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론 -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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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_신영복

담론 : 현실에 관한 설명을 산출하는 연표와 규칙의 자기지식적인 집합체
말로하는 언어에서는 한마디 말보다 큰 일련의 말들
글로 쓰는 언어에서는 한 문장보다 큰 일련의 문장들.

제목부터 어려웠던 책이라 뜻을 찾아보니 이렇게 나오네요. 그런데 봐도 모르겠습니다.
신영복 교수님 책은 처음 읽는거라 어떤 사상을 가지고 계시며 책 내용이 어떨지 궁금함에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만만하게 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어렵진 않을거라 생각하고 봤는데 이해하기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특히 첫 단원인 공자, 맹자 등 중국 고전에 대한 부분은 읽어도 읽어도 이해할 수 없었고, 어려운 단어들 속에 저의 무지함이 양파 껍질 벗겨내든 밝혀지다보니 창피함의 연속이었습니다.

포스팅하는 것도 포기하려고 했고, 또 엄두도 안났지만 첫 단원의 시작부분인 공부에 대한 내용만 포스팅하려고 합니다. 이 부분만 기억에 남고 또 머리속에 간직하고 싶네요. 어려웠던 중국고전부분은 조금 더 열심히 공부하고, 선생님의 `강의`도 읽어보고 해서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공부는 살아가는 것 자체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서 공부해야 합니다.
세계는 내가 살아가는 터전이고 나 또한 세계 속의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공부란 세계와 나 자신에 대한 공부입니다. 자연, 사회, 역사를 알아야 하고 나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공부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키우는 것입니다. 세계 인식과 자기 성찰이 공부입니다.`

`공부의 시작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생동안 하는 여행 중에서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낡은 생각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오래된 인식틀을 바꾸는 탈문맥입니다. 우리가 갇혀 있는 완고한 인식틀을 깨뜨리는 것이 공부라는 뜻입니다.
생각은 가슴이 합니다. 생각은 가슴으로 그것을 포용하는 것이며, 관점을 달리 한다면 내가 거기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생각은 가슴 두근거리는 용기입니다.
공부는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애정과 공감입니다.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먼 여행이 남아있습니다. `가슴에서 발까지으 여행입니다.` 발은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삶의 현장을 뜻합니다. 애정과 공감을 우리의 삶 속에서 실현하는 것입니다. 삶이 공부이고 공부가 삶이라는 까닭은 그것이 실천이고 변화이기 때문입니다. 공부는 세계를 변화시키고 자기를 변화시키는 것이비나. 공부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이며, `가슴에서 끄타는 여행`이 아니라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입니다.

또 막상 적으니 어렵네요.. 더 좋은 내용이 많은데...
공부를 하는 목적자체가 마음으로 와 닿는게 있어야 하고.. 즉 깨달음이 있어야 하고..
그 깨달음을 통해 실천을 해야 하다는 내용인 것 같네요..
그런데 공부를 통해 실천하기가 너무나 어렵고 힘들기 때문에 너무 먼 여행이라고 적어놓은게 아닐까 하는 .... 제 나름대로의 풀이를 해 봅니다.
그리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면서 또한 내가 누군인지 스스로 알아가는 과정이 공부라는 것 역시 제 인생에 중요한 내용이 아닐까 싶습니다.

더이상 제 생각이 정리가 안되서 최정운 교수의 `남자의 물건`에서 신영복 교수님을 소개한 자료로 포스팅을 끝내고자 합니다. (신영복 교수님의 `강의`도 읽어봐야 겠어요...)

<벼루에 먹을 갈 듯 삶은 과정 그 자체가 중요하다.>
˝무기수는 출소 날짜가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하루하루가 뭔가 살아갈 의미가 있어야 해요.
결과적으로 인생이란 게 그런게 아닌가 해요.
삶 자체가 과정이 아름다워야 하고, 자부심을 느낄 수 있어야 하고, 깨달음도 있어야 하고...
그래서 아마 무기수라는 어쩌면 굉장히 절망적인 상황이 인생에 대한 또 다른 시각을 열어주기도 하지 않을까 그런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
신영복은 `과정으로서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뒤통수를 맞는 느낌이었다.
삶이란 목적을 사는게 아니라 과정을 사는 것이라는 이야기다.
물론 목적이 중요하다. 그러나 목적에 의해 과정이 생략된 삶을 사는 것처럼 불행한 삶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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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술사
파울로 코엘료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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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술사_파울로 코엘료


책 읽는 내내 삶이라는 것에 대해 다양한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었다. 모험, 꿈, 선택, 행운, 고향, 기회, 마음.. 등 사는데 있어 한번쯤은 진지하게 생각해본 단어들이 책 중간중간 계속해서 나온다. 이 단어들과 함께 고민하고 깨달음을 한개한개 얻어가면서 떠난 산티아고의 모험이 한편으로는 우리 삶의 여정과 같진 않을까?


내가 부족해서인지 뚜렷한 울림은 없었지만, 책의 두께 만큼의 여운은 남을 것 같은 책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려웠다. 경험이 많고 연륜이 있는 사람이라면 작가가 전해주고자 하는 삶의 이유들, 꿈을 쫓는 다는 것들을 이해할 수 있으려나? 조금 더 큰 후에 다시 읽어보면 책에서 계속해서 말하는 것처럼 다른 깨달음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궁금증을 남긴 책이었다.


양치기였던 산티아고는 어느날 한 노인을 만난다. 그리고 그 노인은 산티아고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무언가를 온 마음을 다해 원한다면, 반드시 그렇게 된다.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은 곧 우주의 마음으로부터 비롯된 때문이며, 그것을 실현하는게 이땅에서 자네가 맡은 임무이다.' 그리고는 이집트 피라미드에 숨겨져 있는 보물을 찾으러 여행을 떠나라 권한다. 보물을 찾는 방법을 알려주겠다면서....

여기서 등장하는 내용 중 자아의 신화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그리고 이 노인은 자아의 신화를 이루어내는 것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부과된 임무라고 말한다. 우리가 사는 이유. 우리가 무엇 때문에 사는지 말해주고자 하지만 산티아고와 마찬가지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단지 삶의 이유라는 것을 배울 수 있는 것인지, 또 배운다고 알 수 있는 것인지 고민해볼 뿐이다. 열심히 살고 산티아고와 같이 여행을 떠나 많은 경험을 쌓고 천천히 기다리다보면 언젠가는 알 수 있겠지하면서 그냥 기다릴뿐이다.


산티아고는 여행 떠나기를 주저한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모두 포기하고 떠나야하기 때문이고 익숙한 이 삶에서 변화를 주기가 쉽지 않아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불확실한 미래가 두려울 수도 있겠지만 막상 변화를 주고 모험을 떠나보면 금방 익숙해진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금방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짐승이라면 환경이 바뀌면 살 수 없겠지만 인간은 어느 환경에서든 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축복이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결국에는 산티아고는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바람처럼 자유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 자유를 느끼기 위해서..


진정한 여행은 혼자 떠나는 여행이다. 산티아고처럼 위험하고 험난한 여정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성숙해질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나 역시 홀로 떠난 2달간의 여행은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값진 나만의 보물이다. 산티아고가 느낀 것처럼 말은 안 통하지만 어디가서든 사람들은 통한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고, 혼자 외딴 곳을 여행할 수 있었다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도둑으로 인해 가진 돈을 전부 잃어버린 산티아고는 1년 동안 크리스탈 상점에서 일을 하게 된다. 그리고 가게 주인과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되는데 그 가게 주인의 꿈은 메카 순례여행이었다. 하지만 가게 주인은 이 꿈을 실현하지 않는다. 이유는 꿈을 실현하면 살아갈 이유가 없어질까 두렵기 때문이란다. 오직 꿈으로만 간직하고 싶다고 말한다. 꿈이란 것은 실현하고 나면 가게 주인말처럼 절망이 올까? 살아가는 이유가 없어지는 것일까? 간직한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다면 그리고 현재의 삶이 만족스럽다면 가게 주인처럼 꿈을 간직한채 살아갈 수 있겠지만, 꿈을 실현한 후의 일을 먼저 걱정한다는 것은 미련한 짓인 것 같다. 실현 후에 일은 그 때가서 생각해봐도 되지 않을까? 산티아고 말처럼 모든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꿈을 보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산티아고 역시 크리스탈 가게에서의 생활에 만족하다보니 정작 자신의 꿈이었던 피라미드의 보물을 찾는 일에 다시한번 고민하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현재의 자신을 지키려는 습성 즉 안정적인 삶, 익숙한 삶을 바꾸고 싶지 않은 습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산티아고는 다시 한번 여행을 떠난다.


산티아고는 여행 내내 양들을 생각하고 돌아갈 고향을 생각한다. 하지만 꿈을 위한 여행은 계속 되는데 고향이란 곳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고향이 있다는 것, 언제든지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란 생각이 들었다. 집, 고향, 부모님! 이런 소중한 것들의 의미는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있다라는 점, 언제든지 나를 반겨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라는 것이다. 내가 뭘 하든 용서해 줄수 있고, 돌봐줄 수 있는 곳!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곳!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축복이다.


그리고 산티아고는 여행을 계속하는 자신의 결정에 어느 정도 의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의심을 한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인생이란 것은 어떻게 변할지,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것. 내가 선택한대로 가는 것도 아니고 원하는데로 살아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살다보면 어떻게든 살아지는게 인생이기 때문이다. 산티아고 말처럼 결정이란 단지 시작일 뿐! 앞으로의 여정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 이후의 일은 자신이 어떻게 바꾸지 못하는 것이고,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 그리고 그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느냐, 못하느냐는 그 사람의 몫이다.


단지 운이란 것은 분명 인생에 있어 중요한 표지이다. '운7기3'이라는 말처럼 우리의 인생은 운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운을 잡은 사람이 그 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차이는 분명히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차이는 사람의 인생을 바꿔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복권에 당첨된 사람을 보고 우리는 흔히 운이 좋다.라고 말한다.(그냥 운이 좋다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할 수 있겠지만) 하지만 노력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결실을 맺은 사람한테도 역시 운이 좋았어라는 말을 한다. 분명 이 두개의 운의 차이는 틀리다. 그리고 운을 받은 사람이 느끼는 운의 차이는 더욱 클 수 있다. 이 차이는 앞으로 이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해서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산티아고는 여행을 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그 중에 기억에 남는 사람은 낙타몰이꾼이다. 이 낙타몰이꾼이 하는 말 중에 우리 인생에 있어 잊어서는 안될 중요한 말을 한다.


'난 음식을 먹는 동안엔 먹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소. 걸어야 할 땐 걷는 것, 그게 다지. 난 지금 과거를 사는 것도 미래를 사는 것도 아니니까. 내겐 오직 현재만이 있고, 현재만이 내 유일한 관심걸이요. 만약 당신이 영원히 현재에 머무를 수만 있따면 당신은 징정 행복한 사람일게요.'


박웅현 작가의 여덟단어에서도 나오지만 이런 인생이야말로 정말 개처럼 사는 인생이다. 개들은 이 사람이 말한 것처럼 산다. 밥 먹을 때는 밥 먹는데만 집중하고, 자고 싶을 때는 다른 생각없이 잠만 잔다. 인간들은 무슨 생각들이 많아 저렇게 복잡하게 사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현재에만 집중한다. 단순한 삶이 정말 행복한 삶이 아닐까?


산티아고는 여행하면서 여러 표지들에 대해서 깊이 고민한다. '내가 가는 길에 표지를 남겨놓으신 분은 신이 틀림없어' 이제껏 그는 표지들이 이 세상에 속하는 그 무엇일거라 생각한다. 먹거나 자는 것, 사랑을 찾아 떠나거나, 일거리를 찾아나서는 것과 같은 그 어떤 것일거라고. 따라서 서두를수도, 초조해할 수도 없다고 말한다. 이 표지들을 못보고 지나칠 수도 있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사는게 다 정해진 일일까? 바쁘게 살다보니 표지를 못보고 지나치고 살고 있는건 아닐까? 살다보면 어느순간 내 운명대로 살아가고 있는 건지. 아님 내가 내 운명을 바꾸면서 살고 있는건지 헷갈릴 때가 있다. 내가 운명을 바꾸면서 살자고 내린 결정들 역시 내 운명의 하나이지 않을까? 이력서를 여러군데 써 봤지만 딱 한군데만 붙는다면 이 회사에 가라는 하늘의 표지일까? 아님 내 실력이 이 회사밖에 안되기 때문에 이 회사에 간 것일까? 뭔가 이상한 생각들일 수는 있겠지만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느껴봤을 것이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다를 것이다. 중요한 것은 뭐가 됐든 주어진 내 운명을 내가 내린 선택을 열심히 살아가는 것 밖에는 없는 것 같다.


오아시스에서 사랑하는 연인을 만났고, 오아시스에서 얻은 직업(?)과 충분한 돈을 벌게 된 산티아고는 연금술사와 다시 한번 피라미드를 찾아 떠나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만약 나라면 떠나지 않았을테지만 산티아고는 다시 한번 떠난다. 아직 꿈을 못 찾아서 그런건지. 아님 연금술사가 4년 후의 산티아고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말해줘서 그런지는 모르겟지만 산티아고는 이 기회를 놓치면 안될거라 생각한다. 연금술사와의 여행이란 기회를 놓치기 아쉬운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고 죽을 때까지 세번의 기회가 찾아온다고 흔히 말한다. 다만 그 기회가 언제 오는건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으며, 설령 누가 가르쳐주거나 아님 이 책에서 말하는 표지가 있었다고 해도 그 기회를 잡은 사람은 흔치 않다. 다만 계속 도전하고 비록 실패하더라도 실패하다보면 언젠가 자기에게 찾아온 기회를 자기도 모르게 잡았을 수도 있다. 남들보다 늦을 수도 있겠지만 언젠가는 잡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계속 도전을 해보는 사람이라면 언젠가는 기회를 잡고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연금술사와 함께 하는 여행은 산티아고에게 많은 깨달음을 준다. 그리고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듣기 시작한다. 산티아고의 표현에 의하면 '마음과 친구를 되었다'는 것이다. 마음을 다스려라. 마인드 컨트롤! 이런 표현과 같은 것일 텐데 이렇게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쉽지 않다. 그리고 마음이 따라가는대로 실천하기란 더 쉽지 않다. 하지만 마음이 하는 소리를 따라가다보면 우리 모두 한층 성장할 수 있다. 그리고  연금술사는 이것이 연금술이라 말한다. '우리가 지금의 우리보다 더 나아지기를 갈구할 때,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도 함께 나아진다는 것 우리 모두 자신의 보물을 찾아 전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간다는 것, 그게 연금술이라는 거지.'


우리가 진정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는 우리의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고 한다. 아마도 이제까지 내가 원하는 일들이 실현이 되지 않았다면 내 소망이 간절하지 않아서일 것이다. 이 책에서 계속 언급되고 있는 '자아의 신화'를 쫓아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조금씩 성장할 수 있을 것이고 우리가 원하는대로 살게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현재를 열심히 살고, 우리 일상에서의 표지를 찾기 위해 단순하게 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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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아홉 생일, 1년 후 죽기로 결심했다 (스페셜 에디션 한정판)
하야마 아마리 지음, 장은주 옮김 / 예담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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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아홉 생일, 1년 후 죽기로 결심했다.

죽기로 결심한다는 게 쉬운 일일까 생각해봤다. 의사로부터 1년 시한부 선고를 받은 것처럼 주인공이자 작가는 실제로 자기 스스로 1년 후에 죽는 걸 목표로 삼았다. 라스베가스에서 해보고 싶은 걸 다 해본 다음이라는 조건이 붙지만 어쨌든 최종 목표는 `자기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이다. 다소 허무맹랑한 결심인 것 같지만 누가 뭐라하든 작가는 목표를 그렇게 정했고 이 목표를 위해 열심히 살았다는 점에 대해서 박수를 쳐 주고 싶다.

20대랑 30대의 차이가 뭘까? 그냥 매년 1살 먹는 건 똑같지만 사람들은 누구나 20대에서 30대 넘어갈 때 작가와 같이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본다. 앞의 숫자가 바뀐다고 해서 그러진 않을 것 같다. 옛날 사람들이 대게 60살의 나이로 일찍 죽었기 때문에 인생의 절반인 30살이란 나이가 의미가 있을 순 있겠지만 100살까지 산다고 하는 지금은 30살이란 나이가 왜 중요한지 궁금할 따름이다. 내 경험으로 미뤄봤을 때는 이제 나만을 위해 살 수 없는 나이가 되버린 듯한 느낌이 들 나이가 30살이라서 큰 의미를 둔 것도 같다. 대부분 이 나이 전후로 해서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애를 낳아 기르는 시기가 30대이기 때문에 나만을 위한 시간은 30살 이후로 크게 줄어든다. 많은 책에서 서른 살 이후로도 자신을 위해 살 수 있다라고 용기를 주기 위해 노력하지만 현실에서의 30대들은 이런 선택이 쉽지 않다. 확신없는 미래가 두렵기 때문에...

작가는 29살에 자신의 인생을 뒤돌아보면서 자신의 인생에 대한 가치가 없다 느껴졌다. 자신감 뿐만 아니라 자존감이 없다보니 살 이유를 느끼지 못한 것이다. `나란 인간, 과연 살 가치가 있는 걸까?` 라고 느끼면서.... 이런 목적없는 인생은 살 필요가 없다 느끼며 스스로 1년 후에 죽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죽기 전에 라스베가스에서 원없이 호화롭게 살아보고 죽는다는 점을 1년동안의 삶의 목표로 삼았다.

이런 목표로 무슨 일이든 서스름없이 시작한다. 호스티스, 누드 모델부터 시작해서 영어 공부, 블랙잭 공부까지... 인생이 1년 밖에 안 남았으니 두려울 것이 없었다. 처음에는 라스베가스에서 쓸 돈을 벌 목적으로 시작한 일들이었지만 점점 주인공의 인생이 바뀌기 시작했다. 살이 빠지면서 남자들에게 호감스런 여성이 되었으며, 주변에는 친구들이 점점 생기기 시작했고, 파견 근무나 호스티스 클럽에서도 인정받을 정도로 일도 잘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죽기 전 라스베가스에서 자신이 원하던 호화로운 생활을 지내고 블랙잭도 성공적으로 끝마치고 났을 때 그녀는 자신의 목표였던 자살을 하지 않는다. 더 살아보고 싶다는 희망이 생겨서였을까, 아님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겨서일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최종적으로는 주인공은 자기 자신을 사랑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밑바닥 인생부터 열심히 살고, 친구들을 만나고,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기다보니 자기 자신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해보기 전엔 절대로 알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 그리고 `사람은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고 말하며 새로운 인생을 살기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주인공이 잠시 만났던 할머니의 대사가 너무 좋아 올린다.

˝너희들 몇 살이라고 했지? 스물 아홉? 서른? 요즘 여자애들은 서른만 넘으면 나이 들었다고 한숨을 푹푹 쉰다며? 웃기지 말라고 해. 인생은 더럽게 길어. 꽤 살았구나. 해도 아직 한참 남은게 인생이야. 이 일 저 일 다 해보고 남편 자식 다 떠나보낸 뒤에도 계속 살아가야 할 만큼 길지. 100미터 경주인 줄 알고 전력질주하다 보면 큰코다쳐. 아직 달려야 할 거리고 무지무지하게 많이 남았는데, 시작부터 힘 다 쏟으면 어쩔거야? 내가 너희들한테 딱 한마디만 해줄게. 60 넘어서도 자기를 즐겁게 해줄 수 있는 게 뭔지 잘 찾아봐. 그걸 지금부터 슬슬 준비하란 말이야. 내가 왜 이나이 먹고서도 매일 술을 마시는지 알아? 빈잔이 너무 허전해서 그래. 빈 잔에 술 말고 다른 재미를 담을 수 있다면 왜 구태여 이 쓴 걸 마시겠어?˝

인생은 길다. 시간이 빠르다고 하지만 인생을 24시간으로 봤을 때 내 인생은 아직 정오도 넘어가지 않았다. 할머니 말처럼 60, 70, 80 넘어서도 나를 즐겁게 해줄 수 있는게 무엇인지 아직은 잘 모르지만 천천히 계속 준비중이다.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하다보면 찾게 되겠지하는 희망을 가지면서....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사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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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창의력만 훔쳐라
김광희 지음 / 넥서스BIZ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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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창의력만 훔쳐라_김광희


일본이란 나라는 싫다가도 대단하다고 생각될 때도 있고, 저질스럽다가도 신기한 나라이다. 특히 우리나라에게는 역사적으로 아픈 기억을 준 나라이기 때문에 증오의 대상이지만 일본을 닮아가고 있다는 점은 참 아이러니하다. 저자의 말처럼 아무리 미워도 옆에 위치하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좋든 싫든 함께 가야하는 나라임에는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한일 관계가 화해와 단합과 같은 긍정적인 관계로 가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대립적인 한일 관계를 생각하고 양국의 국민들간의 반일/반한 감정들을 보면 화해와 단합은 아무리 생각해도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분명 일본이란 나라로 부터 배울 점들은 많다. 그리고 우리나라가 일본이란 나라를 모델로 삼아 이만큼 성장해 올 수 있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은 이제 일본으로부터 배울 점은 없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저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일본이란 나라는 아직까지는 뽑아 먹을 것들이 많다라고 얘기하고 있으며 그 중에 작가는 창의력을 대표적으로 뽑아 먹을 먹거리로 선택했다.


 서두에 얘기했듯이 일본 사람들은 조금 괴짜같은 성격이 있는 것 같다. 만화를 보든 영화를 보든 콘텐츠 산업을 보든 기발하다 못해 싸이코틱하다. 1장에서는 이런 기상천외하면서도 싸이코틱한(저자는 기상천외한 발상이라고 표현했지만 아무리 봐도 싸이코스러운 제품/상상력들도 있다.) 창의력들을 소개한다. 먼저 AKB48 아이돌부터 신비의 계곡 목거리, 노벨상 수상자들, 신기한 광고들 그리고 수능시험보는 로봇까지.. 창의적인 신기한 일본 사회를 보여주고자 한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일본 문화를 배우고 싶다거나 부럽다는 생각은 크게 들지 않았다. 우리 나라도 분명 찾아보면 이런 사례들이나 신기한 아이디어 상품들, 그리고 기발한 생각으로 성공한 사례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일본이란 나라와 우리나라의 차이는 일본은 어떤 내용이든 창의적이기만 하면 모두 인정해주는데 반해 우리나라는 창의적이어도 문화나 사람들이 보는 인식에 맞지 않으면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ABK48아이돌이나 글래머 여성을 모델로 등장시켜 좋은 가슴 있다고 한 광고를 보자면 일본에서는 그냥 웃고 넘길 수 있는 사회 문화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문화 정서상 차이일 수는 있겠지만 이런 차이가 창의력을 키우는데 큰 걸림돌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이 들기도 한다.


2장에서는 일본의 일상에서 느끼고 바라본 몇가지 내용을 소개하였다. 현재 일본이 겪고 있는 사안이나 난제는 일본을 계속해서 닮아가고 있는 우리나라에게는 미래이며 좋은 거울이 될 수 있다. 그 중에 대표적인 내용이 로봇이었다. 세계 로봇산업을 꼽으라면 미국과 일본이다. 특히 인간형 로봇이 휴머로이드(?) 로봇은 일본이 최강이다. 따라서 일본은 로봇을 제4차 산업혁명으로 예상할만큼 로봇산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아직은 걸음마 수준이지만 기술이란 것은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하기 때문에 언제 로봇이 자동차처럼 우리 옆을 지키고 있을지 모른다고 소개한다. 이에 대해서 세계의 많은 학자들이 여러가지 의견을 내놓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로봇'이란 미래 산업은 현재의 시장을 변화시키고 우리의 삶 자체를 재편할 만큼 강력하며, 인간을 대체할 노동력으로 급부상할 것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나라도 로봇산업에 크게 신경을 써야하지 않나 생각해본다.


다음으로는 20세기 필름이란 시장을 독점했던 코닥과 후지필름사의 현재 모습을 소개해준다. 결과부터 얘기하자면 모두가 다 알겠지만 코닥은 망햇고, 후지필름은 살아남았다. 그리고 이유 역시 코닥이 디지털 카메라 시장에 늦게 진출하면서 문을 닫게 되었다는 스토리는 누구나 다 아는 유명한(?) 이야기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내용이 있다. 당시 디지털 카메라 시장의 중심은 일본이었으며, 코닥이 디지털화에 늦은 이유가 캐나다와 가까운 뉴욕주 북서부의 로체스터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시 마랳, 경쟁자로 넘쳐 나는 큰 물에서 놀아야 혁신으로 나아갈 동력과 방향성을 제때 정확히 읽을 수 있다는 뜻으로 코닥은 알면서도 당한 꼴이 되었다고 소개한다. 현재로 따지자면 무슨 시장이든 중심은 중국, 인도, 브라질 등 BRICS가 될 것이다. 이들 나라 시장의 중심을 잘 파악하고 시장 환경을 잘 타는 것이 생사의 관거이라 할 수 있다.


2장 마지막 내용은 2차세계대전에서 일본 전투기였던 제로센에 대한 내용이다. 진주만에서 자폭기로 유명한 전투기인데, 2차 세계대전당시 제로센이란 전투기는 최고의 전투기였다고 한다. 미국 해군이 자군의 조종사들에게 제로센을 만나면 도망가라고 할 정도로 일본이 완벽하다고 자부했던 전투기였는데 이 전투기가 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어떻게 해서 미국 전투기에게 패배했는지 이야기해준다. 일본 제로센 전투기는 해군의 요청에 따라 개발되었는데 요청했던 내용이 함정이다. 해군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전투기를 만들라는 훈령이 떨어졌고, 당시 미츠비시의 기술진들은 이런 요청에 부응하여 결점 하나 없는 완벽한 전투기를 개발하겠다는 목표로 당시 노하우를 다 쏟아부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한 전투기가 제로센이었다고 한다. 당시 결점이라고는 찾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고 일본이 자부할 정도로 기술적으로 한계에 달한 전투기였는데 이런 이유 때문에 일본 개발자들은 자신들이 개발한 제로센을 능가하는 전투기를 개발할 수 없었다고 한다. 따라서, 태평양 전쟁 6년 동안 단 한번의 개선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정도로 개발자들 스스로의 발상에 한계를 긋는 제로센을 만듬으로서 후발기술이 생겨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 후에 미군의 최신예 전투기에 패배할 수 밖에 없었고, 마지막에는 가미카제 특공대의 전투기로 역사를 마감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이야기해주고자 하는 점은 이렇다.


'창의적 기술이든 발상이든 그에 관한 마음가짐은 완벽에 다가서려는 태도로 일관해야 한다. 한편으로 완벽함 추구를 통해 도출된 아이디어라 할지라도 그것이 완벽하다는 생각은 늘 경계해야 한다. 완벽하다고 믿는 순간 자신의 사고에 스스로 한계, 즉 높은 철벽을 쌓을 가능성이 있다.'


마지막 3장은 일본을 거울삼아 한국을 보자는 내용이다. 특히 기업들이 겪고 풀어야할 문제점을 일본 기업과 비교하여 진단하고자 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일본의 소니와 현재 우리나라의 최대기업인 삼성이다. 소니는 198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세계 최대의 전자회사였다. 하지만 그 이후 혁신적인 제품을 내놓지 못하고 모바일 산업, TV산업 등에서 계속해서 부진한 모습이 보여 현재는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이다. 전문가들은 소니의 패망 원인이 지나친 내수 시장에 의존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1억 2천명의 인구에 의존해 노력하지 않아도 발전할 수 있었고 그로인해 상대적으로 혁신을 게을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휴대폰의 경우 최고의 기능과 기술력을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자국 표준에만 집착하다가 세계 시장과의 호환을 놓쳤다고 평가받는다.


하지만 이러한 소니의 몰락이 왜이렇게 현재의 삼성과 비슷해보인다.


현재 삼성이 흔들리고 있다. 애플과 격차는 좁혀들고 있으며 중국의 거센 추격을 받고 있다. 때문에 영업 이익이 전년 대비 30% 이상 줄어들었다는 것은 대한민국 국민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특히 삼성기업이 가지고 있는 경제력은 우리 나라 전체 경제를 흔들 수 있을 만큼 거대하며 파급력은 대단하다. 때문에 모두가 한 목소리로 우리 나라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삼성을 살려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세계의 벽 앞에 삼성을 어떻게 살려야할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소니를 보고 배우자고 저자는 이야기하고 있다.


소니가 쇠락한 가장 큰 이유는 '조직의 관료화'라고 말한다. 혁신의 최대의 적도 관료화이며 관료화는 잘 나가는 조직이 시간과 함께 떠안게 되는 숙명적 난제이다. 조직은 이를 구성하고 있는 인재에 달려있는데, 그런 인재들이 점차 관료화된다면 기업의 생명은 끝이다. 본질은 변화보다는 안주가, 긴장감보다는 느슨함이 지배하는 조직의 관료화가 기업의 성쇠를 좌우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따라서, 삼성이 현재와 같이 조직의 의사 결정이 늦고 창의적이거나 모험적 투자는 등한시하면서 구성원 대다수가 현상 유지와 당면한 실적 관리에 몰두하고 있다면 삼성의 미래를 불보듯 뻔하다.


그래서 조직의 비대화와 관료화, 상명하복의 조직 문화를 어떻게 일소할 것인지가 혁신으로 가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라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조직 구성원을 보면 우수한 직원 20%, 그렇지 못한 직원 20%, 그저 그런 평범한 직원 60%라고 한다. 기업을 살리기 위해서는 이 세 부류중 어느 부류에 주안점을 둔 혁신을 추진할 것인가를 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진정으로 혁신을 꿈꾸는 CEO라면 앞으로 치고 나가려고도, 뒤로 처지려고도 하지 않는 안정 지향적이자 안주를 탐닉하는 60%의 말들에게 먼저 채찍을 가해야지만 회사는 앞으로 나갈 수 있다. 대한민국은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인재가 유일한 자원이다. 따라서 인재를 키우고 혁신을 해야지만 기업은 살아나갈 수 있다. 혁신을 한다는 것은 개인과 조직의 두뇌를 깨우는 일이라고 한다.


어느 전문가가 한국이 부럽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뭐가 부럽냐고 물었더니 '일본은 한국과 같이 일본같은 거울이 없었다. 그래서 항상 시행착오를 겪어야 하면서 성장해왔는데 한국은 일본이라는 거울이 있으니 이런 시행착오를 겪지 않고 성장할 수 있기 때문에 부럽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과연 우리가 이런 일본을 거울삼아 잘 성장하고 있는지 의심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일본이 초고령화 시대가 온 사이에 우리나라 역시 저출산으로 인한 고령화 시대로 접어들고 있지만 이런 사회를 개선하려고 하는 모습은 어디서도 찾아 볼 수가 없으며,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여전히 원자력 발전소를 늘리려고만 하고 있다.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국민들이 관심을 갖고 나라를 조금씩 변화시켜 나가는 길 밖에는 없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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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수업 - 온전한 나로 살아가기 위한 최고의 질문
박웅현 외 지음, 마이크임팩트 기획 / 알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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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수업_박웅현, 진중권, 고미숙, 장대익, 장하성, 데니스홍, 조한혜정, 이명현, 안병옥


최근 인문학책을 보면 많은 작가들이 현대인들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라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과연 진정 생각없이 살아가고 있는 걸까? 수업까지 들으면서 생각이라는 것이 필요한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또 다른 책에서는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잠자기 전까지 계속해서 생각을 하면서 산다고 하는 작가도 있다. 옷입는 것부터 시작해서 아침, 점심, 저녁은 무엇을 먹을지, 회사에서 무슨 일을 해야 할지, 가족, 동료, 친구들과의 관계에 대한 생각들 등등 연속적인 선택에 대한 생각들을 하면서 살고 있다. 그리고 이런 선택들에 의해서 즐거움, 고마움, 행복과 같은 좋은 감정도 느낄 수 있고, 걱정, 후회,미련 등과 같은 힘겨운 감정들을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다. 즉, 머리속에는 끊임없이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머리속이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는데도 위 8명의 사람들을 비롯 많은 인문학자들이 생각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일까? 그럼 반복되는 일상의 생각들은 이들이 말하는 생각이 아닌 걸까? 생각이라는 것이 무리가 하는 생각들과 다른 더욱 더 거창하고, 진지한 것들이여야만 하는 것인가?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이 궁금증을 해소시키기 위해 생각을 위한 수업을 주제로 한 이 책을 통해 8명의 작가들이 이야기하는 생각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알아보고자 이 책을 펴보았다.


왜는 왜 필요한가 by 박웅현


박웅현 작가는 물은표가 좋다고 한다.

인생의 즐거움은 느낌표를 찾는데 있으며, 이 물음표가 있어야 느낌표가 따라온다고 한다. 또한 큰 즐거움을 위해 이 느낌표가 커졌으면 좋겠으며, 느낌표가 커지기 위해서는 물음표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물음표는 곧 질문! 질문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리스/로마 시대에는 질문이 많았던 시대였다. 반면 중세시대는 질문이 사라진 시대였다고 이야기한다. 그리스/로마시에는 소크라테스와 같은 인물을 예로 들면서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을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처형을 당했는데, 그 이유는 끊임없이 질문을 했던 것 뿐이다. 당시 소크라테스의 질문은 이러했다. '신의 말은 어떤 경우에나 항상 옳은가?', '신이 거짓을 행하라고 명령하는 경우는 없는가?','신의 명령에 우선하는 절대선의 개념이 있는 건 아닌가?' 등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질문들이다. 질문은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고 한다. 그래서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 질문을 싫어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었고, 그래서 소크라테스 역시 이런 질문들을 했다는 이유로 처형을 당한 것이다. 중세시대는 '암흑시대'라고 불렸으는데 그 이유가 신을 믿기 위해 질문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지금이 당시의 중세시대와 닮았다고 박웅현 작가는 이야기한다. 중세시대에는 신이라는 존재를 믿기 위해 질문을 던지지 않았고, 지금은 돈을 벌기 위해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고 한다.


학교 다닐 때 선생님들이 고전 읽기를 권했는데 지금은 선생님들은 단지 수능 시험에 나오는 것만 익히라고 한다. 책 읽는 것은 공부가 아닌 것 만냥! 그래서 이러한 학교 현실에 대해 박웅현 작가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이야기하고 이렇게 질문을 던져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왜요?'라는 유치스러워보이지만 진지한 질문을 던졌다.


'왜 수능시험에 나오는 걸 익히는 것만 가지고 공부라고 할까요? 책이란 뭐죠? 책 읽기가 곧 공부아닌가요? 상식이 뭔가요? '안나 카레니나'가 상식 아닌가요? 왜 공부하세요? 그럼? 왜 대학에 가시나요?'

'여러분은 왜 공부합니까?' 좋은 대학가려고? 좋은 직장에 가고 싶어서? 왜요? 돈 벌려고요.. 왜요? 결혼하려고요... 왜요? 애 낳으려고요... 그다음에는요? 좋은 교육 시켜야죠... 그 다음에는요? 좋은 대학 보내야죠..


박웅현 작가는 대학생들을 위주로 이 수업을 진행했기 때문에 직장인인 나는 이런 질문들을 던져 보았다. 과연 나는 왜 일을 하고 있는가? 돈 벌려고? 집 사려고? 자식 잘 키우려고? 이런 것들이 내 삶의 진정한 목적이자 목표인가? 그냥 남들이 이렇게 살고 있으니깐 나 역시 이렇게 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아닐까 라는 무의식적인 안전함을 추구하는 것일까? 진정 이런 것들이 나를 위한 일들인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이지?


대한민국 국민들은 20대 초반까지 살면서 한번도 자기 자신에게 진지하게 "왜?란 질문을 던져본 적이 없다. 30대인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내가 진정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도 모르며,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이것은 20대 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인 모든 연령층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문제이다.


대학생 친구가 이야기한다. 대학에 와서 사람들을 살펴보니 나를 채우는 요소가 엄마, 아빠, 선생, 선배라는 걸 알게 되었다고.. 그리고 정작 나 자신을 구성하는 요소 중에 내가 원하는 것은 없었다고... 이런 것들이 질문하지 않는 사람의 몸이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는 사람의 몸! 그래서 이 친구는 자기 자신을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채워나가기 위해, 내가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기 위해 끊임없이 왜?라고 묻기 시작했다.


외국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몰라 일단 논다고 한다. 그러다가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그에 맞춰 공부할 수 있는 곳으로 찾아 들어가죠. 이런 것들이 우리가 살아가야 할 모습 아닌지 진자하게 생각해본다.


"배는 항구에 정박해 있을 때 가장 안전하다. 하지만 그것이 배가 만들어진 이유는 아니다" 파울로 코엘료의 책 <순례자>에서 나왔던 책인데 박웅현 작가는 이 구절을 보면서 안정된 직장을 추구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고 이야기 한다. 연복, 연금, 퇴직금 등이 있을 때 우리는 안전하다고들 말하지만 과연 이런 것들이 우리가 태어난 이유일까? 모두 중요하지만 나만의 드라마를 만들어가려면 무엇보다 내가 원하는 것부터 알아야 한다고 한다.


나만의 드라마! 누구나 이런 드라마를 써나가고 싶지만 아직 하고 싶은 일들이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안전을 버리고 항해를 떠나기에는 앞으로의 삶이 불분명하다. 눈이 멀어 앞을 보지 못하는데도 마음만 벅차서 앞으로 나가려고 하는 느낌이랄까? 나침반도 없고 선원들도 없는데도 무작정 돛을 올리고 배를 띄우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나 혼자라면 모를까. 옆에 가족들이 있는 상태에서 무작정 배를 띄울 수도 없느 노릇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안전한 항구에 정박한 채로 썩어가는 걸 알면서도 정박해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정말 모르겠다. 과연 나만의 드라마를 쓰는게 맞는 것인지...


하지만 박웅현 작가가 이야기한대로 일단은 질문을 계속 던져보는 것이 좋은 것 같다. 내가 원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질문을 해야 언젠가는 정말 큰 느낌표가  따라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남과 다른 나만의 생각을 갖는것, 그런 생각을 가진 자신을 존중하는 것이 정말로 중요한 일이다. 박웅현 작가도 알고 있다. 자기 삶을 온전히 나의 것으로 만들며 살아가다 보면, 불안해지는 때가 온다는 것을... 이 길이 맞을지, 내 선택이 옳을지 확실할 수는 없는것이기 때문에... 하지만 예측하기 힘든 것이 인생이고, 그 안에서 스스로 선택을 내리는 것이 또한 즐거움일 것이다.라고 작가는 이야기 한다.


여덟단어에 이어 이번 수업에도 자존감이 또 나온다. 그만큼 나에 대한 존중이라는 말,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는 이야기가 중요한 것일테고, 나만의 드라마를 써 나가고 배를 바다로 띄어 항해를 하기 위해서는 자존이 전적으로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TV 예능중에 '동상이몽'이라는 예능을 가끔씩 보게 되는데 이 사회의 모든 청소년들에게 이 자존감이 많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아들러가 이야기한대로 이 세상에 내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움을 느끼며 살아가야 하지만 맞벌이로 인해 바쁜 부모들과 친구들과의 공유가 아닌 경쟁을 하라고 부추기는 학교에서조차 이러한 고마움을 느끼도록 많이 신경을 못 써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과연 청소년들이 자기 자신을 위한 삶, 질문들을 해 보았을까 의문이 든다. 그래서 항상 내 자신들, 주위 사람들에게 그들 스스로의 자존감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는 항상 고맙다는 말과 사랑한다는 말들을 자주 해줘야 한다. 박웅현 작가 역시 "나도 찌질하지만, 쟤도 찌질해, 내가 좋아하는 게 저 사람이 좋아하는 것보다 중요해"라는 말을 하며 자존하도록 권장한다.


우리는 왜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by 진중권


다음은 정치다. '생각해 봤어?'에 이어서 2번째로 진중권 교수의 정치적 내용을 읽었는데 '생각해 봤어?'에서 나왔던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나라 정치 이야기는 계속 보고 또 봐도 흥분된다. 나쁜 흥분이지만...


이번 수업은 주제대로 우리가 왜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되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정치에 관심을 왜 가져야 되는건지..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정치에 무관심해진 사람들을 위해 말하고자 한다. 그래서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 정치에 왜 관심을 못가지는지 대한민국 현실에 대해서 말해준다.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 민주주의 실현에 대한 배고픔이다. 우리나라는 80년대 부르짖던 민주주의 과제는 어느 정도 해결됐다고 사람들이 믿는다. 그로인해 민주주의 보다는 배고픔 즉,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느냐보다는 어떻게 해야 취직을 할 수 있을까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는게 낫다고 이야기하고 더해서 정치에 관심을 가질수록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가 흔히 발생하고 있다. 그래서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건 불이익과 낙인뿐이며, 그래서 정치에 관심 끄고 먹고살 일이나 걱정하는 게 낫다고 믿는 자칭 '현실주의자'들이 생겨나고 있다.


다음으로는 정치인들이 짜증나서 그렇다이다. 원래 정치인이라고 한다면 공익을 위해 일해야 하는 사람들인데 우리나라의 정치인들이란 사람들은 사익이 공익보다 더 우선시하게 일을 한다. 이런 말은 인정할 수밖에 없으며, 카메라 앞에서는 여야가 매일 싸우는 것 같지만, 카메라가 지나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여야를 막론하고 수다를 떠는 정치인들 생각만 하면 정말 정치에 관심을 뚝 끊고 싶어진다. 우리는 이러한 장면들을 매일 반복적으로 보게 된다.


세번째 유형은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는게 아예 '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이런 유형이 많은데 친구들과 정치이야기를 하다보면 주위에서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도 많으며 특히, 대학생들이 많은 자리에서 이야기하다 보면 '늙은이, 재수없다, 잘난 척 하는 거냐' 라는 식의 눈치를 주는 경우가 있다. 진중권 교수도 정치 이야기를 하다보면, 사람이 치열해지게 마련이며, 교우관계는 물론 심지어 가족관계까지도 망가지기 십상이라고 이야기한다. 실제 정치에 대한 과도한 관심은 주위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드는 경향도 있기 마련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으며, 그들을 붙잡고 반박해야 하는데 진중권 교수 역시 자신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런 환경, 사람들 속에서도 계속해서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하며, 왜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이유를 설명해 준다.


정치란 무엇일까? 첫번째는 공동체 주의적 경해이고, 두 번째가 바로 자유주의적 견해라고 한다.

공동체주의자들은 정치를 '덕을 실현하는 행위'로 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오직 국가 공동체에 참여하여 그 안에서 정치적 활동을 할 때에만 진정으로 인간다워진다고 말한다. 즉,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란 말이다. (이렇게 이론적으로 나가면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그리스인들이 보기에는 인간은 출마나 투표를 통해 폴리스의 정치적 결정 과정에 참여하며 살아가는 폴리스의 동물이라고 한다.


다음은 자유주의적 견해이다. 자유주의들은 정치를 무엇보다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행위'로 한다. 현대의 우리나라는 의회 민주주의 내에서 토련과 논쟁으로 상이한 이해관계를 조정합니다. 이들이 보는 정치란 비록 가치관과 이해관계는 서로 달라고 합리적 토론과 논쟁을 통해 현실에서 부딪치는 문제들을 공동으로 해결하여 다수가 만족하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기제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러한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멀쩡히 해결될 문제도 국회로 들어가면 외려 해결불가능한 난제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생각도 든다고 한다.


'차라리 국회의 결정 과정을 계산기에 맡기면 어떨까?'


영화 이야기를 잠깐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얼마전 애국주의와 가족주의를 내세운 천만 관객이 본 영화(아무래도 명량인듯) 이야기를 할 때 '그 영화, 별로였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보고 공동체주의적 성향 사람들은 애국심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반면 진중권 교수처럼 자유주의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나라 사랑을 하려면 조용히 혼자 하면 될 것이지, 왜 그것을 요란하게 남에게까지 강요해야하는것일까'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공동체주의가 강해지면 나치시절의 독일이나 지금의 북한과 같은 전체주의가 된다고 한다. 반면 자유주의자들은 가치관의 다양성을 존중한다. 이들은 개인들 사이에 이념이나 사상이나 종교가 나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러한 경해도 너무 강하면, 여러 문제가 발생하는데 그 중에 국가가 개인의 가치관을 가지고 시장에 개입해 과세를 하면 안되며, 국가는 야경국가, 작은 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성원들이 공유하는 가치가 전혀 없다면, 이렇게 서로 갈등하는 계급, 계층을 국가 공동체 안에서 하나로 통합하기 어려워진다고 말한다.


그래서 서로 다른 가치관들이 서로 소통하려면, 그것들 사이에 공통분모가 존재해야 하는데 이 공통분모는 강요를 통해 얻어져서는 안된다. 다른 조직의 성원들이 서로 다른 생각을 인정하고, 토론과 논쟁을 통해 차이를 좁혀 합의점을 넓혀갈 수 있는 방식으로 풀어나가야 한다.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수준을 넘어 사회의 대다수가 합의한느 가치관을 만들어낼 때, 사회가 안정적으로 발전해나가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이어서 우리나라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인지 생각을 해보자고 한다. 자유주의는 국가나 권력으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지키는 것을 의미하고 민주주의는 집단적 평등의 사항으로 인민주권사항, 그리고 다수결의 원칙을 바탕에 둔 사상인데 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자유주의와 항상 짝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나라는 실질적으로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지만, 헌법에는 사실 사회주의적인 면도 강하게 존재한다. 우리나라 헌법 자체는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진보적이지만, 법률이나 판결이 헌법만큼 진보적이지 못한 것이다.


자유주의에서 말하는 자유에는 두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정치적 '표현의 자유'이고, 다른 하나는 '영업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자유주의자들은 전자가 아니라 주로 후자만 강조한다고 한다. 결국 우리나라 자유주의적 가치는 이렇게 왜곡되어 있으며, 기업가들이 나라를 마음대로 쥐고 흔들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즉, 우리나라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적 가치 모두 우리 헌법의 정신과 비교하면 많이 왜곡되어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고통받는 이유는 왜곡에서 비롯되었다. 우리 사회의 사회보장제도는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교육이건 의료건 노후 보장이건 '너희가 다 알아서 해'라는 식의 체제이다. 기업들은 대학에 맞춤형 인재를 키워내라고 요구합니다. 기업에 꼭 맞는 인재를 생각하는게 대학의 역할이며, 당연히 그 비용은 수혜자인 기업에서 대야 한다고 주자한다. 부모가 아닌... 노동자 역시 사회 보장이 없는 상태에서 무조건 살아남아야 되고 그 결과, IMF 이후 '신 자유주의'정책의 결과, 중산층이 참혹하게 붕괴됩니다.  과연 가진 자들이 정말 전보다 더 열심히 일하거나 혹은 갑자기 더 큰 능력이 ㅅ애겨서 더 많이 가지게 된 걸까요? 혹은 갑자기 더 큰 능력이 생겨서 더 많이 가지게 된 걸까요? 못 가진 자들이 전보다 노력을 덜하거나 혹은 갑자기 능력이 떨어져서 못 가지게 된 걸까요?


이를 바로잡으려면 게임의 규칙을 다시 세워야 하는데 그렇다면 게임의 규칙은 누가 만드냐? 바로 정치이다. 즉, 우리가 이렇게 힘들게 살게 된 이유가 바로 우리가 내린 정치적 결정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런 결정을 내렸을까? 정말 신기한 것이 투표 결과를 보면 잘사는 강남 사람들과 못사는 사람들의 투표 결과가 일치한다. 강남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에 맞춰 계급 투표를 하지만 반면, 가난한 사람들은 그냥 변화가 싫어서 보수당을 찍는다. 진심으로 조선시대에 노예들, 누군가의 밑에서 일하는 것이 편한 사람들처럼 현대의 못사는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가지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매일 같이 힘들어 하면서도.....


지금의 문제점들을 조금 더 보여주자면 먼저, 비정규직이다. 우리는 1년 내내 필요한 인력을 비정규직으로 만들어, 정규직과 똑같은 생산라인에 투입하면서도 임금을 절반밖에 주지 않는다. 이는 고용 유연화가 아니라 사실상 임금 착취이다. 비정규직 차별은 만인의 평등을 이야기하는 민주주의 원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행위이며, 우리 사회를 근대 민주주의 이전의 신분 사회로 되돌리고 있는 셈이다. 이런 역사적 퇴행을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갑질' 문화, 땅콩 회황, 라면 상무 등인데 이들은 노동자를 자신과 대등한 인격이 아니라, 자신에게 인격적으로 예속된 노비 정도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모두가 결국 우리가 스스로 내린 정치적 결정들의 결과들인 것이다.


우리들은 정말 열심히 살아왔다. 대학들이 원하는대로 청소년때 죽어라 수능공부를 해 왔고, 대학에 입학해서도 취업을 하기 위해 기업이 원하는 스펙을 쌓기 위해 대학 등록금, 토익 시험 비용, 등 많은 비용을 들여 하라는 대로 다 했다. 이렇게 열심히 했는대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힘들게 살고 있다면, 이런 사회적 책임으로 봐야 한다.


우리가 정치에 관심을 끈 사이에, 그리고 우리가 잘못된 선택을 한 사이에 기득권과 돈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세상을 조정해왔다. 우리는 과연 평등한가? 결코 아니다. 우리는 평등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불평등을 당하면서 살아왔다. 노동자가 사용자와 실질적으로 대등해지 위해서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진중권 교수는 양자가 대등하려면, 노동자가 자신을 '단체'로 저직해야 한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노동조합이다. 독일에서는 "강력한 노조는 독일 기업의 경쟁력 요소"라고 주장하며,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노동자와 기업의 운영자들이 함께 내린다고 한다. 그러면서 주요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한 노동자는 자신이 몸담은 기업에 더 큰 책임감을 느끼게 되고, 이로써 기업의 생산성은 훨씬 높아질 수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결코 공정거래라는 것이 없다. 우리 회사 뿐만 아니라 모든 회사가 기술혁신을 해서 생산 원가를 떨어뜨렸다. 이것은 중소기업의 노력해서 얻은 성과이다. 하지만 대기업이 매년 회계 감사가 들어오게 되면 기술력에 의한 원가 절감된 금액만큼 제품의 납품가를 깍아버린다. 결국 기술 혁신으로 얻은 이윤이 온전히 대기업의 몫으로 날아가 버린다. 이런 현실 속에서 어떤 기업이 과연 기술혁신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박근혜 정부 들어와서 창조 경제를 자주 말하는데 창조결제를 위한 전제조건은 공정 거래 질서 확립이다. 즉, 대기업의 갑질을 막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잘 안된다. 왜!!?? 정치가 왜곡되서라고 말한다.


정치란 결국 사회라는 게임의 규칙을 쌓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국민들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그 놀이의 규칙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정치에 관심을 끊는 것은 우리 삶을 새로이 조직할 수 있는 가능성을 포기하고 그저 남이 내 운명을 결정하게 두는 행위와 같습니다. 남이 ㅁ나들어놓은 매트릭스 안에서 헝거 게임을 하겠다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정치적 상상력이다. 그리고 60대 이상 세대들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우리 사회가 자꾸 거꾸로 돌아가고 있는데 이들의 선택은 우리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힘이 있다. 따라서, 우리가 앞으로 잘살고 다음 세대가 잘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바꿔나가야하는 용기가 필요하지 않나 생각해본다.


과학은 가치에 침묵하는가 by 장대익


과학을 인문학이랑 연결짓는 다는 것은 쉽지 않아보인다. 개인적으로는 과학으로 인해 좋은 점도 당연히 있었겠지만, 지구를 황폐하게 만들고 실험쥐나 토끼들과 같이 인간의 질병 치료를 목적으로 희생되고 있는 동물들을 보면 과학이란 학문을 좋아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이런 것들을 하고 있는 인간들이겠지만, 과학이 없었다면 지구가 황폐해지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로 인해 희생된 동물들 역시 죽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와서 과학으로 지구를 되살린다고 해봤자 '도랑치고 가재잡는' 격이다. 과연 왜 인간이란 동물이 만물의 영장이란 스스로의 자부심과 함께 지구를 지배하고 모든 동물들을 지배하게 되었는지 궁금해지면서 그래서 장대익 교수가 과학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할지 수업이 흥미로웠다.


장대익 교수가 던지는 질문은 "정말 과학은 가치에 침묵할 수 밖에 없는가? 과학은 인간 실존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이다.


우선, 과학이 인간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부터 이야기한다. 첫번째로는 과학은 인간을 '우주적 존재'라고 말한다. 우리 인간이 빅뱅-별-원소-태양계와 지구의 탄생-생명의 탄생-문명의 발생 등의 과정을 거쳐 진화해온 존재라는 것이다. 두번째는 '자연적 존재'라 말한다. 인간은 겨우 20만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나타난, 자연계에서 가장 어린 존재로서 우연히 일어난 운석 충돌로 인해 공룡이 자리를 잃고 인간이 진화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었기 때문에 인간은 자연적 존재로서의 우연한 결과물이라고 한다. 그 중에 육상 척추동물들 중에서 이렇게 단기간에 넓은 범위로 퍼져 생태적으로 성공한 종은 호모사피엔스 단 한종으로써 대체 무엇이 인간을 이렇게 특별한 존재로 만들었을까? 질문을 던진다.


인간의 뇌 용량은 침팬지 뇌 용량을 3.5배이다. 600만 년전 침팬지와 인간이 한 공통 조상에게서 갈라져 나온 이래 인간의 뇌 용량이 급격하게 커진 이유는 무엇일까? 이 현상에 대해 각광받는 이론인 브레인 이론을 보자면, 인간의 뇌가 생태적 문제가 아닌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커졌다고 본다. 인간은 집단 구원 간의 사회적 유대를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스킨십이었떤 동물들의 털 고르기를 하는 대신 언어를 진화시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해왔다고 말한다. 즉, 인간의 큰 뇌는 효율적인 집단생활을 영위하고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말로 하는 털고르기'인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고 서로와의 관계를 부드럽게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다른 영장류와 빈교할 때 어떤 고유한 사회성을 가지고 있을까?

첫번째로 '시선 따라가기'이다. 이 시선 따라가기 행동은 다른 사람의 의도를 파악하고 공통의 관심사에 반응하는 사회성의 기본이 되는 행동이다. 다음은 '가리키기'. 자기의 관심을 다른 사람도 같이 갖게끔 만들고 공동의 주의 집중을 유도하는 사회성의 중요한 기술이다. 세번째는 '마음읽기'라고 한다. 인간만이 가진 또 다른 사회적 능력으로 '추론'능력을 뜻하는데 우리 인간은 타인의 목적과 의도를 읽는 이 복잡한 추록 과정을 일상에서 실제로 행하고 있다고 한다. 네번째로는 공막의 유무에 있다고 한다. 인간에게는 눈동자 주위에 하얀 공막이 존재하는데 이 공막의 존재가 눈동자의 위치가 공개되기 때문에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 눈만을 보고도 알 수 있고, 이것이 협동의 기초가 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공평성과 정의감에 대한 차이를 들 수 있다. 영장류는 모두 정의감을 가졌지만, 인간만이 정의의 문제를 해결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내용이다. 이렇게 여러 측면에서 차별화된 사회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호모 사피엔스가 '초사회적 종'으로 진화했따는 이야기를 한다.


다음은 슈퍼 모방자에 대한 내용인데 인간은 초사회적인 종일 뿐 아니라 가르치고 따라하는 행동을 통해 문화를 축적해왔따고 말한다. 침팬지 사회의 특징적인 행동을 정리해서 봤을 때 따라 하는 행동, 즉 모방을 통해 문화가 만들어진다고 한다. 침팬지도 어느 정도의 모방력을 갖고 있고, 그로부터 문화 비슷한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 존재이지만 인간은 목표와 상관이 있든 없는 세부적인 절차와 과정을 모두 따라했다는 것이다.(이 부분은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다.) 더 나아가 문화를 축적하는데 있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특징은 단순한 모방을 넘어 적극적으로 가르친다는데 있다고 말한다. 인간은 절차를 그대로 따라 하는 특별한 모방 능력과 적극적으로 타인을 가르치는 사회적 학습 시스템을 기반으로 하여 인지 자본을 축적이고 이를 후대에 전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인간만의 문화를 만들 수 있었다고 이야기 한다. 즉, 전지구적으로 퍼져나가 문명을 이룩하며 생존해온 인간은 생태학적으로 전례가 없는 지구의 지배자이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이 눈치가 발달한 초사회적 동물이고 눈썰미가 있는 슈퍼 모방자이기 떄문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어떻게 이런 엄청난 종이 되었나?'하는 질문의 답은 찾는 작업은 종교의 영역에서 과학의 영역으로 바뀌어왔다. 과학은 우주적, 자연적 존재로서의 인간 실존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켜왔으며, 가치와 의미를 추구하는 인간 본성에 대해 더 깊은 이해를 제공해왔다. 더 나아가 과학은 가치를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끝으로 장대익 교수는 인간에 대한 앎은 인문학의 주제이기도 하지만, 그 앎을 인간에 대한 탐구라고 본다면 이에 대해 가장 새롭고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바로 과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과학은 21세기 인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설령 진화론적 측면, 그리고 인류가 진화해온 과정, 동물들과의 차이점에서 인간을 본다면 과학이 21세기의 인문학이 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는 과학을 따라올 다른 학문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진화론 적인 인문학이 아닌 감성적, 정신적인 인문학. 인간이 왜 사는가에 대한 내용이 되야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과학적 측면에서는 인간의 행복을 해결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백날 과학을 탐구해봤자 약간의 도움은 될 수 있을 지언정 인간이 어떻게 하면 행복해 질 수 있을까에 대한 대답은 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정의로울 수 있는가. by 정하성


다시 정치 이야기같지만 이번에는 정치보다는 경제의 맥락에서 장하성 교수가 대한민국의 현실을 이야기한다. 주제를 먼저 읽었을 때는 다소 진보주의적 내용이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장하성 교수는 보수, 진보 모두 꼬집는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우리나라의 보수주의자들과 진보주의자 모두를 꼬집는다고 이야기하는 게 맞을 것 같다. 대한민국은 자본주의 국가가 맞다. 극 자본주의 국가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장하성 교수가 하는 말이 흥미로웠다.


'한국' 자본주의인가 한국 '자본주의'인가.

이 말을 이해하는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풀이하자면,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가 한국을 위한 자본주의인가? 자본주의를 위한 한국인가? 이다. 그리고 '과연 한국이 어떤 자본 주의 시장 경제 체제를 갖고 있는가'라고 질문을 던져본다. 그리고 이 질문에 스스로 답할 수 있어야 오늘날의 이 답답한 상황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공산주의와 구분되는 가장 큰 차이가 기본적으로 사유재산을 인정하느냐이다. 사회주의는 국가가 모든 것을 소유하고 통제하지만 자유주의는 경쟁을 통해 얻어낸 사유재산을 인정해주며 역사적으로 봤을 때 자유주의 체제가 현실에 맞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단순히 사유재산을 보호하고 경쟁하는 것이 시장 경쟁의 전부는 아니다. 그 사유재산은 정당하고 공정하게 취득한 것이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으며 따라서 정당하지 못한 취득 재산은 허용되어서도, 보호되어서도 안된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논리로 한국 경제를 봤을 때 한국은 참으로 많은 불공정 경쟁과 정당하지 못한 부의 축적이 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부분은 보수, 진보라는 프레임 안에서 전혀 바로잡혀지지 않고 있다.


진보와 보수 모두 무언가를 지키려고 하긴 하지만 이들이 각각 지키려고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장하성 교수는 질문한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한다. 보수는 자신의 이권에 매몰된 나머지 기득권을 지키려고 하고, 진보는 세상을 바꾸겠다는 이념에 매몰된 나머지 현실과 동떨어진 이념을 지키려고 한다고.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보수는 자유 시장을 위해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를 지향한다고 말하지만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시장을 부정하는 행위를 너무나 쉽게 한다. 경쟁을 통해 효율을 내고 파이(?)를 키우려면 그 경쟁은 반드시 공정해야 하지만, 우리 나라의 보수 집단들은 불공정 경쟁을 옹호하거나 심지어 불공정 경쟁을 추구하는 것처럼 본인다고 이야기한다.


반면 진보는 세상의 모든 문제가 자본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이들은 문제는 대안은 말하지 않은채 계속 문제 제기만 한다는데 있다. 그저 현실에 대한 체제를 부정하면서 대안을 모색하는 노력을 별로 하지 않고 그저 끊임없이 함께 잘사는 평등 사회를 이룩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재분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재분배'란 말은 다시 분배한다는 의미인데 우리나라의 경우는 재분배 이전에 분배 자체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다는게 더 큰 문제이다.


그리고 보수는 자구 과거를 토대로 미래를 설계하자고 한다. 그러다보니 보수들 대부분이 박정희 향수를 갖게 되었으며, 경제를 많이 발전시킨 대통령이기도 하지만, 독재를 했고 쿠테타로 정권을 탈취하기도 한 불행한 자화상이기도 한 이 시대를 그리워하면서, 국니들에게 자꾸 그런 시대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려고 한다고 말한다.


반대로 진보는 우리나라와 맞지 않는 유럽 선진국의 실례를 수입해 우리에게 적용하자고 한다. 남의 사진을 보면서 내 얼굴을 찾으려는 격이라고 말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문제를 살펴보자면 보수의 궁극적 이념은 자유주의이다. "극단적 자유주의"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정부가 자유를 제한해서는 안되며, 사유 재산을 건드리면 안된다라는 주의이다. 그런데 한국 자본주의의 가장 큰 문제는 어쩔 수 없는 시대 상황, 짧은 기간의 압축 성장이라는 변명을 일정 부분 우리가 받아들여, 한국의 많은 축적 사유재산이 불법, 불의 부패로 만들어지는데 일조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만들어진 재산을 어디까지 보호해야 한다고 보는가? 앞으로의 정당상은 어떻게 확보해야 하는 걸까? 생각해 보자고 한다.


한국 사회의 문제 중 하나가 경영권이다. 회사의 최고 경영자에게는 노동자, 공급자, 주주, 사회 등의 이해 당사자들을 위해 최선을 다할 의무와 책임이 있을 뿐, 회사를 가지 마음대로 경영할 권리는 있지 안하. 하지만 최고경영자가 회사에 대해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는 인식은 오로지 우리나라밖에 없다.  그러면서 국가의 미래가 걸린 여러 기업들의 경영이 어떻게 세습될 수 있는 것인지, 이것이 북한의 정권 세습과 대체 무엇이 다르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정말 심각한 문제는 이제 한국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보수의 기득권 개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시장에는 소비자도 있고 공급자도 있다. 그런데 어째서 기업에 유리한 것만이 시장 경제라는 매우 잘못된 개념이 자리 잡게 된 것인지 답답하기만 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많은 경쟁이 새로운 도전자의 공공보다는 기득권의 강화를 불러오는 부작용을 낳게 되었다. '도전하면 된다'는 희망적인 신화는 한국에서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 점점 도전이 성공하기 어려운 토양이 되어가면서, 도전하려는 사람들 자체가 많이 사라지고 있다. 경쟁의 목적은 기득권 없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기회를 준 다음,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가기 위해 함께 노력해나간다는데 있다. 즉, 경쟁에 따른 상과를 함께 나누는 것. 이것이야말로 경쟁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진보는 문제가 없느냐! 진보는 끊임없이 자본주의 탓만 하고 있다. 비판은 현실의 문제를 지적하고 대안을 마련하기 위한 것인데, 진보는 대안을 제시하지 않고, 현실 부정만 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우리 경제가 자본을 빼고 돌아갈 수 있을까? 이것이 가능할 것인가? 자본을 부정하면서 대안을 말하지 않는 것은 무책임한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세상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나가야 한다. 진보와 같이 무조건 현실을 비판하고 부정적으로 바라보기만 한다고 해서 바뀌는 사실은 하나도 없다.


다음으로는 이러한 대한민국 사회의 부끄러운 내용을 그래프로 보여준다. 그리고 세계 여러나라들과의 순위와 퍼센트로 정리하자면, 일을 많이 하는 나라 2위, 임금 불평등 심한 나라 3위, 저임금 노동자가 많은 나라 1위, 고용이 불안정한 나라 4위, 청년 첫 일자리가 비정규직 나라 36%, 비정규직 임근은 정규직의 50% 이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일은 죽어라 하고, 임금은 불평등하고, 고용은 불안하고, 특히 젊은 세대에게는 미래가 어둡다.


우리나라는 양극화 문제가 정말로 심각하다. 중산측 인구 자체는 줄어들고 있으며, 3분의 2가 저소득층으로 추락하고, 3분의 1은 고소득층으로 가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재산소득의 불평등 보다는 임금소득의 불평등을 더욱 시급하게 생각해야 한다. 기업은 소비 주체가 아니라 투자와 생산의 추제인데 기업이 많은 것을 가졌을 때 미래 성장을 위한 투자를 해야 한다. 그 결과 가계소득의 반등으로 나타나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 가계소득의 추락은 임금으로 분배되는 몫이 줄어든게 첫번째 원인, 자영업의 영업 상황이 악화된 게 두 번째 원인이라는 것이다. 경제가 성장하면서 가계소득, 기업소득, 정부소득 모두가 올라야 맞지만 우리나라는 기업 소득만 오를 뿐 가계소득, 정부소득 모두 성장하지 못하는 구조이다. 처음에 재분배의 문제점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우리나라는 분배 자체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다고 이야기 했듯이 기업이 모든 소득을 다 가지고 가는데 어떻게 복지를 하고 재분배를 하겠는가?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점을 고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장하성 교수는 다시 묻는다. 여전히 경제 성장률이 높은 한국, 그런데 그 성장의 성과는 누가 가져갔을까? 우리는 왜 가져가지 못하는 것일까? 그 이유가 잘못된 재분배에 있는 건가? 정부가 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그런것인가? 기업이 분배를 하지 않아서 그런 것인가? 계속해서 이런 방식으로 미래 성장을 추구할 수 있을까? 혹은 분배 구조를 바꿔야 하는 것일까? 묻고 또 묻는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한다. 한국 자본주의 버리지 못하니 고쳐 써야 한다.


그 방법으로는 점진적 변화, 혁명, 개혁을 이야기한다.

점진적 변화는 세상은 우리 모두가 함께 만들어가야 하며, 진화에 맡길 수 없다는 내용이다. 즉, 미래는 흘러가는대로 두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두번째 혁명은 혁명이 가장 빠른 변화지만 우리에게는 그럴 힘도 없으며, 혁명은 피를 부르기 때문에 선택할 수 없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남은 방법은 개혁으로 가장 가능성 있는 방법이라고 이야기한다. 개혁은 우리에게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와 목표가 있다면, 그에 따른 정책 대안은 얼마든지 말수 있다. 그리고 실천해야 한다고 말한다. 실천의 좋은 예가 미국으로 루스벨트 대통령의 실천력으로 인해 아메리칸 드림이 생겨났고, 그로 인해 평등한 사회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레이건 대통령 이후 공화당이 집권하면서, 다시 선진국들 중에서 가장 불평등한 사회가 되었다.


현재 한국 사회는 미룰보다 더 불평등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분노하지 않는 것일까?


장하성 교수는 정치인에게 기대하지 말라고 말한다. 많은 정치인들을 본 결과, 비전이 있으면 실천력이 없고, 실천력이 없으면 비전이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는 투표이다. 투표라는 민주적 절차에 의해 자본을 제어하고 잘못된 구조를 바꿔야 한다. 특히, 젊은 세대들은 세상을 너무 긍정적으로 보지 말아야 하며, 기성세대들이 우리들의 미래를 만들어주도록 허락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세상을 긍정적으로 살라'는 말은 주어진 현실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틀에 맞춰 살라는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다. 그리고 기득권들이 많은 투표하는 이유는 그들의 기득권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미래를 우리 스스로 만들어나가야 한다. 기성세대가 70~80년대 민주화를 싸울 때 그렇게 했듯이...


그런데 우리세대는 위로받으려고만 할 뿐, 저항하지 않는다.

과연 투표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그렇고 그런 정치인, 모두가 자신의 사적인 이익을 위해서 정치를 하고, 실천도 없는 말뿐인 공약들을 보고 우리는 누구를 믿고 투표를 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희망을 버리지 말하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 노무현 대통령과 같이 10명 중 1명은 우리를 위해 헌신하고 있는 정치인이 있을 것이며, 그들을 지켜줄 수 있는 사람들은 현실을 이기고자 하는 우리들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장하성 교수가 마지막에 이야기했듯이 우리가 작은 나비들처럼 다 함께 모여 날갯짓을 한다면 우리들 스스로 태풍을 만들 수 있으며 우리가 원하는 시대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겠다. 조용히 혁명하자!


누구와 함께 살 것인가 by 조한혜정 


조한혜정 교수가 누군지 몰라 인터넷을 통해 찾아봤는데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에서도 인터뷰한 기록이 있어 찾아봤다. 인터뷰 내용 중 뜻깊었던 말은 '스스로 돕고 더불어서 도우면 새로운 어떤 공공 사회가 만들어지는데 그걸 이제는 실천하지 않으면 아이도 못 키우고, 결혼해서도 같이 놀 시간도 하나도 없고, 이건 정말 대안이 없는 사회가 아니냐는 생각이 드는 거죠.' 란 이야기였다. 주위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사회, 이웃을 진정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회가 우리나라에서는 사라졌다는 말이다. 실제로도 내 옆집, 아랫집, 윗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살고 있다. 새로 이사오면 이사왔나보다 하는... 떡을 돌리는 일은 이제 서로 귀찮은 일이 되어버렸다. 나 역시도 그랬으니.. 그래서 이번 조한혜정 교수의 주제가 끌렸고 수업 내용 역시 진정 우리 사회에 필요한 내용이라고 느꼈다.


조한혜정 교수가 이번 수업에 말할 내용은 배우자 선택 이런 것이 아닌 '지구 위에서, 지구를 떠나지 않고, 친구들과 작당하여 우정과 환대의 마을을 만들면서 사는 것'이라고 한다. 요즘 사회에서는 선한 의도로 주위 사람한테 접근해도 나쁜 의도로 접근한 사람인양 취급받는 그런 사회가 되었다. 즉, 신뢰와 나눔의 시공간이 사라진 것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연애할 때 돈 없어도 벤치나 공원 잔디밭에 누워 놀고 그랬는데 이제는 돈이 없으면 연애할 장소도 없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친밀성도 돈이 있어야 일어나는 거래의 대상이 된 것이다. 결혼을 할 때 역시 상대의 재력, 능력 등 시장의 물건 고르듯 상대를 가듬하며 계산을 한다. 부모 자식 간 역시 이러한 계산된 관계가 되는데 실례로 자녀들이 스스로 경제적 자립이 불가능해지면서 공부, 결혼 등 많은 부분에서 부모에 의존하게 되다 보니 30대가 넘어도 돈을 가진 부모 밑에서 순종하거나 순종하는 척 하게 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가족뿐만 아니라 부부관계 역시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남편은 밤늦게까지 일하고 집에 오면 피곤함을 온몸으로 표현한다. 일하기 싫어서... 아내도 별반 다르지 않아 취업한 부인이든 집에서 살림하는 주부든 피곤한 것은 매한가지이니, 남편에게 뒤질세라 힘껏 피곤함을 드러낸다. 이런 피곤함을 보고 자란 아이들 역시 공부에 하루종일 시달렸다는 표현을 부모에게 표현하죠. 그렇게 온 가족이 피곤함 표현 경쟁을 하다보면, '즐거운 나의 집'이 함께 식사하면서 대화를 나누고 서로를 돌보며 생활하는 보금자리가 아니라 피곤한 이들이 녹초가 되어 만나는 일종의 숙박업소가 되어가고 있다. 그렇다보니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세대 '3포 세대'가 생겨나고 있다.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고 자기 자신이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힘들다 보니 이 세상을 모두 없애고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는 만화책이나 영화 같은 악한 인물들이 말하는 대사를 현실에서도 고지 곧대로 믿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즉, 시대적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을 몸으로 알게 된, 즉 '리셋'이 필요한 시대라는 것을 알게 된 청년들이 생겨나고 있다고 한다. 결국 우리 사회가 청년들이 세상을 바꾸어갈 수 있는 학습을 받고 그런 자원을 가질 수 있는 사회인지 생각해볼 때 매우 비관적을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환경적인 문제를 들여다보자면 엘리시움, 인터스텔라같은 영화들이나 세계의 많은 환경단체에서 말하는 지구 파괴나 탈핵 문제, 온난화 현상들과 같은 문제가 최근에 많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지구 파괴를 목적으로 한 영화들을 보자면 지구를 탈출해서 지구 밖이나 다른 행성을 찾아 탈출하자는 스토리가 많다. 인간이 지구를 파괴해놓고선 지구를 버리고 다른 곳에서 산다고 하니 껌 단물 빠지니깐 버리는 것도 아니고 참으로 인간이란 어쩔 수 없는 이기적인 동물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과연 지구를 감옥으로 규정하고 거기에서 탈출하는 것은 맞는 방향일까? 감옥 혹은 거대한 오염 덩어리가 되어가는 지구를 어떻게든 사람이 살아가는 곳으로 회복하는 것이 맞는 방향일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위험하다고 한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막상 변화를 위한 움직인 보이질 않고 있다. 왜일까?


조한혜정 교수는 기본적으로 우리들의 삶이 너무 불안해서 그렇다고 이야기하고 다른 이유로는 우리가 '함게 모여 의논하는 사회적 존재'라는 감각이 사라져서 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일반 시민들 역시 과학자들처럼 명확하지 않으면 믿지 않으려고 한다. 자신이 합리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나?


그런데 아시디피 인간의 삶은 명확한 사실에 의해서만 이루어지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모여서 어려움을 토론하고 질문을 제기하고 중구난방 의논을 하면서 세상의 문제를 풀어가야 하는 것, 그리고 사람들은 의논하는 사회적 존재이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는 정치적 존재이며, 변화하는 시대를 사는 역사적인 존재라고 말한다.


우리나라 교육을 보자면 대학은 실제 성과를 대기보다 부작용을 낳는 성과주의 체제로 전환되었고, 대학 구성원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낼 것을 강요한다. 그 결과, 돈을 벌기 위해 기숙사를 짓고, 휴학을 해도 돈을 내야 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된 것이다. 2006년경부터는 대학생들이 많이 달라졌다. 대학에 입학하기만 하면 술 마시고 놀러 다니고 미팅하고 그랬던 학생들은 사라지고, 부모님께 감사해하고 미안해하면서 놀지 않고 취업 공부만 하는 학생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학원은 학생들을 오로지 돈으로밖에 안보이고 있으며 감옥처럼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며 광고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 모든 상황은 개개인이 주어진 환경에 최대한 적응하는 양상을 보여주는데, 문제는 지금이 사회가 전체적으로 변해야 하는 시점이며, 급변하는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는데 사회가 변화지 않는다는 전제로 적합성을 추구한다면, 그 결과는 실패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사회 구성원 다수가 이러한 사회에서 산다면 그 사회는 갈수록 더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사회가 될 것이고, 그 안에서 개개인은 불행해질 수 밖에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시장이 국가의 기능을 거의 마비시켜버린 지금은 기댈 데가 사라진 상황에서 국민/시민들이 풀어내는 적대와 불안이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의 글로벌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직은 돈이 많은 선진국가나 국민들이 힘을 쏟아야 할 일은, 더 이상 부의 축적이 아니다. 갖가지 사고와 재난의 위험, 그로 인한 무수한 갈등과 불안을 줄이는 일이 무엇보다 우선이다. 후쿠시마나 세월호 사태와 같은 일들이 계속 일어날 텐데, 그런 상황에서 서로 적대시하지 않고 문제 해결을 해나갈 수 있는 내부의 합의 구조를 만들어가는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방향 전환을 해낼 수 있을까? 조한혜정 교수는 간단히 대답한다. 공부하자!


그간 우리는 입시 공부를 한다고 배움의 즐거움을 잊고 살았는데 지금은 그 배움을 기쁘게, 즐겁게 할 때이다. 혼자가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모여 함께 이야기하고 공부하는 자리가 만들어져야 하며, 의논할 줄 아는 국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기계가 아니라 사회에 관여하는 유기체적 존재로서 윤리적 삶을 살아야 하고, 세상을 구할 탁월함을 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


이러기 위해서는 그간 몸담았던, 돈이 지배하는 이 체제를 낯설게 보기 시작하면 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지금 엄청난 위험 부담을 안고 살아가고 있으며, 그런 면에서 파국적 상황을 살아가고 있음을 인식/인정해야 다음 단계로 이동할수 있다. 획일성을 복제하는 데 급급한 사회는 변화하는 환경에 대한 적응력이 별로 없는 사회다. 다양성이 조직화되어 있는 사회가 좋은 사회이며 획일적 국민을 계속 만드는 나라에 미래란 없다. 이런 미래를 만들지 않기 위해선 무엇보다 책을 읽고 누군가와 나누어야 한다고 말한다. 같이 읽고 의견을 나누고 생각을 나누게 되면 자연스럽게 모여 무언가를 하게 될 것이라고.. 그리고 모임 자체가 해방적인 배움의 자리가 되어야 하며, 각자 도생하는 버릇 내지 태도를 버리고, 친구를 사귀라고 권한다.


가난하게 살더라도 집을 떠나 자유롭게 살수 있는 조건이 마련될 때 성인이 된 청년은 부모와 정겹고 협력적인 관계를 만들어나갈 수 있으리라...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느린 시간, 멈춰 있을 장소, 느슨하지만 지속적인 관계를 맺어가는 것, 이 세가지라고 말한다. 바로 '고치를 칠 시간과 장소'인 것이다.


이 밖에도 많은 교수들과 천문학자 분들이 지구의 역사, 환경을 위한 생각 등 많은 분야에 대해서 생각을 하자는 취지로 좋은 내용을 수업을 들려주었다. 이렇게 많은 분들이 대한민국 뿐만 아니라 온 세상, 지구를 위해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해주고자 노력하고 있지만 정작 우리가 이분들의 노력에 대답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대답한다는 것은 이분들의 생각을 공유하고 우리들 스스로 생각을 해보자는 것일 텐데.. 현실은 암담하기만 하다. 지하철에서 책을 보는 사람,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사에는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사람이 700명 중 4명정도라고 한다. 아마도 나머지 696명은 스마트폰을 보고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지하철을 타고 다니면서 많은 대학생들 직장인들을 매일 보는데 정말 모두들 스마트폰만 쳐다보면서 살고 있다. 기술의 발전이 인간을 모두 멍청이로 만들고 있는건 아닐까? 우리들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정말 한숨만 나오게 된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이야기했듯이 우리가 나비가 되어 주위 사람들과 독서를 통해 생각을 공유하고 옳은 투표를 하며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자존을 할 수 있는 날개짓으로 태풍을 만들어 이 세상을 바꿔나갈 수 있는 믿음을 가져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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