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70대였던 이승만은 자기중심적이고 완강하면서 변덕스러운 인물로, 열렬한 민족주의자에 애국심이 강한 반공주의자였으며 독재자 기질이 다분했다. 그는 자신이 민주적인 국가 기관 전체를 완전히 통제하고, 누구도 자신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경우에만 독실한 민주주의자였다. 이승만은 일본과 미국이 만들어낸 인물이자 평생 경험한 배신과 위선, 투옥과 정치적 망명으로 변화되고 단련된 인물이었다. 이는 조국의 무참한 근대사가 야망에 찬 젊은 정치인에게 남긴 유산이었다. 김일성 역시 전혀다른 방식으로 빚어지긴 했으나 똑같이 이러한 비극의 산물이었다.
- P105

젊은 시절 이승만은 형 집행을 가까스로 면한 정치범으로 하버드 대학에서수학하고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일생은 조국의현실을 보여주듯 고난과 실망으로 가득했다. 망명자로서 느끼는 무력감은 강대국의 눈에 비친 주권을 상실한 무기력한 국가의 모습과 같았다. 그는 박사학위를 받고 잠시 고국에 들른 후 35년을 미국에서 보냈다. 최선의 상황은 아니었지만 전문적인 탄원자가 되어 한반도가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펼쳤다. 이승만은 열정적인 민족주의자였던 만큼처세술에도 능한 야심가였다. 그가 마침내 권력을 쟁취할 수 있었던 것은 편집광적인 집념 덕분이기도 했다. - P105

전쟁사가 클레이 블레어 (Clay Blair)가 기술한 바에 따르면 하지는 이승만을 "솔직하지 않고 정서적으로 불안하며 야비하고 부패하고 예측할 수 없는인물이라 여겼다.

일본의 식민 지배가 초래한 분단은 대다수 외국인들이 밖에서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한반도는 그저 땅덩이가38선을 기준으로 분단된 것이 아니었다. 분단 상황이 사회와 문화마저 분열시켰으며 남과 북 어느 쪽이든 모두 비통한 시대의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이는 엄청난 내부 분열을 불러와 한국전쟁 동안에도 지속적으로 충돌했다. 한국전쟁은 단순히 국경을 넘어 북한이 남한을 침공한 도발 이상의 의미였다. 식민 지배를 거치면서 십수 년 동안 쌓였던 내부 분열과 모순 그리고 오랜 정치갈등이 터져 나온 위험한 상황이었다. 남북한은 거의 반세기 동안 쌓아왔던대립과 갈등을 이제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해결하려 했다. 일본의 식민 통치는너무나 기혹하여 민족주의자들은 식민지 조국에서 버틸 재간이 없었다. 당시시대 상황에서 식민지 한국은 점차 일제에 협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으면 탄압을 받았기 때문이다. 해외로 망명을 간 애국자들도 불미스러운 모습을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망명을 받아준 소련, 중국, 미국에서 활동하면서이들 강대국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은 탓이었다.
- P110

신을 믿을거라면 조상을 섬겨라 - P111

스탈린은 김일성의 리더십이 소련군보다 뛰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좋아했다. 그가 실제로 정치적인 역량과 지도력이 뛰어났다면 마음대로 다루기 어려웠을 테니 이것은 당연했다. 자신들의 요구를 충족시켜줄 수있다면 다소 경력이 부족하더라도 영웅이라고 선전하고 신화 같은 역사로 미화시킨 다음 권좌에 앉히면 그만이었다.
소련이 김일성을 선택한 이유가 바로 이거였다. 그는 교조적인 지도력을가질 필요가 없었으며, 상당 부분 그렇지도 않았다. 소련 공산당은 자신들의위성 국가에 카리스마적인 인물을 앉힐 필요가 없었다. 스탈린이 유고슬로비아의 공산지도자 요시프 브로즈 티토(Josip Broz Tito)와 마오쩌둥을 우려했던것은 이들 스스로 이룩한 성과물 때문이었다. 민족적인 색채가 강하고 지도력이 뛰어난 인물을 지원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도 결국 입증되었다.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들은 여기서분쟁을 일으키겠죠. 한국은 극동의 그리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 년 전에 그리스에서 했던 것처럼 지금 강력하게 대처해서 과감하게 맞서 싸우면 이들이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단지 준비나 하면서 방관한다면이란으로 진격하여 중동 전체를 장악할 거예요. 지금 우리가 전장에 뛰어들지않는다면 그들이 앞으로 무엇을 할지 말해봐야 소용없을 겁니다."

암울한 상황 가운데 희망적인 소식이 하나 있었다. 미군이 유엔군의 깃발아래 싸울 수 있게 된 것이다. 트루먼은 미 지상군의 투입을 승인하기에 앞서이미 유엔의 결의를 받았다. 당시에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보다 유엔의 승인을 받기가 훨씬 쉬웠다. 1950년 당시 유엔은 대체로 미국과 서유럽 국가의 이익을 대변했다. 반대세력이라고는 소련과 위성 국가들뿐이었다. 여러모로 백인 세계의 마지막 자취라고 할 수 있었다. 안전보장이사회에서는 한국에서의무력 사용을 의결하여 승인했다. 유일하게 기권한 두 나라는 비백인 국가인인도와 이집트였다. 1950년대 말에 시작한 식민지 시대의 종말이 1960년대에 가속화되고 아프리카와 아시아 그리고 중동의 신생 독립국들이 참여하면서 유엔의 구성은 극적으로 변화했다. 서구 세계의 영향력은 크게 줄어들었다. 유엔 조직 내에서도 미국과 서유럽의 보수적인 정치 분위기에 냉소적이었다. 소련은 어처구니없게도 한국전쟁에 관한 안전보장이사회 의결에 불참하여 중국 국민당 정부가 여전히 안보리에 있다는 사실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 거부권 행사를 하지 못했다. 6월 27일에 유엔은 한국전쟁 참전 결의를 승인함으로써 미군에게 유엔의 깃발을 안겨주었다. - P147

태생적으로 반(反)식민지주의자라고 확신했다. 미국은 이내 잔인하고 추악한식민지 억압 전쟁을 끝냈다. 그러자 미국의 강력한 두 가지 성향이 다시 나타났다. 백인 기독교도들의 의무감에서 현지인들을 문명화시키기 위해서라도필리핀을 식민지화해야 한다는 선교적인 요구와 가장 저열한 형태의 인종차별주의가 동시에 대두한 것이다. 그래서 게릴라들을 검둥이라는 뜻의 니거스(niggers)‘ 나 황인종을 비하하는 ‘구구스(gugus)‘라 불렀다. 구구스라는 명칭은 현지 여자들이 머리 감을 때 사용하는 나무껍질에서 나온 말이다. 이는훗날 미군이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에서 아시아인을 구별하기 위해 부르던국스(gooks)‘ 라는 말의 유래가 되었다.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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