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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수업 - 온전한 나로 살아가기 위한 최고의 질문
박웅현 외 지음, 마이크임팩트 기획 / 알키 / 2015년 6월
평점 :
생각수업_박웅현, 진중권, 고미숙, 장대익, 장하성, 데니스홍, 조한혜정, 이명현, 안병옥
최근 인문학책을 보면 많은 작가들이 현대인들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라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과연 진정 생각없이 살아가고 있는 걸까? 수업까지 들으면서 생각이라는 것이 필요한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또 다른 책에서는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잠자기 전까지 계속해서 생각을 하면서 산다고 하는 작가도 있다. 옷입는 것부터 시작해서 아침, 점심, 저녁은 무엇을 먹을지, 회사에서 무슨 일을 해야 할지, 가족, 동료, 친구들과의 관계에 대한 생각들 등등 연속적인 선택에 대한 생각들을 하면서 살고 있다. 그리고 이런 선택들에 의해서 즐거움, 고마움, 행복과 같은 좋은 감정도 느낄 수 있고, 걱정, 후회,미련 등과 같은 힘겨운 감정들을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다. 즉, 머리속에는 끊임없이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머리속이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는데도 위 8명의 사람들을 비롯 많은 인문학자들이 생각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일까? 그럼 반복되는 일상의 생각들은 이들이 말하는 생각이 아닌 걸까? 생각이라는 것이 무리가 하는 생각들과 다른 더욱 더 거창하고, 진지한 것들이여야만 하는 것인가?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이 궁금증을 해소시키기 위해 생각을 위한 수업을 주제로 한 이 책을 통해 8명의 작가들이 이야기하는 생각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알아보고자 이 책을 펴보았다.
왜는 왜 필요한가 by 박웅현
박웅현 작가는 물은표가 좋다고 한다.
인생의 즐거움은 느낌표를 찾는데 있으며, 이 물음표가 있어야 느낌표가 따라온다고 한다. 또한 큰 즐거움을 위해 이 느낌표가 커졌으면 좋겠으며, 느낌표가 커지기 위해서는 물음표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물음표는 곧 질문! 질문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리스/로마 시대에는 질문이 많았던 시대였다. 반면 중세시대는 질문이 사라진 시대였다고 이야기한다. 그리스/로마시에는 소크라테스와 같은 인물을 예로 들면서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들을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처형을 당했는데, 그 이유는 끊임없이 질문을 했던 것 뿐이다. 당시 소크라테스의 질문은 이러했다. '신의 말은 어떤 경우에나 항상 옳은가?', '신이 거짓을 행하라고 명령하는 경우는 없는가?','신의 명령에 우선하는 절대선의 개념이 있는 건 아닌가?' 등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질문들이다. 질문은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고 한다. 그래서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 질문을 싫어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었고, 그래서 소크라테스 역시 이런 질문들을 했다는 이유로 처형을 당한 것이다. 중세시대는 '암흑시대'라고 불렸으는데 그 이유가 신을 믿기 위해 질문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지금이 당시의 중세시대와 닮았다고 박웅현 작가는 이야기한다. 중세시대에는 신이라는 존재를 믿기 위해 질문을 던지지 않았고, 지금은 돈을 벌기 위해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고 한다.
학교 다닐 때 선생님들이 고전 읽기를 권했는데 지금은 선생님들은 단지 수능 시험에 나오는 것만 익히라고 한다. 책 읽는 것은 공부가 아닌 것 만냥! 그래서 이러한 학교 현실에 대해 박웅현 작가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이야기하고 이렇게 질문을 던져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왜요?'라는 유치스러워보이지만 진지한 질문을 던졌다.
'왜 수능시험에 나오는 걸 익히는 것만 가지고 공부라고 할까요? 책이란 뭐죠? 책 읽기가 곧 공부아닌가요? 상식이 뭔가요? '안나 카레니나'가 상식 아닌가요? 왜 공부하세요? 그럼? 왜 대학에 가시나요?'
'여러분은 왜 공부합니까?' 좋은 대학가려고? 좋은 직장에 가고 싶어서? 왜요? 돈 벌려고요.. 왜요? 결혼하려고요... 왜요? 애 낳으려고요... 그다음에는요? 좋은 교육 시켜야죠... 그 다음에는요? 좋은 대학 보내야죠..
박웅현 작가는 대학생들을 위주로 이 수업을 진행했기 때문에 직장인인 나는 이런 질문들을 던져 보았다. 과연 나는 왜 일을 하고 있는가? 돈 벌려고? 집 사려고? 자식 잘 키우려고? 이런 것들이 내 삶의 진정한 목적이자 목표인가? 그냥 남들이 이렇게 살고 있으니깐 나 역시 이렇게 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아닐까 라는 무의식적인 안전함을 추구하는 것일까? 진정 이런 것들이 나를 위한 일들인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이지?
대한민국 국민들은 20대 초반까지 살면서 한번도 자기 자신에게 진지하게 "왜?란 질문을 던져본 적이 없다. 30대인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내가 진정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도 모르며,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모른다. 이것은 20대 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인 모든 연령층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문제이다.
대학생 친구가 이야기한다. 대학에 와서 사람들을 살펴보니 나를 채우는 요소가 엄마, 아빠, 선생, 선배라는 걸 알게 되었다고.. 그리고 정작 나 자신을 구성하는 요소 중에 내가 원하는 것은 없었다고... 이런 것들이 질문하지 않는 사람의 몸이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는 사람의 몸! 그래서 이 친구는 자기 자신을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채워나가기 위해, 내가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기 위해 끊임없이 왜?라고 묻기 시작했다.
외국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몰라 일단 논다고 한다. 그러다가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그에 맞춰 공부할 수 있는 곳으로 찾아 들어가죠. 이런 것들이 우리가 살아가야 할 모습 아닌지 진자하게 생각해본다.
"배는 항구에 정박해 있을 때 가장 안전하다. 하지만 그것이 배가 만들어진 이유는 아니다" 파울로 코엘료의 책 <순례자>에서 나왔던 책인데 박웅현 작가는 이 구절을 보면서 안정된 직장을 추구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고 이야기 한다. 연복, 연금, 퇴직금 등이 있을 때 우리는 안전하다고들 말하지만 과연 이런 것들이 우리가 태어난 이유일까? 모두 중요하지만 나만의 드라마를 만들어가려면 무엇보다 내가 원하는 것부터 알아야 한다고 한다.
나만의 드라마! 누구나 이런 드라마를 써나가고 싶지만 아직 하고 싶은 일들이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안전을 버리고 항해를 떠나기에는 앞으로의 삶이 불분명하다. 눈이 멀어 앞을 보지 못하는데도 마음만 벅차서 앞으로 나가려고 하는 느낌이랄까? 나침반도 없고 선원들도 없는데도 무작정 돛을 올리고 배를 띄우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나 혼자라면 모를까. 옆에 가족들이 있는 상태에서 무작정 배를 띄울 수도 없느 노릇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안전한 항구에 정박한 채로 썩어가는 걸 알면서도 정박해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정말 모르겠다. 과연 나만의 드라마를 쓰는게 맞는 것인지...
하지만 박웅현 작가가 이야기한대로 일단은 질문을 계속 던져보는 것이 좋은 것 같다. 내가 원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질문을 해야 언젠가는 정말 큰 느낌표가 따라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남과 다른 나만의 생각을 갖는것, 그런 생각을 가진 자신을 존중하는 것이 정말로 중요한 일이다. 박웅현 작가도 알고 있다. 자기 삶을 온전히 나의 것으로 만들며 살아가다 보면, 불안해지는 때가 온다는 것을... 이 길이 맞을지, 내 선택이 옳을지 확실할 수는 없는것이기 때문에... 하지만 예측하기 힘든 것이 인생이고, 그 안에서 스스로 선택을 내리는 것이 또한 즐거움일 것이다.라고 작가는 이야기 한다.
여덟단어에 이어 이번 수업에도 자존감이 또 나온다. 그만큼 나에 대한 존중이라는 말,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는 이야기가 중요한 것일테고, 나만의 드라마를 써 나가고 배를 바다로 띄어 항해를 하기 위해서는 자존이 전적으로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TV 예능중에 '동상이몽'이라는 예능을 가끔씩 보게 되는데 이 사회의 모든 청소년들에게 이 자존감이 많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아들러가 이야기한대로 이 세상에 내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움을 느끼며 살아가야 하지만 맞벌이로 인해 바쁜 부모들과 친구들과의 공유가 아닌 경쟁을 하라고 부추기는 학교에서조차 이러한 고마움을 느끼도록 많이 신경을 못 써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과연 청소년들이 자기 자신을 위한 삶, 질문들을 해 보았을까 의문이 든다. 그래서 항상 내 자신들, 주위 사람들에게 그들 스스로의 자존감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는 항상 고맙다는 말과 사랑한다는 말들을 자주 해줘야 한다. 박웅현 작가 역시 "나도 찌질하지만, 쟤도 찌질해, 내가 좋아하는 게 저 사람이 좋아하는 것보다 중요해"라는 말을 하며 자존하도록 권장한다.
우리는 왜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by 진중권
다음은 정치다. '생각해 봤어?'에 이어서 2번째로 진중권 교수의 정치적 내용을 읽었는데 '생각해 봤어?'에서 나왔던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나라 정치 이야기는 계속 보고 또 봐도 흥분된다. 나쁜 흥분이지만...
이번 수업은 주제대로 우리가 왜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되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정치에 관심을 왜 가져야 되는건지..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정치에 무관심해진 사람들을 위해 말하고자 한다. 그래서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 정치에 왜 관심을 못가지는지 대한민국 현실에 대해서 말해준다.
먼저 이야기하는 것이 민주주의 실현에 대한 배고픔이다. 우리나라는 80년대 부르짖던 민주주의 과제는 어느 정도 해결됐다고 사람들이 믿는다. 그로인해 민주주의 보다는 배고픔 즉,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느냐보다는 어떻게 해야 취직을 할 수 있을까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는게 낫다고 이야기하고 더해서 정치에 관심을 가질수록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가 흔히 발생하고 있다. 그래서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건 불이익과 낙인뿐이며, 그래서 정치에 관심 끄고 먹고살 일이나 걱정하는 게 낫다고 믿는 자칭 '현실주의자'들이 생겨나고 있다.
다음으로는 정치인들이 짜증나서 그렇다이다. 원래 정치인이라고 한다면 공익을 위해 일해야 하는 사람들인데 우리나라의 정치인들이란 사람들은 사익이 공익보다 더 우선시하게 일을 한다. 이런 말은 인정할 수밖에 없으며, 카메라 앞에서는 여야가 매일 싸우는 것 같지만, 카메라가 지나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여야를 막론하고 수다를 떠는 정치인들 생각만 하면 정말 정치에 관심을 뚝 끊고 싶어진다. 우리는 이러한 장면들을 매일 반복적으로 보게 된다.
세번째 유형은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는게 아예 '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이런 유형이 많은데 친구들과 정치이야기를 하다보면 주위에서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도 많으며 특히, 대학생들이 많은 자리에서 이야기하다 보면 '늙은이, 재수없다, 잘난 척 하는 거냐' 라는 식의 눈치를 주는 경우가 있다. 진중권 교수도 정치 이야기를 하다보면, 사람이 치열해지게 마련이며, 교우관계는 물론 심지어 가족관계까지도 망가지기 십상이라고 이야기한다. 실제 정치에 대한 과도한 관심은 주위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드는 경향도 있기 마련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으며, 그들을 붙잡고 반박해야 하는데 진중권 교수 역시 자신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런 환경, 사람들 속에서도 계속해서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하며, 왜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이유를 설명해 준다.
정치란 무엇일까? 첫번째는 공동체 주의적 경해이고, 두 번째가 바로 자유주의적 견해라고 한다.
공동체주의자들은 정치를 '덕을 실현하는 행위'로 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오직 국가 공동체에 참여하여 그 안에서 정치적 활동을 할 때에만 진정으로 인간다워진다고 말한다. 즉,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란 말이다. (이렇게 이론적으로 나가면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그리스인들이 보기에는 인간은 출마나 투표를 통해 폴리스의 정치적 결정 과정에 참여하며 살아가는 폴리스의 동물이라고 한다.
다음은 자유주의적 견해이다. 자유주의들은 정치를 무엇보다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행위'로 한다. 현대의 우리나라는 의회 민주주의 내에서 토련과 논쟁으로 상이한 이해관계를 조정합니다. 이들이 보는 정치란 비록 가치관과 이해관계는 서로 달라고 합리적 토론과 논쟁을 통해 현실에서 부딪치는 문제들을 공동으로 해결하여 다수가 만족하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기제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러한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멀쩡히 해결될 문제도 국회로 들어가면 외려 해결불가능한 난제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생각도 든다고 한다.
'차라리 국회의 결정 과정을 계산기에 맡기면 어떨까?'
영화 이야기를 잠깐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얼마전 애국주의와 가족주의를 내세운 천만 관객이 본 영화(아무래도 명량인듯) 이야기를 할 때 '그 영화, 별로였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보고 공동체주의적 성향 사람들은 애국심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반면 진중권 교수처럼 자유주의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나라 사랑을 하려면 조용히 혼자 하면 될 것이지, 왜 그것을 요란하게 남에게까지 강요해야하는것일까'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공동체주의가 강해지면 나치시절의 독일이나 지금의 북한과 같은 전체주의가 된다고 한다. 반면 자유주의자들은 가치관의 다양성을 존중한다. 이들은 개인들 사이에 이념이나 사상이나 종교가 나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이러한 경해도 너무 강하면, 여러 문제가 발생하는데 그 중에 국가가 개인의 가치관을 가지고 시장에 개입해 과세를 하면 안되며, 국가는 야경국가, 작은 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성원들이 공유하는 가치가 전혀 없다면, 이렇게 서로 갈등하는 계급, 계층을 국가 공동체 안에서 하나로 통합하기 어려워진다고 말한다.
그래서 서로 다른 가치관들이 서로 소통하려면, 그것들 사이에 공통분모가 존재해야 하는데 이 공통분모는 강요를 통해 얻어져서는 안된다. 다른 조직의 성원들이 서로 다른 생각을 인정하고, 토론과 논쟁을 통해 차이를 좁혀 합의점을 넓혀갈 수 있는 방식으로 풀어나가야 한다.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수준을 넘어 사회의 대다수가 합의한느 가치관을 만들어낼 때, 사회가 안정적으로 발전해나가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이어서 우리나라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인지 생각을 해보자고 한다. 자유주의는 국가나 권력으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지키는 것을 의미하고 민주주의는 집단적 평등의 사항으로 인민주권사항, 그리고 다수결의 원칙을 바탕에 둔 사상인데 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자유주의와 항상 짝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나라는 실질적으로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지만, 헌법에는 사실 사회주의적인 면도 강하게 존재한다. 우리나라 헌법 자체는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진보적이지만, 법률이나 판결이 헌법만큼 진보적이지 못한 것이다.
자유주의에서 말하는 자유에는 두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정치적 '표현의 자유'이고, 다른 하나는 '영업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자유주의자들은 전자가 아니라 주로 후자만 강조한다고 한다. 결국 우리나라 자유주의적 가치는 이렇게 왜곡되어 있으며, 기업가들이 나라를 마음대로 쥐고 흔들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즉, 우리나라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적 가치 모두 우리 헌법의 정신과 비교하면 많이 왜곡되어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고통받는 이유는 왜곡에서 비롯되었다. 우리 사회의 사회보장제도는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교육이건 의료건 노후 보장이건 '너희가 다 알아서 해'라는 식의 체제이다. 기업들은 대학에 맞춤형 인재를 키워내라고 요구합니다. 기업에 꼭 맞는 인재를 생각하는게 대학의 역할이며, 당연히 그 비용은 수혜자인 기업에서 대야 한다고 주자한다. 부모가 아닌... 노동자 역시 사회 보장이 없는 상태에서 무조건 살아남아야 되고 그 결과, IMF 이후 '신 자유주의'정책의 결과, 중산층이 참혹하게 붕괴됩니다. 과연 가진 자들이 정말 전보다 더 열심히 일하거나 혹은 갑자기 더 큰 능력이 ㅅ애겨서 더 많이 가지게 된 걸까요? 혹은 갑자기 더 큰 능력이 생겨서 더 많이 가지게 된 걸까요? 못 가진 자들이 전보다 노력을 덜하거나 혹은 갑자기 능력이 떨어져서 못 가지게 된 걸까요?
이를 바로잡으려면 게임의 규칙을 다시 세워야 하는데 그렇다면 게임의 규칙은 누가 만드냐? 바로 정치이다. 즉, 우리가 이렇게 힘들게 살게 된 이유가 바로 우리가 내린 정치적 결정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런 결정을 내렸을까? 정말 신기한 것이 투표 결과를 보면 잘사는 강남 사람들과 못사는 사람들의 투표 결과가 일치한다. 강남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에 맞춰 계급 투표를 하지만 반면, 가난한 사람들은 그냥 변화가 싫어서 보수당을 찍는다. 진심으로 조선시대에 노예들, 누군가의 밑에서 일하는 것이 편한 사람들처럼 현대의 못사는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가지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매일 같이 힘들어 하면서도.....
지금의 문제점들을 조금 더 보여주자면 먼저, 비정규직이다. 우리는 1년 내내 필요한 인력을 비정규직으로 만들어, 정규직과 똑같은 생산라인에 투입하면서도 임금을 절반밖에 주지 않는다. 이는 고용 유연화가 아니라 사실상 임금 착취이다. 비정규직 차별은 만인의 평등을 이야기하는 민주주의 원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행위이며, 우리 사회를 근대 민주주의 이전의 신분 사회로 되돌리고 있는 셈이다. 이런 역사적 퇴행을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갑질' 문화, 땅콩 회황, 라면 상무 등인데 이들은 노동자를 자신과 대등한 인격이 아니라, 자신에게 인격적으로 예속된 노비 정도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모두가 결국 우리가 스스로 내린 정치적 결정들의 결과들인 것이다.
우리들은 정말 열심히 살아왔다. 대학들이 원하는대로 청소년때 죽어라 수능공부를 해 왔고, 대학에 입학해서도 취업을 하기 위해 기업이 원하는 스펙을 쌓기 위해 대학 등록금, 토익 시험 비용, 등 많은 비용을 들여 하라는 대로 다 했다. 이렇게 열심히 했는대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힘들게 살고 있다면, 이런 사회적 책임으로 봐야 한다.
우리가 정치에 관심을 끈 사이에, 그리고 우리가 잘못된 선택을 한 사이에 기득권과 돈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세상을 조정해왔다. 우리는 과연 평등한가? 결코 아니다. 우리는 평등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불평등을 당하면서 살아왔다. 노동자가 사용자와 실질적으로 대등해지 위해서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진중권 교수는 양자가 대등하려면, 노동자가 자신을 '단체'로 저직해야 한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노동조합이다. 독일에서는 "강력한 노조는 독일 기업의 경쟁력 요소"라고 주장하며,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노동자와 기업의 운영자들이 함께 내린다고 한다. 그러면서 주요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한 노동자는 자신이 몸담은 기업에 더 큰 책임감을 느끼게 되고, 이로써 기업의 생산성은 훨씬 높아질 수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결코 공정거래라는 것이 없다. 우리 회사 뿐만 아니라 모든 회사가 기술혁신을 해서 생산 원가를 떨어뜨렸다. 이것은 중소기업의 노력해서 얻은 성과이다. 하지만 대기업이 매년 회계 감사가 들어오게 되면 기술력에 의한 원가 절감된 금액만큼 제품의 납품가를 깍아버린다. 결국 기술 혁신으로 얻은 이윤이 온전히 대기업의 몫으로 날아가 버린다. 이런 현실 속에서 어떤 기업이 과연 기술혁신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박근혜 정부 들어와서 창조 경제를 자주 말하는데 창조결제를 위한 전제조건은 공정 거래 질서 확립이다. 즉, 대기업의 갑질을 막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잘 안된다. 왜!!?? 정치가 왜곡되서라고 말한다.
정치란 결국 사회라는 게임의 규칙을 쌓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국민들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그 놀이의 규칙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정치에 관심을 끊는 것은 우리 삶을 새로이 조직할 수 있는 가능성을 포기하고 그저 남이 내 운명을 결정하게 두는 행위와 같습니다. 남이 ㅁ나들어놓은 매트릭스 안에서 헝거 게임을 하겠다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정치적 상상력이다. 그리고 60대 이상 세대들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우리 사회가 자꾸 거꾸로 돌아가고 있는데 이들의 선택은 우리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힘이 있다. 따라서, 우리가 앞으로 잘살고 다음 세대가 잘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바꿔나가야하는 용기가 필요하지 않나 생각해본다.
과학은 가치에 침묵하는가 by 장대익
과학을 인문학이랑 연결짓는 다는 것은 쉽지 않아보인다. 개인적으로는 과학으로 인해 좋은 점도 당연히 있었겠지만, 지구를 황폐하게 만들고 실험쥐나 토끼들과 같이 인간의 질병 치료를 목적으로 희생되고 있는 동물들을 보면 과학이란 학문을 좋아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이런 것들을 하고 있는 인간들이겠지만, 과학이 없었다면 지구가 황폐해지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로 인해 희생된 동물들 역시 죽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와서 과학으로 지구를 되살린다고 해봤자 '도랑치고 가재잡는' 격이다. 과연 왜 인간이란 동물이 만물의 영장이란 스스로의 자부심과 함께 지구를 지배하고 모든 동물들을 지배하게 되었는지 궁금해지면서 그래서 장대익 교수가 과학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할지 수업이 흥미로웠다.
장대익 교수가 던지는 질문은 "정말 과학은 가치에 침묵할 수 밖에 없는가? 과학은 인간 실존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이다.
우선, 과학이 인간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부터 이야기한다. 첫번째로는 과학은 인간을 '우주적 존재'라고 말한다. 우리 인간이 빅뱅-별-원소-태양계와 지구의 탄생-생명의 탄생-문명의 발생 등의 과정을 거쳐 진화해온 존재라는 것이다. 두번째는 '자연적 존재'라 말한다. 인간은 겨우 20만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나타난, 자연계에서 가장 어린 존재로서 우연히 일어난 운석 충돌로 인해 공룡이 자리를 잃고 인간이 진화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었기 때문에 인간은 자연적 존재로서의 우연한 결과물이라고 한다. 그 중에 육상 척추동물들 중에서 이렇게 단기간에 넓은 범위로 퍼져 생태적으로 성공한 종은 호모사피엔스 단 한종으로써 대체 무엇이 인간을 이렇게 특별한 존재로 만들었을까? 질문을 던진다.
인간의 뇌 용량은 침팬지 뇌 용량을 3.5배이다. 600만 년전 침팬지와 인간이 한 공통 조상에게서 갈라져 나온 이래 인간의 뇌 용량이 급격하게 커진 이유는 무엇일까? 이 현상에 대해 각광받는 이론인 브레인 이론을 보자면, 인간의 뇌가 생태적 문제가 아닌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커졌다고 본다. 인간은 집단 구원 간의 사회적 유대를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스킨십이었떤 동물들의 털 고르기를 하는 대신 언어를 진화시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해왔다고 말한다. 즉, 인간의 큰 뇌는 효율적인 집단생활을 영위하고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말로 하는 털고르기'인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고 서로와의 관계를 부드럽게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다른 영장류와 빈교할 때 어떤 고유한 사회성을 가지고 있을까?
첫번째로 '시선 따라가기'이다. 이 시선 따라가기 행동은 다른 사람의 의도를 파악하고 공통의 관심사에 반응하는 사회성의 기본이 되는 행동이다. 다음은 '가리키기'. 자기의 관심을 다른 사람도 같이 갖게끔 만들고 공동의 주의 집중을 유도하는 사회성의 중요한 기술이다. 세번째는 '마음읽기'라고 한다. 인간만이 가진 또 다른 사회적 능력으로 '추론'능력을 뜻하는데 우리 인간은 타인의 목적과 의도를 읽는 이 복잡한 추록 과정을 일상에서 실제로 행하고 있다고 한다. 네번째로는 공막의 유무에 있다고 한다. 인간에게는 눈동자 주위에 하얀 공막이 존재하는데 이 공막의 존재가 눈동자의 위치가 공개되기 때문에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 눈만을 보고도 알 수 있고, 이것이 협동의 기초가 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공평성과 정의감에 대한 차이를 들 수 있다. 영장류는 모두 정의감을 가졌지만, 인간만이 정의의 문제를 해결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내용이다. 이렇게 여러 측면에서 차별화된 사회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호모 사피엔스가 '초사회적 종'으로 진화했따는 이야기를 한다.
다음은 슈퍼 모방자에 대한 내용인데 인간은 초사회적인 종일 뿐 아니라 가르치고 따라하는 행동을 통해 문화를 축적해왔따고 말한다. 침팬지 사회의 특징적인 행동을 정리해서 봤을 때 따라 하는 행동, 즉 모방을 통해 문화가 만들어진다고 한다. 침팬지도 어느 정도의 모방력을 갖고 있고, 그로부터 문화 비슷한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 존재이지만 인간은 목표와 상관이 있든 없는 세부적인 절차와 과정을 모두 따라했다는 것이다.(이 부분은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다.) 더 나아가 문화를 축적하는데 있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특징은 단순한 모방을 넘어 적극적으로 가르친다는데 있다고 말한다. 인간은 절차를 그대로 따라 하는 특별한 모방 능력과 적극적으로 타인을 가르치는 사회적 학습 시스템을 기반으로 하여 인지 자본을 축적이고 이를 후대에 전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인간만의 문화를 만들 수 있었다고 이야기 한다. 즉, 전지구적으로 퍼져나가 문명을 이룩하며 생존해온 인간은 생태학적으로 전례가 없는 지구의 지배자이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이 눈치가 발달한 초사회적 동물이고 눈썰미가 있는 슈퍼 모방자이기 떄문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어떻게 이런 엄청난 종이 되었나?'하는 질문의 답은 찾는 작업은 종교의 영역에서 과학의 영역으로 바뀌어왔다. 과학은 우주적, 자연적 존재로서의 인간 실존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켜왔으며, 가치와 의미를 추구하는 인간 본성에 대해 더 깊은 이해를 제공해왔다. 더 나아가 과학은 가치를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끝으로 장대익 교수는 인간에 대한 앎은 인문학의 주제이기도 하지만, 그 앎을 인간에 대한 탐구라고 본다면 이에 대해 가장 새롭고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바로 과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과학은 21세기 인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설령 진화론적 측면, 그리고 인류가 진화해온 과정, 동물들과의 차이점에서 인간을 본다면 과학이 21세기의 인문학이 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는 과학을 따라올 다른 학문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진화론 적인 인문학이 아닌 감성적, 정신적인 인문학. 인간이 왜 사는가에 대한 내용이 되야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과학적 측면에서는 인간의 행복을 해결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백날 과학을 탐구해봤자 약간의 도움은 될 수 있을 지언정 인간이 어떻게 하면 행복해 질 수 있을까에 대한 대답은 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정의로울 수 있는가. by 정하성
다시 정치 이야기같지만 이번에는 정치보다는 경제의 맥락에서 장하성 교수가 대한민국의 현실을 이야기한다. 주제를 먼저 읽었을 때는 다소 진보주의적 내용이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장하성 교수는 보수, 진보 모두 꼬집는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우리나라의 보수주의자들과 진보주의자 모두를 꼬집는다고 이야기하는 게 맞을 것 같다. 대한민국은 자본주의 국가가 맞다. 극 자본주의 국가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장하성 교수가 하는 말이 흥미로웠다.
'한국' 자본주의인가 한국 '자본주의'인가.
이 말을 이해하는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풀이하자면,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가 한국을 위한 자본주의인가? 자본주의를 위한 한국인가? 이다. 그리고 '과연 한국이 어떤 자본 주의 시장 경제 체제를 갖고 있는가'라고 질문을 던져본다. 그리고 이 질문에 스스로 답할 수 있어야 오늘날의 이 답답한 상황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공산주의와 구분되는 가장 큰 차이가 기본적으로 사유재산을 인정하느냐이다. 사회주의는 국가가 모든 것을 소유하고 통제하지만 자유주의는 경쟁을 통해 얻어낸 사유재산을 인정해주며 역사적으로 봤을 때 자유주의 체제가 현실에 맞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단순히 사유재산을 보호하고 경쟁하는 것이 시장 경쟁의 전부는 아니다. 그 사유재산은 정당하고 공정하게 취득한 것이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으며 따라서 정당하지 못한 취득 재산은 허용되어서도, 보호되어서도 안된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논리로 한국 경제를 봤을 때 한국은 참으로 많은 불공정 경쟁과 정당하지 못한 부의 축적이 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부분은 보수, 진보라는 프레임 안에서 전혀 바로잡혀지지 않고 있다.
진보와 보수 모두 무언가를 지키려고 하긴 하지만 이들이 각각 지키려고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장하성 교수는 질문한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한다. 보수는 자신의 이권에 매몰된 나머지 기득권을 지키려고 하고, 진보는 세상을 바꾸겠다는 이념에 매몰된 나머지 현실과 동떨어진 이념을 지키려고 한다고.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보수는 자유 시장을 위해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를 지향한다고 말하지만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시장을 부정하는 행위를 너무나 쉽게 한다. 경쟁을 통해 효율을 내고 파이(?)를 키우려면 그 경쟁은 반드시 공정해야 하지만, 우리 나라의 보수 집단들은 불공정 경쟁을 옹호하거나 심지어 불공정 경쟁을 추구하는 것처럼 본인다고 이야기한다.
반면 진보는 세상의 모든 문제가 자본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이들은 문제는 대안은 말하지 않은채 계속 문제 제기만 한다는데 있다. 그저 현실에 대한 체제를 부정하면서 대안을 모색하는 노력을 별로 하지 않고 그저 끊임없이 함께 잘사는 평등 사회를 이룩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재분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재분배'란 말은 다시 분배한다는 의미인데 우리나라의 경우는 재분배 이전에 분배 자체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다는게 더 큰 문제이다.
그리고 보수는 자구 과거를 토대로 미래를 설계하자고 한다. 그러다보니 보수들 대부분이 박정희 향수를 갖게 되었으며, 경제를 많이 발전시킨 대통령이기도 하지만, 독재를 했고 쿠테타로 정권을 탈취하기도 한 불행한 자화상이기도 한 이 시대를 그리워하면서, 국니들에게 자꾸 그런 시대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려고 한다고 말한다.
반대로 진보는 우리나라와 맞지 않는 유럽 선진국의 실례를 수입해 우리에게 적용하자고 한다. 남의 사진을 보면서 내 얼굴을 찾으려는 격이라고 말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문제를 살펴보자면 보수의 궁극적 이념은 자유주의이다. "극단적 자유주의"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정부가 자유를 제한해서는 안되며, 사유 재산을 건드리면 안된다라는 주의이다. 그런데 한국 자본주의의 가장 큰 문제는 어쩔 수 없는 시대 상황, 짧은 기간의 압축 성장이라는 변명을 일정 부분 우리가 받아들여, 한국의 많은 축적 사유재산이 불법, 불의 부패로 만들어지는데 일조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만들어진 재산을 어디까지 보호해야 한다고 보는가? 앞으로의 정당상은 어떻게 확보해야 하는 걸까? 생각해 보자고 한다.
한국 사회의 문제 중 하나가 경영권이다. 회사의 최고 경영자에게는 노동자, 공급자, 주주, 사회 등의 이해 당사자들을 위해 최선을 다할 의무와 책임이 있을 뿐, 회사를 가지 마음대로 경영할 권리는 있지 안하. 하지만 최고경영자가 회사에 대해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는 인식은 오로지 우리나라밖에 없다. 그러면서 국가의 미래가 걸린 여러 기업들의 경영이 어떻게 세습될 수 있는 것인지, 이것이 북한의 정권 세습과 대체 무엇이 다르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정말 심각한 문제는 이제 한국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보수의 기득권 개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시장에는 소비자도 있고 공급자도 있다. 그런데 어째서 기업에 유리한 것만이 시장 경제라는 매우 잘못된 개념이 자리 잡게 된 것인지 답답하기만 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많은 경쟁이 새로운 도전자의 공공보다는 기득권의 강화를 불러오는 부작용을 낳게 되었다. '도전하면 된다'는 희망적인 신화는 한국에서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 점점 도전이 성공하기 어려운 토양이 되어가면서, 도전하려는 사람들 자체가 많이 사라지고 있다. 경쟁의 목적은 기득권 없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기회를 준 다음,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가기 위해 함께 노력해나간다는데 있다. 즉, 경쟁에 따른 상과를 함께 나누는 것. 이것이야말로 경쟁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진보는 문제가 없느냐! 진보는 끊임없이 자본주의 탓만 하고 있다. 비판은 현실의 문제를 지적하고 대안을 마련하기 위한 것인데, 진보는 대안을 제시하지 않고, 현실 부정만 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우리 경제가 자본을 빼고 돌아갈 수 있을까? 이것이 가능할 것인가? 자본을 부정하면서 대안을 말하지 않는 것은 무책임한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세상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나가야 한다. 진보와 같이 무조건 현실을 비판하고 부정적으로 바라보기만 한다고 해서 바뀌는 사실은 하나도 없다.
다음으로는 이러한 대한민국 사회의 부끄러운 내용을 그래프로 보여준다. 그리고 세계 여러나라들과의 순위와 퍼센트로 정리하자면, 일을 많이 하는 나라 2위, 임금 불평등 심한 나라 3위, 저임금 노동자가 많은 나라 1위, 고용이 불안정한 나라 4위, 청년 첫 일자리가 비정규직 나라 36%, 비정규직 임근은 정규직의 50% 이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일은 죽어라 하고, 임금은 불평등하고, 고용은 불안하고, 특히 젊은 세대에게는 미래가 어둡다.
우리나라는 양극화 문제가 정말로 심각하다. 중산측 인구 자체는 줄어들고 있으며, 3분의 2가 저소득층으로 추락하고, 3분의 1은 고소득층으로 가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재산소득의 불평등 보다는 임금소득의 불평등을 더욱 시급하게 생각해야 한다. 기업은 소비 주체가 아니라 투자와 생산의 추제인데 기업이 많은 것을 가졌을 때 미래 성장을 위한 투자를 해야 한다. 그 결과 가계소득의 반등으로 나타나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 가계소득의 추락은 임금으로 분배되는 몫이 줄어든게 첫번째 원인, 자영업의 영업 상황이 악화된 게 두 번째 원인이라는 것이다. 경제가 성장하면서 가계소득, 기업소득, 정부소득 모두가 올라야 맞지만 우리나라는 기업 소득만 오를 뿐 가계소득, 정부소득 모두 성장하지 못하는 구조이다. 처음에 재분배의 문제점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우리나라는 분배 자체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다고 이야기 했듯이 기업이 모든 소득을 다 가지고 가는데 어떻게 복지를 하고 재분배를 하겠는가?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점을 고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장하성 교수는 다시 묻는다. 여전히 경제 성장률이 높은 한국, 그런데 그 성장의 성과는 누가 가져갔을까? 우리는 왜 가져가지 못하는 것일까? 그 이유가 잘못된 재분배에 있는 건가? 정부가 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그런것인가? 기업이 분배를 하지 않아서 그런 것인가? 계속해서 이런 방식으로 미래 성장을 추구할 수 있을까? 혹은 분배 구조를 바꿔야 하는 것일까? 묻고 또 묻는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한다. 한국 자본주의 버리지 못하니 고쳐 써야 한다.
그 방법으로는 점진적 변화, 혁명, 개혁을 이야기한다.
점진적 변화는 세상은 우리 모두가 함께 만들어가야 하며, 진화에 맡길 수 없다는 내용이다. 즉, 미래는 흘러가는대로 두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두번째 혁명은 혁명이 가장 빠른 변화지만 우리에게는 그럴 힘도 없으며, 혁명은 피를 부르기 때문에 선택할 수 없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남은 방법은 개혁으로 가장 가능성 있는 방법이라고 이야기한다. 개혁은 우리에게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와 목표가 있다면, 그에 따른 정책 대안은 얼마든지 말수 있다. 그리고 실천해야 한다고 말한다. 실천의 좋은 예가 미국으로 루스벨트 대통령의 실천력으로 인해 아메리칸 드림이 생겨났고, 그로 인해 평등한 사회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레이건 대통령 이후 공화당이 집권하면서, 다시 선진국들 중에서 가장 불평등한 사회가 되었다.
현재 한국 사회는 미룰보다 더 불평등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분노하지 않는 것일까?
장하성 교수는 정치인에게 기대하지 말라고 말한다. 많은 정치인들을 본 결과, 비전이 있으면 실천력이 없고, 실천력이 없으면 비전이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는 투표이다. 투표라는 민주적 절차에 의해 자본을 제어하고 잘못된 구조를 바꿔야 한다. 특히, 젊은 세대들은 세상을 너무 긍정적으로 보지 말아야 하며, 기성세대들이 우리들의 미래를 만들어주도록 허락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세상을 긍정적으로 살라'는 말은 주어진 현실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틀에 맞춰 살라는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다. 그리고 기득권들이 많은 투표하는 이유는 그들의 기득권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미래를 우리 스스로 만들어나가야 한다. 기성세대가 70~80년대 민주화를 싸울 때 그렇게 했듯이...
그런데 우리세대는 위로받으려고만 할 뿐, 저항하지 않는다.
과연 투표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그렇고 그런 정치인, 모두가 자신의 사적인 이익을 위해서 정치를 하고, 실천도 없는 말뿐인 공약들을 보고 우리는 누구를 믿고 투표를 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희망을 버리지 말하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 노무현 대통령과 같이 10명 중 1명은 우리를 위해 헌신하고 있는 정치인이 있을 것이며, 그들을 지켜줄 수 있는 사람들은 현실을 이기고자 하는 우리들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장하성 교수가 마지막에 이야기했듯이 우리가 작은 나비들처럼 다 함께 모여 날갯짓을 한다면 우리들 스스로 태풍을 만들 수 있으며 우리가 원하는 시대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겠다. 조용히 혁명하자!
누구와 함께 살 것인가 by 조한혜정
조한혜정 교수가 누군지 몰라 인터넷을 통해 찾아봤는데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에서도 인터뷰한 기록이 있어 찾아봤다. 인터뷰 내용 중 뜻깊었던 말은 '스스로 돕고 더불어서 도우면 새로운 어떤 공공 사회가 만들어지는데 그걸 이제는 실천하지 않으면 아이도 못 키우고, 결혼해서도 같이 놀 시간도 하나도 없고, 이건 정말 대안이 없는 사회가 아니냐는 생각이 드는 거죠.' 란 이야기였다. 주위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사회, 이웃을 진정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회가 우리나라에서는 사라졌다는 말이다. 실제로도 내 옆집, 아랫집, 윗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살고 있다. 새로 이사오면 이사왔나보다 하는... 떡을 돌리는 일은 이제 서로 귀찮은 일이 되어버렸다. 나 역시도 그랬으니.. 그래서 이번 조한혜정 교수의 주제가 끌렸고 수업 내용 역시 진정 우리 사회에 필요한 내용이라고 느꼈다.
조한혜정 교수가 이번 수업에 말할 내용은 배우자 선택 이런 것이 아닌 '지구 위에서, 지구를 떠나지 않고, 친구들과 작당하여 우정과 환대의 마을을 만들면서 사는 것'이라고 한다. 요즘 사회에서는 선한 의도로 주위 사람한테 접근해도 나쁜 의도로 접근한 사람인양 취급받는 그런 사회가 되었다. 즉, 신뢰와 나눔의 시공간이 사라진 것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연애할 때 돈 없어도 벤치나 공원 잔디밭에 누워 놀고 그랬는데 이제는 돈이 없으면 연애할 장소도 없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친밀성도 돈이 있어야 일어나는 거래의 대상이 된 것이다. 결혼을 할 때 역시 상대의 재력, 능력 등 시장의 물건 고르듯 상대를 가듬하며 계산을 한다. 부모 자식 간 역시 이러한 계산된 관계가 되는데 실례로 자녀들이 스스로 경제적 자립이 불가능해지면서 공부, 결혼 등 많은 부분에서 부모에 의존하게 되다 보니 30대가 넘어도 돈을 가진 부모 밑에서 순종하거나 순종하는 척 하게 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가족뿐만 아니라 부부관계 역시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남편은 밤늦게까지 일하고 집에 오면 피곤함을 온몸으로 표현한다. 일하기 싫어서... 아내도 별반 다르지 않아 취업한 부인이든 집에서 살림하는 주부든 피곤한 것은 매한가지이니, 남편에게 뒤질세라 힘껏 피곤함을 드러낸다. 이런 피곤함을 보고 자란 아이들 역시 공부에 하루종일 시달렸다는 표현을 부모에게 표현하죠. 그렇게 온 가족이 피곤함 표현 경쟁을 하다보면, '즐거운 나의 집'이 함께 식사하면서 대화를 나누고 서로를 돌보며 생활하는 보금자리가 아니라 피곤한 이들이 녹초가 되어 만나는 일종의 숙박업소가 되어가고 있다. 그렇다보니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세대 '3포 세대'가 생겨나고 있다.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고 자기 자신이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힘들다 보니 이 세상을 모두 없애고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는 만화책이나 영화 같은 악한 인물들이 말하는 대사를 현실에서도 고지 곧대로 믿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즉, 시대적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을 몸으로 알게 된, 즉 '리셋'이 필요한 시대라는 것을 알게 된 청년들이 생겨나고 있다고 한다. 결국 우리 사회가 청년들이 세상을 바꾸어갈 수 있는 학습을 받고 그런 자원을 가질 수 있는 사회인지 생각해볼 때 매우 비관적을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환경적인 문제를 들여다보자면 엘리시움, 인터스텔라같은 영화들이나 세계의 많은 환경단체에서 말하는 지구 파괴나 탈핵 문제, 온난화 현상들과 같은 문제가 최근에 많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지구 파괴를 목적으로 한 영화들을 보자면 지구를 탈출해서 지구 밖이나 다른 행성을 찾아 탈출하자는 스토리가 많다. 인간이 지구를 파괴해놓고선 지구를 버리고 다른 곳에서 산다고 하니 껌 단물 빠지니깐 버리는 것도 아니고 참으로 인간이란 어쩔 수 없는 이기적인 동물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과연 지구를 감옥으로 규정하고 거기에서 탈출하는 것은 맞는 방향일까? 감옥 혹은 거대한 오염 덩어리가 되어가는 지구를 어떻게든 사람이 살아가는 곳으로 회복하는 것이 맞는 방향일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위험하다고 한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막상 변화를 위한 움직인 보이질 않고 있다. 왜일까?
조한혜정 교수는 기본적으로 우리들의 삶이 너무 불안해서 그렇다고 이야기하고 다른 이유로는 우리가 '함게 모여 의논하는 사회적 존재'라는 감각이 사라져서 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일반 시민들 역시 과학자들처럼 명확하지 않으면 믿지 않으려고 한다. 자신이 합리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나?
그런데 아시디피 인간의 삶은 명확한 사실에 의해서만 이루어지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모여서 어려움을 토론하고 질문을 제기하고 중구난방 의논을 하면서 세상의 문제를 풀어가야 하는 것, 그리고 사람들은 의논하는 사회적 존재이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는 정치적 존재이며, 변화하는 시대를 사는 역사적인 존재라고 말한다.
우리나라 교육을 보자면 대학은 실제 성과를 대기보다 부작용을 낳는 성과주의 체제로 전환되었고, 대학 구성원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낼 것을 강요한다. 그 결과, 돈을 벌기 위해 기숙사를 짓고, 휴학을 해도 돈을 내야 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된 것이다. 2006년경부터는 대학생들이 많이 달라졌다. 대학에 입학하기만 하면 술 마시고 놀러 다니고 미팅하고 그랬던 학생들은 사라지고, 부모님께 감사해하고 미안해하면서 놀지 않고 취업 공부만 하는 학생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학원은 학생들을 오로지 돈으로밖에 안보이고 있으며 감옥처럼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며 광고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 모든 상황은 개개인이 주어진 환경에 최대한 적응하는 양상을 보여주는데, 문제는 지금이 사회가 전체적으로 변해야 하는 시점이며, 급변하는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는데 사회가 변화지 않는다는 전제로 적합성을 추구한다면, 그 결과는 실패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사회 구성원 다수가 이러한 사회에서 산다면 그 사회는 갈수록 더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사회가 될 것이고, 그 안에서 개개인은 불행해질 수 밖에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시장이 국가의 기능을 거의 마비시켜버린 지금은 기댈 데가 사라진 상황에서 국민/시민들이 풀어내는 적대와 불안이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의 글로벌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직은 돈이 많은 선진국가나 국민들이 힘을 쏟아야 할 일은, 더 이상 부의 축적이 아니다. 갖가지 사고와 재난의 위험, 그로 인한 무수한 갈등과 불안을 줄이는 일이 무엇보다 우선이다. 후쿠시마나 세월호 사태와 같은 일들이 계속 일어날 텐데, 그런 상황에서 서로 적대시하지 않고 문제 해결을 해나갈 수 있는 내부의 합의 구조를 만들어가는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방향 전환을 해낼 수 있을까? 조한혜정 교수는 간단히 대답한다. 공부하자!
그간 우리는 입시 공부를 한다고 배움의 즐거움을 잊고 살았는데 지금은 그 배움을 기쁘게, 즐겁게 할 때이다. 혼자가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모여 함께 이야기하고 공부하는 자리가 만들어져야 하며, 의논할 줄 아는 국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기계가 아니라 사회에 관여하는 유기체적 존재로서 윤리적 삶을 살아야 하고, 세상을 구할 탁월함을 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
이러기 위해서는 그간 몸담았던, 돈이 지배하는 이 체제를 낯설게 보기 시작하면 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지금 엄청난 위험 부담을 안고 살아가고 있으며, 그런 면에서 파국적 상황을 살아가고 있음을 인식/인정해야 다음 단계로 이동할수 있다. 획일성을 복제하는 데 급급한 사회는 변화하는 환경에 대한 적응력이 별로 없는 사회다. 다양성이 조직화되어 있는 사회가 좋은 사회이며 획일적 국민을 계속 만드는 나라에 미래란 없다. 이런 미래를 만들지 않기 위해선 무엇보다 책을 읽고 누군가와 나누어야 한다고 말한다. 같이 읽고 의견을 나누고 생각을 나누게 되면 자연스럽게 모여 무언가를 하게 될 것이라고.. 그리고 모임 자체가 해방적인 배움의 자리가 되어야 하며, 각자 도생하는 버릇 내지 태도를 버리고, 친구를 사귀라고 권한다.
가난하게 살더라도 집을 떠나 자유롭게 살수 있는 조건이 마련될 때 성인이 된 청년은 부모와 정겹고 협력적인 관계를 만들어나갈 수 있으리라...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느린 시간, 멈춰 있을 장소, 느슨하지만 지속적인 관계를 맺어가는 것, 이 세가지라고 말한다. 바로 '고치를 칠 시간과 장소'인 것이다.
이 밖에도 많은 교수들과 천문학자 분들이 지구의 역사, 환경을 위한 생각 등 많은 분야에 대해서 생각을 하자는 취지로 좋은 내용을 수업을 들려주었다. 이렇게 많은 분들이 대한민국 뿐만 아니라 온 세상, 지구를 위해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해주고자 노력하고 있지만 정작 우리가 이분들의 노력에 대답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대답한다는 것은 이분들의 생각을 공유하고 우리들 스스로 생각을 해보자는 것일 텐데.. 현실은 암담하기만 하다. 지하철에서 책을 보는 사람,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사에는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사람이 700명 중 4명정도라고 한다. 아마도 나머지 696명은 스마트폰을 보고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지하철을 타고 다니면서 많은 대학생들 직장인들을 매일 보는데 정말 모두들 스마트폰만 쳐다보면서 살고 있다. 기술의 발전이 인간을 모두 멍청이로 만들고 있는건 아닐까? 우리들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정말 한숨만 나오게 된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이야기했듯이 우리가 나비가 되어 주위 사람들과 독서를 통해 생각을 공유하고 옳은 투표를 하며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자존을 할 수 있는 날개짓으로 태풍을 만들어 이 세상을 바꿔나갈 수 있는 믿음을 가져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