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괜찮은 눈이 온다 - 나의 살던 골목에는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한지혜 지음 / 교유서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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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인터넷에서 이런 글을 본 적이 있다. 가난이란 A와 B의 선택지에서 맞게 되는 기회와 경험의 박탈이 아니라 여력이 있음에도 어느 것도 선택하지 못하는 불안의 마음이라고. 정작 그 글을 읽을 당시에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지금에 와서야 마음이 저릿해짐을 느낀다. 가진 것 없던 그 시절에서 멀어져 지금은 제법 평범한 모양새로 살아간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내 마음은 아직 그때에 머물러 있었나 보다. 소설가 한지혜의 <참 괜찮은 눈이 온다>를 읽으면서 나는 내 마음이 실로 가난함을 느꼈다. 저자는 개천에 살던 유년시절의 기억부터 규제 밖에 있는 이들에 대한 고찰까지 가족이라는 사회의 최소단위를 통해 골목골목에 자리한 기억을, 나아가 하나의 거대한 사회를 보여준다. 지나간 시절의 그리움과 아픔, 살면서 겪게 되는 절망의 순간에 우리는 어떤 삶의 태도를 가질 것인가. 그 물음은 나에게 전해졌다.



포클레인이 지나갈 때마다 벽이 흔들렸다. 흔들리는 벽에 기대어 책을 읽다가 먼지 많은 바람을 쐬러 나가면 부서진 담장 사이로 전에 본 적 없는 꽃무더기가 보였다. 나는 그게 참 신기했다. 저 벽들은 대체 언제부터, 어떻게 꽃을 품고 있던 걸까. 보고 있자면 기분이 묘했다. 그 꽃이 내게 가르쳐주는 것이 벽 속에나 꽃을 가두고 있는 인생에 대한 비관적인 상징인지, 모든 벽도 사실은 꽃을 품고 있다는 낭만적인 상징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저 조금 서러운 기분이었다. p.44



정식으로 글을 배우기 전부터 책을 좋아했던 아이, 그에게 책은 다른 세계로 가는 통로이자 부모님의 기대를 업은 삶의 무게였다. 다닥다닥 붙은 셋방에서 벽 속에 갇힌 듯한 이층집으로, 쥐들과 조우하는 좁디 좁은 다락이 있는 집으로 잦은 이사를 하는 동안 그는 집이라는 공간을 통해 "자신이 처한 상황의 비정상적인 상태를 인식"한다. 벽 속에 피어난 꽃을 보고서 비관적인지 낭만적인지 깨닫기도 전에 서러운 기분이 밀려들었던 것은 집들이 무너져가는 곳에 발을 딛고 서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의 글이 나에게 울림을 주었던 것은 자신을 가감없이 내보인다는 데에 있었다. 만약 그가 가난했던 과거를 추억하는데 그쳤더라면 나 역시 이야기를 듣는 데에서 그쳤을 것이다. 자신의 경험을 담은 글이 "현실을 모르는 낭만주의적 감상"이라 폄하 받지만 그는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고 나아가 성찰한다. 철거촌에 살았지만 철거민으로 싸워본 적 없고 집을 구하기 위해 밤낮으로 애쓴 건 가족들이지 자신이 아니었다고, 그렇기에 아무도 못 본 꽃을 볼 수 있었던 거라고. 타인의 시선에서 나를 돌아보고 또 받아들인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불과 며칠 전 어느 소설의 서평을 쓰면서 나 자신을 받아들여야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지껄여댔는데 실은 그냥 편하게 앉아 남 얘기를 하고 있었던 거다. 연민에 빠지긴 쉽고 생각하기를 멈추면 일은 간단해진다. 그러나 그 속에서 삶 또한 멈춰버린다는 것을 나는 이미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삶이란 게 참 묘하다. 눈을 뜨면 날마다 새로운 날이지만 실상 삶의 관성은 어제를 포함한 기억 속에 있다. 살아봤던 시간의 습관으로 살아보지 않은 시간을 더듬어가는 것, 현실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과거인 그런 게 삶이라는 생각도 든다. p.159

 


과거의 삶으로 새로운 시간을 더듬어간다는 것은 어쩌면 그리움으로 살아간다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그리움 속엔 언제나 가족이 있다. 좁은 방에서 살을 맞대고 자라온, 모든 걸 공유할 수 밖에 없었던 시간들을 함께 견뎌낸 사람들. 이제는 먹을 수 없는 아버지의 칼국수와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엄마의 손맛은 그리움의 산물이 됐다. 그런데 후회로 남은 순간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홀로 먼길을 달렸을 엄마의 자전거가, "쉽지 않은 시대를 아등바등 살았던 한 사내의 서사"가 담긴 가계부가 그러하다. 아버지의 마지막 존엄을 지켜주지 못한 것은 가족들 모두에게 고통으로 남았다. "모든 후회는 참회가 아니라 변명이라"지만 결코 닿지 않을 변명으로라도 자신에게 용서받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작가는 멈추지 않고 나아가는 생의 움직임이라 말한다. "이것이 내 삶의 바닥이다 싶을 때, 섣불리 솟구치지 않고 그 바닥까지도 기어이 내 것으로 움켜쥐는 힘"이 솟아나기를,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기를 응원하는 그는 함박함박 떨어지는 눈의 위로를 건낸다. 아이의 쏟아지는 질문에 진지한 자세로 대답하는 그의 노력처럼 언젠간 능숙한 솜씨로 주렁주렁 수확물을 키워낼 고추 모종은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질 것이다.



작가는 자신을 일컬어 실패에서 출발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악재의 연속에서 벼랑 끝으로 내몰리듯 구조조정을 당했던 일, 상금 때문에 수상식에 가족들을 초대하지 못했던 기억, 그 이후 오랫동안 작가로서 성과를 내지 못했던 일, 아니 그보다 훨씬 전 빈 쌀독에 주저앉아 울던 엄마의 모습을 지켜보았던 기억. 성공보다 실패가 많았던 삶을 살아온 그는 매 순간 다른 이들의 것보다 훨씬 더 높은 발아열을 견뎌내야 했다. 그러므로 그는 당신을 모른다고 힘주어 말한다. 자신보다 더 낮은 위치에 있는 이들, 차별 받고 소외당하는 이들의 삶을 조명하면서도 자신의 생각이 과연 정당한 것인지, "이런 질문마저 바닥에 묶인 어떤 삶들에 대한 무례인 것 같"다는 고민을 솔직하게 내비친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에서 나는 진정한 소설가의 고뇌를 엿본다. 당선자보다 낙선자들에게 더욱 마음이 쓰이는 사람. 누군가의 수고가 담긴 서툴고 미흡한 글을 끝까지 읽어내는 예의를 가진 사람. 소설가 한지혜는 무엇을 써야 할지 지금도 그 답을 잘 알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가 함부로 글을 쓰지 못하는 사람이라서, 낮은 자세로 굽어보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서 진심으로 그의 소설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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