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은 지식과 학문의 탐구를 속세와 내세를 포함한 모든 곳에서 인간생활과 활동의 필수로 익무화하고 있다. 무함마드의 언행록인 『하디스』에는 "그 누가 현세를원한다면 지식을 얻어야 하고, 그 누가 내세를 원한다 해도 지식을 얻어야 하며, 또그 누가 이 두 가지를 다 원한다 해도 역시 지식을 얻어야 한다"고 지식 습득의 당위성을 강조한다. 그런가 하면 이슬람의 학문을 이야기할 때 으레 인구회자되는학문은 멀리 중국에까지 가서라도 구할지어다‘ 라는 말로 학문 탐구를 독려하고 있다. - P197

루어지면서 지역별 학문중심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일찍이 헬레니즘 문화를 맛본데다가 페르시아와 인도, 심지어 중국 문화의 영향까지도 받아 오던 실크로드 육로의 요충지 부하라가 바로 그러한 중심지의 하나였다. 그 중심지 형성의 선도자는부하라 학맥의 삼총사로 불리는 성훈(聖訓) 학자 부하리와 의학자 이븐 시나, 수학자 알 콰리즈미다. 이들은 이슬람 세계를 두루 편답하면서 자신들의 학문세계를 개척하고 나서는 부하라에 돌아와서 여러 신학교와 사원들을 전전하면서 후학들에게학문을 전수했다. 이들 삼총사의 학문적 업적은 이슬람 세계뿐만 아니라, 유럽 세계에도 널리 알려져 근대적 학문의 기반을 닦는 데 불후의 기여를 했다. - P197

가령 상사병에 관해서는 체중과 체력의 감퇴, 발열 등 만성적 증상이 나타나며, 그치료법은 사모하는 상대방과 결혼시키는 처방밖에 없다고 진단한다. 그가 병리현상과 심리현상을 아우른 ‘심신의학법‘ 으로 한 왕자를 치료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망상증에 걸린 왕자는 자신이 소라고 믿고 소의 울음소리를 내면서 자기를 잡아먹어 달라고 애원한다. 그러자 이븐 시나는 도살꾼으로 가장하고 이 왕자가 너무 여위어 앙상하니, 우선 살찌워 놓아야 잡아먹을 수 있다고 한다. 이에 왕자는 마음껏먹다 보니 병세는 어느새 말끔히 가시고 건강은 회복되었다. 이른바 심신의학법의 효험이다. 그밖에 그는 알코올을 소독제로 추천한 최초의 의사이기도 하다. - P199

중세 무슬림들은 수학에서도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수학 발전에서 그들은 영(雲, 0)의 도입과 대수학의 정립이라는 두가지 특출한 기여를 했는데, 그 진두에는대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알 콰리즈미(780~850)가 있다. - P200

그가 쓴 「집합과 분할으 서」라는 논문이 12세기 인도 숫자에 대한 콰리즈미의서」라는 제하에 라틴어로 번역됨으로써 유럽인들은 처음으로 영을 포함한 숫자를알게 되었다. 숫자에 얽힌 사연에 무지한 유럽인들은 아랍인들에게 전수받은 이 인도 숫자를 ‘아라비아 숫자‘ 로 오인한 나머지 16세기에 이르러 전통적으로 써 오던로마 숫자를 아라비아 숫자로 대체해버렸다. 영어의 ‘사이퍼(cipher: 0, 암호)‘는
‘영‘ 혹은 ‘공(空)‘, ‘무(無)‘ 라는 아랍어 쉬프르에서, 그리고 알고리즘(algorism:아랍식 기산법, 아라비아 숫자)‘은 알 콰리즈미의 이름에서 연유된 것이다. - P200

피타고라스를 비롯한 고대 그리스 수학자들은 수를 단순한 영의 개념으로 본 데반해 알 콰리즈미는 상호관계적인 개념으로 인식함으로써 대수학이라는 새 학문을탄생시켰다. 그는 대수학에서의 문제풀이 절차가 마치 외과의사가 부서진 상처를다시 원상회복시키는 수술과정과 비슷하다고 하여 아랍어 외과 전문용어인 자브르(접골, 깁스)‘를 빌려 대수학을 ‘자브르‘ 라고 했는데, 그것이 영어 ‘앨지브러(algebra: 대수학)‘ 의 어원이다. - P201

태양의 땅‘ 호라즘, 스트라본은 이렇게 명명하면서 이곳엔 태양의 빛을받아 자란 고귀한 나라들이 있었다고기술하고 있다. 천혜의 땅에 찬란한문명이 깃들었다는 의미다. 기름진 델타에 2백만 년 전에 이미 문명이 싹다면, 그곳은 분명 인류문명의 한 발원지임에 틀림 없다. 이른바 인류문명의 발원지라고 하는 4대 고대문명론 이 도전을 받아야 할 이유의 하나가 바로 이런데 있다. - P233

히바는 박물관 도시‘ 답게 유적유물을 어떻게 보존하고 관리하는가에서 본보기를 보여 주고 있다. 유적유물은 역사의 퇴물이 아니라 보물이다. 그것은 어제의 증언이고 오늘의 자긍이며 내일의 길잡이다. 유적유물을 아끼고 사랑하며 그 값어치를 제대로 헤아리는 사람만이 문명인이며 미래창조형 인간이다. - P241

한 시간 더 달려 드디어 팔미라(Palmyrtal)에 도착했다. 한사코 이곳을 찾은 것은실크로드의 전개에서 차지하는 중요성 때문이다. 1877년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호펜(F. V. Richthofen) 이 중국에서 중앙아시아를 경유해 서북 인도로 가는 길 연변에서 고대 중국 비단 유물이 발견되었다는 점을 감안해 처음으로 이 길을 자이덴슈트라센(Seidenstrassen: 독일어로 비단길), 즉 ‘실크로드‘ 라고 명명했다. 그러다가역시 독일의 동양학자 헤르만(Herrmann A.)은 그 동안 중앙아시아에서 지중해 동안의 이 팔미라까지 이어지는 오아시스 곳곳에서 중국 비단 유물이 발견된 사실에근거해 이 비단교역의 길을 팔미라까지 연장하고 ‘실크로드(일명 오아시스로)"라고재천명했다. 요컨대, 팔미라에서 중국 비단 유물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실크로드오아시스 육로는 오늘날처럼 지중해 동안까지 연장된 것이다.
- P321

이어 11세기까지는 비잔틴 시대를 맞는다. 이곳에 엉킨 숱한기독교 이야기는 이때에 일어난 일들에 관한 것이다. 몽골군과 티무르군의 군화 자국도 역력하다. 11세기 투르크족의 유입에 묻어 들어온 이슬람 문명은 오늘로 이어진 주도 문명이다. 카파토키아를 비롯한 아나톨리아에 대한 로마제국의 지배를 되새길 때마다 저 유명한 말 한마디가 떠오른다. 로마 황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이곳을 정복하고는 개선장군답게 세계를 향해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Veni,
Vidi, Vici!)" 라고 포효(砲) 한다. 그러나 로마제국에도 해가 지는 날은 분명 있어,
오는 길은 가는 길의 시작이고, 승리는 패배의 예고였다는 사실(史實)을 세상은 보고야 말았다. - P361

역사상 원정이건 교역이건 간에 두 대륙을 오가기 위해서는 서로를 잇는 다리가필요했음은 불문가지다. 기원전 4세기 유럽 쪽의 시티안으로 원정을 떠난 아케메네스 조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 1세의 명령에 따라 최초의 다리가 놓였다. 70만 페르시아 군사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배와 뗏목을 이어 붙여 가교를 만들었다. 그 후2천여 년 동안 배로만 오갔지 그 누구도 다리를 놓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다가 1973년 사상 처음으로 두 대륙을 잇는 보스포루스 다리가, 그리고 15년 후인1988년에는 파티흐(정복자) 술탄 무함마드 다리가 놓였다. 두 다리 밑으로는 매년 5만여 척의 각종 선박이 지나간다. - P376

그 현장을 확인하기 위해 이스탄불에 도착한 다음날 아침 일찍 보스포루스 다리(일명 아타튀르크 다리)로 유럽에서 아시아로 갔다 오는 다리 여행을 했다. 이른 아침인데도 차량들로 몹시 붐빈다. 유럽에서 아시아 쪽으로 가는 차량 통과료는 3리라(한국 돈으로 2천 원 정도)이나, 아시아에서 유럽 쪽으로 오는 통행료는 무료다. 유럽 쪽의 생활수준이 높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 양쪽 인구는 비슷하지만 유럽 쪽에는 백화점이 7개가 있는 반면에 아시아 쪽에는 3개밖에 없는 형편이다. 이 다리는1950년에 건설계획을 짜 놓고 공사는 20년 후인 1970년에야 시작해 터키 공화국 수립 50주년이 되던 1973년 10월 29일에 총 공사비 2, 300만 달러를 들여 완공했다. 공사는 영국의 클리블랜드 엔지니어링과 독일의 호치티예프 사(社)가 맡았는데, 길이는 1,560미터고 폭은 33미터이며, 바다로부터의 높이는 64미터이다. 현수교(懸垂橋)로서 다리를 지탱하는 지름 0.5센티미터의 강철 철사만도 무려 10, 412개가 사용되었다. 하루에 20만 대의 차량과 60만 명의 행인이 지나다닌다. 2002년 통계로 유럽에서는 네 번째로 긴 현수교이며, 세계에서는 일곱 번째로 긴 다리라고 한다. - P377

오아시스로의 변천사를 되돌아보면, 처음부터 극동에서 로마까지의 길이 일시에 개통된 것은 아니다. ‘세계의 지붕‘ 이라고 일컫는 파미르 고원을 사이에 두고 동서 각지에 짤막짤막한 길들이 단절적으로 널려 있었다. 그리고 파미르 고원 횡단로가 뚫리면서 이 길들이 서로 이어져 비로소 동서의 오아시스들을 관통하는 완결된길이 열리게 되었던 것이다.
파미르 고원 서쪽의 서아시아 지방에는 기원전 6세기경에 이미 정비된 교통로가있었다. 아케메네스 조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기원전 522~486 재위) 때에 인도 서북부의 간다라 지방부터 이집트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정연한 교통망이 사통팔달하여 영내 23개 주와의 연계가 원활했다. 그 바탕에서 오아시스로의 발단이라고할 수 있는 수도 수사부터 아나톨리아의 사르디스에 이르는 이른바 ‘왕의 길‘이 개통되었다. - P383

즉 한반도의 남단(경주) 에서 출발해 서울(한주)과 평양을 지나 강계(동황성) 에서압록강을 건넌 다음 선양(심주)이나 요중(광주)을 거쳐 고대 한 중 접경지인 초양(영주)에서 중국 땅으로 접어든다. 6세기께 초양은 고구려가 지배한 동북아 최대의 국제무역도시였다. 여기서 서남쪽으로 산하이 관(임투관)을 넘어 베이징(유주)에 도착한다. 이어 동·중· 서로의 세 갈래 길을 따라 남하해 뤄양에 이른 후 서진해 시안에 도달하면 서역으로 이어지는 오아시스로와 맞닿는다. 그렇게 되면 서단을 로마로 하고 동단을 경주로 하는 오아시스로의 전 노정이 복원된다. 그 총 연장거리는약 1만 5천 킬로미터(약 3만 7천리)로서, 하루에 100리씩 걸으면 주파하는 데 꼭 1년이 걸린다. - P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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