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옷장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 지음, 신유진 옮김 / 1984Books / 202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소설이 시작되고, 처음엔 도대체 뭔 소린가 했다. 대화체가 따옴표 안에 들어있지 않고 꺽쇠 << >>안에 들어가 있어서 이게 대화인 거 같은데 회상인지, 지금 일어나는 일인지조차 헷갈렸다. 그러다 갑자기 깨닫는다. 


아! 지금 일어나는 일은.... 낙태구나...하고 말이다. 게다가 "낙태 전문 산파의 집에 갔다가 나온 스무 살의 여자아이"(...9p)의 너무나 솔직하고 담담한 고백체의 소설이다. 


생각들이 이어진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소설 속에서 설명은 없다. 그저 낙태를 하고 기숙사로 돌아온 드니즈 르쉬르의 지금까지 일어난 일과 과거의 회상과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이유 등에 대한 생각이 끝도 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그 생각들을 통해 독자는 드니즈가 어떤 집안에서 태어나고 어떤 생활을 했으며 어떤 교육을 받고 어떤 사춘기 시절을 지나왔는지 알게 된다.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드니즈의 지금 상태나 결과가 같지는 않더라도 충분히 공감하고 가슴 아프고 이해가 된다. 


노동자에서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자영업을 하게 된 드니즈의 부모는 열심히 일해서 신분 상승을 하게 된 자신들에게 자부심을 느낀다. 그리고 그들의 외동딸은 좋은 교육을 통해 그들보다 한 단계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란다. 때문에 열심히 벌어 좋은 학교에 보내는 것을 그들의 최선으로 여긴다. 하지만 그렇게 돈을 벌기 위해 그들은 딸이 가게에서 노동자들의 눈요기가 되는 것을 은근히 종용하거나 그들 스스로는 노동자의 언어(욕설), 행동(거침없고 매너없는)을 바꿔보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드니즈는 여기에서 괴리감을 느낀다. 자신은 하층 계급에 속한다고 여기지만 갑자기 상위 학교에 입학하게 되면서 다른 학생들과 친구가 될 수 없음을, 학교 자체에서 자신을 이상하게 여기니 자신은 늘 이방인으로 여기면서 급기야 부모에게 증오와 학교에 복수심을 갖게 된다. 


"내가 아무리 학위를 쌓아 놓아도 절대 숨기고 싶은 것, 내 가족의 추함, 주정뱅이들의 바보 같은 웃음, 내가 얼마나 천박한 말투와 몸짓으로 채워진 멍청한 년이었는지를 감출 만큼 충분하지는 않을 것이다. "...189p


"내 부모를, 손님들을, 가게를 늘 싫어했던 것은 아니다.....타인들, 교양 있는 사람들, 선생님들, 예의 바른 사람들, 나는 이제 그들 역시 증오한다. 지긋지긋하다. 그들에게, 모두에게, 문화, 내가 배웠던 모든 것에 구역질이 난다. 나는 사방에서 농락당해다..."...15p


드니즈 르쉬르가 바로 아니 에르노라는 사실이 더욱 가슴 아프게 하는 것 같다. 거짓이나 허구는 하나도 없다는 그녀의 자전적 소설의 가장 첫 번째 이야기인 <빈 옷장>은 아마도 그녀 가슴 안에 있던 감정들을 비우는 첫 번째 시도였을지도 모른다. 옷장을 비우는 행위는 다시 채우기 위해서 한다. 계절이 바뀐 옷을 담기 위해 혹은 낡고 맞지 않는 옷을 버리고 새롭고 잘 맞는 옷을 채우기 위해 비운다. 어쩌면 <빈 옷장>은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는 작업을 통해 앞으로 자신이 만들어 갈 새로운 이야기를 채우기 위한 행위는 아닐까. 


#아니에르노 #자전적소설 #빈옷장 #도서관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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