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박정희 1
백무현 지음, 박순찬 그림, 민족문제연구소, 뉴스툰 기획 / 시대의창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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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죄가 있으나 공이 있으니 봐주자’는 논리가 있다. 한마디로 잘못은 했지만 잘한 것이 있으니 없는 셈 하자는 말인데 한국에서는 이런 논리가 꽤나 오랫동안 써먹히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맞는 논리인가. 세계 2차 대전이 끝나고 전범재판이 열렸을 때 한국과 세계인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사건이 있었다. 마루타부대로 잘 알려진 731부대의 지휘관, 속칭 ‘인간백정’으로 통하는 이시이 지로 중장이 무죄를 받은 것이다. 누구도 그가 무죄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나 승전국들은 그가 ‘충분한’ 공이 있다는 이유로 죄를 없는 셈 했다.

그때 세계는 그것을 두고 무엇이라고 했던가. 아니, 세계까지 볼 것도 없이 한반도에서 마루타부대의 악명을 누누이 들었던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했던가. 강자의 논리이자 야만인의 행태라고 했다. 그렇다. 평범한 사람들의 지적은 정확했다. 그것은 분명 야만인의 시대에서 볼 수 있는 행태였다.

그런데 야만인의 시대에 야만인의 논리는 흥미로운 속성을 갖고 있다. 실상 그 논리의 ‘우위’에 속하지 않고 언제든지 버림받을 수 있음에도, 많은 이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그 우위에 포함되어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전범재판에서 한국인들은 당시 우위에 속하지 못했다. 그래서 혹독하게 비판했다. 그런데 같은 논리라도 우위에 속할 경우 이야기가 달라진다. 야만의 논리를 ‘합리적’이라고 말해버리는 것이다. 요즘 경제인들에 대한 이야기에서 그런 논리가 자주 나오는 것도 그럴 테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역시 박정희가 그 대상의 선두주자다. 역사책 어디를 살펴봐도 박정희 만큼 야만의 논리가 통용되는 경우도 없다.

박정희가 누구인가. 한국에서 역사책을 한번이라도 들여다본 사람이라면, 주위 사람들과 현대사에 관해 최소한의 의사소통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이름을 알 것이다. 박정희 만큼 한국 근현대사에 영향을 끼친 인물도 없다. 또한 박정희 만큼 평가가 극과 극으로 나뉘는 역사 속의 인물도 찾기 힘들다. 사실 대다수의 국민들이 칭송해 마지않는, 박정희 스스로가 자신과 동일시했던 성웅 이순신처럼 그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웠다면 이런 일은 없을 텐데 불행하게도 국가의 지도자였던 그는 영웅과 기회주의자 사이에서 그 평가가 논쟁 중에 있다.

<만화 박정희>는 그러한 박정희에 대한 엇갈리는 평가에 종지부를 찍기 위한 책이다. ‘한국이 오늘날 이만큼 살 수 있게 밑바탕을 만든 경제성장의 지도자’라는 평가와 ‘한국이 오늘날 이토록 황폐화된 땅덩어리가 되도록 만든 기회주의자이자 독재자’라는 평가의 부딪힘을 끝내려는 것이다. 동시에 박정희와 관련된 야만의 논리를 폭로하며 박정희를 바라보고 추억하는 사람들의 가슴에 제대로 된 불꽃을 지피려는 책이기도 하다.

책은 ‘영웅’과 ‘기회주의자’ 사이에서 박정희가 기회주의자라고 말한다. 이제껏 등장했던, 뻔하고 뻔한 양비론의 가면을 걷어치우고 본격적으로 발걸음을 내민 것이다. <만화 박정희>의 발걸음은 상상 이상이다.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아니라 시쳇말로 ‘맞아죽을’ 각오하고 할 말 못할 말을 다하고 있다. ‘인권탄압’이나 ‘부정부패’라고 죄를 말하기가 민망할 정도다. 또한 개인의 야욕을 위해 나라의 많은 것들을 팔아버린 ‘독재자’라고 말하는 순간 그의 죄가 가벼워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다.

친일행각, 5. 16 군사정변, 김대중 암살 시도, 인혁당 사건, 굴욕적인 한일협정, 독재를 위한 유신 선포, 베트남 파병의 대가로 받은 돈의 상당수를 자신의 지갑으로 집어넣는 등의 온갖 부정부패는 그야말로 그가 보여준 행태들은 끝이 없다. 과연 누가 이런 그를 존경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존경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많은 정도가 아니라 소위 존경하는 인물 역대 랭킹에서도 손가락 안에 들 정도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단연코 ‘잘 먹고 잘 살게 해 준’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라는 이미지가 크다. 그렇다. 박정희는 분명 경제성장의 원동력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그것이 전체의 경제 성장이었을까. 기득권의 배를 부르게 하는 경제 성장이었다. 반면에 민생 경제는 파탄 났다. 파탄 난 정도가 아니라 ‘쪽박’을 찼다. IMF가 발생한 원인이 박정희의 무리한 경제정책에서 비롯된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니 더 말해 무엇할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박정희의 경제성장을 으뜸으로 친다. 일본을 상대로 기가 막힌 액수로 임의대로 과거청산을 해버렸으며 친일행각으로 독립군들을 쫓아다녔음에도 ‘경제 성장’을 대며 말을 얼버무린다. 이만큼 잘 살게 된 것이 다 그 덕분인데 오히려 왜 난리를 치냐고 윽박을 치는 사람도 있다.

그것이 맞는 것일까. 설사 박정희가 진실로 기반을 탄탄하게 만든 경제 성장을 이루어냈더라도 그 논리는 엄연한 야만의 논리다. <만화 박정희>는 그것을 말한다. 사람들은 ‘박정희로 인해 목숨을 잃고 죽을 지경에 이른 사람들이 안타깝지만’이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야만의 논리인지를 말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그 대상이 아니었다고 해서, 죄가 있는 만큼 공이 있는 것 아니냐는 말로 덮어두려 한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야만의 논리가 아닌가. 또한 참으로 무서운 속성이 아닌가. 전범재판의 이시이 지로 중장에 무죄를 선고했던 이들은 분명 희생된 이들은 안타깝다고 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공을 이야기하며 죄를 봐주자고 말했다. 아마 그 피해자가 아닌 국가의 국민들도 같은 생각을 했을 터이다. 안타까움을 토로하고는 덮어두려 했을 것이다. 단지 자신이 피해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지금의 박정희 문제처럼.

<만화 박정희 2권>에서 야당의원이 영등포 모 군부대에서 고문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그 의원은 이런 생각을 한다. ‘아, 내가 인간의 세상에 살고 있는가…….’라고. 그 시대를 인간의 시대라고 할 수 있는가. 독재자의 야심 때문에 죽어가고 핍박받던 그들에게 공과 죄를 운운하며 인간의 세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누구도 그 야만의 시대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무모함을 지닌 자는 없을 터이다.

<만화 박정희>는 야만의 논리에 마침표를 찍기 위한 책이다. 그리고 그 야만의 논리의 속성에 젖어버린 사람들에게 찬물을 끼얹기 위한 책이다. 그리고 불꽃을 지피려고 한다. 찬물로 씻어내고 새로운 불꽃을 지피려고 한다. 야만의 시대를 끄고, 인간의 시대를 피우기 위한 불꽃이다. 그것을 어찌 꺼버릴 수 있을까. 쌍수를 들고 환영해야 마땅한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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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귀들
배수아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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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살까지는 생계를 위해서 필요한 돈을 버는 이외의 시간은 오직 혼자서 책을 읽으며 공부할 것이다. 마흔 살까지는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한눈팔지 않고 공부할 것이다. 마흔 살까지 나는 오직 공부에만 미칠 것이다. 마흔 살까지의 내 삶은 언제나 내가 꿈꾸던 교통수단이 없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것과 같으리라. 구술언어가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과 같으리라. 스무 살, 이제 그곳으로 나는 배를 타고 떠난다.” <독학자>중에서


배수아의 <독학자>에서 세상을 등지기로 했던 몽상가, 그 몽상가는 어떻게 되었을까? 배수아라는 작가와 <독학자>를 알고 있던 이들이라면 한번쯤 그 궁금증을 품어봤을 것이다. 정말 자신의 말대로, 자신의 결심대로 내일을 걸어갔을까? 저자가 언급했던 성 안토니우스처럼 황무지 속으로 걸어갔을까?


저자의 최근작 <당나귀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 대답에 어느 정도의 답변을 짐작할 수 있다. 소설과 에세이를 혼합한 것처럼 보이는 이 작품은 직접적으로 <독학자>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두 작품을 동일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천박함과 야만 그리고 가식과 위선으로 얼룩진 시대에서 성 안토니우스와 비트겐슈타인에 눈을 돌린 화자를 보고 있노라면, 기자가 기사로 소통의 여지를 만들 듯이 작가가 글로서 소통의 여지를 만든다는 사실을 상기해본다면 그것은 억지스런 추측이 아닐 것이다.


<당나귀들>의 초반부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간에 ‘조롱’의 언어로 가득차있다. 무엇에 대한 조롱인가. 속된 말로 ‘체’하는 것에 대한 조롱이자 예술에 대한 악의 섞인 조롱에 대한 조롱, 천박함에 대한 조롱, 그리고 가식에 대한 조롱이다. 타인의 의사 중에 자신이 원하는 것만 찾아듣고 모든 것을 판단해버리는 그 오류들의 세상, 정해진 규칙을 벗어났을 때 일단 그것부터 트집을 잡은 뒤에 전체까지 비난해버리는 난폭함의 세상, 바로 오늘날에 존재하는 그 모습들이 조롱의 대상이다.


“우리는 야만인처럼, 포만과 쾌락에 대한 탐욕과 그것을 가로막는 사물들에 대한 원시적 적개심 이외에는 다른 어떤 희미한 기억조차도 갖지 못하게 되었다. (…) 우리는 모두 ‘나’라고 쓰인 커다란 관을 머리에 이고 돌아다니며 신석기인의 토굴 안에서 아무도 귀기울여 주지 않는 아귀다툼의 독백을 읊조리고 있느라 다른 사람도 역시 모두 사방에서 동시에 뱉어 내고 있는 아귀다툼의 독백을 들을 여유가 없다.” ‘본문’ 중에서


화자가 발을 딛고 있는 곳은 화자의 표현에 따르면 ‘도살장 인부의 칼날 아래 굴욕적인 포즈로 매일매일 던져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이곳을 떠날 수 있을까. 어떤 교통수단을 이용해 최대한 멀리 가든 다른 곳도 마찬가지다. 작품 속에서 화자의 눈과 지식을 통해 언급되는 세계의 도시들 어디든 그렇다.


화자는 예술로 눈을 돌린다. 어떤 종류의 예술이든 간에 이 세상에 대한 혐오를 잊을 수 있는, 순수성을 지닌 예술로 몸을 던지려는 것이다. 그것은 자의든 타의든 간에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몽상가를 자처하는 이들은 성 안토니우스와 비트겐슈타인처럼 남들과 다른 길을 가야한다.


<당나귀들>를 소설과 에세이가 혼합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 까닭은 이때부터 밝혀진다. 엄연히 책은 ‘장편소설’임을 밝히고 있지만 책과 음악에 대한 이야기들이 주요하게 등장하는 중반부로 치닫게 되면 이 책이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마치 저자의 독서일기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관련된 일기를 보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무어 그리 중요하겠는가. 어차피 중요한 것은 소통이 아닌가. 저자든 화자든 누구의 입을 통해서 나온 말인가 아니라 몽상하는 이가 예술 속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얻었나일 테다.


“간혹 나는 책에서 나와 같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한다. 그것에 대해서 말하거나 쓰는 두려움, 결코 피할 수 없는 통속이나 보편성에 대한 두려움, 달콤하고 간절한 사랑의 속삭임이 예술의 도구가 되는 것에 관한 두려움, 푸르스름한 원숭이가 되는 두려움, 결코 적절하게 말해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 굳어 버린 불안한 입술의 두려움, 끝없는 우울을 유발하는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쇠약함들을.” ‘본문’ 중에서


“몽상가. 그 단어는 나에게 다른 모든 세상의 사물들이 항상 그러하듯이, 80년대의 어느 날 읽고 있던 책에서 갑자기 튀어나왔다. 그것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었고 당시의 베스트셀러였다. (…) 쿤데라 표현에 따르면, 인간은 어떤 의미로든 타인의 시선을 욕망하며, 그 욕망의 대상이 되는 타인의 시선을 기준으로 인간을 분류해 볼 때, 몽상가란 ‘부재하는 사람들의 환상적인 시선 안에서 살고자 하는 사람’이라고 정의된다.” ‘본문’ 중에서


몽상가는 무엇을 보았는가. 본 것을 확인했지만 말할 수는 없다. <당나귀들>에는 세상의 많은 것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것들을 갖고 몽상가가 본 것이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없지 않다. 끝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직 몽상가는 노를 젓고 있는 중이다.


<당나귀들>은 중간에 잠시 몽상가의 말을 듣는 것이기에, 이걸 갖고 무엇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을 테다. 억지로 단정 지으려 한다면, 그것은 몽상가가 지극히 싫어하는 것이기에 다시는 말을 걸지 않을 수 잇을 테니 기다려야 할 테다. <당나귀들>를 통해 말을 걸었다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테다.


<당나귀들>은 잠시 문학에서 숨을 고르려는 요량으로 보기에는 적절치 않다. 그것은 작품을 지배하는 관념적인 분위기 탓도 있겠지만 작품 자체가 그것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몽상가에게 영향을 주었던 그 위대한 예술들의 손짓을 꿈꾸는 것일까. 한껏 조롱하면서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 그 자태는 쉽게 만나서 친해질 수 있는 사교성이 뛰어난 존재는 아니다. 그러나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흔히 ‘진국’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여기에 해당된다. 쉽게 친해질 수 없지만 한번 알게 되면 쉽사리 고개를 돌릴 수 없는 존재, 그것이 <당나귀들>의 그 일 테다.  


<당나귀들>에서 자주 언급된 밀란 쿤데라의 말을 빌려 말해보자면 이 작품은 <불멸>이 그러하듯이 “맛있는 음식을 천천히 음미하듯이” 읽어야 한다. “자전거 경주처럼” 읽는다면 필히 체하고 말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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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
알랭 드 보통 지음, 이강룡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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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이 책도 연애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알랭 드 보통의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을 보고 있노라면 자연스럽게 그런 의문이 든다. 이사벨이라는 여자의 전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그 여자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알고, 과거를 알며, 어린 시절의 추억을 알고, 가족과 친족관계 등 이사벨이라는 이름에서 파생되는 모든 것을 알아가는 그 과정을 그린 이 작품은 단순히 연애소설이라고 말하기에는 주저되는 감이 없지 않다. 차라리 ‘전기’나 ‘보고서’라고 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작품은 엄연한 연애소설인다. 그렇다면 연애소설이되 연애소설처럼 보이지 않는 이유는 뭘까? 아마도 그것은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로 잘 알려진 저자의 풍부한 재능과 주제 의식 탓일 게다. 하나의 만남을 인간이 벌일 수 있는 행위 중 가장 심오한 탐구적 행위로 묘사하고 서로 알아간다는 것이 어떤 행위보다 어려우면서도 동시에 흥미진진한 일인지를 말하는 저자의 폼과 주제 의식을 보면서 단순히 연애소설이라고 단정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남성과 여성의 영원한 화두가 바로 이성과의 ‘만남’이다. 누군가의 말처럼 인류 역사는 이성들의 만남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인류가 직립보행을 시작한 것만큼이나 만남의 문화도 오랜 과정을 거쳤다는 것도 사실일 게다. 그 만남이라는 것은 지역과 시대에 따라서 천양지차의 경향을 보여줬다. 서로 얼굴을 쳐다보는 것조차 민망해하던 시절이 있었는가 하면 일방적으로 하나의 성이 권력자로 다른 성을 지배하던 시절도 있었다.


오늘날은 어떠한가. ‘만남’이라는 단어가 충동적이며 일시적이고 또한 즉흥적으로 여겨지는 때가 오늘이다. 또한 남녀가 만나고 서로 알아가는 그 과정들이 ‘작업’이라는 한 단어로 대체 돼버린 현실이 오늘인데 이것은 비단 어느 한 곳만의 상황은 아닐 테다. 전 세계 곳곳에 인스턴트음식점들이 자리를 잡고 있듯이 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상황일 테다.


그런 상황이 오늘이다 보니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을 쉽사리 연애소설이라고 말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이른바 작업의 생명이라는 것은 최소한의 비용을 들여 최대한의 효과를 살리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저자는 빗나가도 한참 빗나갔다. 최소한의 비용이나 최대한의 효과니 하는 것들은 저자 앞에서 모래성이 무너지듯 쉽게 허물어진다. 작업이라는 단어도 마찬가지다.


화자인 남자가 우연히 이사벨이라는 여자를 만난다. 남자는 한눈에 여자가 허영심 많고 예술가 뒤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는 속 빈 강정 같은 부류일 것이라고 판단한다. 나름대로 겉모양과 하는 짓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가 생각하던 그런 종류의 여자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예술가 뒤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지 않고 속 빈 강정 같지도 않다. 여자의 장점과 단점 모두 남자가 생각한 것들과는 다른 곳에 존재하고 있다.


그 남자는 평소 서점 같은 곳에서 왜 전기는 유명한 인물들이 초점이 되는지 의아해하던 인물이다. 또한 업적이나 업적을 들춰낼 수 있는 에피소드들이 전기의 핵심이 되는지도 의아해하던 사람이다. 그런 남자였기에 여자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는 사실, 그리고 집에 데려다주면서도 쉽게 헤어지기 싫다는 이유 등으로 ‘전기’를 써보기로 한다.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은 남자가 여자의 전기를 쓰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평범한 사람이 평범한 사람의 것을 알아내는 것이라고 해서 만만하게 볼 수 없다. 마치 인물의 백과사전을 작성하듯, 인물이 살아왔던 기억을 고스란히 전수받아 대신 살아가겠다는 의지라도 있는 것처럼 남자는 여자의 많은 것을 알아간다. 그 꼼꼼함만 놓고 본다면 남자의 태도는 이제껏 전기를 썼던 어느 전기 작가들보다 앞서가고 있다.


대상인물이 이루어낸 업적에 비하면 여자가 과연 전기의 대상이 될까 싶지만 이미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세상에 전기가 유명인물들의 전유물이라는 법도 없거니와 한 여자가 한 남자의 가슴에 사랑의 감정을 일으켰다는 것 또한 놀라운 업적이 아니겠는가. 그 점에서 여자는 충분한 대상요건을 갖고 있으며 자신의 역할을 적절하게 소화해낸다. 남자 또한 성실하게 그 의무를 다한다. 저자 또한 전기를 쓴다는 행위와 별도로 이들이 서로를 알아가면서 서로를 좋아하게 되는 장면들을 잊지 않고 포착해내 독자들을 만족시키는 그 의무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


사실 이 작품이 연애소설답게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이 진지하게, 그리고 누가 봐도 제지할 수 없을 정도로 탐구해가는 작품 속의 모습 일 테다. 즉흥적인 만남을 즐기는 입장에서 본다면 이렇게 까지 해야 할까 싶겠지만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은 기어코 해낸다. 그리고 즉흥적인 만남에서 얻어낼 수 없는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키스하기 전에 우리가 하는 말들>은 동일 분야의 도서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독특함을 갖고 있다. 그 독특함은 연애소설의 책장을 펼치지 않았던 이들의 손끝을 움직일 정도다. 물론 그것은 중독 현상까지 만들어낸다는 작가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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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게 무덤
권지예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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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과 불이 서로를 그리워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일까? 구체적으로 '타오르는 불꽃'과 '깊어가는 강물'이 서로를 그리워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불과 물의 만남을 상상한다면 막연하게나마 그럴 듯한 무언가를 보게 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2002년 이상문학상 수상작가 권지예의 세 번째 소설집 <꽃게 무덤>은 그 기대에 대한 답을 담고 있다. 구체적으로 표제작 <꽃게 무덤>과 <물의 연인>에서 그 답을 확인할 수 있다. 물과 불의 만남이 이분법적으로 충돌을 연상케 한다지만 저자의 손끝에서 여성은 물로, 남성은 불로 상징되어 재창조되는 물과 불의 만남은 충돌보다는 동화되어가는 듯한 '흉내 내기'다.


물이 불을 그리워하고 불 또한 물을 그리워한다. 하지만 소설이라고 해서 이들의 기본 속성을 무시할 수는 없는 터. 물이 불을 끄고 불은 물 속에서 기어코 꺼지고야 마는 그 이치는 소설 속의 인물들에서도 마찬가지이기에 지켜볼수록 애틋하기만 하다.


<물의 연인>에서 인디언의 이름으로 '타오르는 불꽃'이라고 불리게 되는 남자나 '깊어가는 강물'이라고 불리는 여자가 과거와 현재 뿐만 아니라 삶의 죽음을 넘나들면서도 속 시원하게 서로에게 말을 건네지 못한 것은 안타까움, 그 자체다.


또한 '간장게장'를 유난히 좋아했던 여자를 물에서 만났지만 물 속으로 떠나보내야 했던 남자의 애틋한 사연과 안쓰러워 보이는 식욕의 고백이 담긴 표제작 또한 가슴 속 깊은 곳의 애수를 자아낸다.


표제작과 <물의 연인>은 애틋하다. 그것은 차마 밝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작품 뿐만 아니라 <꽃게 무덤>에 수록된 작품들 대부분이 그렇다. 그런데 앞의 두 작품과 달리 다른 ‘밝지 않은 작품’들은 ‘슬픔’보다 ‘기막힘’이라는 단어를 불러온다.


반전의 묘미 때문인가? <비밀>과 <산장카페 1Km>, <봉인> 등이 그러한데 감히 '반전이 좋다'라고 말하기가 아쉬울 만큼 저자의 이 작품들은 갑작스럽게, 혹은 예상할 수 있지만 예상하고 싶지 않았던 내용들이라서 외면했던 것들이 방심하는 순간에 불쑥 등장해 머릿속의 종을 울린다. 또한 뒤통수에 둔탁한 것이 내리친 것 같은 허망함까지 던져준다.


길이 있다고, 길이 있을 것이라고 속삭이는 저자의 말에 이끌려 빠르게 달려 나갔다가 한순간에 자신이 딛고 있는 곳이 허공으로 변해버린 것을 알았을 때 맛볼 수 있는 그것은 '반전'이라는 단어, 그 자체로는 유명한 추리소설의 것들에 비하면 그다지 놀라운 것은 아니다. 허나 위력은 어느 추리소설의 유명한 반전 못지않다.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저자가 들려주는 말에 철썩 같이 믿고 싶게 만드는 사연들 때문이다.


마술사가 되기를 꿈꾸는 어린이가 납치되어 겪는 이야기를 다룬 '비밀'은 어두운 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숲 속의 길을 걸어가는 것과 같은 아슬아슬함을 담고 있다.


평범하게 시작하는 이야기에서 미처 예상 못했던 납치, 가족사, 배신 등의 요소들이 작품 중간 중간에서 복병처럼 튀어나와 긴장감을 가중시키는데 그 맛이 일품이건만 일품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건 숱한 복병들이 만들어내는 반전이 보여주는 서글픔 때문이다.


'기가 막히다'고 해야 할까? 오히려 반전에 감탄하고서도 반전이 없었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 정도니 그 위력은 어찌 과소평가 할 수 있을까.


이런 애틋함과 기막힘과 별도로 <꽃게무덤>은 쉽게 읽힌다. 여러 작품의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는 '삶과 죽음'이라는 운명 속에서도 저자가 죽음보다는 삶을 더 갈망하기 때문인가. 어두운 것을 이야기함에도 천연덕스럽게 저자의 말투가 밝다.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다양하게 등장하는 화자들의 말투는 한결같이 밝다.


절망적인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죽음을 선고받을 거라고 믿을 때조차 그렇다. 물론 그 탓에 몇몇 작품은 보는 이들을 더 기막히게 하는 끝을 선보이기는 하지만 사실 그것조차 이미 저자의 손끝 재주를 인정하게 만들 수 없는 반증이 아니겠는가.


저자의 손끝 재주가 갈수록 더 진해진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더 현란해진다고 해야 할까? <폭소> 이후 2년여의 시간이 흐른 뒤에 찾아온 저자의 작품을 보면서 더 간결하게 화려한 이야기를 해내고 마는, 천연덕스럽게 아픔을 보여주고 마는 저자의 펜을 어떻게 변했다고 말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그것을 말하지 않더라도 그 변화는 반가운 것이다. 더 신명나게 소설을 읽을 수 있게 됐으니 어찌 반갑다는 말을 아낄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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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분투기
정은숙 지음 / 바다출판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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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이 독자들의 뇌리 속에 자리 잡을 때 독자들은 책의 제목만큼이나 저자 또한 잊지 않고 기억한다. 그런데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 게 있다. 독자들이 기뻐하고, 슬퍼하고, 웃거나 울게 만들 수 있는 책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저자만큼이나 힘겹게 노력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책이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것으로 만족하는, 수 백 페이지의 처음이나 끝에 아주 작게 이름 한 줄 집어넣는 것에 만족하는 ‘편집자’들이 그들이다. 책이 세상에 나오는데 절대 없어서는 안 될 편집자들은 저자와 함께 동고동락하며 고생해도 스포트라이트에서는 언제나 비껴있다. 저자가 빛이라면 편집자는 그림자 같은 존재라고 할까?


정은숙의 <편집자분투기>는 그러한 편집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20여년의 시간 동안 실무에서 활동했으며 현재도 편집자이자 출판사의 대표로 활약하고 있는 저자는 이론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보고 겪었던 경험을 통해 생생한 ‘편집자 인생’을 털어놓고 있다.


사회 각층의 여러 인물들은 소설에서 다양하게 부활하며 그들의 비애를 보여준다. 하지만 유독 ‘편집자’는 예외다. 제임스 미치너의 <소설>에 등장하는 ‘이본 마멜’ 정도가 편집자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줬다.


소설뿐만 아니라 수필이나 에세이도 그랬다. 그래서 더욱 반갑다. <편집자분투기>를 통해서 책을 편집한다는 화려한 수식어 뒤에 가려져 있던 편집자들의 진짜 모습을 기대할 수가 있다. 특히 자신의 실패담까지 과감하게 털어놓을 정도니 기대치를 한껏 높여도 좋다.


“편집자는 책을 만들면서 세상의 일부를 만들어가는 사람이다. (…) 그런데 책의 의미를 일련의 정연한 사고체계 그 자체라고 확대해서 보면 인류가 가진 지혜가 다 이 가운데 내포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책을 만든다는 것은 비단 책만이 아니라 세상을 편집하는 작업 한가운데 있다는 의미도 된다.” <편집자 분투기> 중에서


책을 편집한다는 것이 세상을 편집한다고 말하는 저자. 저자는 대학을 졸업하면서 곧바로 편집 실무에 뛰어들었다. 왜일까? 좋은 직업들도 많았을 텐데 충분히 박봉이 예상되는 편집자가 된 까닭은 무엇일까? 책을 편집한다는 마술 같은 겉모습에 현혹된 것일까?


저자가 1985년 1년차 초보 편집자로 한 일은 교정 교열 맞춤법 익히기와 숱한 잡무들이었다. 기자가 되겠다는 꿈에 ‘홍성사’에 취직한 저자에게 초보 편집자의 일들은 그야말로 밑바닥이라고 할 수 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침에 출근하다 보면 낡은 계단에 자장면 그릇들이 놓여 있었다. 어젯밤에 편집부의 누군가가 야근을 했다는 증거였다. 밤까지 쉬지 않고 일을 하고도 늘 일정에 쫓기는 것이 편집자의 운명임을 그때 이미 나는 깨달았다. 또한 잡지 마감에 닥쳐서는 편집부 선배들이 모두 예민해져 있었기에 막내사원으로서 분위기를 파악하여 대처하기가 만만치 않았다.”<편집자 분투기> 중에서


어째서일까? 그럼에도 저자는 편집하는 일을 20년 이상 해내고 <편집자분투기>를 세상에 내놓았다. 스스로에 대한 만족감일까? 아니다. 페이지 어느 곳에서도 그런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발전을 위한 채찍질을 하는 것 같다. 저자는 한국의 편집자들과 편집자들을 지망하는 사람들에게 따끔한 말을 거두지 않는데 그 모양새는 마치 자기 자신을 향한 일침을 놓는 것과 같다.


<편집자분투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편집자를 위한 책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어느 문학작품에 뒤지지 않는 진한 향기를 갖고 있다. 책 한 권을 언급해도 따뜻한 애정이 느껴지는 저자의 글에서 책을 만든다는 것에 심취해 있는 편집자들의 모습을 엿볼 수가 있다.


또한 저자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이미 생생한 편집자들의 삶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독자들이 간과하고 있던 한 가지를 일깨워준다. 그것은 한 권의 책을 만들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력하는 편집자들의 존재다. 더불어 편집자뿐만 아니라 독자가 조금이라도 책과 원활하게 소통하기 위해서 애쓴 여러 실무 팀들의 존재도 알려준다.


책을 논하면 보통 저자를 떠올린다. 그것이 일반적인 분위기였다. 편집을 이야기할 때야 고작 책 표지를 논하는 정도에 그쳤다. 하지만 <편집자분투기>는 알려준다. 세상을 편집하는 심정으로 책을 편집하는 고단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그렇기에 독자가 웃고 울 수 있는 한 권의 책이 세상에 나올 수 있음을 말이다.


편집자를 위한 이야기들로 가득한 정은숙의 <편집자분투기>. 보는 대상이 정해져 있다고 해서 외면하기에는 아까운 작품으로, 책이라는 종합예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예술을 감상하기에 앞서 한 번쯤 마주쳐야 할 작품으로 손꼽을 수 있다.


“출판 기획편집자에게 줄 찬사는 책을 잘 만들었다는, 또는 편집이 잘 되었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편집자는 책을 통해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꾸는데 기여하고 싶은 것이다.”<편집자 분투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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