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의 땅을 찾아서 우리문고 20
스콧 오델 지음, 정미영 옮김 / 우리교육 / 2009년 9월
절판


만약 나에게 1.5톤의 황금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하지만 그 기회가 나와 동료의 생명을 담보로 해야 하는 것이라면? 황금을 찾아 나서보지 않은, 그리고 눈 앞에 실제로 존재하는 1.5톤의 황금을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아마도 아주 간단하게 대답할지도 모른다. 사람의 생명보다, 인간의 존엄성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고. 그러니 당연히 나와 동료의 생명을 구하고 황금은 포기할 수 있노라고.. 1.5톤의 황금이 아무리 나의 인생을 화려하게 보장해주더라도 일단 살고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이다. 하지만 과연 대부분의 사람들이 눈 앞에 놓인 1.5톤의 황금을 보고 단 한순간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돌아설 수 있을까? 가뜩이나 연일 사상 최고치를 갱신하는 최고의 재태크 수단이 바로 황금이 되어버린 이 마당에 말이다.


15살 지도만드는 소년의 황금을 향한 모함

<황금의 땅을 찾아서>는 황금으로 가득하다는 미지의 땅을 찾아 떠난 모험을 그린 소설이다. 하지만 모험심 강하고 보물을 그리는 치기 가득하고 용맹한 젊은이가 주인공인 스펙타클 어드벤처물이라고 단순히 장르를 규정해버리기엔 약간 다른 점들이 곳곳에 보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우선 이 작품의 주인공은 황금을 찾는 것이 목적인 모험심 강한 이가 아니라 미지의 땅을 찾아내어 최초의 지도를 그리고자 꿈을 꾸는 지도 제작하는 15세의 소년이 주인공이다. 황금이라는 보물이 아닌 스스로가 만들어내야할 창조물을 위해 모험을 하는, 모험의 동기가 다른 소년이 이야기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야기는 처음부터 황금을 찾아내는 과정보다는 황금을 향한 사람들의 무모함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추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한다. 황금을 찾기 위해 경험했던 모험들을 장황하게 늘어놓기만 하기 보다는 황금을 찾는 다는 목적, 바로 그 부를 향한 인간의 욕망이, 사람들에게 어떤 추악함을 끌어내게 하는지, 그리고 이성을 어떻게 마비시키는지, 사람들이 어떻게 스스로를 망가뜨리는지를 차근차근 그 모험의 경로를 따라 보여준다고 하면 설명이 될까?

황금을 눈 앞에 둔 지도 만드는 소년의 변화

지도를 그리는 15세의 소년은 처음에는 그저 황금보다는 스스로의 힘으로 새롭게 만들어낼 미지의 땅에 대한 꿈에 자신을 놓는다. 하지만 모험이 진행되고 결국 그의 눈 앞에 그들이 찾아내내 황금 1.5톤이 놓여있게 되자 그 역시 변하기 시작한다. 눈 앞에서 황금에 대한 욕심으로 인해 많은 동료들이 생명을 잃었음을 목격하고도 황금을 향한 욕심을 버릴 수는 없었던 소년. 그는 황금이라는 부의 상징 앞에서, 자신에 앞서 변화했고 그 때문에 처참하게 죽어간 이들과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변해간다. 그리고 그 변화는 자신의 가장 곁에서 늘 꿈을 나누었던 지아를 떠나게 하고 마지막으로 그에게 끝없이 욕심을 버리라 말했던 신부까지도 죽음을 맞게 한다. 결국 소년은 혼자 남게 되고, 스스로의 생명도 보장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황금이라는 것이 얼마나 자신을 망가뜨렸는지 깨닫게 된다. 그리고 소년은 황금을 분화구 속으로 던져버린다. 황금앞에 변했던 자신을 버리듯, 그 욕심을 버리듯 말이다. 그럼에도 지켜줄 수 있었던 동료를 죽음에 이르게 한 자신의 잘못까지 버리지는 못하였지만..


결국 그들에게 남은 것은..

모든 것에 앞서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결코 물질이 아니라고들 쉽게 말한다. 하지만 막상 눈 앞에 자신의 인생과 그 이후의 인생까지도 완전히 바꿀만큼의 물질적 부가 보장되는 일이 놓여있다면 그 누구가 흔들리지 않을 것인가? 아마도 모두가 조금의 흔들림 혹은 큰 갈등을 겪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결코 댓가가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눈 앞에 놓여있는 것이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 같더라도 그것에는 분명 댓가가 필요한 법이다. 행복을 위해 추구했던 어떤 것이 행복을 앗아가는 위험이 되어 돌아온다면 그것은 과연 진짜 기회일까? 진짜 행운일까? 행운과 악운을 구분하고 행복과 행복을 위해 추구해야 하는 목적과 수단을 혼동하지 않는것. 그것이 지혜까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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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 고흐의 구두를 신는다 - 그림과 나누는 스물한 편의 인생 이야기
이명옥 지음 / 21세기북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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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예술 분야에서 혹은 문학에서, 예술라 이름지어진 이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것들은 무엇이 있을까? 물론 많은 것들, 그리고 다양한 것들을 추구하고 있기에 서로 다른 분야의 일들을 하고 있는 것이겠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이들의 공통점이 바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글을 통해, 음악을 통해, 그림을 통해 혹은 영화를 통해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끝없이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행복을, 때로는 슬픔을, 때로는 고통을...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그들이 만들어낸 결과물로 얻어내었을때, 우리는 그것을 감동이라고 이름붙인다.


같은 주제 다른 표현

<나는 오늘 고흐의 구두를 신는다.>에는 21가지 주제를 그린 많은 화가들의 각기 다른 작품들이 소개되어 있다. 어느 화가는 한가지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평생을 그리기도 했고, 어느 화가는 단 한번 그 주제를 그려내는데에 오랜 시간은 쏟기도 했다. 그래서 어느 화가는 한가지 주제를 다양한 화폭속에 다른 이미지로, 어느 화가는 동일한 주제를 다르지만 같은 화폭속에 담아내기 위한 작업을 수없이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해내는 것이다. 그 주제는 인생을 다시 살아가기 위한 희망이기도 하고, 인류의 숙제인 가난이기도 하며 인간의 가장 아래에 깔려 있는 본능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나는 오늘 고흐의 구두를 신는다.>는 바로 그 같은 주제를 다르게 표현한 차이 그리고 다른 주제를 비슷한 그림으로 만들어낸 차이를 느낄 수 있게 한다.


그림 속에 담긴 인생의 이야기들

<나는 오늘 고흐의 구두를 신는다.>에 담긴 21가지의 주제들은 때로는 개인의 인생을 그리는 주제이고, 때로는 인류의 인생이기도 하며, 인생을 넘은 사후의 세계를 살아가는 인생이기도 하다. 각자 다른 많은 화가들이 표현해낸 인생이라는 주제를 자잘하게 나누고 그 안에서 모두가 한번쯤은 생각해보거나 모두가 한번쯤은 경험할법한 이야기들을 담아 화폭 속에 담아내는 작업. 그래서 그림은 한 사람의 인생이기도 하고, 인류의 인생이기도 한 것이 아닐까? <나는 오늘 고흐의 구두를 신는다.>안에 담겨 있는 수 많은 그림들 속에서 나의 인생과 인류의 인생이 겪는 작고 큰 경험들을 만날 수 있듯이 말이다.


작품속에 녹아든 사람의 인생

누군가의 작품을 읽거나, 듣거나, 보게 될때 사람들이 가장 먼저 느끼는 점은 바로 그 안에서 그것을 만들어낸 창조자의 인생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들의 생각이나 인생의 과정 혹은 인생의 흐름을 뒤바꾸어 놓은 어느 사건들이 모티브가 되어 때로는 음악이 되고 때로는 그림이 되고 때로는 문학작품이 되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고흐의 구두를 신는다.>에서 소개되고 있는 21가지의 주제에서도 바로 그것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관점에서그림을 그려낸 작가들이 그 그림을 그리던 시절의 이야기와 경험들, 그리고 그들의 인생에서 그 작품들에 영향을 미쳤을법한 일화들을 만나는 것도 <나는 오늘 고흐의 구두를 신는다.>의 매력이 될 것이다. 그림 속에 녹아 있는 한 사람의 인생. 그것이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남았는가를 느껴보는 것도 그림을 보는 또 하나의 방법일테니 말이다.

무엇을 그렸느냐 보다 중요한 무엇을 얻었느냐.

<나는 오늘 고흐의 구두를 신는다.>는 각각의 그림 속에 작가가 놓여있던 상황이나 그의 인생 전반을 흘렀던 작가의 생각들을 연결시켜, 혹은 그 작가가 작품을 발표했을 당시에 남겼던 말들을 빌어 작가가 그림을 통해 남기고자 했던 메세지들을 충분히 소개한다. 아마 그림을 보는 동안 그 이야기들을 상기한다면 작품 속에 녹아든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에 정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하지만 책을 덮으며 이런 생각들을 덧붙여 보게 된다. 작가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 그림을 그렸는가를 알아내고, 그 그림을 통해 그것들을 정확하게 얻어내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그림을 통해 관람자가 어떤 것을 얻었느냐인가가 아닌가 하는 생각 말이다. 작가가 그림을 통해 슬픔을 표현했더라도 그 그림의 모퉁이에서 관람자가 작은 행복의 빛을 발견했다면 그 그림은 그 관람자에게는 슬픔이 아닌 행복으로 기억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행복이 그 그림이 그에게 주는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 하고 말이다. 어느 예술이건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을 그렸내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얻어내었느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작게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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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비 Young Author Series 2
크리스 클리브 지음, 오수원 옮김 / 에이지21 / 2009년 10월
절판


우리에게 알려진 사실들 중 얼마만큼의 것들이 진실일까? 혹은 세상에 알려진 것들이 모든 진실을 다 끌어안고 있는 것일까? 세상이 움직이는 속도가 빨라지는 만큼 우리가 알 수 있는 것들도 점점 늘어가고, 그것들을 알기 위해 우리가 접해야하는 미디어들도 하루하루 늘어나고 있긴 하지만, 가끔은 생각해본다. 내가 보는 것이, 내가 듣는 것이, 내가 읽는 것이 모두 진실일까? 그리고 그것들이 세상의 모든 진실을 다 끌어안고 있는 것일까?


나이지리아의 한 소녀, 생존을 위해 살아남다.

리틀 비는 나이지리아의 한 소녀가 자신의 고향에서 벌어진 일을 목격하고 난 후, 그 일이 세상에 드러나기를 바라지 않는 이들에게서 도망쳐 영국이라는 새로운 땅으로 발길을 옮기는 과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민자 수용소라는 곳에서 우연히 자유를 얻게 되고, 그 얻은 자유가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는 것에 늘 불안해야했던 리틀 비. 그녀가 이민자 수용소를 나와 갈 수 있는 곳은 그녀가 가진 유일한 영국인 부부의 한 남성의 신분증에 적힌 그의 주소 뿐이다. 영국이라는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향의 영어가 아닌 영국의 영어를 2년여간 몸에 익혔을만큼 영특했던 나이지리아의 한 소녀는 그녀가 영국에서 다시 끔찍했던 그녀의 고향의 기억속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해야할 것들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고, 그녀가 가야할 곳을 단 한 곳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그녀를 기다리지 않는 유일한 그녀의 지인이 사는 그곳으로 말이다.


부부의 삶을 뒤흔든 해변가의 단 하루

부부가 리틀 비를 알게 된 것은 그들의 휴가에서 였다. 인생의 권태기를 맞이하고, 살가운 부부생활을 이어나가는데에 실패한 부부가 마지막 도피처처럼 생각했던 그 여행. 그 여행을 시작으로 다시 시작하려던 부부의 인생은 해변가의 우연한 만남으로 자신들은 전혀 알지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그리고 그 만남이 바로 리틀 비와의 첫 만남이었다. 누군가에게서 도망치는 리틀비와 그녀의 언니, 그리고 그녀들을 살리고자 했던 부부에게 조건을 내건 추격자들, 그 추격자들은 그 부부에게 그녀들의 목숨대신 그들의 손가락을 하나씩 요구하고 그 자리에서 남편은 손가락을 잘라내지 못하지만 아내인 새라는 단호히 손가락을 잘라낸다. 그 댓가로 리틀비는 목숨을 구하고 그녀의 언니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부부는 리틀비의 생사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귀국하게 되고, 남편은 자신이 그 순간 해내지 못했던 결정으로 두명의 소녀들을 모두 죽게했다는 죄책감에 하루하루를 고통으로 보내기 시작한다. 새로운 다짐으로 시작하려던 부부의 위태로운 권태기는 해변의 단 하루로 이제 권태기가 아닌 또 다른 위기로 옮겨간 것이다.


리틀 비, 작지만 진한 날개짓.

스스로를 죽여가던 남편은 어느날 자살을 하고, 그의 장례식날 아침 리틀 비는 그 집에 나타난다. 남편의 죽음과 이어진 리틀비의 출현, 그리고 리틀비의 신분등은 새라에게 많은 부담을 끌어안게 하는 요소였지만 그녀는 리틀 비를 집으로 맞아들인다. 리틀비를 받아주지 않는다면 리틀비는 다시 고향으로 추방당할 것이고, 그것은 리틀비에게 새라가 경험했던 해변의 하루를 평생으로 만들게 됨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리틀비는 새라의 삶으로 천천히 스며들고 리틀비의 작은 움직임은 새라를 다시 움직이고 숨쉬게 한다. 그녀만의 영특함과 마음의 진심으로 말이다.



자유를 그리는 리틀 비, 작은 꿀벌의 몸짓에 감동하다.

리틀 비는 나이지리아를 빠져나온 한 소녀가 자신의 자유를 위해, 그리고 생존을 위해 영국이라는 낯선 땅에 발을 내딛고 꿈을 꾸는 이야기들을 짧게 보여준다. 피와 고통으로 얼룩진 고향에서 빠져나와 그녀가 영국이라는 나라를 향하게 한 것은 그녀의 선택이 아닌 어쩌면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내몰림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영국의 이민자 수용소는 이 난민들을 가두어 두고 몇장의 서류로 대부분은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는 추방의 명령을 내려 그들을 돌려보낸다. 그들이 생존을 위해,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영국을 향했더라 할지라도 영국에게 그들은 자원이 새는 빈틈일 뿐이니 말이다. 게다가 리틀 비의 본국인 나이지리아는 공식적으로는 안전한 곳이라고 했다. 그들에게 이들은 그저 공식적으로 안전한 나라에서 살아온 사람들이며, 조금 더 나은 경제적 이득을 위해 정상적인 절차를 밟지 않고 영국으로 들어온 이방인들에 지나지 않는다.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아닌, 부를 위한 이동을 감행한 이방인들, 그들은 영국 시민들의 정당한 권리에 무임승차한 범법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리틀 비는 그곳을 우연히 빠져나오게 되지만 여전히 불법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늘 전전긍긍해야만 한다. 언제 끌려가 죽음으로 내몰릴 그곳에 다시 돌아가게 될지 모르니 말이다. 하지만 리틀비는 결국 새라의 아들인 찰리를 위해 위험을 무릎쓴다.


손가락 하나의 리틀 비, 리틀 비의 생명인 찰리

새라는 그날 밤 해변에서 리틀 비를 구하기 위해 손가락 하나를 잘라낸다. 하지말 리틀비는 새라의 아들인 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한다. 손가락 하나로 살려낸 리틀 비의 생명과 리틀 비의 생명을 담보로 구해야 했던 찰리. 모두가 같은 숨을 내쉬며 살아가는 사람이지만 그들의 목숨을 구한 것은 분명 다른 것들이다. 왜 새라의 손가락 하나만으로 살릴 수 있었던 리틀 비의 목숨을, 찰리를 구할때는 리틀 비의 목숨을 던져야 했을까? 그것은 아마도 영국과 나이지리아, 영국인과 난민, 주류와 비주류, 강자와 약자로 이름지어지는 상대적인 차이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생명은 소중하다며 여기저기 외치는 소리는 끊이지 않지만 누군가의 생명이 누군가의 생명보다 더 중요할 수 있는 현실. 그 현실이 새라의 손가락 하나와 리틀비의 목숨을 같은 가치로 놓게 되는 비극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닐까? 진정한 소중함과 진정한 생명의 가치를 말하기 위해서는 어쩌면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진실인지, 혹은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이 정말 진정에서 우러나온 것들인지부터 다시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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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2 - 7月-9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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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점에서 잠시 만나기 위해 오랜 시간을 걸려 돌아온 선들은 잠시의 만남을 뒤로 하고 다시 다른 방향을 위해 달려한다.

아마도 이 선들은 또 다시 하나의점에서 만나게 될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영원히 반복되는 무한대의 반복이 될지도 모르고, 뫼비우스의 띠처럼 안과 바깥이, 진실과 거짓이, 현실과 허구를 구분할 수 없는 상태로 끝없이 반복되는 세상이 될지도 모른다.

<1Q84>의 이야기는 그렇게 서로 맞물리고 변화하지만 끝없이 돌고도는 그 띠의 모습을 닮아있다.


<1Q84>의 두번째 이야기.

<1Q84>년의 이야기, 의문과 뒤틀림으로 달라진 새로운 1984년, <1Q84>...

<1Q84>의 이야기는 2권이 시작되면서 1권과는 조금 다른 느낌을 전달한다. 1권의 이야기들이 <1Q84>년의 4월에서 6월의 이야기라는 점 이외에도 <1Q84>의 1권은 많은 배경들을 담고 있다. 아오마메와 덴고의 어린 시절, 그리고 아오마메와 덴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특별한 사건들 이외에도 그들에게 사건을 만들어주는, 혹은 단서들을 제공하게 되는 많은 이들의 배경과 사연들이 담겨 있는 것이 바로 4월부터 6월의 이야기. 그리고 본격적으로 아오마메와 덴고가 그들의 기억속에서 서로를 찾아내어 끌어오기 시작하면서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1Q84>의 2번째 이야기는 7월부터 9월의 이야기이자 그 전의 이야기에서 보다 훨씬 더 많이, 그리고 더 자세하게 아오마메와 덴고 두 사람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기 시작한다.


아오마메와 덴고, 두 사람의 주변에서 끝없이 벌어지는 사건들.

아오마메와 덴고에게는 각각 자신들에게는 획기적이라 할만한 사건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아오마메에게 유일했던 친구의 죽음 후, 그녀에게는 거의 생기지 않았던 인간적인 관계,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거의 유일하다시피한 아유미가 다소 충격적이고 놀라운 모습으로 살해당하고, 그녀는 다시 어렵게 맺었던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고립되어 버린다. 덴고는 정체불명의 사람이 찾아와 거액의 지원금을 제시하는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그와 1년 넘게 내연의 관계를 맺고 있던 유부녀 걸프렌드가 존재를 감춘다. 그녀가 사라진 이 사건은 책 속에서 '상실되었다'라고 설명되어진다. 또, 그를 <공기 번데기> 리라이팅 작업에 참가 시킨 편집장 역시 아프다는 핑계로 소식을 끊는다. 두 사람 모두 비슷하지만 조금은 다른 형태로 맺고 있던 관계들이 그들 주변에서 하나씩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는 것이다. 마치 그들을 세상에서 분리 시켜버리려고 작정한 누군가가 있듯이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이 계획했던 가장 큰 일들은 차근히 진행시켜 나간다. 아오마메에게 그 일은 '선구'의 리더를 죽이는 일이고, 덴고에게 그 일은 또 다른 자신의 장편소설을 집필하는 일이다.



두 사람, 서로를 마주보다.

아오마메가 계획한 '선구'의 리더를 살해하는 일은 아오마메가 계획한 것과 거의 맞아떨어지며 그녀의 계획을 달성하는게 조금의 어려움도 없는 상황으로 전개된다. 그러가 막상 '선구'의 리더를 맞딱드리게 된 아오마메는 그가 가진 특유의 분위기에 의해 조금씩 압도 당하고 계획한 일을 망설이게까지 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리더는 이미 아오마메의 계획을 알고 있었으며 더욱이 그것을 원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 앞에 아오마메의 망설임은 더욱 커지지만 결국 아오마메는 계획했던 일을 완수해낸다. 하지만 그 일의 완수는 처음의 의도와는 완전히 목적이 달라져 있다. 자신의 상상과는 달랐던 '선구'의 리더, 그리고 그 리더의 입에서 흘러나온 리틀피플과 선구에 관한 이야기. 그 이야기의 끝에 매달려 있는 자신과 덴고의 운명. 처음 리더를 죽이는 목적이 10대 아이들은 잔혹하게 성폭행한 파렴치한을 없애고자 하는 것이었다면, 그녀가 마지막 순간 그의 목숨을 다른 세계로 옮겨가게 한 이유는 이제 덴고가 된 것이다.



덴고는 자신의 소설을 집필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기억속에 남아있던 아오마메를 불러내온다. 두개의 달이 뜨는 곳의 이야기. 덴고가 쓰는 이야기는 두개의 달이 쓰는 바로 그 <1Q84>해의 이야기이다. 덴고가 소설을 쓰고, 정체모를 집단의 접근을 받고, 내연녀가 상실되는 시간 속에서 그는 실종된 후카에리를 다시 재회한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이번에는 후카에리가 그에게 찾아온 것이다. 후카에리와의 계획되지 않은 동거속에 그는 자꾸만 과거를 배회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오랜 시간 전의 아오마메를 다시 기억해내고, 자신의 기억속에 오랜 시간 머물렀던 어머니의 모습에 접근하며, 자신의 친부가 아닐지도 모르는 자신의 아버지와도 화해를 이룬다. 그리고 후카에리를 통해 현실의 아오마메를 느끼고 그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꺼내기 시작한다. 덴고의 머리위에 떠 있는 달은 어느새 두개가 된다. 마치 그가 <공기번데기> 속에 그려내었던 그 현실처럼 말이다. 그는 어느새 <1Q84>의 어느날에 살고 있다.


현실이 된 공기번데기와 리틀피플.

아오마메의 현실은 다시 아오마메가 읽는 <공기번데기>라는 소설이 되고, 덴고의 소설은 이제 덴고의 현실이 된다. 그리고 그 현실이 지나가고 있는 시간은 의문이 가득찬 <1Q84>년이다. <1Q84>년의 덴고와 아오마메는 서로를 만나지 못하지만 어느새 마주보고 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서서히 리틀피플과 공기번데기라는 소설 속 이야기를 현실로 만나게 된다. 아오마메의 <1Q84>가 현실이었듯 이제 덴고에게도 <1Q84>는 현실이 된다. 처음부터 소설이 아닌 현실이었던것 처럼. 그리고 처음부터 <1Q84>년 이었던것 처럼 말이다.

두개의 달로 시작되는 <1Q84>위의 두 사람.

<1Q84>의 가장 큰 매력은 어디가지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설정한 허구인지, 혹은 어디까지가 그가 설정한 현실인지 그 경계가 모호하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소설이 현실이 되고 현실이 다시 소설이 되는 이야기. 안과 바깥의 구분이 없이 끝없이 돌고도는 그 모호함이 읽는 이를 조금은 혼란스럽게 그리고 환상속으로 자연스럽제 젖어들게 하는 매력이 있다. 어쩌면 현실과 허구를 구분하는 것은 이 책의 내용에서는 전혀 의미가 없을지도 모를 일이다. 뫼비우스의 띠에 안과 바깥을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 하듯말이다. <1Q84>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어쩌면 그것이 아닐까? 현실이 현실이 아닌 허구같고, 허구가 허구가 아닌 현실같더라도,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에 관계없이 남는다는 아주 작은 진실 말이다. 1984년의 아오마메와 덴고가 <1Q84>라는 의문이 가득한 세계에서도 결국 자신들의 가장 아래에 깔려있던 서로에 대한 진심을 끌어내어 남겼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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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1 - 4月-6月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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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점에서 두개의 선이 빠져나온다.

선은 각자 다른 방향 각은 각도로 포물선을 그린다.

선은 점점 멀어지다가 다시 서로를 향한다.

두개의 포물선이 만난다.

이제 두개의 선은 교차하서나 하나의 선으로 새로 태어날 것이다.



나는 물론 그 선의 시작점에서부터 그 선들이 움직이는 것을 본 것은 아니다.. 나는 아마, 두개의 선들이 가장 멀어져있던, 3차 방정식그래프로 설명하자면 그 선들의 꼭지점즈음에서 이 선들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은 이 두개의 선이 만나 한 점을 이루는 곳에서 책을 바라보고 있다.



1Q84...두개의 달이 떠 있는 어느 이상한 날들의 이야기.

요즘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며 여기저기에서 난리가 난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 소설 제1권을 읽은 나의 느낌을 표현하자면 대충 이런 느낌이다.


두개의 서로 다른 이야기.

<1Q84>는 서로 다른 두 사람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서른살의 여인 아오마메와 같은 나이의 덴고. 서로 같은 나이이지만 너무도 다른 두 사람. 아오마메는 어린 시절 소프트 볼 선수를 거처 스포츠 의학과 침술을 공부하고 스포츠 클럽의 강사로 일을 하는 여성이자, 자신이 직접 만들어낸 도구로 자연사로 위장한 살인을 거듭하는 킬러이다. 이에 반해 서른 살의 덴고는 수학강사로 일을 하며 소설가로의 등단을 위해 조금씩 자신의 글들을 준비하고 있는 일종의 소설가 지망생이다. 서로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교차로 이어지며 <1Q84>는 마치 전혀 다른 두가지의 이야기가 섞여 있는 듯한 분위기로 시작된다. 전혀 다른 두개의 선이 평생선을 달리듯이 말이다.


아오마메, 그녀의 이유있는 범죄와 그녀의 상처.

아오마메의 살해의 대상은 남성이나는 타고난 성적 우월성과 겉으로 보기에는 견고하게 다듬어진듯한 사회적 지위를 이용해 자신의 아내에게 폭력을 일삼는 파렴치하고 간악한 남성로 제한되어 있다. 그녀가 스스로 이러한 사람들을 찾아내어 하는 것은 아니나, 자신에게 이런 사람들을 자연사로 위장시켜 사회에서 격리시키는 일을 제공하는 이는 또 다른 여성이자 나이가 지긋한 노부인이다. 어린시절부터 유일하다시피했던 절친한 친구를 가정폭력으로 잃었던 아오마메와 소중한 딸을 역시 가정폭력이라는 이유로 임신한 상태에서 잃어야만 했던 두 여인의 상처가 맞물리며, 그녀의 친구와 그녀의 딸에게, 혹은 아오마메와 노부인에게 절대 잊혀지지 않을 고통을 안겨주는 대상을 다른 세상으로 보내기 위한 계획이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을 위한 것이 없는, 무기력하고 의미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던 아오마메는 어느날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이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것과는 조금 다른 형태로 만들어져 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하늘에는 두개의 달이 뜨고, 그녀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대형사건이 과거에 기록되어 있다. 그녀의 머리에는 없으나 현실에는 존재하는 것들, 그리고 그녀 이외에는 아무도 의문을 가지지 않는 것들이 생겨나면서 그녀는 스스로를 확신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그녀의 기억과 비슷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달라져 있는 올해에 새로운 이름을 붙인다. 바로 <1Q84>...어딘지 모르게 다른, 그래서 의문히 가득 들어찬 해. 1984년의 다른 이름.. <1Q84>...



덴고, 그의 이유있는 사기행각과 그의 기억

소설가 지망생 덴고에게는 또 다른 사건이 벌어진다. 어느날 우연히 접하게 된 17세 소녀의 소설 한편. <공기 번데기>라는 알 수 없는 제목으로 한 문예지의 신인작가 응모전에 지원된 이 작품은 어딘지 어색하고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이지만 다른 어느 곳에서도 느낄 수 없는 상상력과 독특함으로 그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어딘지 일반적인 규칙에서 한참 벗어나 있는 듯한 이 글이 어쩌면 세간의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도 못하고 묻혀버릴 것이라는 걱정과 함께 조금 더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게 하고자 하는 문학도로서의 알수없는 욕망에 이끌려 그는 이 작품의 수정에 참여하게 된다. 작가는 따로 있으나 덴고 자신은 오로지 문장을 수정하고 새로 정리하여 내는 리라이팅 작업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리라이팅 작업을 하는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공기 번데기>의 원작자 후카에리와의 만남으로 덴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의 거대한 사건에 휘말리기 시작한다.


두 이야기가 시작되고, 두 이야기가 만나는 지점.

이야기가 중반을 지나 끝으로 가게 되면(1권에 한해) 서로 너무나 다른, 그래서 두권의 책을 섞어 읽는 듯한 느낌까지 받게 하는 이 이야기들이 사실은 처음부터 이어졌음을 알리는 몇가지 단서들을 만나게 된다. 어린 시절 증인회라는 종교의 신앙을 가지고 있던 아오마메의 부모님때문에 본의 아니게 많은 것들을 강요당하고, 많은 것들에서 배척당해야했던 상처의 기억들 사이에서 그녀를 유일하게 구원해주었던 존재가 바로 덴고였던 것. 덴고의 아주 작은 배려가 그녀에게 강요당한 어린 시절의 상처들에서 그녀가 빠져나오게 된 힘을 제공했던 것이다. 그래서 아오마메는 오랜 시간 덴고를 추억하고 기다린다. 또 어린 시절 상처를 만들었던 부모님의 잘못된 신앙을 이유로 그녀는 편집적인 종교적 신앙에 대해서도 반감을 가지고 있다. 아오마에에게 덴고가 거대한 기억의 존재였던 것에 반해 덴고에게 아오마메는 아주 큰 기억은 아니다. 그저 어린시절 특이한 행동과 종교로 친구들과 섞이지 못하고 따돌림 당했던 10살 소녀의 기억이 전부라면 전부일까, 무언가 특이한 점이 있다면 NHK의 수신료 수납원으로 일했던 아버지가 일요일이면 강요하다시피 해서 데리고 다녔던 수납경로일주에서 그녀를 만났다는 것 정도일까? 하지만 덴고에게도 자신이 박탈당한 일요일의 자유와 10살의 아오마메가 박탈당한 전도로 인한 자유가 묘한 동질감을 느끼게 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과거의 한 시절을 함께 보낸 아오마메와 덴고는 그러나 현재는 아주 다른 삶을 살고 있다. 한 사람은 냉혹한 킬러로, 한 사람은 꿈을 그리고자 하는 소설가 지망생으로.. 이 두 사람이 다시 만나는 지점. 그것은 바로 덴고가 리라이팅 작업을 하게 된 <공기번데기>의 원작자 후카에리가 된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후카에리라는, 또 <공기 번데기>라는 점에서 만나게 되는 두 사람의 이야기. 그 이야기는 서로 만나게 되는 그 점에서까지고 조금은 다른 관점을 보여주지만, 그래서 더욱 몽환적이고 알 수 없는 매력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1Q84>의 첫번째 이야기였다.


두개의 달이 뜨는 <1Q84>년의 어느날들..

몇년 전쯤 서태지와 아이들이 발매했던 앨범중에 시대유감이라는 곡이 있었다. 사전심의제를 실질적으로 없애는 역할을 했던 획기적인 사건을 만들어내었던 곡으로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있는 곡이기도 한 이 노래는, 처음 발매되던 시기에는 가사가 심의에 걸렸다는 이유로 가사가 아예 없는 버전으로 발매되었다가 후에 다시 가사가 더해져 재수록 되었던 곡이기도 하다. 그 시대유감의 가사에 바로 <1Q84>에 등장하는 두개의 달이 살짝 모습을 드러낸다. 기존의 세계에 지친 사람들은 새로운 세상을 기다리다 미쳐가고, 두 개의 달이 뜬 어느 날에 사람들은 새로운 날이 올것이라는 기대를 품는 다는 내용. 바로 <1Q84>에서 등장하는 두개의 달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그런 달의 모습으로 말이다. 두 개의 달은 다른 여러 문화권의 문학에서도 사람들이 미치거나, 엄청난 위험이 몰려드는 흉조로 취급되는 경우가 있다. 때로 그 위험은 세계의 멸망으로 그려지기도 하고, 그저 흉조로만 그 역할을 다하기도 하는데 아마도 <1Q84>의 두개의 달 역시 이런 의미를 담고 있지 않을까? 위험이 지나가고 나면 새로운 날이 오리라. 루나틱한 광기들이 새로운 날들을 끌어오리라는 광적인 믿음과 그 위기 뒤에 어쩌면 기다리거나 모습을 드러낼 지도 모를 새로운 날들이...



아직은 <1Q84>가 무엇을 그리고자 하는 이야기인지, 어떤 이야기를 풀어낼지 자신할 수없다. 이제 겨우 반절을 읽었을 뿐이니 말이다. 하지만 무엇인가가 일어날 <1Q84>해의 기록은 그래서 더욱 매력적이고 손을 뗄 수 없지 않나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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