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곰배령, 꽃비가 내립니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여기는 곰배령, 꽃비가 내립니다 - 세쌍둥이와 함께 보낸 설피밭 17년
이하영 지음 / 효형출판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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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일상에서 치열함을 무기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 그런 일상의 사람들은 가끔 그 치열함에 치여 스스로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에 대해 궁금증조차 품지 못할때가 있다.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그토록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일까? 어쩌면 당연하게 한번쯤은 의문을 품었어야 하는 이 질문에 가장 당연한 답은 행복이 아닐까 한다. 치열하게 달리고 뛰어넘어 행복한 삶을 쟁취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 그것이 아마도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평범하며 동시에 가장 현명한 답이리라.

당신은 어디에서 행복을 꿈꾸고 있나요?
갈수록 농촌이나 산촌, 어촌은 비어만 가고, 젊은 사람들은 도시에 몰려드는 세상.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니, 진정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사람많은 도시서 인간관계를 맺으며 사회적 동물의 하나로 비비적 대며 살아가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들때도 있다. 하지만 사람많은 도시에서 살아가기 위해 사람들은 사회적 동물로서의 관계나 행복에 집중하기 보다는 어느사이엔가 경쟁하고 달리며 경주에서 이겨야만 그에 따른 보상을 받을 것만 같은 압박에 시달리게 된다. 물론 어느 경주에나 승리자가 있고, 그 경주에서 이기는 순간의 행복이나 성취감은 분명 행복이라는 단어로 설명될 수도 있을테다. 하지만 하나의 경주에 승자가 한명 뿐이라면 한명의 승자를 위해 희생되어야 하는 다른 이들의 힘겨움에 대한 댓가가 너무 큰 것은 아닐까? 행복을 얻기 위해 내달리고 있는 지금. 우리는 과연 행복할까? 왜 행복은 반드시 쟁취해야만 하는 것일까? 행복은 쟁취하기 보다는 누리는 것 부터 시작할 수는 없는 것일까?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어디서나 시작하고 어디서나 살아갈 수 있다는 무모한 자신감을 가지고 17년을 강원도 어느 산골에서 살아온 한 여인처럼 말이다. 그녀의 행복은 쟁취한 것일까? 아니면 그저 있는 그대로를 누리는 것일까?

자연과 함께, 시간과 함께, 행복과 함께
<여기는 곰배령, 꽃비가 내립니다>는 도시를 떠나 강원도 곰배령에 자리를 잡고 민박을 하며 세 쌍둥이의 어머니로 살아가고 있는 어느 여인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모든 것이 불편할 것 만 같은 깊은 산 속의 어느 곳에서 다른 사람처럼 도시의 삶에 길들여져 있다가 어느날 갑자기 그것들이 없는 곳으로 순간이동을 이룬것같은 삶. 그녀의 말처럼 이전의 삶이 모두 없어지고 새로운 세상에 익숙해지며 이전의 중요했던 것들을 놓고 새로운 것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게 되는 그녀의 산중생활기는 그래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힘에 겹고 버겁기 보다는 구름위를 걷듯, 혹은 도라지 꽃 가득한 곰배령의 설피밭을 걷듯 꿈같고 폭신폭신하기만 하다. 시간이 흐르는 것을 당연하다 하고, 자연에서 얻는 것들에 감사하며, 그것만으로도 현재의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여유를 가진 그 여인의 삶, 아이들의 교육을 걱정하기 보다는 아이들의 성장을 흐뭇해하는 그녀의 모습은 그래서 치열하지 않지만 편안하고, 화려하지 않지만 소박한 행복을 가득 담고 있는 것만 같다.

모든 것의 어울림에서 찾은 행복.
그녀가 곰배령 산중에서 얻은 것에 이름을 붙이자면 아마도 그것은 행복일 것이다. 모든 것들이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삶. 사람이라고 하여 그것들을 지배하거나 가지려 하지 않고 그것이 무엇이든 어울려 한 덩어리가 되어 가는 법을 배워하는 인생은 그래서 어쩌면 당연히 행복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누구나 한번쯤 도시의 복잡함에서, 그리고 인생의 치열함에서 한발자국쯤 비껴나 자연과 함께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안에는 지금껏 익숙한 것들을 버리고 새로운 세상에서 적응하며 새로운 나를 만들어야 한다는 도전의 의미도 담겨 있다. 그녀의 삶이 부럽지만 우리 모두가 그녀처럼 몇해 동안 열두채의 집을 짓고서라도 그곳에 살겠다는 의지를 불태우지 못하는 것은 익숙해진 것들을 버리고 새로운 것들을 찾아 떠나야 하는 도전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세상의 치열함에서 멀어져 강원도 산중에 열두번의 집을 짓고 자연에 익숙해져 살아가는 그녀의 삶은 오히려 도전적이고 열정적이다. 행복을 찾기 위해 무엇인가를 버리고 새로 시작하는 그녀의 의지는 그래서 그녀가 지금 누리고 있는 행복의 삶만큼이나 부러운 또 하나의 그녀만의 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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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영 2010-03-07 1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tiktok798님 안녕하세요^^
<여기는 곰배령, 꽃비가 내립니다> 읽어주셔서, 독후감도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tiktok798님의 리뷰중 '누리는 행복'을 읽으면서 '달마야 놀자'라는 영화의 한 장면이 떠 올랐습니다.
밑빠진 항아리를 연못속에 풍덩 집어 던지던 ^^ 그 장면에서 느끼던 통쾌함이 제 마음을
후르륵 스쳐지나갑니다.
초등학교 일학년때부터 타고다니던 만원버스의 추억도 떠 오릅니다.
아마도 도시에서 나름 치열하게 살았던 시절이 제게도 있었음을 말하고도 싶은게지요^^
갱년기를 핑게로 자꾸만 주저앉고 싶어하는 요즘의 제 일상에
저도 덩달아 '도전과 열정'이라는 샘물을 부어봅니다.
신선한 자극에 감사드리며
세쌍둥이네 풀꽃세상 홈피(www.jindong.net)의 '풀꽃사는 이야기방'에도 tiktok798님의 리뷰 '어울림으로 살아가는 법'를 게시합니다.
happy new spring time~
 
<마망, 너무 사양해>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마망 너무 사양해 - 행복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꼬마 파리지앵의 마법 같은 한마디
이화열이 쓰고 현비와 함께 그리다 / 궁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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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부모를 통해서 세상을 본다고 한다. 엄마와 아빠라는 보호그늘 아래에서 세상에 정식으로 발걸음을 내딛기 전, 세상을 보는 방법과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들을 배워하나며 유년 시절을 보내고, 그 기초로 세상과 정식으로 소통하며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해나간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부모라는 자리는 존재자체만으로 세상이며 하늘이고, 그늘이다.

파리지앵 아빠와 한국인 엄마, 그리고 꼬마 파리지앵들..
<마망 너무 사양해>의 작가 이화열은 한국인 여성이지만 오래전부터 파리에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고 있는 여성이다. 그녀는 파리지앵인 남편을 만나 작은 파리지앵들을 둘이나 키우며 살아간다. 전통 파리지앵이었던 남편과는 다르게 한국에서 건너가 파리를 배우며 살아가는 한국 여인. 그리고 태어나면서부터 파리지앵이었던 두 아이들의 조합은 아이들에게는 세상을 배워가는 과정이고, 한국의 여인에게는 파리를 배워나가는 과정이다. 그래서일까? 이 가족의 엄마와 아이들은 일방적으로 한쪽이 한쪽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통해 세상을 배워나가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아이들은 엄마와 아빠를 통해 어른들의 세상을 배워나가고, 아빠는 엄마를 통해 문화가 다른 한국에 대해 생각해보며, 엄마는 아이들과 남편을 통해 파리에 대해 배워나가는 끝없는 소통과 교감이 있는 가족. 그 소통과 교감은 이들 가족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자 이 책의 주요 내용이기도 하다.

어른, 아이들을 통해 세상을 다르게 보다.
파리지앵 아빠와 한국인 엄마를 둔 9살 단비와 6살 현비는 한국의 아이들과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마망 너무 사양해를 통해 사람들에게 손을 내민다. 무엇이든 경쟁과 승리를 통해 쟁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가게 되는 한국사회와는 조금 다른 듯 보이는 프랑스에서 자라나는 아이들. 경쟁과 승리를 통해 성취하는 것들이 진정한 자신의 것들이라 배우며 자라났던 한국인 어머니의 눈에 자신의 존재를 고민하고 자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감사하는 6살 아들과 동생과는 다르게 단호하고 강단있는 모습으로 여장부 같은 이미지를 가지게하는 단비는 그녀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에 대한 눈을 선물하고, 그녀는 아이들을 통해 프랑스를 배우고 자신이 그동안 미쳐 깨닫지 못했던 좀 더 자유로운 세상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어른들을 통해 아이들이 세상을 배우듯, 프랑스에서 자라난 자신의 아이들을 통해 그녀 역시 조금 다른 세상을 맛보고 있는 것이다.

자유롭게, 더 멀리
경쟁에서 이긴자만이 승자로 기억된다는 우리 나라. 그래서 아이들은 어려서 부터 친구들과 경쟁하고 세상과 싸워 이겨야 한다는 투사정신에 가까운 압박을 받는다. 학원을 서너개씩 다니고 아침부터 밤까지 한권의 책보다는 수학공식과 싸워야 하는 아이들을 보면 아직 미혼인 나는 결혼후 나도 저렇게 나의 아이들에게 무거운 짐을 강요하는 것은 아닐까 고민하게 될 정도로 말이다.

언젠가 이제는 환갑에 가까운 나이가 되신 엄마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먼저 시집간 여동생이 맞벌이를 이유로 엄마에게 손주 키워달라고 하면 엄마는 어떻게 할거냐고 말이다. 엄마는 빙긋 웃으시더니 조금은 꿈꾸듯이 말씀하셨던 것 같다. "당연히 키워줘야지. 근데 너희들 키우던 것 처럼은 안키울거야. 어릴때는 공식하나 더 외우는 것 보단 책 한줄 더 읽고 자유롭게 생각하는 법을 배우는게 더 나은거라는 걸 너희들 다 크고 나서 깨달았거든. 너희들 키울때 그걸 알았으면 조금 더 좋은 엄마가 됐겠지만 이제라도 알았으니 손주는 그렇게 키워야지."

존재를 고민하고 세상을 꿈꾸는 나이. 그 나이에 맞는 고민하고 꿈꾸는 방법 그녀가 6살 현비와 9살 단비를 보며 충격을 받을 때가 있다고 고민하는 것은 자신은 그 시절에 생각하지 않았던 가장 중요한 것들을 그녀의 아이들은 놓치지 않고 발견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이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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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 Alice in Wonderland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1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헐리웃를 지휘하는 영화감독들 중 천재감독을 한명 꼽아보라고 한다면 나는 단연코 팀버튼을 꼽는다. 비틀주스와 가위손으로 시작해 크리스마스 악몽을 지나 찰리와 초콜릿 공장, 그리고 스위니 토드까지 언제나 하나의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는 듯 해 보였던 그의 작품은 뭐랄까..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가장 섬뜩한 모습을 만들어내는 재주가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팀버튼의 이름을 들으면 평범하지 않은 것들을 기대하고 범상치 않은 이야기를 꿈꾸게 된다. 그만의 독특한 자유로움과 섬뜩한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에 말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책과 동일한 이야기를 담고 있지는 않다. 이미 소녀 시절에 이상한 나라에 다녀왔던 앨리스가 이상한 나라에서의 경험을 꿈으로만 생각하고 잊고 지내며 성장한 19살의 여인이 된 어느날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의 경험이 아닌 그저 상상이라고 생각했던 앨리스, 그녀 앞에 다시 나타난 조끼 입은 토끼로 인해 그녀는 다시 이상한 나라에 초대된다. 공포정치로 이상한 나라를 압박하는 붉은 여왕의 손에서 이상한 나라의 국민들을 구해낼 영웅으로 예언된 채 말이다. 이미 소녀가 아닌 아름다운 여인으로 자라난 앨리스. 과거의 경험을 모두 잊고 이상한 나라에 들어오게 된 그녀는 예언대로 이상한 나라의 국민들을 붉은 여왕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해 하얀여왕을 도울수 있을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팀 버튼이라는 감독과 조니뎁이라는 조합만으로도 사람들에게 많은 환상을 불러 일으켰던 영화이기도 하다. 여기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는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엄청난 상상력은 왜 팀버튼이 이 이야기를 이제야 영화로 만드는지가 의아할 정도로 팀버튼 식의 뒤틀림이 가득할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하기도 했다. 어떠한 소재를 가지고도 특유의 상상력으로 사람들을 오싹하게 만들었던 그의 기발함이 또 하나의 기발함을 만나 어떤 모습으로 재창조 될지 기다리는 것 만으로도 즐거웠다고 해야할까? 그래서 극장에서 만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화려한 화면과 독특한 캐릭터들만으로도 충분히 팀버튼스러움을 바라는 기대에 어느 정도는 부응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눈으로 보이는 팀버튼스러움에 만족했다면 스토리면에서는 약간 아쉬움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팀버튼 만이 보여줄 수 있었던 섬뜩함. 곱씹을수록 전혀 아름답기보다는 기묘했던 그만의 뒤틀림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점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그래서 지극히 마이너스러움을 내뿜었던 팀버튼과 초대형 메이져 마이너 배우라는 조니뎁의 또 한번의 만남. 그래서 늘 아이들을 위한 소재를 이용해 어른을 위한 동화를 만들었던(그것도 잔혹동화로..), 그들의 과거 작품들을 볼때는 여러모로 적응이 안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늘 실험적이었던 팀 버튼이 이번에는 영화의 이야기가 아닌 3D라는 하드웨어를 앞세우기 위해 만들어낸 영화라고 생각한다면 이번엔 스토리가 아닌 그 영상미와 실험정신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도 되지 않을까? 최근 3D로 큰 인기를 끌었던 아바타가 본 작품의 개봉 후 3D작업을 따로 하여 개봉함으로써 일반 영화 상영과 3D영화 상영의 시차를 두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2D와 3D를 동시에 개봉하여 관객을 기다리고 있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그 나름의 가치가 분명 있는 것 같다. 게다가 팀버튼과 그의 아내 헬레나 본햄 카터, 그리고 이들 부부의 아이들에게 기꺼이 대부가 되어준 조니뎁이라는 가족이 만들어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섬뜩함 대신 아름다움을 채워 넣음으로서 어른을 위한 잔혹동화보다는 아이들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는 생각을 해본다. 혹시 아는가? 팀 버튼도 이제는 자신의 아이와 손 잡고 볼만한 섬뜩하지 않은 아름다운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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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의 유토피아 -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꿈꾼 세계 키워드 한국문화 5
서신혜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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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를 바 없는 하나의 민족안에서 서로 다른 이념을 앞세워 총구를 겨누는 전쟁이 일어난다. 남쪽과 북쪽의 군인들은 각자의 국가를 위해 목숨을 걸고 자신의 형제를 향해 총을 쏘아댄다. 하지만 그들에게 이념은 큰 의미가 없다. 단지 나의 형제가 그 전쟁을 통해 죽었고, 나의 친구가 죽음 앞에 서 있을 뿐이다. 국가는 이념을 앞세우지만 그들은 자신과 가족, 형제를 위해 싸운다. 이제 남과 북은 서로의 가족과 친구를 죽인 적일 뿐이다. 분명 그들은 하나의 민족이자, 그들 자체로 가족이고 친구임에도 말이다. 매일매일 동료가 죽어나가는 전쟁터, 그 안에서 어느날 아군과 떨어져 낙오하게 된 몇몇의 병사가 생겨난다. 이곳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야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외따로 떨어져 있는 곳에서 전쟁따위는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열심히 일하고 그 일의 수확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 예절은 있지만 힘은 없고, 먹고 살 식량은 있지만 개인의 부는 없는 곳, 남과 북의 낙오한 병사들은 그곳에서 만나 새롭게 하나의 가족으로 태어난다.

몇년 전 큰 인기를 끌었던 영화 중에 웰컴투 동막골이라는 작품이 있었다. 6.25전쟁을 배경으로 낙오한 남과 북의 병사들이 세상과 거의 격리되다시피 한채로 자신들만의 사회를 구성하고 살아가는 동막골이라는 마을에 흘러들면서 이념을 앞세워 싸우던 전쟁의 적이 아닌 말이 통하고 생각이 통하는 하나의 민족임을 확인하고 새로운 우정과 의리를 쌓아가며 진정한 인간애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그렸던 이 영화를 보며 사람들은 전쟁중이던 그들의 시대적 배경보다 그들이 살아가는 동막골만의 모습과 그 안의 새로운 사회상에 매력을 느꼈었다. 누구하나 욕심을 부리지 않고, 힘을 앞세우지 않으며, 권력보다는 존경으로 이끌어 나가는 사회. 동막골 사람들의 일상은 우리가 한번쯤 꿈꾸었던 인간 그대로의 삶, 그리고 지금은 잃어버린 자연의 하나로서의 사람들의 삶을 갈망하게 했었다. 그리고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동막골의 세상은 그대로가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이 꿈꾸었던 조선인의 유토피아와 맞닿아 있었다.

사람들은 언제나 현실을 탈피하는 이상향을 꿈꾸며 살아간다. 그래서 지역과 시대를 막론하고 어떤 시간과 장소의 사람들이던 그들만의 꿈의 세계를 그리고 상상하며 살아왔다. 때로는 유토피아라 불리웠고, 때로는 무릉도원이라 불리웠으며, 종교적으로는 천국이 될수도, 극락이 될 수도 있는 아무걱정없는 행복한 사회. 이름과 구체적인 상상은 달랐다 할지라도, 그들이 살아갔던 시대와 장소와는 달랐던 그들만의 이상향은 과거에도 있어왔고 현재에도 존재하여, 아마도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만들어지고 그려질 것이다.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아닌지와는 별개로 그것이 바로 그 시대의 사람들이 원하는 진정한 국가이며 사회이고 정의이기 때문이다.

<조선인의 유토피아>는 이렇게 수 없이 많이 존재했었던 사람들의 꿈. 바로 그 이상향들 중에서도 우리의 조상들이 그리고 원했던 이상향의 모습에 집중하여 내용을 담고 있다. 꿈에서 보았던 복숭아 나무 가득한 무릉도원에서부터 실제로 존재했다고 전해지는 미원이라는 사회까지, 그들이 꿈꾸고 바람해왔던 유토피아의 기록과 자료들을 통해 당시의 지식인과 백성들이 어떤 세상을 이상적으로 생각했었는지, 그리고 현실의 어떤 부분에서 벗어나고자 했었는지를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살펴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한 시대의 사람들이 가장 바랬던, 가장 바람직한 꿈의 그곳은, 그 시대의 사람들이 최고의 가치로 놓았던 것은 어떤것인지 부터, 당시의 사회에서 그들이 가장 피하고 싶었고, 부조리하다고 느꼈던 모순들이 어떤 것들이었는지까지를 역설적으로 설명해주는 시대의 이념을 설명하는 자료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이야기처럼 우리 조상들의 이상향은 서양의 그것들과는 꽤 다른 모습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위도식하는 것으로도 인생을 풍요롭게 살 수 있는 곳을 꿈꾸었던 서양의 사람들에 비해 우리의 조상들이 꿈꾸었던 유토피아는 일한 만큼 거두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인류 처음의 모습에 가까웠으니 말이다. 노동의 가치를 알고, 자연과 하나가 되어 인간도 자연의 일부가 되어 살아갈때 진정한 이상의 나라가 된다는 우리 조상들의 꿈의 세상. 작게는 권력으로 대변되는 힘으로부터, 크게는 무엇인가를 소유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인간의 욕심을 경계하고 무엇이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두는 것에 최고의 가치를 두었던 우리의 이상향은 그래서 서양의 그것보다 어찌보면 현실가능하고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가능성을 상상하게 한다.

사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그들이 꿈꾸었던 유토피아가 실제하는가는 중요한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시대가 바뀌면 시대를 이끄는 정신과 이념이 바뀌듯, 한 시대의 사람들이 꿈꾸는 이상향 역시 언제나 늘 바뀌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한 시대의 유토피아가 아무런 가치도 없는 허무맹랑한 것은 아닐것이다. 누군가가 바라는 꿈은 그 사람의 가치관과 인생의 목표, 그리고 사고방식을 보여주듯이, 시대의 유토피아 역시 그 시대의 흐름과 배경, 그리고 최고의 가치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료로서 그리고 후대에 보여주는 당시의 시대상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하는 것이니 말이다. 조선인의 유토피아, 그래서 그 과거의 유토피아를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우리가 꿈꾸는 유토피아에 어떤 가치를 부여하고 어떤 의미를 두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 바로 그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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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세자의 입학식 - 조선의 국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키워드 한국문화 4
김문식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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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뉴스를 통해 중고등 학생들의 과도한 졸업 뒤풀이가 한참동안 문제가 된 적이 있다. 비단 올해 뿐만이 아니라 해마다 졸업시즌이 되면 학생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일명 졸업식 뒤풀이가 상식선을 벗어나 지나친 형태로 행해져 문제가 되곤 했다. 게다가 졸업시즌이 끝나면 곧 바로 이어지는 입학시즌. 입학이후 신입생 환영회라는 형태로 이루어지는 행사들도 심심치 않게 문제가 되곤 한다. 졸업이든, 입학이든,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곳을 떠나거나 새로운 곳에 소속되는 것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는 분명 의미있고 뜻깊은 것임에도 적정선을 지키지 못해 사고를 부르고, 때로는 사회적 문제로까지 이어지곤 하는 것이다. 졸업이라는 두 글자의 단어 안에 정들었던 학교를 떠나야 하는 안타까움과 서운함을 가득 담아 눈물을 짓고, 입학이라는 두 글자에 새로운 세상을 향한 설레임을 가득담았기에 아름다웠던 기억들, 이런 의미있고 아름다워야 하는 행사들이 이토록 보기싫게 뒤틀리기 시작한 것은 어느 때 부터였을까? 아마도 시대와 세대가 변하고 그 안에서 사람들의 의식이 변했기에 같은 이름으로 행해지는 행사도 그 의미를 다르게 부여하고 다르게 임하게 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의례와 행사에는 시대상과 시대를 관통하는 의식이 진하게 깔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왕세자의 입학식, 그림으로 남겨지다.
<왕세자의 입학식>은 효명세자의 입학식을 묘사한 <왕세자입학도첩>을 기본으로 당시 행해졌던 왕세자의 성균관 입학식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입학의식을 의미하는 입학례라는 이름이 붙여진 왕세자의 입학식. 그 입학식을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묘사하여 그려낸 <왕세자입학도첩>을 통해 작게는 군왕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학문적 소양을 닦는 것을 게을리 할 수 없는 왕세자에 대한 처우와 의식자체, 크게는 그것이 가지는 의미까지도 살펴보려 한 것이다. 그저 학문을 닦기 위해 성균관의 문턱을 넘는 유생이 아닌, 최고의 자리에 앉기 위한 첫걸음으로서 학문적 지식을 쌓기 위해 그곳의 들어서야 하는 왕세자의 위치가 더해져 왕세자에게 학문이란 어떤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지, 혹은 학문을 연마하는 학생으로서의 왕세자는 어떠했는지를 총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게 한 것이다.

왕세자, 학생이 되다.
<왕세자입학도첩>에는 왕세자가 성균관에 입학하는 입학례의 단계를 출궁의, 입학의, 수하의라는 이름으로 구성하여 표현해내고 있다. 왕세자가 궁을 나와 성균관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출궁의, 그리고 성균관에 도착한 이후 정식으로 성균관의 학생으로서 입문하는 의식인 입학의, 마지막으로 입학의 의식까지 모두 마친 왕세자가 다시 궁으로 돌아와 종친과 2품 이상의 관리들에게 입학을 축하받는 수하의를 표현한 <왕세자입학도첩>은 왕세자의 성균관 입학이 왕세자 개인에게 가지는 의미와 한 나라의 왕세자로서 가지는 의미들을 단계별로 나누어 그려낸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왕세자의 교육이 반영하는 시대상.

그렇다고 하여 <왕세자의 입학식>이 단지 한명의 왕세자가 입학하는 과정을 표현한 <왕세자입학도첩>의 설명에만 치우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왕세자의 입학식>이라는 제목의 이 책이 진정으로 집중하고 있는 것은 왕세자에게 치루어졌던 이 입학의 의식을 통해 당시의 시대상과 시대 전반을 좌우하고 있던 의식들을 짚어내는 또 다른 시각이기 때문이다. 당시 사대를 하고 있던 중국에서조차 이토록 거나하게 치루어지지 않았던 왕세자의 입학식에 우리나라가 의미를 두고 치중했던 이유부터, 왕세자가 치루어낸 입학의식의 단계별 의미를 통해 우리의 지배층이 학문에 어떤 자세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살피고, 왕세자가 배워야 했던 교재의 선택을 통해 우리의 사상구조까지도 읽어내려는 노력. 바로 그 노력이, 이 책 <왕세자의 입학식>에 담겨 있는 것이다.

작은 것 하나에도 의미를 담고 있었던 또 하나의 배움.

단 한명의 사람. 왕세자라는 특수한 자리에 있었던 어린 소년이 배움을 시작하기 위한 첫 단계를 위해 궁을 나와 학교 앞에서 권위를 버리고 학생으로서 새로운 마음가짐을 가다듬는다. 왕세자라는 이름대신 학교에 입학하는 학생이라는 새로운 신분을 얻은 소년은 시대를 아우르는 사상과 의식을 전달받고 그 안에서 자신만의 새로운 자아와 학문에 대한 열의, 그리고 세상을 먼저 내다볼 수 있는 깊은 혜안을 얻고자 의식을 치룬다. 소년을 어린 시절 부터 보아왔던 친지들과 그가 앞으로 세상을 통치하는데에 반드시 필요할 수족과도 같은 관리들은 다가올 세상을 더 밝게 열어줄 성군이 될 소년의 첫걸음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왕세자는 입학례를 통해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현재를 통해 미래를 내다보는 방법을 배워나갈 것을 알리는 것이다. 그래서 왕세자의 입학식은 한 개인의 의례이기 보다는 한 국가의 과거위에 세워질 미래를 의미하기도 한 행사가 되는 것이다. <왕세자의 입학식>이 보여주고자 한 것은 당시의 지배층이 국가의 미래를 위해 국가를 짊어지고 갈 왕세자에게 어떤 배움을 준비하고 있었는지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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