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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 박경리 시집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0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시집의 제목과는 다르게, 어쩌면 조금 죄송하게도 나에게 있어 박경리 선생님의 이름은 어떤 의무감을 떠올리게 한다. 토지를 어서 빨리 다 읽어봐야 한다는.
고등학교 때 교과서를 통해 처음 접하게 된 소설 '토지'는 여느 문학 소설들과 크게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는 어떤 소설이든, 어느 시이든 내게는 다 시험 범위 중 하나였고,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외워야만 하는 것들이었으니까.
그러다 문학을 시험 범위가 아니라 내가 정말 원해서 보게 되면서부터는 소설 한편 한편이, 시 한편 한편이 다르게 느껴지게 되었다. 건성건성으로 읽던 것을 그만두고 읽으면서 좀 더 많은 것을 느껴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 중심점에 박경리 선생님의 '토지'가 있다. 한 편의 소설 속에 우리네 역사와 문화 등을 거침없이, 솔직하고 진솔하게 담고 있는 소설. 소설을 소설로써 평가할 수 없는 우리의 문화유산과 같은 소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렇게 대단하다 느끼는 소설을 아직까지도 완독을 하지 못하고 있다. 시작을 이 책으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에 읽기 시작한 '아리랑'이나 '한강'은 완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생각 속에 머물던 '토지' 완독을 목표로 하고 있던 중에 박경리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다는 뉴스를 보게 되었다. 누군가의 죽음은 늘 마음 한 켠이 싸해지게 마련이지만 박경님 선생님의 소식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기에 그 놀라움과 아픔이 더 컸었다.
후에 박경리 선생님의 유고 시집이 나온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제목부터 박경리 선생님의 평소 생활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이 시집. 읽어야겠다고 마음 먹은 건 상당히 오래전인데 이제서야 읽게 되었다.
오랜만에 읽는 시집이고, 박경리 선생님의 유고 시집이기에 조금은 긴장된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
책 속에 담긴 시집들은 제목과 같이 참 마음이 편안해 지는 내용이었다. 표현이 적당할는 지 모르겠는데 구수한 느낌이랄까. 읽으면서 괜스레 아주 오래전의 기억을 더듬게 되고, 어린 시절 친구들 혹은 부모님과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되었다.
같은 한국어를 쓰는데도 쓰는 사람에 따라 참 풍기는 느낌이 다르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리고 글로써 사람의 마음을 얼마나 토닥거려 줄 수 있는지도.
한국적인 정서를 글로써 가장 잘 표현해내시는 분 중에 한 분이 아마 박경리 선생님이 아닐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이 분의 새로운 글들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새삼 안타까웠다. 그래도 이 분께서 남겨주신 글들이 있으니 이제는 미루지 말고 조금씩이라도 읽어봐야겠다. 어떤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읽고 싶다는 마음에서.
한
육신의 아픈 기억은
쉽게 지워진다
그러나
마음의 상처는
덧나기 일쑤이다
떠났다가도 돌아와서
깊은 밤 나를 쳐다보곤 한다
나를 쳐다볼 뿐만 아니라
때론 슬프게 흐느끼고
때론 분노로 떨게 하고
절망을 안겨 주기도 한다
육신의 아픔은 감각이지만
마음의 상처는
삶의 본질과 닿아 있기 때문일까
그것을 한이라 하는가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