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없이 어둠도 없으리

연필이라는 게 잘 들여다볼 수 있는 도구인 것 같아요.
스튜디오 이름처럼 연필로 명상한다고 하는데, 스태프들이처음 왔을 때는 ‘나뭇잎을 그려라, 나무를 그려라 하면그 이미지를 생각으로 그려요. 그런데 이건 연필을 들고나뭇잎이든 나뭇가지든 사람이든 실물을 잘 들여다보면서그리는 것과는 차이가 있죠. 그릴 때 느낄 수 있는 교감같은 게 다르고 또 그림을 볼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예의를 갖추는 것 같기도 하고요. 또 하나는 나이가 들어서느끼는 건데, 어머님들이 항아리 닦는 것과 비슷한 것같아요. 장독대 항아리를 단지 일로써 닦는 게 아니라닦으면서 계획을 세우기도 하고, 많은 시름을 잊기도하는데요. 연필에 그런 지점이 있어요. 깎다 보면 짧은순간이지만 느낄 수 있는 생각이 있고요. 그리고 점점손때가 묻는 걸 보면서 느껴지는 체취도 있고요. 가장중요한 이유라면 기회가 공평하다고 할까요. 고가의장비를 떠나서 그냥 흑심을 감싸고 있는 나무토막 하나가지고 자기 노력으로 그림에 다가가는 거니까요. 가장정직하고 올바르고 동기가 좋은 물건이 아닐까 싶어요. - P212

신기한게 뭐냐면요, 스튜디오 이름 때문에 타이틀을 넣을때 연필 소리를 넣으려고 녹음실에 가서 많은 시도를해봤는데 실제 연필 소리를 녹음하더라도 막상 들어보면그게 아닌 것 같은 거예요. 사각거리는 그 소리는 나와연필, 종이, 내가 그리는 대상만 느낄 수 있는 고유한소리인 것 같더라고요. 이를 녹음하는 순간 달라지거든요.
연필이라는 사물을 인식하고 듣게 되는, ‘쓱쓱‘ 종이 위를스치는 그 소리는 제작각의 상황에 따라 달라요. 때문에아무리 좋은 소리를 녹음기로 들어도 이건 연필 소리가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신기하더라고요. - P213

이 사진 ‘빛없이 어둠도 없으리‘는 저와 페데리카의모습인데요. 여성을 향한 폭력에 반대한다는 의도로 찍은사진입니다. 요즘 이탈리아에서 몇몇 남성이 여성에게행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하고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한작품이었죠. 이 상황에 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그리고 더는 참을 수 없음을 알리기 위해 찍었습니다. - P247

무언가를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철학적으로든과학적으로는 누구보다도 확신에 차 자신이 하는 일을 설명할 수 있다. - P251

무소유를 주장한 미국의사상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도 숲으로 들어가며 특정 크기의휴지까지 필요하다고 세밀하게 준비물을 적어놓고는 정작연필은 거기에 포함하지 않았다. 재미있는 것은 그가 연필회사를 운영하며 지금 디에고가 이야기하는 9H부터 9B까지의연필 강도를 네 단계로 나누어 ‘전문가를 위한 연필의종류‘라고 광고하고 판매까지 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대부분연필에 관한 이야기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연필의역사에서 정말 흥미로운 인물 중 하나이다.
- P258

영국 보로우델 광산
연필심의 고향이라 하면 단연 영국 보로우델 Borrowdale의 흑연광산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지금의 연필과 개념은 약간 다르지만, 16세기에 이 지역에서 흑연이 발굴됨으로써, 비로소 연필심이 탄생했다고 할 수 있다. 무언가를 쓰고 그리기에 너무도 질이 좋은 이 광물이 ‘흑연‘으로 정확히 성질이 규명되고 명명된것은 그로부터 200여 년이 지난 후였다. - P290

삼나무로만 만드는 것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삼나무는어떤 물건으로 만들어도 뒤틀어지지 않는다는 탁월한 장점이있다. 곧고 단단한 나무로 연필심을 받쳐주어야 심이 부러지지않고, 몽당연필이 될 때까지 연필을 쓸 수 있다. 연필에 있어흑연 못지않게 중요한 척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연필의 나무는 적당히 가벼우며 진이 너무 많지 않고 향이있어야 한다.
삼나무 확보가 어려워지면서 대안으로 다른 나무가쓰이기도 했으나, 잘 부러지고 고유의 연필 향이 없다는 이유로소비자에게 외면받기 일쑤였다. 판매량도 저조했고 실패였다.
그래서 대부분은 아직까지도 삼나무를 쓰고 있다. 만일 지금쓰고 있는 연필이 어쩐지 싼 것 같거나 조금 불편하다면 나무의향을 맡아보시라. 아마도 삼나무가 아닐 테다. - P296

양치기가 보로우델 지역의 언덕에서 나무 하나를발견했어요. 그 나무는 태풍으로 쓰러진 상태였고요.
나무뿌리까지 뽑혀있었어요. 그 근방에서 검은 물질을발견했었는데, 이를 본 양치기는 석탄이라고 생각했대요.
하지만 태워도 타지 않았고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이흑연이었다는 거죠. - P297

혹자는 흑연이 금보다도 더 값어치 있었다고 하던데요.
정말인가요?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많은 금속의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어요. 이러한 상황에서 흑연은다른 물질과 달리 한곳에서만 생산되었기에 독점할 수있었죠. 흑연 광산 소유자들은 가격을 올리기 위해 광산을1년 동안 운영하지 않기도 했습니다. 가격은 더 올라갔고금보다 더 값어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 거죠. 1830년대산업혁명이 한창일 때, 즉 철도 건설, 배 건조가 한창일 때납 1톤의 가격이 10파운드였어요. 당시 흑연 1톤의 가격은5,000파운드였고요. 그래서 흑연 도둑들도 출몰하기 시작한 겁니다 - P310

선입견은 모든 곳에 존재하지만 특히 이 작은 사물 연필에게도 오해받고 있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래서연필을 통해 우리가 주변의 사소한 사물들에 관해 진정한 그의미를 얼마만큼이나 간과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려고 한다.
우선 연필은 어떤 사물의 역사를 제대로 아는 것의가치를 새삼 가르쳐준다. 연필은 한창때 그 값어치가 금에맞먹었는데 지금은 아무도 그 가치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물이되었다. 그런가 하면 손을 뻗으면 언제나 우리 주위에 있으며,
아이디어를 다듬어주는 사물이자 인류의 삶에서 없어서는안 될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인식속에 그 존재가 미미하고 소소하여 곧 사라질 것 같다는 느낌을주고 있다. - P328

1560년경 영국의 현재 컴브리아 주, 당시에는 아마컴벌랜드 주였을 테지만 이곳 광산에서 흑연을 발견한이후에야 필기구에 활용하기 시작했다. 다빈치가 세상을떠난 지 50여 년이 지나서야 지금 연필의 개념이 겨우 탄생한 것이다. - P329

초창기 이시대는 흑연을 덩어리 채로 사용하였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삼나무에 싸인 온전한 흑연 연필의 모습은 1975년 프랑스의콩테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공식화되어 있다. 그가 처음으로특허를 냈기때문이다.
- P329

‘결핍감‘이 끊이지 않는 이 시대는 자신의 삶을 힘들게한다. 무언가를 성취하지 않은 나의 삶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걸 당연한 전제로 받아들인다. 그 존재가 바로 나 자신 인데도말이다. 나 자신에게도 스스로 사회적 ‘선입견‘을 적용하며 살고있는 것이다. 무언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걸 깨닫는 것,
그런 기회를 만드는 것을 연필은 내게 가르쳐 주고 있다. - P330

너무 흔하다는 것 그리고 소소함에 관해 생각해본다. 왜사람들은 다른 삶의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려 드는가? 자신의 가치를 정확히 아는가? 
자신만의 이야기는 무엇이었나? 자신을제대로 이해해야 스스로의 가치를 알 수 있는 게 아니던가?
성공하지 않으면 가치가 없던가? - P331

이렇게 국내외의 관심을 받으며 기획한 지 14년이 지나연필 다큐멘터리는 촬영에 들어가게 되었다.
2015년 1월 25일, 연필 다큐멘터리는 SBS 스페셜<연필, 세상을 다시 쓰다>로 방영되었다. 연필을 세상에 꺼내이야기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 지구촌에서 몇 안 되는 작업아니겠는가. - P343

아무도 독특하거나 대단하다고 인식하지 않는 평범한연필이었다. 하지만 저 멋진 보로데일 고향에서 출발해,
한때는 흑연을 훔치기 위해 목숨도 거는 이가 있었고, 기술을독점하고자 서로 빼앗으며 연필 깎는 걸 법으로 막았던 때도있고, 산업 간 연필 전쟁이 있을 정도로 그 존재가 귀했던연필이 아니던가! 연필은 내 시야가 허망한 외부가 아닌 나자신으로 향하게 한다. 언제나 내 역할을 당당히 하는 존재,
주목받지 않아 몰랐던 가치가 무궁무진한 존재!

그래, 나는 연필이다.

박지현 - P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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