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귀들
배수아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5년 5월
평점 :
품절


“마흔 살까지는 생계를 위해서 필요한 돈을 버는 이외의 시간은 오직 혼자서 책을 읽으며 공부할 것이다. 마흔 살까지는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한눈팔지 않고 공부할 것이다. 마흔 살까지 나는 오직 공부에만 미칠 것이다. 마흔 살까지의 내 삶은 언제나 내가 꿈꾸던 교통수단이 없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것과 같으리라. 구술언어가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과 같으리라. 스무 살, 이제 그곳으로 나는 배를 타고 떠난다.” <독학자>중에서


배수아의 <독학자>에서 세상을 등지기로 했던 몽상가, 그 몽상가는 어떻게 되었을까? 배수아라는 작가와 <독학자>를 알고 있던 이들이라면 한번쯤 그 궁금증을 품어봤을 것이다. 정말 자신의 말대로, 자신의 결심대로 내일을 걸어갔을까? 저자가 언급했던 성 안토니우스처럼 황무지 속으로 걸어갔을까?


저자의 최근작 <당나귀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 대답에 어느 정도의 답변을 짐작할 수 있다. 소설과 에세이를 혼합한 것처럼 보이는 이 작품은 직접적으로 <독학자>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두 작품을 동일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천박함과 야만 그리고 가식과 위선으로 얼룩진 시대에서 성 안토니우스와 비트겐슈타인에 눈을 돌린 화자를 보고 있노라면, 기자가 기사로 소통의 여지를 만들 듯이 작가가 글로서 소통의 여지를 만든다는 사실을 상기해본다면 그것은 억지스런 추측이 아닐 것이다.


<당나귀들>의 초반부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간에 ‘조롱’의 언어로 가득차있다. 무엇에 대한 조롱인가. 속된 말로 ‘체’하는 것에 대한 조롱이자 예술에 대한 악의 섞인 조롱에 대한 조롱, 천박함에 대한 조롱, 그리고 가식에 대한 조롱이다. 타인의 의사 중에 자신이 원하는 것만 찾아듣고 모든 것을 판단해버리는 그 오류들의 세상, 정해진 규칙을 벗어났을 때 일단 그것부터 트집을 잡은 뒤에 전체까지 비난해버리는 난폭함의 세상, 바로 오늘날에 존재하는 그 모습들이 조롱의 대상이다.


“우리는 야만인처럼, 포만과 쾌락에 대한 탐욕과 그것을 가로막는 사물들에 대한 원시적 적개심 이외에는 다른 어떤 희미한 기억조차도 갖지 못하게 되었다. (…) 우리는 모두 ‘나’라고 쓰인 커다란 관을 머리에 이고 돌아다니며 신석기인의 토굴 안에서 아무도 귀기울여 주지 않는 아귀다툼의 독백을 읊조리고 있느라 다른 사람도 역시 모두 사방에서 동시에 뱉어 내고 있는 아귀다툼의 독백을 들을 여유가 없다.” ‘본문’ 중에서


화자가 발을 딛고 있는 곳은 화자의 표현에 따르면 ‘도살장 인부의 칼날 아래 굴욕적인 포즈로 매일매일 던져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이곳을 떠날 수 있을까. 어떤 교통수단을 이용해 최대한 멀리 가든 다른 곳도 마찬가지다. 작품 속에서 화자의 눈과 지식을 통해 언급되는 세계의 도시들 어디든 그렇다.


화자는 예술로 눈을 돌린다. 어떤 종류의 예술이든 간에 이 세상에 대한 혐오를 잊을 수 있는, 순수성을 지닌 예술로 몸을 던지려는 것이다. 그것은 자의든 타의든 간에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몽상가를 자처하는 이들은 성 안토니우스와 비트겐슈타인처럼 남들과 다른 길을 가야한다.


<당나귀들>를 소설과 에세이가 혼합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 까닭은 이때부터 밝혀진다. 엄연히 책은 ‘장편소설’임을 밝히고 있지만 책과 음악에 대한 이야기들이 주요하게 등장하는 중반부로 치닫게 되면 이 책이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마치 저자의 독서일기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관련된 일기를 보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무어 그리 중요하겠는가. 어차피 중요한 것은 소통이 아닌가. 저자든 화자든 누구의 입을 통해서 나온 말인가 아니라 몽상하는 이가 예술 속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얻었나일 테다.


“간혹 나는 책에서 나와 같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한다. 그것에 대해서 말하거나 쓰는 두려움, 결코 피할 수 없는 통속이나 보편성에 대한 두려움, 달콤하고 간절한 사랑의 속삭임이 예술의 도구가 되는 것에 관한 두려움, 푸르스름한 원숭이가 되는 두려움, 결코 적절하게 말해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 굳어 버린 불안한 입술의 두려움, 끝없는 우울을 유발하는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쇠약함들을.” ‘본문’ 중에서


“몽상가. 그 단어는 나에게 다른 모든 세상의 사물들이 항상 그러하듯이, 80년대의 어느 날 읽고 있던 책에서 갑자기 튀어나왔다. 그것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었고 당시의 베스트셀러였다. (…) 쿤데라 표현에 따르면, 인간은 어떤 의미로든 타인의 시선을 욕망하며, 그 욕망의 대상이 되는 타인의 시선을 기준으로 인간을 분류해 볼 때, 몽상가란 ‘부재하는 사람들의 환상적인 시선 안에서 살고자 하는 사람’이라고 정의된다.” ‘본문’ 중에서


몽상가는 무엇을 보았는가. 본 것을 확인했지만 말할 수는 없다. <당나귀들>에는 세상의 많은 것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것들을 갖고 몽상가가 본 것이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없지 않다. 끝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직 몽상가는 노를 젓고 있는 중이다.


<당나귀들>은 중간에 잠시 몽상가의 말을 듣는 것이기에, 이걸 갖고 무엇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을 테다. 억지로 단정 지으려 한다면, 그것은 몽상가가 지극히 싫어하는 것이기에 다시는 말을 걸지 않을 수 잇을 테니 기다려야 할 테다. <당나귀들>를 통해 말을 걸었다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테다.


<당나귀들>은 잠시 문학에서 숨을 고르려는 요량으로 보기에는 적절치 않다. 그것은 작품을 지배하는 관념적인 분위기 탓도 있겠지만 작품 자체가 그것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몽상가에게 영향을 주었던 그 위대한 예술들의 손짓을 꿈꾸는 것일까. 한껏 조롱하면서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 그 자태는 쉽게 만나서 친해질 수 있는 사교성이 뛰어난 존재는 아니다. 그러나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흔히 ‘진국’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여기에 해당된다. 쉽게 친해질 수 없지만 한번 알게 되면 쉽사리 고개를 돌릴 수 없는 존재, 그것이 <당나귀들>의 그 일 테다.  


<당나귀들>에서 자주 언급된 밀란 쿤데라의 말을 빌려 말해보자면 이 작품은 <불멸>이 그러하듯이 “맛있는 음식을 천천히 음미하듯이” 읽어야 한다. “자전거 경주처럼” 읽는다면 필히 체하고 말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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