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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강 전국시대에 대한 비판과 진단

천자가 봉건 제후(公,侯,伯,子,男)를 세우고 통칭 공이라 하고 천자는 왕이라 했다. 공은 사방 최대 100리, 천자는 사방 1000리의 영토를 다스렸다. 천자와 제후가 두는 관리는 大夫, 士, 庶人이었다. 특히 천자의 대부는 제후급이었다. 왕이 중심이 되는 정치가 왕도정치이고, 제후가 좌지우지하는 정치가 패도정치였다. 춘추전국시대는 주왕조시대인데, 이전의 하왕조의 걸왕을 폐위하고 역성혁명으로 은왕조를 세운 탕왕은 天命미상을 내세워 천명은 떠날 수도 있다고 했다. 은왕조는 하늘에 대한 제사(禮)를 통해 자신이 천명을 받았음을 보여주고 싶어했다. 예에는 천명을 계속해서 받고 싶은 염원이 담겨있는 것이다. 은왕조의 주왕에게는 문왕과 무왕(부자관계)이라는 신하가 있었는데, 무왕이 주왕을 치고 주나라를 세웠다. 무왕도 천명미상을 내세워 역성혁명을 정당화했다. 하늘에 제사만 지낸다고 해서 천명을 붙들어 둘 수 없음을 알고 民心天心을 말했다. 민심을 얻기 위한 지배층의 규율로서의 예가 확대되어 정착되었다. 여기서 예절, 예법이 등장했다. 그리고 德이라는 개념이 처음으로 생겨나고 예치, 덕치라는 말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천자가 점차 천자답지 못하게 되자 제후들도 점차 존경심이 약해지고 춘추시대에는 오패가 등장하고 전국시대에는 천자가 아주 약해지고 대부들이 제후국을 찢어 갖게 된다.

춘추시대 수십개의 제후국이 전국시대 7개 제후국으로 통폐합되는 과정에서 숱한 전쟁을 치렀다. 그리고 제후들이 자신을 왕이라고 칭했다. 전국시대 왕들은 군사적, 문화적으로 우월성을 강조했다. 위나라 양혜왕(卑禮厚幣)이 현자들을 초빙해서 내 나라를 이롭게 할 방도를 질문했다. 맹자는 인의만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내 나라를 이롭게 한다는 생각을 왕들이 한다면 대립과 투쟁이 그칠 수 없다. 이로움의 속성은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이로움이란 끝이 없는 것이다. 이로움과 해로움을 초월하는 기준은 의로움이다. 이로움을 추구하면 빼앗지 않고는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제후들이 이로움을 추구하므로 천하가 어지러운데 이로움을 버릴 때 최고의 이로움을 얻을 것이라는 것이 맹자가 하고자 한 말이었다. 正名. 임금은 임금다워야 한다. 주왕조가 왕의 경계로 삼은 덕목은 保民 如保赤子이다. 백성의 부모가 되어야 할 왕이 오히려 백성을 착취하여 가축을 살찌움을 비판했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정벌, 의로운 전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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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제자인 자로가 공자에 대해 어떤 사람인지 대답을 못한 것을 공자가 추궁했다. 자로는 왜 공자에 대해 대답을 못했을까? 자로는 공자를 더 위대한 모습으로 설명하고자 했으나 공자가 생각하는 스승의 상은 잘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배움의 열정을 가진 사람이었다.

15세에 배움에 뜻을 두고 30세에 섰다는 것은 규모가 있게 되었다는 것이고, 40세에 불혹은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는 뜻이다. 50세 지천명은 변곡점이고 60세, 70세는 완숙되어 가는 경지였다. 지천명이란 인간의 삶이 생각대로 영위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는 뜻이다. 사람이 하는 영역이 있고 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 사람의 일을 다 해야만 실망하거나 미련이 남지 않게 된다. 천명을 알게 되면 여유있게 삶을 대하게 된다. 지천명에서부터 이순, 종심욕구불유구가 가능하게 된다. 15세에 배움에 뜻을 둔 이후로 경지에 이르게 된 것을 말하고 싶어한 것 같다. 공자는 잘 가르치는 모습이 아니라 열심히 배우는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어했다.

스승에게 보여주는 최소한의 예물이 속수다. 속수는 가르침을 받으려는 자가 스승의 가르침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으려는 마음의 징표다. 공자는 그것을 중시했던 것이다.

온고이지신은 어떤 사람이 스승이 될 만한가를 말하기 위해서이다. 동일한 것이 변하기 이전이 고이고 변한 이후가 신이다. 이 변화는 지적인 작용과 관계있다. 변화를 가능하게 했던 동력이 온이다. 온은 식지 않도록 계속해서 데운다는 뜻에 가깝다. 배움의 온도를 지속적으로 가해서 새로운 배움을 가능하게 하는 사람이 스승인 것이다.

공자는 배움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스승이 되었다. 스승이 없었던 공자가 스승이 된 것을 보고 제자들은 공자가 태어나면서부터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공자는 자신을 생이지지자가 아니라 옛을 좋아해서 누구보다 민첩하게 구한 사람이라고 했다. 공자는 일정한 스승을 두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서 배웠다. 스승이 없다는 악조건을 승화시킨 데에 공자의 뛰어남이 있다.

술이부작이란 말이 참 공자다운 말인데 작은 창작이다. 창작이란 없던 것을 처음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술이란 있던 것을 좀 더 보완해서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이다. 공자가 했던 모든 말은 옛 사람이 했던 말을 자기화해서 전해주었을 뿐이다.

조문도 석사가의, 그 정도로 도를 듣는다는 것이 가치있다는 뜻이다. 인간다운 삶의 길이 가치있으며 그런 길이 있다고 공자는 생각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그러지 않으려고 한다. 이기적인 마음을 버리지 않으면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고 공감하고 합의할 수 있는 방식이 아니라 각자 멋대로 가려고 한다.

군사부일체. 아버지는 나에게 생명을 주었고 임금은 나를 장성하게 해 주었다. 그런데 스승은 나를 가르쳐준 분이다. 스승은 나의 생물학적 생존이 아니라 인간다운 인간으로 살아가게 하는 존재인 것이다. 스승은 나에게 무엇을 가르쳐주는가? 스승은 도를 전수하고 학업을 제공하고 미혹을 풀어준다. 개인이 아니라 도를 스승으로 삼는다. 도가 있는 곳이 스승이 계신 곳이다. 전통사회의 위계질서는 나이와 지위가 결정한다. 그러나 도를 알고 사는 것은 나이와 지위도 중요하지 않다. 전통사회에서 스승을 임금과 아버지와 같은 지위로 본 것이 아니라 보다 더 본질적인 차원에서 규정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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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부모는 야합(예를 갖추지 않고 결혼)해서 공자가 태어났다. 공자의 이름은 名-丘, 字(관례이후)-仲尼(본댁에 형이 있었음)이다. 성장과정에서 본댁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 가난하게 성장한 공자가 어떻게 유학이란 사상을 펼치게 되었는가? 공자는 지도층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고 좋은 지도층이 될 인재를 양성하고자 한 것이지 지도층을 옹호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천자를 통해서 새로운 정치를 하고자 했다. 난세에 대처하여 고민하는 지식인은 은자적이거나 현실참여적인 두 유형이 있다. 지금까지 유가와 도가는 계속해서 영향을 끼치고 있는데 유가는 봄, 여름과 같아서 세상을 풍요롭게 하고자 하고, 도가는 가을, 겨울과 같아서 인간이 생산을 할수록 부정적인 면도 커지는 것을 비판하고 깨부수려고 한다. 유가가 서 있는 장은 인간이 인간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에 영합하지도, 그렇다고 은자적이지도 않은 중용의 지점을 찾아가려는 것이 유학이고 공자의 입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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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는 어떤 책인가. 처음부터 제자들이 공자의 가르침과 삶의 모습을 기억하기 위해 기록한 것으로 제3자에게 보여주기 위해 기록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제자들이 서로 공유하기 위해 편찬한 책이다. 무엇을 기록하는가? 자신이 감동받았고 잊고 싶지 않은 것을 기록했을 것이다. 그러나 2500년 전 종이가 발명되기 전의 기록은 제약을 받을 수 밖에 없었고 매우 압축된 표현으로 기록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을 풀어야 이해가 가능하다. 그런데 첫번째 글은 아마 상징적이고 대표성을 띤 글이었을 것이다.

 

배움(學)이란 본받음이다. 우리는 언제 배울까? 부족함과 결핍을 자각할 때 배운다. 그럴 때 변화와 성장을 하게 되고 새로운 것과의 만남을 통해 배운다.

 

익힘(習)이란 낯설던 것이 익숙해지는 것이다. 어린 새가 비행연습을 하는 것을 떠올리면 된다. 둥지 밖으로 떨어지는 어린 새는 죽을 고비를 넘기며 성장한다.

 

기쁨(悅)은 내면의 희열이다. 배움은 새롭고 낯선 것과의 만남을 통해 일어나고 익힘으로써 변화하고 성장한다. 그렇게 변화하고 성장하여 내가 보는 세상이 다르게 보일 때 기쁜 것이다.

 

벗(朋)은 누구인가? 같은 길을 가는 자, 즉 도반이다. 길을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은 가치를 부여하는 행이다. 도반은 가치관을 형성하는 과정을 같이하는 자이기도 하다.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도반은 스승이다.

 

온다(來)는 것은 방향성이 있음을 말한다.

 

즐거움(樂)은 여럿이 함께 느끼는 것이다. 각자의 희열이 모여서 가르치고 배움으로써 그 파장이 세상의 변화로 이어질 때 즐겁다.

 

남이 알아주지 않기(人不知而) 때문에 나의 배움이 의미가 없는가? 남들의 평가나 물질적 이익을 바라는 심리 때문에 곡학과 아세를 하게 된다. 배움이란 앎이고 앎이란 나의 관점과 사유가 성장하고 그 결과 인격이 성장하는 것이다. 남이 알아주기를 바란다면 나의 상품가치를 높이기 위해 앎을 활용하고 가공하게 된다. 결국 남을 위한 배움은 왜곡을 가져 온다. 배움은 남을 위한 것이지만 배움의 주체가 변해야 세상을 이롭게 할 수 있다.

 

好學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채워지지 않는 것들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일상의 삶의 태도가 드러나는 일과 말에 있어서 민첩하고 신중해야 한다. 또한 도가 있는 곳, 즉 스승과 책을 통해 수정해가야 한다. 배움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배움이 새로운 것을 만나는 것이라면 생각함(思)은 배운 것을 자기화시켜가는 과정이다. 이렇게 되새기고 검증하고 정리하고 성찰하지 않고 배운 것을 재생만 하는 것은 속이는 짓이다. 생각은 맷돌과 같아서 배움이 없으면 생각할 수도 없다. 알고 있는 것만 생각하는 것은 자기완결적인 것으로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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