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게 무덤
권지예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4월
평점 :
품절


물과 불이 서로를 그리워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일까? 구체적으로 '타오르는 불꽃'과 '깊어가는 강물'이 서로를 그리워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불과 물의 만남을 상상한다면 막연하게나마 그럴 듯한 무언가를 보게 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2002년 이상문학상 수상작가 권지예의 세 번째 소설집 <꽃게 무덤>은 그 기대에 대한 답을 담고 있다. 구체적으로 표제작 <꽃게 무덤>과 <물의 연인>에서 그 답을 확인할 수 있다. 물과 불의 만남이 이분법적으로 충돌을 연상케 한다지만 저자의 손끝에서 여성은 물로, 남성은 불로 상징되어 재창조되는 물과 불의 만남은 충돌보다는 동화되어가는 듯한 '흉내 내기'다.


물이 불을 그리워하고 불 또한 물을 그리워한다. 하지만 소설이라고 해서 이들의 기본 속성을 무시할 수는 없는 터. 물이 불을 끄고 불은 물 속에서 기어코 꺼지고야 마는 그 이치는 소설 속의 인물들에서도 마찬가지이기에 지켜볼수록 애틋하기만 하다.


<물의 연인>에서 인디언의 이름으로 '타오르는 불꽃'이라고 불리게 되는 남자나 '깊어가는 강물'이라고 불리는 여자가 과거와 현재 뿐만 아니라 삶의 죽음을 넘나들면서도 속 시원하게 서로에게 말을 건네지 못한 것은 안타까움, 그 자체다.


또한 '간장게장'를 유난히 좋아했던 여자를 물에서 만났지만 물 속으로 떠나보내야 했던 남자의 애틋한 사연과 안쓰러워 보이는 식욕의 고백이 담긴 표제작 또한 가슴 속 깊은 곳의 애수를 자아낸다.


표제작과 <물의 연인>은 애틋하다. 그것은 차마 밝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작품 뿐만 아니라 <꽃게 무덤>에 수록된 작품들 대부분이 그렇다. 그런데 앞의 두 작품과 달리 다른 ‘밝지 않은 작품’들은 ‘슬픔’보다 ‘기막힘’이라는 단어를 불러온다.


반전의 묘미 때문인가? <비밀>과 <산장카페 1Km>, <봉인> 등이 그러한데 감히 '반전이 좋다'라고 말하기가 아쉬울 만큼 저자의 이 작품들은 갑작스럽게, 혹은 예상할 수 있지만 예상하고 싶지 않았던 내용들이라서 외면했던 것들이 방심하는 순간에 불쑥 등장해 머릿속의 종을 울린다. 또한 뒤통수에 둔탁한 것이 내리친 것 같은 허망함까지 던져준다.


길이 있다고, 길이 있을 것이라고 속삭이는 저자의 말에 이끌려 빠르게 달려 나갔다가 한순간에 자신이 딛고 있는 곳이 허공으로 변해버린 것을 알았을 때 맛볼 수 있는 그것은 '반전'이라는 단어, 그 자체로는 유명한 추리소설의 것들에 비하면 그다지 놀라운 것은 아니다. 허나 위력은 어느 추리소설의 유명한 반전 못지않다.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저자가 들려주는 말에 철썩 같이 믿고 싶게 만드는 사연들 때문이다.


마술사가 되기를 꿈꾸는 어린이가 납치되어 겪는 이야기를 다룬 '비밀'은 어두운 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숲 속의 길을 걸어가는 것과 같은 아슬아슬함을 담고 있다.


평범하게 시작하는 이야기에서 미처 예상 못했던 납치, 가족사, 배신 등의 요소들이 작품 중간 중간에서 복병처럼 튀어나와 긴장감을 가중시키는데 그 맛이 일품이건만 일품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건 숱한 복병들이 만들어내는 반전이 보여주는 서글픔 때문이다.


'기가 막히다'고 해야 할까? 오히려 반전에 감탄하고서도 반전이 없었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 정도니 그 위력은 어찌 과소평가 할 수 있을까.


이런 애틋함과 기막힘과 별도로 <꽃게무덤>은 쉽게 읽힌다. 여러 작품의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는 '삶과 죽음'이라는 운명 속에서도 저자가 죽음보다는 삶을 더 갈망하기 때문인가. 어두운 것을 이야기함에도 천연덕스럽게 저자의 말투가 밝다.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다양하게 등장하는 화자들의 말투는 한결같이 밝다.


절망적인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죽음을 선고받을 거라고 믿을 때조차 그렇다. 물론 그 탓에 몇몇 작품은 보는 이들을 더 기막히게 하는 끝을 선보이기는 하지만 사실 그것조차 이미 저자의 손끝 재주를 인정하게 만들 수 없는 반증이 아니겠는가.


저자의 손끝 재주가 갈수록 더 진해진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더 현란해진다고 해야 할까? <폭소> 이후 2년여의 시간이 흐른 뒤에 찾아온 저자의 작품을 보면서 더 간결하게 화려한 이야기를 해내고 마는, 천연덕스럽게 아픔을 보여주고 마는 저자의 펜을 어떻게 변했다고 말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그것을 말하지 않더라도 그 변화는 반가운 것이다. 더 신명나게 소설을 읽을 수 있게 됐으니 어찌 반갑다는 말을 아낄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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