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 싶은 주인공, 겪고 싶은 기적 이야기

상품내용



| 상품상태





일본소설이 쏟아지고 있다. 이는 작년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다. 열풍이라면 열풍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 현상은 올해까지도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일본소설이 호응을 얻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에 대한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확연히 눈에 띄는 것은 국내 작품에 비해 ‘가볍다’는 특징이 있다는 점이다.
‘가볍다’는 말은 작품의 무게가 떨어진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이야기를 풀어내는 기법을 뜻한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일본소설들은 ‘방심’한 채 있을 수 있는, 주인공을 따라서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소설들이다.
‘검은색’으로 표현해야 할 절망적인 사건조차 ‘핑크색’으로 그려낸다고 할까? 이러한 사실은 요즘 인기를 얻고 있는 일본소설들에서 공통적으로 보여 지는 특징인데 인터넷 언어에 익숙한 청소년들부터 삶의 피로를 잊기 위해 소설을 보는 청년들이 특히 그런 점을 반기고 있다.
일본소설이 가볍다는 것은 같은 주제를 그려도 한국 소설이 묵직한 붓으로 그려나간다면 일본 소설은 가벼운 붓으로 그려나간다는 것과도 같은 뜻으로 볼 수 있다. 특별한 서사구조가 없어도 꾸준히 사랑받는 요시모토 바나나의 작품들이나 우화 같은 설정으로 웃음을 주려는 젊은 작가들의 작품들로 보고 있노라면 ‘일본적인 문학’을 짐작할 수는 없어도 최소한 국내 작품들보다 주목받는 이유가 공통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이사카 코타로의 <칠드런>도 그런 작품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5개의 단편들이 연작소설처럼 구성된 이 작품은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주인공 ‘진나이’의 캐릭터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은행 강도가 들이닥친 와중에도 강도가 든 총이 진짜냐고 물어보고 이상한 분위기가 싫어 기타를 들고 음악을 연주하는 진나이는 첫 작품 ‘뱅크’에서 엉뚱하면서도 무례한 주인공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독자들은 진나이를 미워할 수가 없다. 모두가 꿈꿔보았던 만화 주인공 같은 인물이기 때문일까? 당혹스럽게 여겨졌던 그의 행동들이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독자들의 기대감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단편들이 진행될수록 ‘천방지축’ 진나이가 누구보다 따뜻한 마음씨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약한 마음을 감출수록 겉으로는 더 강하게 보이려고 하는 성향의 사람들이 있다. 진나이도 그런 경우다. 세상에 걱정하나 없을 것 같던 그에게 사실은 원조교제를 했던 아버지가 있었다는 ‘상처’가 드러날수록 진나이를 향한 시선은 자연스럽게 싸늘함에서 온정으로 바뀌게 된다. 또한 엉뚱해보였던 그가 사실은 가정법원에서 소년사건을 담당하는 ‘멋쟁이’이며, 비행청소년들로부터 영웅 취급을 받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동경’과 같은 시선까지 보내게 된다.
진나이라는 주인공에게는 콤플렉스가 있다. 그것은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하는, 실상은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콤플렉스다. 이런 설정은 <칠드런>뿐만 아니라 국내 작품들에게서 다수 발견되던 것이다. 그렇기에 이런 경우 아들인 주인공들이 얼마나 울부짖으며 답답함을 호소하는지, 또한 아버지를 용서할지 말지를 두고 심연의 갈등 속에서 허우적거릴 것이라고 예상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칠드런>의 ‘진나이’는 그런 것을 거부한다. 오히려 독특한 해결방법을 찾아내 보는 이들을 당황시킨다. 보는 사람들에게까지 고민을 전염시키지 않으려는 의도일까? 충동적이긴 하지만 진나이는 아주 간단하게 해결방법을 찾아냈다.
그 방법은 패륜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진나이’를 찾는 사람들은 진나이를 두고 ‘패륜’이라는 말을 꺼내지 않는다. 오히려 응원하고 있다.
진나이는 또 다시 원조교제하는 아버지를 보고는 때리겠다고 말을 남기고 떠난다. 차마 얼굴을 보고 때릴 수 없어 생각한 방법이 아르바이트하던 ‘곰대가리 인형’을 쓰고 덮치는 것이었다. 상식을 뛰어넘는 상상력이란 이럴 때 사용하는 표현일까?
진나이만 그런 것이 아니다. <칠드런>에 등장하는 주변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상식을 뛰어넘는 상상력이 지나쳐 신비로워 보일 정도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동화 같은 풍경을 만들어낼 줄 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청년이 오히려 남들을 위로하고, 맹인견은 사람보다 더 다정스러운 마음을 갖고 있으며, 친구를 위해 곤란한 상황에 걸어가는 마음씨 좋은 인물들인 것이다.
아마 이런 인물들과 인물들이 겪는 사건들을 두고 사람들은 ‘작위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건 사실이다. <칠드런>의 구성을 살펴보면 작위적인 내용이 다분하다. 그런데 그 작위적이라는 것은 독자를 위함이다. 작품 속에서 ‘기적’을 행하기 위해 말도 안 되는 상황들이 등장하고, 그것을 토대로 읽는 사람들의 마음속에까지 기적을 전해주기 위해 울어야 할 상황에서도 인물들은 웃고, 삶을 불평해야 할 시기에도 남을 위로해주겠다고 거리로 나선다.
‘울부짖음’과 ‘신세한탄’이 있어야 할 자리에 <칠드런>의 저자는 ‘엉뚱한 상상’과 ‘따뜻한 인간애’를 집어넣고 있다. 이런 점에서 <칠드런>을 두고 사실적인지 아닌지를 논하는 건 의미가 없어 보인다. 의미가 있는 것은 저자의 이러한 의지는 사람들에게 환영받고 있고, 만화 같은 주인공은 기억되고 있다는 것이다.
왜 사람들은 왜 일본소설을 찾는가? 왜 사람들은 '진나이'를 만나고 싶어할까? <칠드런>을 보면 하나의 답을 알 수 있다. ‘삶’을 잊을 수 있는 가벼움, 그것이 옳든 그르든 간에 그러한 바탕 위에서 그려진 작품을 보고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주인공을 만나보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그것을 알려주는 분명한 척도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