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또 이따위 레시피라니 - 줄리언 반스의 부엌 사색
줄리언 반스 지음, 공진호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4월
평점 :
아주 유명한 작가 '줄리언 반스'. 줄리언 반스라는 이름은 모르더라도, 영화로까지 만들어진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라는 책 제목은 한 번쯤은 들어봤을 거다. 우리나라에선 맨부커상 때문에 한동안 온라인 서점 메인에 걸려있기도 했고 말이다. (내가 읽은 책이 상을 받았다 해서 괜스레 뿌듯했었다.) '예측할 수 없었던 소설만큼이나 돋보였던 유려한 글.' 나는 줄리언 반스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그런 그가 쓴 음식 에세이가 발매된단다. 줄리언 반스라는 네임벨류만으로도 읽어야겠단 생각을 했을 텐데 그가 쓴 음식 에세이라니. 이건 꼭 읽어야 하는 거다. 앞뒤 재지 않고 읽기로 했다.
<또 이따위 레시피라니>라는 독특한(?) 제목을 갖고 있는 이 책은, 마크 힉스라는 영국의 유명한 셰프의 추천사로 시작한다. 요리사들이 간과하는 독자의 심정, 어렸을 때부터 따로 요리를 가르치지 않는 문화 등을 성토하며, 마지막에 '내가 지금까지 말한 사항들의 많은 부분을 논한다.'라는 말을 추가하며 추천사를 끝맺었다. 추천사에서부터 흥미가 돋아났다. 제목에서 이미 나타내고 있다시피 레시피에 유감이 아주 많았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 책은 레시피에 유감이 아주 많은 줄리언 반스의 조목조목 레시피 해부기다. 필요해서 샀는데 정작 쓸데 없는 요리책에 관한 부엌 현학자의 성토이자, 겁 많은 부엌 초보의 요리(대체로 망하는) 경험기다. 엉망진창 부엌에서의 좌충우돌하는 요리사의 멘붕기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아주 빵빵 터지는 건 아니지만 소소한 공감과 생각들이 절로 웃음짓게 만드는 기분 좋은 책이기도 하다.
줄리언 반스의 요리 경험치는 다음의 몇 구절로 설명 가능하다.
나는 장을 보러 갈 때 정확한 목록과 친절한 요리책이 있어야 한다. 가벼운 마음으로 장을 보는 이상적인 일, 즉 장바구니를 팔에 걸고 경쾌하게 걸어가며 편안한 마음으로 당일 최상의 식재료를 사 가지고 와서 전에 만들어본 것이든 아니든 무언가를 임의로 요리해내는 그런 일은 영원히 내 능력 밖의 일일 것이다.(22쪽)
나 자신보다는 주방 기구를 신뢰한다. 손가락으로 고깃덩어리를 찔러 익은 정도를 알아보는 일은 아마 영원히 없을 것이다. 나는 또한 요리할 때 맛보기를 꺼린다. 다시 말해서 나중에 음식을 내놓았을 때 다른 맛이 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두렵다는 말이다. (23쪽)
요리를 시작한 지 꽤 시간이 흘렀으나 여전히 요리에는 자신이 없고, 레시피 없이 자신있게 만들 수 있는 요리는 한정적인, 도전의지는 충만해서 레시피를 보며 여러가지 음식을 만들어보긴 하지만 높은 확률로 실패하고 마는 여전히 초보 요리사. 자꾸만 불명예를 떠안는 줄리언 반스. (46년생. 유명한 소설가. 부엌 현학자)
엘리자베스 데이비드는 이렇게 말한다. “요리를 그르칠 가능성은 우리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그걸 따돌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래도 그녀는 다음과 같은 리처드 올니의 말에 동의하리라. “실패는 창피한 게 아니며, 보통은 성공보다 더 도움이 될 수 있다.”
아무렴, 나도 이상적인 이론으로는 그게 맞는 말임을 안다. 그러나 실제로 대부분의 가정 요리사들에게 실패는 실로 불명예다. (150쪽)
요리를 하나 만드는데도 온갖 생각을 하는 이 소설가는 음식의 이름에서 부역자를 생각한다거나(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협력했던 프랑스 정권의 주석을 생각했다는데, 마치 도리뱅뱅이란 음식을 보면서 청바지를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사고방식이었던 듯 싶다), 책을 쓰려는 요리사는 쇠사슬에 꽁꽁 묶어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하고(어느정도 나도 동의하는 바다), 요리책을 보지 않는 요리사를 법규를 대충 훑어보는 변호사에 비유하기도 한다. 재료를 부르는 단어의 어원에 대해서 따져보기도 하고, (내가 보기엔 장황한 핑계 같다만) 정확하지 않은 레시피로 실패한 요리에 대한 경험을 늘어놓기도 한다. 레시피를 따라하다 열받은 내용은 기본, 독자에 대한 배려가 없는 (하지만 책을 쓴 요리사로서는 전혀 이상한 걸 느낄 수 없는) 레시피에 대한 분노는 옵션이다.
무엇보다 요리책 레시피 속 계량 방법에 맹렬하게 이의를 제기할 때는 나도 속이 시원했다.
나는 내가 상당 부분 의존하는 요리책들에 분노하는 일 또한 잦다. 왜 요리책은 수술 지침서처럼 정밀하지 않을까? 레시피에 쓰이는 단어는 왜 소설에 쓰이는 단어만큼도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걸까? 전자는 몸에, 후자는 머리에 소화불량을 일으킬 수 있는데 말이다. (26쪽)
이 레시피는 설명이 애매한데, 그러면 적절한(아니 그보다는, 겁나는) 해석의 자유가 있다는 건가? 아니면 저자가 더 정확한 언어를 구사할 수 없어서 그런 건가? 한 덩어리(lump), 한 모금(slug), 한 덩이(gout)는 얼만큼이지? 언제를 이슬비라고 하고 또 언제를 그냥 비라고 하느냐 하는 문제와 다를 게 없다. (41쪽)
“두 손을 합쳐 최대한 덜어낼 수 있을 만큼의 딸기를 넣으시오.”라는 리처드 올니의 레시피는 어떤가? 정말 이러긴가?(42쪽)
‘썰다’라는 말은 다섯 갈래로 나뉘는데, 어느 쪽을 택할까 고민하느라 곧바로 작업에 들어가지 못한다. (44쪽)
우리나라 레시피도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다. 다른 나라 언어보다 부사나 형용사 갯수가 많은 우리나라 특성상 엄마나 할머니가 설명해주는 레시피는 딴 나라 말인 듯 아득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대파 한 줌, 아니다. 대파 한 움큼이랑 새우젓국을 자분자분하게 넣고 한소끔 끓여." tvN 프로그램 <수미네 반찬>에서 김수미가 이야기하는 '엄마표 레시피'를 잘 이해하지 못해 셰프들이 당황하는 모습, 우리네 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라 낯설지가 않다. 줄리언 반스가 한국사람이었다면 부엌 현학자의 투덜거림이 곱절은 늘어났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줄리언 반스가 시종일관 책 속에서 불평불만만 늘어놓는 건 아니다. 요리책을 100권 정도 소장하고 있는 자신의 경험을 살려 '실패하지 않는 요리책을 고르는 노하우'를 전수한다거나, 에두아르 드 포미안이란 요리사의 조언에 따라 지치지 않고 디너파티를 현명하게 준비하는 방법을 일러준다거나 하는 유용한 경험도 얻을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쪽은 전자였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줄리언 반스는 요리에 굉장히 유감이 있는 걸까? 단연코 줄리언 반스는 누구보다 요리를 사랑한다. 요리에 시간을 쏟고, 더 나은 것을 위해 고민하고, 여러 권의 요리책 속 같은 레시피를 비교해보고. 애정이 없다면 일어나지 않을 일들이다. 관심이 없다면 요리에 대한 이러한 깊은 생각들은 태어나지도 않았다. 그러니 책 속 분노들은 줄리언 반스가 자신의 애정을 드러내는 또 다른 방법이지 않을까. "그냥 좋아한다고 말하긴 부끄러우니 이렇게라도 내 애정을 드러내야겠어!" 만화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흔한 츤데레 타입.
더불어 이렇게나 유명하고 명망있는 사람조차 부엌에서는 나와 별 다를 것 없다는 묘한 위안도 얻을 수 있다. 나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 뿐인데, 줄리언 반스가 옆집 투덜이 할아버지쯤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확 가까워진 내적 친분만큼이나 글도 가까워진 느낌이 든다. 유쾌한 투덜이 할아버지가 또 다른 음식 에세이는 언제쯤 내줄는지.
이론적으론 다 알아. 레시피란 모두 근사치라는 걸, 창의적인 요리사는 그때그때 구할 수 있는 재료와 품질에 맞춰 요리하리란 걸, 불변하는 것은 없다는 걸, 그 밖에 이런저런 걸 다 안다고. 난 그저 한창 요리하는 중에 이런 현실을 맞닥뜨리고 싶지 않은 거라고.(13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