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꿈꾸는 책들의 도시 1~2 세트 - 전2권
발터 뫼어스 지음, 플로리안 비게 그림, 전은경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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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재탄생한 소설. 부흐하임은 내 상상보다 훨씬 멋진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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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19 - 외진 곳
장은진 외 지음 / 생각정거장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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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글을 잘 쓰는데 그동안 왜 몰랐을까, 싶었는데 내 책장에 아직 읽히지 않은 그의 책이 있었다... 장은진 작가의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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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여름 2019 소설 보다
우다영.이민진.정영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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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보다 해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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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괜찮은 눈이 온다 - 나의 살던 골목에는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한지혜 지음 / 교유서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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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인터넷에서 이런 글을 본 적이 있다. 가난이란 A와 B의 선택지에서 맞게 되는 기회와 경험의 박탈이 아니라 여력이 있음에도 어느 것도 선택하지 못하는 불안의 마음이라고. 정작 그 글을 읽을 당시에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지금에 와서야 마음이 저릿해짐을 느낀다. 가진 것 없던 그 시절에서 멀어져 지금은 제법 평범한 모양새로 살아간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내 마음은 아직 그때에 머물러 있었나 보다. 소설가 한지혜의 <참 괜찮은 눈이 온다>를 읽으면서 나는 내 마음이 실로 가난함을 느꼈다. 저자는 개천에 살던 유년시절의 기억부터 규제 밖에 있는 이들에 대한 고찰까지 가족이라는 사회의 최소단위를 통해 골목골목에 자리한 기억을, 나아가 하나의 거대한 사회를 보여준다. 지나간 시절의 그리움과 아픔, 살면서 겪게 되는 절망의 순간에 우리는 어떤 삶의 태도를 가질 것인가. 그 물음은 나에게 전해졌다.



포클레인이 지나갈 때마다 벽이 흔들렸다. 흔들리는 벽에 기대어 책을 읽다가 먼지 많은 바람을 쐬러 나가면 부서진 담장 사이로 전에 본 적 없는 꽃무더기가 보였다. 나는 그게 참 신기했다. 저 벽들은 대체 언제부터, 어떻게 꽃을 품고 있던 걸까. 보고 있자면 기분이 묘했다. 그 꽃이 내게 가르쳐주는 것이 벽 속에나 꽃을 가두고 있는 인생에 대한 비관적인 상징인지, 모든 벽도 사실은 꽃을 품고 있다는 낭만적인 상징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저 조금 서러운 기분이었다. p.44



정식으로 글을 배우기 전부터 책을 좋아했던 아이, 그에게 책은 다른 세계로 가는 통로이자 부모님의 기대를 업은 삶의 무게였다. 다닥다닥 붙은 셋방에서 벽 속에 갇힌 듯한 이층집으로, 쥐들과 조우하는 좁디 좁은 다락이 있는 집으로 잦은 이사를 하는 동안 그는 집이라는 공간을 통해 "자신이 처한 상황의 비정상적인 상태를 인식"한다. 벽 속에 피어난 꽃을 보고서 비관적인지 낭만적인지 깨닫기도 전에 서러운 기분이 밀려들었던 것은 집들이 무너져가는 곳에 발을 딛고 서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의 글이 나에게 울림을 주었던 것은 자신을 가감없이 내보인다는 데에 있었다. 만약 그가 가난했던 과거를 추억하는데 그쳤더라면 나 역시 이야기를 듣는 데에서 그쳤을 것이다. 자신의 경험을 담은 글이 "현실을 모르는 낭만주의적 감상"이라 폄하 받지만 그는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고 나아가 성찰한다. 철거촌에 살았지만 철거민으로 싸워본 적 없고 집을 구하기 위해 밤낮으로 애쓴 건 가족들이지 자신이 아니었다고, 그렇기에 아무도 못 본 꽃을 볼 수 있었던 거라고. 타인의 시선에서 나를 돌아보고 또 받아들인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불과 며칠 전 어느 소설의 서평을 쓰면서 나 자신을 받아들여야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지껄여댔는데 실은 그냥 편하게 앉아 남 얘기를 하고 있었던 거다. 연민에 빠지긴 쉽고 생각하기를 멈추면 일은 간단해진다. 그러나 그 속에서 삶 또한 멈춰버린다는 것을 나는 이미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삶이란 게 참 묘하다. 눈을 뜨면 날마다 새로운 날이지만 실상 삶의 관성은 어제를 포함한 기억 속에 있다. 살아봤던 시간의 습관으로 살아보지 않은 시간을 더듬어가는 것, 현실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과거인 그런 게 삶이라는 생각도 든다. p.159

 


과거의 삶으로 새로운 시간을 더듬어간다는 것은 어쩌면 그리움으로 살아간다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그리움 속엔 언제나 가족이 있다. 좁은 방에서 살을 맞대고 자라온, 모든 걸 공유할 수 밖에 없었던 시간들을 함께 견뎌낸 사람들. 이제는 먹을 수 없는 아버지의 칼국수와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엄마의 손맛은 그리움의 산물이 됐다. 그런데 후회로 남은 순간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홀로 먼길을 달렸을 엄마의 자전거가, "쉽지 않은 시대를 아등바등 살았던 한 사내의 서사"가 담긴 가계부가 그러하다. 아버지의 마지막 존엄을 지켜주지 못한 것은 가족들 모두에게 고통으로 남았다. "모든 후회는 참회가 아니라 변명이라"지만 결코 닿지 않을 변명으로라도 자신에게 용서받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작가는 멈추지 않고 나아가는 생의 움직임이라 말한다. "이것이 내 삶의 바닥이다 싶을 때, 섣불리 솟구치지 않고 그 바닥까지도 기어이 내 것으로 움켜쥐는 힘"이 솟아나기를,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기를 응원하는 그는 함박함박 떨어지는 눈의 위로를 건낸다. 아이의 쏟아지는 질문에 진지한 자세로 대답하는 그의 노력처럼 언젠간 능숙한 솜씨로 주렁주렁 수확물을 키워낼 고추 모종은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질 것이다.



작가는 자신을 일컬어 실패에서 출발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악재의 연속에서 벼랑 끝으로 내몰리듯 구조조정을 당했던 일, 상금 때문에 수상식에 가족들을 초대하지 못했던 기억, 그 이후 오랫동안 작가로서 성과를 내지 못했던 일, 아니 그보다 훨씬 전 빈 쌀독에 주저앉아 울던 엄마의 모습을 지켜보았던 기억. 성공보다 실패가 많았던 삶을 살아온 그는 매 순간 다른 이들의 것보다 훨씬 더 높은 발아열을 견뎌내야 했다. 그러므로 그는 당신을 모른다고 힘주어 말한다. 자신보다 더 낮은 위치에 있는 이들, 차별 받고 소외당하는 이들의 삶을 조명하면서도 자신의 생각이 과연 정당한 것인지, "이런 질문마저 바닥에 묶인 어떤 삶들에 대한 무례인 것 같"다는 고민을 솔직하게 내비친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에서 나는 진정한 소설가의 고뇌를 엿본다. 당선자보다 낙선자들에게 더욱 마음이 쓰이는 사람. 누군가의 수고가 담긴 서툴고 미흡한 글을 끝까지 읽어내는 예의를 가진 사람. 소설가 한지혜는 무엇을 써야 할지 지금도 그 답을 잘 알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가 함부로 글을 쓰지 못하는 사람이라서, 낮은 자세로 굽어보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서 진심으로 그의 소설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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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8
페터 한트케 지음, 안장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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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외된 청소년들의 성장통을 다룬 영화 『월플라워』에서 지금까지도 선명히 기억나는 한 장면이 있다. 고통스러운 과거와 성 정체성, 불확실한 미래라는 문제를 지닌 이들이 어두운 터널을 질주하며 느꼈던 무한한 자유. 그 설렘의 파동은 화면 밖의 나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아이와 어른이라는 위태로운 경계에서도 그들이 밝게 웃을 수 있었던 건 터널과 같은 어두운 시기까지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닐까. 페터 한트케의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속 주인공은 그러한 고통을 마주하는 대신 터널 속 순간이 삭제되길 염원하는 인물이다. 더 이상 함께 해봐야 좋을 것 없다는 짧은 편지를 남기고 홀연히 사라진 아내 '유디트'의 흔적을 좇아 '나'는 길 위를 방황한다. 적잖은 충격에 휩싸인 남자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혼잣말을 하고 사람들을 관찰하며 폭력을 휘두르고픈 유혹에 시달린다. 어쩌면 진정으로 그를 떠나고 싶었던 사람은 그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서른을 목전에 둔 그는 인생에서 가장 혹독한 성장통을 겪고 있었다.



"이런 수수께끼 같은 것을 푸는 일이 우스울 수도 있어. 나는 다만 옛날처럼 스스로를 외톨박이로 느끼기 싫어서 그것을 간명하게 표현해내려고 해. 거리낌 없이 행동하고 말을 많이 하고 자주 웃으려고 해. 게다가 배로 회전문을 밀쳐낼 수 있을 정도로 뚱뚱해졌으면 해. 그렇게 해서 점차 남이 이상하게 보지 않는 존재가 되고 싶어." p.100



'나'는 억압된 환경에서 자란 고독한 인물이다. 알콜 중독자 아버지와 우울증을 앓는 어머니 밑에서 두려움과 불안은 일상처럼 몸에 배었고, 오스트리아의 거대한 자연 환경은 어린 그를 속박하던 존재에 불과했으므로 언제나 동굴이나 땅굴로 숨어들기 일쑤였다. 온통 금지과 거절뿐이었던 기숙 생활은 '나'를 지나칠 정도로 체계적이고 강박적인 인물로 성장케 했다. 그래서일까, 주인공이 불안정한 감정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른 존재로의 변신을 꿈꾸고, "다른 사람의 추억을 듣는 것만으로 암울했던 기억에서 해방"된 기분을 느끼는 것은 '나'라는 인물이 왜 타자화된 삶을 살았고 왜 스스로 관찰자이길 자처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관찰자에게 외로움은 숙명과도 같다.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도시를 배회하던 남자는 엉뚱하게도 오스트리아에 있는 어머니의 이웃집에 비싼 요금까지 치뤄가며 국제 전화를 건다. 그에겐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 사적인 대화를 나눌 사람이 필요했고 전화를 거는 행위 그 자체에서 심리적 안정을 느끼는 모습은 마치 넘치는 사람들 틈에서 한없이 고독한 우리네 현대인들의 자화상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해진다.



내키는 대로 유유자적 발길을 옮기는 남자를 보며 짐작했겠지만 이것은 사실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여정, 나 자신과의 타협을 다룬 소설이다. 불만족스러운 현재의 내가 아닌 미래의 더 나은 나를 꿈꾸는 남자는 하루빨리 나이 들길 소망한다. 자신에 대해 말하길 거부하고 회피적 성격을 보이던 그가 조금씩 변화의 계기를 맞는 순간들이 있다. 강박증을 가진 아이 '베네딕틴'을 돌보면서, 바짓단에 묻은 진흙을 참아내면서 '나'는 스스로 극복했다고 믿었던 유년기를 되돌아본다. 과거의 인연 '클레어'와 나눈 대화들은 그 자신도 모르던 그의 모습을 직시하게 해주었고, 사물에 지나친 애착을 가진 '한쌍의 연인'이 서로의 규칙에 따라 상생하는 모습은 그에게 자신의 결혼 생활을 반추하고 자아성찰에 이르게 했다. 유디트를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취급하고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길 종용하며 사물처럼 대했던 '나'는 역설적이게도 유디트가 죽었을까 자주 공포에 떨었다. 그 의문에 대한 답은 아이의 엄마 클레어의 입에서 나온다. 베네딕틴이 사물에 집착하는 건 사실 소유욕이 아닌 공포심 때문이라고. 있어야 할 곳에 없고 텅 비어버린 자리처럼 "일종의 소속 관계에서 오는 혼란"이었다. '나'와 유디트가 이미 오래 전에 끝난 관계를 계속 유지했던 것은 아마도 그런 공포심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울러 채워지지 않은 빈 공간이 생겨난 듯해서 고약한 기분이 들었다. 지칠 만큼 지친데다가 더럽혀지고 망쳐진 기분까지 들었다. 소외감이라고 하는 자의적이고 편의적인 포즈에 묻혀서 나는 너무 오랫동안 자족감에 젖어 살아왔다." p.191


그렇다면 '나'를 불안에 빠뜨리는 상상 속 도플갱어의 출현은 무엇을 의미할까. 조금씩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한 남자는 어느 순간 유디트와의 모든 인연이 끝이 났음을 실감한다. 그가 진심으로 이별을 받아들이자 모종의 시험에 들듯 유디트의 습격을 받고, 또 다시 홀로 길을 떠난 남자는 어딘지 낯설다. 술취한 사람을 보고도 슬쩍 길을 내어줄 뿐 일반화 하거나 유형화 하지 않는 그는 어쩐지 한풀 꺾인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따라서 채워지지 않는 공간, 텅 빈 공간 속에서 움직이는 느낌, 자신이 도플갱어로 대체되었다는 상상은 변화를 알리는 산물로 그가 탈피의 과정에 들어선 게 아닐까 짐작해본다. 자발적으로 세상의 외부인이 되어 본인의 상처만 들여다보던 인물이 세상 속의 형편없는 자신을 마주했을 때 느끼게 되는 감정, 책을 읽던 내 마음도 따끔거리던 그 공허함. 세상의 경험을 안고 한발 내딛은 그는 어린이 강도단에게 갈취당한 뒤 빈털터리 신세로 동생이 있는 에스터케이더로 향한다. 가진 것 없던 어린 시절의 그때처럼.



작가 페터 한트케는 이 소설을 두고 "한 인간의 발전 가능성과 희망을 서술하려 했다"고 한다. 왜 발전 그 자체가 아닌 가능성과 희망을 이야기했는지 '나'와 동생의 재회 장면을 읽고 깨달았다. 동생의 숙소에서 남자가 마주한 것은 오래 전의 과거다. 여행길 내내 도처에서 무언의 신호를 보내던 노란색 사물들처럼 15년 된 손수건이나 신발, 카드 그밖의 오래된 동생의 물건들은 그를 순식간에 어린 시절로 회귀시킨다. 눈밭에서 동생의 배설 현장을 목격하고서 제대로 재회를 하기도 전에 도망쳐버린 '나'의 심정을 조금은 알 것도 같다. "감정이란 것이 일시적인 것이 아닌가. 금방 사라져버리는것이 사람의 감정이 아니던가."라며 그 덧없음에 대해 여러차례 얘기했듯이 우리는 줄곧 무언가 깨달은 듯 하다가도 뒷걸음질 치게 되는 순간을 겪는다. 그가 변화해가는 것과 별개로 악몽이 계속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듯 작가 한트케는 말해주지 않고 흐르는 풍경과 사물을, 인물들의 상념과 꿈을 그저 보여줄 뿐이다. 정형화 된 플롯을 따르지 않아서일까. 이토록 한 사람의 머릿속을 여과없이 들여다본 느낌이라니 참으로 생경하다.



책 『
녹색의 하인리히』 속 하인리히의 삶을 이정표 삼아 방랑하던 '나'는 유디트와 함께 마지막 목적지로 감독 '존 포드'를 찾아간다. 그 둘의 모습이 꼭 재판장의 정당한 판결을 기다리는 부부 같아 웃음이 난다. 그들에게 일어난 일련의 사건을 듣고 존 포드의 얼굴에 가득 피어난 따뜻한 웃음에 가까이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란 말이 절로 떠오른다. 고단한 여정의 끝에서 '나'는 하인리히와는 다른 방식의 해피엔딩을 맞았다. 과부 유디트가 적장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어버렸다는 성경 이야기처럼 그들의 지리멸렬한 관계를 유디트가 놓아버림으로써 비로소 '나'는 오래되고 미성숙했던 자신을 떠나보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자유를 상징하는 나라의 근간을, 그 이면을 되돌아본다. 신체적 제약과 사고로 거듭 좌절을 겪은 어느 가정부의 줄타듯 가벼운 발걸음을 상상해본다. 어쩌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 행복보다 잦은 고통의 순간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아닐까. 어두웠던 시간들까지 자신을 이룩한 하나의 역사로 제각각 자리를 차지하고서 그렇게 우리는 살아가고, 또 살아갈 것이다. '우리'라는 연대적 시선으로, 삶이란 고난의 여정을 함께 걷는 동행자로서 서로를 보듬어가면서. 문득 여행을 떠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그가 앞서 보여주었듯 때론 거리를 두어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분명 존재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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