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정 노트 1. 임제
《남명소승》에 영실계곡에 당도하는 모습을 남겼는데 간이용 텐트가 없던 시절이라 장막을 지고 올라가 정상에 베이스캠프를 쳤던 것 같다. 오늘날의 영실코스로 등정한 것 같으며 존자암을 거쳐 갔다. - P54

등정 노트 2. 김상헌
나라의 공무로 출장 온 김상헌은 남사일록》에 이렇게 썼다.

오백장군 골짜기는 돌 봉우리가 다투어 빼어나 말 타고 갑옷을 입은 사람같기도 하고, 혹은 칼과 창을 잡고 깃발을 나부끼는 것 같기도 하며, 푸른 절벽 위에 줄을 지어 서 있어서 오백장군이란 이름을 얻게 된 것이 이것이다.

오백장군은 앞의 영실계곡과 더불어 조선시대에도 대표적인 명승지였던 것같다. 김상헌은 ‘속세 바깥의 깨끗하고 기이한 취향이 많다"고 했다.
- P55

등정 노트 3, 김치
제주판관을 역임한 김치는 양력으로 5월 초순에 올랐으니 등산하기 딱 좋은절기였다.
- P55

등정 노트 4. 지그프리트 겐테
서양인 최초로 한라산을 등정한 백인은 1901년의 독일인 지그프리트 겐테(S. Genthe)다. 그가 서술한 놀라움의 한 대목.
드디어 정상이다. 사방으로 웅장하고 환상적 장관이 한 눈에 들어온다. 섬을 지나 저 멀리 바다 너머로 끝없이 펼저지는 파노라마였다. 제주도 한라산처럼 형용할 수 없는 웅장하고 감동적인 광경을 제공하는 곳은 지상에 그렇게 흔하지 않을 것이다.
- P56

등정 노트 5. 정지용
시인 정지용은 아홉 편의 연작 산문시 "백록담"을 남겼다. 
한라산을 이처럼 아름답게 표현해낸 시도 드물 것이다. - P56

등정 노트 6. 그 밖의 사람들
김석익은 ‘토정 이지함이 세 번 한라산을 올랐으나 당시에 아는 사람이 없었다‘고 기록했다. 육지 도인들이 불현듯 바다를 건너와 한라산으로 들어갔을 가능성을 말해준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문제는 등정기록이 없다는 점이다. - P56

조선시대 한라산 등반이 유람적 성격이 강했다면 현대 등반은 일제강점기에도입되었다. 산을 정복함으로써 인간 영역을 넓히는 서구 알피니즘이 제국 일본의 프리즘을 통해 도입된 것. 알피니즘에는 당시 제국주의를 표방하던 세계 열강의 팽창주의가 숨겨져 있었다. 미지의 세계와도 같은 험준한 산을 정복함으로써 자국의 우수성을 만천하에 증명하려는 의도였다. 일제도 한반도 명산을 정복함으로써 식민지배의 정복사와 일치시키려는 통과의례로 삼고자 했으며, 한라산등반도 이의 행보에 발맞추어 이루어졌다. - P57

오름의 왕국 천의 얼굴
제주도 이해의 첩경은 오름이다.
- P59

일찍이 이형상은 《남환박물》에서 이렇게 썼다.
한라산은 한 가운데가 우뚝 솟아있고 여러 오름이 별처럼 여기 저기 벌리어있으니, 온 섬을 들어 이름을 붙인다면 연잎 위의 이슬 구슬의 형국이라 할 수있다. - P59

화산의 섬
세계 농업유산에 빛나는 돌담 - P65

땅은 평평하고 넓은 듯 하나 울퉁불퉁해서 멀리 바라보기가 어렵다. 비록 언덕의 능선이 있지만 어지러이 뒤섞여서 구분하기가 어렵고, 형세가 그물눈 같기도 하고 혹은어지러이 널려있는 분묘 같기도 하다. 돌을 쌓아 놓았지만 곱지도 않거니와 가지런하지도 않고 모두 닥딱한 광석처럼 거무튀튀하여 보기가 볼썽사납다.
- 《충암록(中錄)》 - P65

제주도 돌담은 과학적이기까지 하다. 치밀하게 쌓기는 하되 자세히 보면 구멍이 숭숭 뚫려있다. 틈새를 주지 않고 완벽하게 쌓으면 거친 바람에 돌담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바람이 틈새로 빠져나가면 돌담은 끄떡없이 제자리를지킨다. 삶의 지혜다. 송악 같은 덩굴류가 돌을 든든하게 붙여주는 역할을 한다.
제주도민이 만들고 가꾸어온 민속지식의 힘이다. - P68

제주사람에게 돌담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시도 눈길에서 놓을 수 없는상징이다. 아예 ‘돌에서 왔다가 돌로 돌아가는 사람들‘ 이다. 돌 구들 위에서 태어나고 죽어서는 산담에 둘러싸인 작지왓자갈밭)의 묘 속에 묻힌다. 살림채 벽체가 돌이며, 울타리와 올레, 수시로 밟고 다니는 잇돌(디딤돌)이 모두 돌이다.
산길은 물론 밭길, 어장길도 돌밭이다. 그래서 제주사람은 짚신 아닌 질긴 칡신을 만들어 신었다. 그 돌담의 미학을 제대로 읽어낸다면 제주도의 아름다움을절반은 이해한 것으로 간주해도 좋다. - P70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할 돌담에 관해
하나, 집 안팎의 집담과 통담, 올레 - P70

둘, 밭을 둘러싼 밭담
가장 많은 담은 역시 밭담이다. 밭담은 우마 침범을 막고 화산토가 날리지 않게 치밀하게 쌓았다. - P71

셋, 신당을 둘러싼 당담 - P78

넷, 무덤을 둘러싼 산담 - P78

무덤은 산담으로 인해 고유의 영역을 보장받으며, 오름의 품안에서 영원의 잠을 청하는 망자의 집으로 비로소 완성된다. - P79

다섯, 목장을 둘러싼 잣담제주도 최대의 토목공사였던 잣담(혹은 잣성)도 중요하다. 잣성은 조선 초기부터 한라산지에 설치된 국영 목마장의 상하 경계다. - P82

여섯, 바다를 둘러싼 원담바다에도 돌담이 있다. 밀물 따라 들어온 고기가 썰물에 갇혀서 빠져나가지못하게 만든 돌담을 육지에서는 돌발로 부르며, 제주도에서는 원담(혹은 갯담)이라고 부른다. 원담 명칭은 지역에 따라서 다르다.
대정읍, 제주시: 원담, 조천, 구좌, 성산: 갯담 - P84

일곱, 용천수를 둘러싼 물통담 - P86

여덟, 섬 전체를 둘러싼 만리잣담
최대의 돌담은 만리잣담인 환해장성이다.
- P86

여자의 섬
정말 남자보다 여자가 많을까 - P92

제주는 아득히 먼 바다 가운데 있어서 수로로 9백여리고 파도가 사납기 때문에 공물실은 배와 장사하는 배가 끊임없이 오가는 가운데 표류하고 침몰함이 열에 다섯이나여섯 가량 됩니다. 제주사람으로서 앞서 가다 죽지 않으면 반드시 뒤에 가다 죽습니다. 그러므로 제주 경내에는 남자 무덤이 매우 드물고 마을에는 여자 많기가 남자의세 배입니다. 부모된 자가 딸을 낳으면 반드시 이 아이가 내게 효도를 잘 할 아이라고 말하고, 아들을 낳으면 이 아이는 내 자식이 아니고 고기밥‘이라고 말합니다.
최부, 《표해록》 - P92

태풍이 지나간 후 해녀들이 높은 파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바다에 나가 파도에 밀려온 해초를 목숨 걸고 ‘건져내고있다. 1980년대 중반 안덕면 사계리 해안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사진) - P99

강인한 제주여성의 슬픈 역사 - P100

장가 조차 못가는 포작(作)은 누구일까. 포작은 《조선왕조실록》에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한다. 때로는 포작간, 포작인, 포작한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다. 포작은 제주도뿐 아니라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를 비롯해 황해도 등지로 숨어들어갔다. 포작은 고기잡이와 해산물 채취를 주업으로 남도 연안을 돌아다니며 살아가는 제주 출신 남자 어부다. 포작이 깊은 바다에서 전복을 잡아 진상하는 역할을 맡았다면, 해녀는 미역 등 해조류 채취에 전념했다. 포작과 잠녀가 부부로가족을 구성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 P101

내가 진심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근로가 미덕이라는 믿음이 현대사회에막대한 해를 끼치고 있다는 것이다. 행복과 번영에 이르는 길은 조직적으로일을 줄여나가는 것이다.
버트란드 러셀 [게으름에 대한 찬양] - P103

대정에 귀양 온 김정희는 은혜의 빛이 여러 세대로 이어진다는 의미의 ‘은광연세(恩光世)‘ 라는 글로 뜻을 기렸다. 재물을 잘 쓰는 자는 밥 한 그릇으로도 굶주린 사람의 인명을 구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썩은 흙과 같다. - P110

제주 근현대사가 빚어낸 성비 파괴도 ‘여자 많은 제주도신화‘를 창조하는데 기여를 했다. 그러한즉, 삼다라고 하여 여자 많음을 어찌 한가롭게 자랑만 할 수 있으랴.
- P115

귤의 섬
원한의 과일에서꿈의 과일로 - P117

행실을 삼가지 않는 무리가 스스로 해외임을 믿고 함부로 탐욕스럽게 빼앗고 백성을대할 때의 행동이 무리하매 섬백성이 원통한 마음을 펴지 못한다. 한번 서울에 가서 조금이라도 괴로운 사정을 위에 알리고자 하지만 수령이 자기의 악행이 알려짐을 싫어하여 물건을 가지고가는 자를 제외하고 섬 밖으로 나가는 것 자체를 금하고 있다.
김상헌, 《남사록》 - P117

천년 이상 지속된 원초적 플랜테이션 - P118

제주도에서는 같은 민족이지만 이와 같은 원초적 플랜테이션이 근 천년 이상 지속되었다. 1894년에 이르러서야 감귤 진상이 해제되었음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한즉 아름다운 감귤에는 제주 사람의 보이지 않는 눈물이 배어 있으며, 감귤의 역사를 이해함은 곧바로 본토와 제주도의 상관관계를 이해하는 첩경이다. - P120

귤나무는 고통나무 - P120

박정희는 1961년 9월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자격으로 제주도를 방문해 서귀포의 감귤농원을 시찰했다. - P130

토종감 뷔페를 고대하며 - P131

2004년 1월 15일, 제주항에서 역사적 사건이 벌어졌다. 한국 국적 킹스기호에 북한으로 보내는 감귤 2500톤을 선적했다. 제주도와 남북협력 제주도국민운동본부‘는 1998년 100톤을 보낸데 이어 해마다 감귤을 실어 보냈으며주로 파나마 선적을 이용했다. 아리랑공연 관람차 평양에 갔을 때, 그 귤을 먹어본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너무 귀하고도 귀해 그만 배급받은 그 굴을 차마 먹지 못하고 바라만 보다가 끝내 썩히고 말았다고 한다. 귤나무를 구경도 못한 북녘에서 받아들이는 귤에 관한 태도는 남녘사람과 다르다. 과잉생산으로 남아돌아서 버려지는 감귤이 가난한 북한 사람들 식탁에서 편안하게공유될 날을 기다려본다. - P134

곶자왈과 숲의 섬
곶과 자왈이 숲을 이루다 - P135

인간의 눈에 침묵의 숲으로 다가올 뿐, 숲에서는 매일매일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나무와 풀이 자신의 영역을 지키려는 거친 싸움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식생이 안정적으로 갖추어진 숲에서는 일종의 휴전협정이 맺어져 있다. 비교적 안정적 조건에서 서 서로의 자리를 인정하며(차마 서로의 영역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리라!)숲의 공동체를 이끌어나가고 있다.
펠릭스 (Felix R. Paturi), 숲 - P135

모든 숲 속의 빈터는 이름을 지니고 있다 - P136

생태환경의 허파
곶자왈은 ‘덩굴과 암석이 뒤섞인 어수선한 숲‘을 가리키는 말이다. 가시덤불과나무들이 혼재한 ‘곶‘과 토심이 얕은 황무지인 ‘자왈‘이 결합된 단어다. - P139

숲이 사라지면 물도 사라진다 -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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