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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네 집 ㅣ 창비시선 173
김용택 지음 / 창비 / 1998년 3월
평점 :
그 여자네 집.
어렸을적 시골 생각나게 하는 서정성이 담뿍 담긴 시.
내가 젤루다 좋아하는 시 중에 하나.
이 시를 쓰고 사모님께 엄청 구박 당하셨을 것 같다는...
그 여자네 집 - 김용택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집 해가 저무는 날 먼데서도 내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 생각하면 그리웁고 바라보면 정다웠던 집 어디 갔다가 늦게 집에 가는 밤이면 불빛이, 따뜻한 불빛이 검은 산속에 깜박깜박 살아 있는 집 그 불빛 아래 앉아 수를 놓으며 앉아 있을 그 여자의 까만 머릿결과 어깨를 생각만 해도 손길이 따뜻해져오는 집
살구꽃이 피는 집 봄이면 살구꽃이 하얗게 피었다가 꽃잎이 하얗게 담 너머까지 날리는 집 살구꽃 떨어지는 살구나무 아래로 물을 길어오는 그 여자 물동이 속에 꽃잎이 떨어지면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닿고 싶은 집
샛노란 은행잎이 지고 나면 그여자 아버지와 그여자 큰오빠가 지붕에 올라가 하루 종일 노랗게 지붕을 이는 집 노란 초가집
어쩌다가 열린 대문 사이로 그 여자네집 마당이 보이고 그 여자가 마당을 왔다갔다하며 무슨 일이 있는지 무슨 말인가 잘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소리와 옷자락이 대문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면 그 마당에 들어가서 나도 그 일에 참견하고 싶었던 집
마당에 햇살이 노란 집 저녁 연기가 곧게 올라가는 집 뒤안에 감이 붉게 익는 집 참새떼가 지저귀는 집
보리타작, 콩타작 도리깨가 지붕 위로 보이는 집 눈 오는 집 아침 눈이 하얗게 처마끝을 지나 마당에 내리고 그 여자가 몸을 웅숭그리고 아직 쓸지 않은 마당을 지나
뒤안으로 김치를 내러 가다가 "하따,이 참말로 이쁘게도 온다이이" 하며 눈이 가득 내리는 하늘을 보다가 싱그러운 이마와 검은 속눈썹에 걸린 눈을 털며 김칫독을 열 때 하얀 눈송이들이 어두운 김칫독 안으로 하얗게 내리는 집 김칫독에 엎드린 그 여자의 등에 하얀 눈송이들이 하얗게 하얗게 내리는 집 내가 함박눈이 되어 내리고 싶은 집 아무도 오가는 이 없는 늦은 밤 그 여자의 방에서만 따뜻한 불빛이 새어나오면
발자국을 숨기며 그 여자네 집 마당을 지나 그 여자의 방 앞 뜰방에 서서 그 여자의 눈 맞은 신을 보며 머리에, 어깨에 쌓인 눈을 털고 가만가만 내리는 눈송이들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가만 가만히 그 여자를 부르고 싶은 집
그 여 자 네 집
어느 날인가 그 어느 날인가 못밥을 머리에 이고가다가 나와 딱 마주쳤을 때 "어머나" 깜작 놀라며 뚝 멈추어 서서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며 반가움을 하나도 감추지 않고 환하게, 들판에 고봉으로 담아놓은 쌀밥같이, 화아한하게 하얀 이를 다 드러내며 웃던 그 여자 함박꽃 같던 그 여자
그 여자가 꽃 같던 열아홉살까지 살던 집 우리 동네 바로 윗동네 가운데 고샅 첫집 내가 밖에서 집으로 갈 때 차에서 내리면 제일 먼저 눈길이 가는 집 그 집 앞을 다 지나도록 그여자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지는 그 여자네 집
지금은 아, 지금은 세상에 없는 집 내마음 속에 지어진 집 눈 감으면 살구꽃이 하얗게 날리는 집 눈 내리고, 아, 눈이, 살구나무 실가지 사이로 목화송이 같은 눈이 사흘이나 내리던 집 언제나 그 어느 때나 내 마음이 먼저 가 있던 그 여자네 집 생각하면, 생각하면 생. 각. 을. 하. 면......
김용택 시집 ‘그 여자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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