 지붕 재료는 새를 썼다. - P380

제주민의 자존심, 정낭정신
육지와 판이하게 다른 것으로 올레와 정낭도 손꼽을 수 있다. 올레는 거릿길에서 집으로 출입하기 위한 골목길이다. 제주도 특유의 공간으로, 사적 주거공간과 공적 거릿길 사이를 연결하는 중간적 성격을 지닌다. 집주인에게는 외부의시선을 차단해 독립적 공간을 확보해 주며, 방문객에게는 집주인과 마주하는 상황을 심리적으로 완화시켜주는 전이 공간이기도 하다. 올레는 직선형이 아니라곡선형이다. 주술적으로는 올레에 들어오는 나쁜 기를 막고 좋은 기만을 걸러서집 안으로 들어오게 하기 위함이며 태풍과 같은 바람이 집으로 직접 들이침을막아준다.
- P382

제주도에는 문이 없다. 이를 도적이 없다는 식으로 단순화시킬 필요는 없다.
고온다습한 제주 풍토에서 나무판자로 문을 만들면 금방 썩을 뿐 아니라 강풍에날아갈 것이다. 정낭이 창안되었다. 정낭은 집에 사람이 있고 없음을 표시하며마소 출입을 방지하기 위해 걸쳐두는 나무토막이다. 정주목은 그 나무토막을 끼워두는 구멍 뚫린 나무 기둥이다. 근자에 남아 있는 정주목은 대부분 돌로 되어있으나 원래는 나무로 만들었다. 나무막대기를 가로로 걸쳐놓아 대문 역할을 했던 것은 한라산에 방목 증인 마소를 가두어 기르기 위한 ‘삼채기‘ 라는 야외의 문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다. - P384

시베리아 사하공화국의 야쿠츠크를 찾아갔을 때, 우리의 정낭과 너무도 흡사한문을 확인한 바 있다. 캄보디아, 태국, 미얀마, 대만에서도 정낭과 비슷한 기능의 문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한반도 육지에서만 특이한 것일 뿐 세계적인 문화임을 알 수 있다.
- P384

오늘날 제주 살림집에서 정당은 대부분 사라졌으나 그 성신만은 남있다. 제주사람들은 ‘정당 정신‘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정닝은 도둑과 기지와 대문이 없다.
는 삼무 정신의 또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문도 없이 밭일이나 바다일을 나가서온종일 일을 하다가 돌아온다. 그때 집을 지켜주는 것이 있다면 오직 이 정낭과 정주목 뿐이다. 하지만 정낭 정신도 관광객이 불어나면서 옛말이 돼가고 있다. - P384

우영팟의 섬
장수를 원하는 이들,
제주도로 가라 - P385

토질이 푸슬푸슬하고 건조하여 밭을 개간하면 반드시 많은 말을 몰아 밟아야 하며, 잇달아 2,3년 농사를 지으면 이삭이 여물지 않아서 부득이 다시 새로운 밭을 개간해야하니 노력은 배가 들어도 수확은 적다. 이것이 백성들이 가난하고 곤궁함이 많은 까닭이다.
- 이원진, 《탐라지》 - P385

거칠고도 모진 풍토
제주도의 토양은 쉽게 농사를 허락하지 않았다. 바다가 거친 만큼 땅도 거칠었기 때문이다. 문헌 기록은 일제히 거친 풍토를 지적하고 있다. - P386

농기(農器)가 매우 좁고 작아서 어린아이 장난감 같다. 
그 까닭을 물어보니, 흙이 두 어치 속에만 들어가도 다 
바위와 돌이므로 깊이 들어갈 수 없다.
-김상헌, 《남사록》 - P386

이런 탓에 바다풀 거름이 발달했다. - P386

메밀꽃 필 무렵의 본무대
빙떡은 메밀과 무를 이용한 대표적인 제주 전통 음식이다. 메밀가루를 반죽하여돼지비계로 지진 다음 무채를 넣고 말아 만든다. 메밀전의 담백한 맛과 무 숙채의 삼삼하고 시원한 맛이 별미다. - P388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이 봉평을 무대로 했기에 메밀 주산지가 강원도인 줄 아는 이가 많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 이란 대목이 국어수업으로 각인되었기때문이다. 그러나 빙떡의 주 재료인 메밀은 오히려 제주도 대표 잡곡이다. 누군가 메밀꽃 필 무렵의 뉴 버전을 쓴다면 제주도를 배경으로 해도 무방하리라.

제주도에는 고구마가 없다
고구마는 지금은 그 의미가 약해졌지만 역사적으로 주목해야 할 식재료다. 제주도 고구마는 그 역사적 족적을 지닌다. 고구마가 제주도에 도입된 시점은 영조39년(1763). 조엄(趙)은 일본을 다녀와서 기행문집 《해사일기(海日記)》에 이렇게 썼다. - P393

대마도에는 감저(甘)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을 효자마
(孝子麻, 효자토란)라 하고 왜음으로 고귀위마(高)라
한다. 이것이 모두 잘 자라서 우리나라에 퍼진다면 문익점의 목면과 같이 백성을 매우 이롭게 할 것이다. 동래에서 잘 자란다면 제주도 및 그 밖의 여러 섬에도 전파시켰으면 좋겠다.
이 기록 때문에 조엄이 고구마를 제주도로 보냈다고 믿지만 정확하지는 않 - P393

1908년에는 고구마 생산량이 1백 80만 관, 즉 6천 750톤에 이르렀다. 일제말기에는 제주도가 고구마 산지로 전국에서 제일 유명했으며, 1940년 동(東)에서 13만 원을 들여 축항을 끝내고 주정공장을 세웠다. 제주도 어른들은 대부분 고구마를 잘라서 말리던 어릴 적 풍경을 기억하리라.
- P394

우리가 잘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다. 본디 제주도에는 고구마란 단어가 없었다는 점. 제주도에서는 고구마를 고금마라고 하다가 현재는 감저(語)라 부른다.
고금은 아마도 고금도란 섬 이름, 마는 토란의 뜻으로 맛이 토란과 비슷하다는데서 이름이 붙은 것으로 여겨진다. - P394

제주도 논을 문화유산으로 - P394

물이 고였다가도 쉬 말라버리는 건답을 두고 강답, 또는 마른논이라 한다. 물이 흔한 골답은 흐렝이, 또는 흐렁논이다. 이재수난 때 대정군수를 지냈던 채구석은 바위를 뚫고 수로를 만들어 대정현 천제연 폭포물을 성천봉 아래까지 끌어들여 논 5만 평을 만들었다. 서귀포 하논이나 강정의 논, 지금은 사라진 대정의 논,
한경면의 두모리, 심지어 제주시내 산지천변에도 1930년대까지 논이 있었다. 제주도 논을 문화유산으로 지정해야 한다. 층계논과 다락논의 경관 가치를 높게 평가하여 문화유산 지정을 서슴지 않는 사람들이 정작 화산회토로 힘들게 조성한논을 주목하지 않음은 이상한 일이다. 화산섬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이다. 똑같이화산지대인 울릉도 태화동에 있던 개척시대의 논도 함께 지정할 일이다.
- P396

밭에서 부르는 이 자랑
제주도 사람들은 어릴 적에 애기구덕에서 자라났을 것이다. 애기구덕은 농사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애기구덕이 없었다면 제주 여인들이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 P397

구황음식이 일상 음식, 일상 음식이 구황음식
한반도의 문화는 기본적으로 쌀밥 문화다. 보리밥 비중이 크지만 사람들의 보편적 희구는 역시 쌀밥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쌀은 늘 귀했다. - P399

제주 특산 술로는 오메기술, 고소리술이 있다. 오메기술은 차조로 만든 오메기떡으로 빚은 술이고, 고소리술은 발효가 끝난 오메기술을 증류시킨 소주다.
제주도에서 고소리는 소주를 증류하는 오시그릇을 말한다. 제주의 술 역시 탁주, 청주, 소주가 있다. 오메기술이 탁주라면 고소리는 소주다. 육지에서 주로 쌀을 소재로 한다면 제주도는 좁쌀을 이용하여 풍토성이 짙다. - P403

우영팟과 거친음식이 장수비결
조건이 열악한데도 불구하고 제주도는 일찍이 장수의 섬이다.
- P403

오늘날 거친 음식을 먹자는 운동이 벌어진다. 식품을 재래의 가공방식으로 가공하여 덜 정제된 거친 상태로 먹자는 운동으로, 슬로푸드 운동과 맥락을 같이 한다. - P406

초라한 밥상을 차려 건강을 지킨다. 제주도 토속음식은 기본적으로 거친 음식이 많다. 보리나 메밀 같은 곡식, 바다에서 나는 몸과 톳 같은 해초가 모두 그러하다. 거친 음식이야말로 장수를 보장하는 저력이다. 지난날에는 쓸쓸한 밥상으로여겨졌겠지만 오늘날에는 황제의 식탁을 뛰어넘는 건강식이 아닐 수 없다.
- P406

장수의 비결은 또한 우영팟(텃밭)에서 나온다. 제주도 살림집의 경영에서 우영이라는 채전과 소막이라는 축사, 통시라는 측간은 필수불가결이다. - P406

따스한 기후도 무시할 수 없다. 겨울과 초봄에는 모진 바람이 불어 육지 이상으로 춥지만 실제 기온은 따스하다. 돌담만 잘 쌓아 바람을 막아주면 한겨울에도 배추나 마늘이 잘 자란다. - P407

물 맑고 공기 좋은 섬나라 유토피아
육지부가 극심한 소작관계로 얼룩졌다면, 세주도는 화산도의 자연적 조건에따라 자작농적 소유가 강하다. 비옥도는 낮으나 개간 가능한 미개척지가 방대하게 널려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제주도는 넉넉하지는 못하나 도둑과 거지와대문이 없는 삼무의 섬이기도 하다.
- P407

접 증답(答)·멸치접 등이 모두 특유의 공동체다. 1980년 8월, 제주도 토박이들이 일찍이 문화운동의 고전적 명구가 되어버린 수눌음선언을 내걸었던 역사적사건을 환기해 본다. 
수눌음선언은 중앙 집중화된 문화에 대하여 최초로 지역문화의 존엄성을 엄숙히 선포했다.
이곳은 중앙에 비교하면 변방이 아니라. 사실은 스러져가는 우리의 전통문화의 새로운 활력을 공급할 전위의 자리인 것이다. 이제는 이곳에 파문을 던져 외래문화가 범람하는 저 한복판까지 전파시켜야 할 것이다.

- P408

제주도 사람은 기본적으로 검소하다. 식생활 역시 검소하다. 일찍이 이형상도 이렇게 쓴 바 있다.
의식이 소박검소하여 화려하게 꾸미는 일이 없으며 부유할지라도 갈옷을입고 또한 계속하여 염장(藏)을 먹지 않는다. - P408

맑은 공기에 좋은 물을 마시면서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제주도를 섬나라 유토피아‘라고 상찬한다면, 너무 과한 말일까. 장수의 섬이다. 사람은 나서 서울로보내고 말은 제주도로 보내란 속담도 바뀔 때가 되었다. 말만 보낼 것이 아니라사람도 제주특별자치도로 보낼 일! - P408

탐라와 몽골의 섬
잃어버린 왕국을 찾아서 - P409

제주에서 가져온 비단으로 가지런히 수를 놓고
제주에 있는 님을 생각하면 이별의 아쉬움을 달랠 길 없네
제주에서 새로운 삶은 찾은 내 님,
그리워함은 부질 없구나- 몽골의 노래, 〈지주호트〉(제주마을) - P409

중국-일본-한국사에서 대만 류큐 - 제주사로
제주도의 공식명칭은 ‘대한민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도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8도의 하나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제주도는 얼마 전까지만해도
‘전라남도 제주도에 불과했다. ‘특별자치도는 커녕 ‘道‘로서의 자기정체성을인정받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다. 제주 사람 입장에서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런지. - P410

국민국가 시각에 젖어 있는 대다수 사람에게 제주도는 ‘단군 할아버지 이래오천 년 단일민족 신화‘를 함께 누려온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제주도는본디 탐라라는 독립 왕국이었다. 문헌에 따라 섭라(M), 탐모라(耽羅), 담라(),
탁라(羅) 등으로 불렸는데 역시 탐라가 오랫동안 호칭되었다. 한치윤은 《해동역사》에서 탐라는 일찍부터 섬나라라는 뜻을 지녔다고 보았다. - P410

제주란 호칭은 탐라 멸망 이후의 일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고종 16년(1229)에 제주가 등장한다. 탐라가 제주로 바뀌어 일개 州로 전락했다. 그러나삼별초 정벌 이후에 원의 직할지가 되면서 제주라는 명칭 대신에 탐라라는 호칭을 다시 사용한다. 원이 제주도와 고려의 관계를 차단시키려는 의도에서 한 일이었다. 이후 충렬왕 20년(1294)에 탐라가 고려에 반환되면서 다시 제주라는 명칭이 사용된다. 문제는 이 모든 게 섬사람의 뜻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 P411

잃어버린 왕국으로 가는 비밀의 열쇄
고산리 유적으로 가보자. 고산리 유적이 형성될 때만 해도 앞의 차귀도는 섬이아니었다. 빙하가 녹으면서 섬이 되었다. 대략 1만 2,000~8,000년 전의 일, 제주도에는 구석기문화도 존재하여 역사의 상한대를 끌어올려준다. 애월읍 어음리의 빌레못동굴, 서귀포 천지연의 구석기유적이 그것이다.
- P412

제주도는 고인돌의 섬이라 할 만큼 고인돌도 많다. 제주도 고인돌의 비밀은 아무래도 가파도에 있다. 우도에 고인돌이 1기 있는 반면, 가파도에는 무려130 여기에 이른다. 최남단에 왜 이렇게 고인돌이 많은 것일까. 한반도 본토에서 한참을 내려오던 그네들은 더 내려가지 못하고 가파도에서 그만 행로를멈춘 것일까. - P414

신화인가 역사인가
삼양동 유적이 탐라소국으로 가는 열쇄를 제공했다면, 탐라국의 결정적 해답은삼성혈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고려사고기(高麗史古記)〉 에서, 탐라의 개국시조고 량 부 세 신인(神人)이  땅으로부터 솟아났다고 했다. 
진산(鎭山) 북쪽 기슭의 모흥(興)이라는 구멍이  그곳이다. 처음은 양을나(良乙那)이고,  다음은 고을나(高乙那), 셋째는 부을나(夫乙那)인데  수렵생활로 가죽옷을 입고 고기를 먹으며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세 신녀가 가축과 오곡의 종자를 가지고 표류해온다.
- P415

맥족 계통으로서 언어와 문화가 거의 같았으므로 각각 천신만고로 도착한 신천지에서 새 국가를 개국하는 데 상호 크게 갈등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순조로운 건국 흔적이 민속에 남아 있다. 섬성신화에 나오는 고·양·부가 북방에서 이동해 들어왔다는 증거는 족장 호칭인 을나에 있다. 을나는 예·맥족에서 사용하던 왕 · 족장의 호칭이다. 부여 · 양맥 · 고구려는 물론이고 동예 · 읍루 ·여진도 왕·군장 · 족장을 을나라고 했다. 삼성신화에서 탐라를 개국한 3을나인양을라 고을라 부을나를 번역하면, 예맥족의 군장, 고구려족의 군장, 부여족의군장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 신용하의 가설이다. - P418

숙종 10년(1105) 탐라국이 소멸되면서 고려의 군현으로 편입되었고 중앙에서 지방관이 파견된다. 충렬왕 21년(1295)에 제주도가 주음으로 승격되면서 목사가 파견된다. 그 전해인 1294년에 충렬왕은 탐라왕자 문창유(文昌裕), 성주 고인단(高仁旦)에게 붉은 띠, 상아홀,  모자, 일산, 신을 한 벌씩 준다. ‘탐라가 이제는 우리나라에 귀속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물품을 준다‘고 했다. - P419

아기업개와 삼별초제주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 중의 하나가 삼별초의 항쟁 아닐까. 그 흔적은 항파두리 항몽유적지 토성에 일부 남아 있다. 1970년대에 복원되었고 성내에 항몽순의비도 세워졌다. 삼별초는 원종 12년(1271) 항몽거점인 진도가 여몽연합군에 의해 함락되자 제주로 들어와 웅거했다. 1273년 연합군의 공격에 최후를 맞이했던 곳이 항파두리다. - P422

몽골은 제주를 일본 정벌의 전초 기지로 이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삼별초의 항쟁이 벌어지자 일본 원정을 늦출 수밖에 없었다. - P425

몽고는 삼별초군 토벌을 계기로 빼앗은 탐라를 외형상으로는 충렬왕 20년(1294)에 고려에 돌려주었으나 여전히 목축 지배권을 행사했고, 관리를 파견하기도 했다. 몽골 공주를 부인으로 얻은 부마국 고려의 다른 모든 요청은 받아들여도 목축권 만큼은 요지부동이었다. 유목민에게 목축권이야말로 최대의 권력이었으며 군사적 힘이었기 때문이다. 뱃길로 불과 7일 거리였으므로 관리하기도 용이했다. - P427

탐라의 흔적은 어디서 찾을 것인가
이제 역사는 흐르고 흘러 제주특별자치도 시대에 접어들었다. - P431

제주도 전체를 관할하던 제주목 설치는 태조 6년(1397)의 일. 제주목에서 제주 전체를 관할하다가 1416년에 대정현 정의현이 신설되었다. 제주목사는 행정 기능 이외에 군사 직책도 겸했다. - P431

1960년대까지 관덕정 일대에는 제주시청을 비롯하여 제주경찰국, 제주지방법원, 검찰청 등 주요 관공서가 모여 있었다. 1970년대의 신제주 개발로 일부기관이 신제주로 옮겨가면서 관덕정 시대가 막을 내리기는 했으나 아직도 동문시장, 칠성통, 산지천 등이 자리잡은 제주시의 중핵이다. 제주대 병원이 옮겨가는 등 구도심이 텅 비게되고 신제주와 제주시의 강남이라는 노형동만 번성하는야릇한 풍경 속에서 관덕정은 저 홀로 탐라와 제주 역사의 무게를 지고가는 중이다. 제주가 아닌 탐라의 원형을 찾고 싶은데, 어디고 그 외형적 흔적은 말끔하게 청산된 듯싶다.
제주도 어디에서 탐라의 흔적을 찾을 것인가! - P432

장두의 섬
탐라의 독립을 허하라
- P433

탐라는 땅이 좁고 백성은 가난하다. 지난날에는 전라도 장사꾼이 와서 옹기와 나락쌀을 팔아주었는데, 이제는 팔러오는 이가 드물었다. 지금은 관이나 개인이 기르는 우마가 들판을 덮었으니 밭갈이를 하지 않고, 오고가는 벼슬아치들만 베틀의 북처럼 잦아, 대접하기에 골몰하게 되니, 그것은 탐라 백성의 불행이어서 가끔 변이 생기는 것이다.
이재현, 《익재난고(益齋亂蒙)》 - P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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