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북 53~54p
내가 걸어가는 폭 1미터의 이 산길이 바로 호랑이가 다니는 길이다. 커다란 호랑이가 좁은 덤불을 헤치며 사슴이나 멧돼지를 찾아다니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덤불에 걸리거나 나뭇가지를 밟아 다른 동물들에게 자신의 접근을 알려줄 뿐, 잡덤불을 부스럭거리며 먹이를 구하는 건 멧돼지나 오소리가 하는 일이다. 호랑이는편한 길을 골라 조용하지만 당당하게 자신의 영역을 돌아보고 사냥을 한다. 산중호걸이 누가 무서워 대로 大路를 양보하겠는가?
그가 산길을 걸으면 모든 동물들이 길을 양보하고 피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숲에서는 인간도 한 마리 무력한 동물에 지나지 않는다. 군자는 대로행大路行이요, 호랑이도 대로행이다.  그래서 호랑이를 산중군자山中君子라  부른다.

하쟈인이 요즘 꼬리와 세력 다툼을 하는 것 같다. 하쟈인은 용의 등뼈 남쪽 어딘가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터를 잡고 성장해 왔으며 이제 왕성한 힘으로 영역을 확장하며 전성기를 향해가는 수호랑이다. 꼬리가 전성기의 영광을 뒤로하고 서서히 지는 별이라면 하쟈인은 떠오르는 별이다. 꾸찌 마파가 사라질 때도 그랬다.
늘 왕대였고, 왕대로서 숲을 활보하던 꾸찌마파의 발자국이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를 꼬리의 발자국이 채웠었다. 꼬리는 이 지역의 현역 왕대다.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고 아무것도 거리끼지 않는 으뜸 수호랑이다. 그가 숲을 나서면 모두길을 피해야 한다. 하지만 세대는 지나가고 다음 세대는 결국 오는 법이다. 꼬리와 하쟈인에게도 그런 시기가 찾아올 것이다. 언젠가 찾아오겠지만 그것이 언제일지는 모른다.
- P66

호랑이가, 그것도 한 지역의 으뜸 수호랑이인 왕대가 가축을습격했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한 시대를 풍미하고 은퇴한 사람에게는 그에 걸맞은 명예와 존경의 향기가 남아 그의 말년을 감싸준다. 그러나 숲에서는 그렇지 않다. 야생호랑이가 늙어서일인자의 자리를 내준다는 것은 이인자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위엄과 권위를 송두리째 잃어버리고 냉혹한 생존 투쟁의 정상에서 바닥으로 곧바로 굴러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지역 호랑이들에게 세대교체의 서곡이 울려 퍼진 것이다. - P68

생명을 먹어야만 살수 있는 생명은 존재 자체가 부조리다. 저 어둠 뒤에서 나를 노려보는 존재가 배고픈 생명이든 피 묻은 야수이는 그것이 무슨 차이인가? 배가 고프면 누구나 킬러가 된다. 피를 빠는 산모기를 잡을때, 닭장에서 애지중지 키운 닭을 잡을 때, 나는 그것을 느낀다.
올배미는 울타리 이쪽 끝까지 옮겨와 있었다. 주검을 내려다보던올배미가 뛰어내렸다. 움켜쥔 발톱에서 까만 생쥐를 배내더니 입에 물고 울타리를 따라 날아갔다.
- P78

자연은 공백을 두지 않아서 꼬리가 없어진다면 누군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그 역할을 대신할 것이다. 낡은 지속이 끝나야 새로운 미지가 시작된다. 그걸 알면서도 살아내야 하는 것이 삶이고그러기 위해서는 먹어야 한다. 꼬리에게 암호랑이는 살아야 할 이유고 목장의 말은 먹고살 먹이다. 하지만 목장에는 포수나 밀렵꾼같은 죽음의 천사가 도사린다. 목장으로 신혼여행을 온 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암호랑이까지 죽음으로 인도하는 길이다. 대를 잇고종족을 연속시키는 고귀한 신혼여행의 장소를 목장으로 택함으로써 먹이는 얻을 수 있겠으나 살아야 할 이유를 저버리고 있다. 죽음 때문에 삶을 내팽개쳐도 안 되지만 삶 때문에 죽음을 내팽개쳐도 안 된다. 그것이 자연에서 죽음이 삶을 끌어안고 삶이 죽음을받아들이는 방식이다. - P114

"옛날에는 이 계곡에 백두산사슴이 너무 많아서 우수리사슴을다 쫓아냈다면서요. 지금은 백두산사슴이 별로 없는데도 우수리사슴이 보이지 않네요. 누가 쫓아냈을까요? 토끼일까요?"
나는 강변을 걸으며 혼잣말인 듯 의뭉스럽게 물었다.
"1년 내내 밀렵꾼들이 너무 많아. 백두산사슴이든 우수리사슴이든 보이는 대로 다 죽여버리지. 내 나이 빼고는 모든 것이 줄어들기만 하고 많아지는 것이 없어. 지키는 사람도 없고… 그래도삶은 가고 있잖아?"
산지기 스테파노비치도 혼잣말인 듯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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