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스트로프이론이란 플라톤의 형상철학이 형상의 속성으로 규정한 불연속성을 기술하는 것 같다. 급격한 변화를 일으키는 불연속의 점들을 카타스트로프의 점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하나의 형태가 다른 형태로 넘어가는 형태 발생을 일으킨다. 즉 형상에 대한 현대적인 규준으로서의 구조적 안정성과 형태 발생을 연구하는 것이 카타스트로프이론인 것이다. 플라톤이 질료와 형상이라는 이분법에 의해 형상의 불연속성을 분석했다면, 베르그송은 물질과 생명이라는 연속하는 두 실재가 타협한 결과물이 불연속적인 사물들(물체와 생명체)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카타스트로프이론은 연속성이 아니라 불연속성에 주목함으로써 변화의 양적 측면이 아니라 질적 변화를 기술하고자 한다. 즉 위상학의 연장선상에서 불연속의 존재론을 시도하는 것이다.
역자서문_위상학과 존재론
이어짐과 끊어짐, 연속과 불연속의 이러한 착종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개념들, 제도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등장한다....우리는 이를 존재론적 분절의 문제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연속/불연속의 문제이자, 하나/여럿의 문제이자, 같음/다름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존재론은 개별 과학들의 근본 원리들을 검토함으로써 그들의 가능성의 조건을 드러내는 선험적 작업을 수행하는 것이다. p.13~4
엘레아 학파는 운동을 환상적인 것으로 만들었고 자연철학을 좌절에 빠지게 만들었으나, 그것은 또한 앞으로의 자연철학이 나아갈 기본적인 방향을 정초해준 것이기도 했다. 이 기본적인 방향은 다음과 같이 정식화할 수 있다.
(1) 운동이 성립하려면 다와 불연속이 정립되어야 한다.
(2) 파르메니데스의 주장과는 달리, 실재는 불연속적인 어떤 존재들이며 오히려 우리 눈에 보이는 현상(운동)은 연속적이다.
(3) 현상의 연속성과 복잡성은 이러한 불연속적 존재들이 일정한 방식으로 조합되고 얽혀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자연철학의 작업은 두 가지로 압축된다.
(1) 실재, 즉 그 자체는 변하지 않는 궁극적인 요소들은 무엇인가.
(2) 이 요소들이 어떤 방식으로 관계 맺어 우리가 감각적으로 확인하는 현실(나타나 있는 실재), 즉 운동을 형성하는가. p.16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질료/형상의 이원적 구도를 그 근간으로 하고 있으며, 이들에게 있어 철학이란 이 질료와 섞여 있는 형상을 순수하게 정련해서 드러내는 것이 된다. 즉 질료는 아페이론의 성격을 지니며 이 아페이론적인 성격이 형상을 그 자체로서 존재하지 못하도록 만듦으로써 이 세계를 운동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질료적인 차원의 질서는 혼돈스럽고 유동적인 흐름(flux)의 세계이지만 이 질료의 질서가 형상의 질서에 의해 지배됨으로써 비로소 우주는 질서를 지니게 되는 것으로 파악되는 것이다. p.17~8
이러한 질료-형상설의 구도에 있어 질료는 연속성의 성질을, 형상은 불연속성의 성질을 부여받게 된다. 질료는 하나의 흐름이며 어떠한 극한도 지니지 않은 아페이론의 세계이다. 이러한 질료가 어떤 우주적 질서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형상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즉 질료에 어떤 극한이 부여됨으로써 시작과 끝이 있는 구체적 사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형상은 질료에 극한을 부여할 수 있어야 하며 무한을 테두리지을 수 있는 불연속성을 그 필수적인 속성으로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불연속을 찾아내는 것이 형상철학의 중요한 작업이며, 나아가 이러한 작업 즉 분석의 작업이야말로 서구 합리주의 사상의 근간을 형성하는 것이다. p.18~9
베르그송은 세계의 연속성을 실재로 본다. 그러나 그가 생각하는 연속성은 아페이론으로서의 연속성이 아니다. 베르그송이 생각하는 연속성은 운동하는 연속성, 질적 생기로 가득차 있는 연속성, 생명의 창조력으로 차 있는 연속성이다. 그래서 그의 철학에는 두 실재가 있게 된다. 하나의 실재는 아페이론으로 화하려는 경향을 그 근본적인 성격으로 가지고 있는 물질이며, 다른 하나는 끊임없이 질적인 차이를 생성시키고자 하는 약동하는 에너지로서의 생명이다. 이 두 실재는 모두 연속성을 그 기본 성질로 한다. 우리 눈에 보이는 사물들, 불연속성을 띠고 있는 개체들은 이 물질과 생명이라는 두 실재가 말하자면 타협한 결과들이다. 그래서 베르그송에 있어 기본적인 구분은 물체와 생명체가 아니라 물질과 생명이다. 물체도 생명체도 물질/생명 간의 투쟁의 결과인 것이다. 베르그송은 물질/생명의 운동을 우주의 ‘하강운동’과 ‘상승운동’으로 표현하며, 이 두 운동이 교차한 결과가 물체나 생명체 등의 사물들인 것이다. p.20
연속/불연속의 개념쌍은 서로 상관적인 것이며 서로 상대적으로 규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들간의 양자택일이란 무의미하다. 그러나 베르그송 이후 과학 및 철학의 흐름은 존재론의 맥락에서든 다른 맥락에서든 불연속에 무게중심을 두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것은 분명하다. 바슐라르의 불연속의 철학, 양자 비약의 개념에 근간하는 양자역학, 피아제의 발생적 인식론, 아날 학파의 역사학, 불연속적인 계열의 개념에 근간하는 구조주의적 인간과학들, 미셸 푸코의 새로운 역사철학, 토마스 쿤의 인식론 등이 모두 이러한 흐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다시 세계에 대한 포괄적인 불연속의 존재론에 도전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위상학은 불연속을 기술할 수 있는 새로운 수학적 기법을 제시했다. p.21~2
톰의 이론이 다루고자 하는 우선적인 대상은 구조적 안정성이다. 구조적 안정성이란 형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현대적인 규준을 의미한다....어떤 작은 범위 내에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면 이 공간은 불연속이 존재하는 공간이며 이 불연속의 점을 카타스트로프의 점이라고 부른다. 이 카타스트로프의 점은 하나의 형태가 다른 하나의 형태로 넘어가는 형태 발생을 구성한다. 카타스트로프이론이란 이 구조적 안정성과 형태발생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p.23
카타스트로프이론은 사물들의 양적인 측면들보다는 그 질적인 변화에 주목한다. 즉 중요한 것은 어떤 점에서 카타스트로프의 점이 발생하는가, 사물들의 질적인 변화에 있어 포착할 수 있는 특이성들은 어떤 것들인가에 주목하는 것이다. 카타스트로프이론은 변화 과정의 양적인 측면들은 문제시하지 않으며 그 변화의 불연속성들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일종의 질의 과학을 구성하는 것이다. p.24
근대 과학의 승리는 연속성과 시간의 정복에 의한 승리라고도 할 수 있으며 베르그송의 철학은 이러한 맥락에서 성립된 것이다. 그러나 위상학의 연장선상에서 카타스트로프이론은 다시금 불연속의 파악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바슐라르가 말한 ‘순간의 직관’에 대한 빼어난 과학적 예를 제공해주고 있는 것이다. p.25
과학과 철학이 하나로 뭉쳐 있을 때 진정한 의미의 과학/철학은 성립한다. 그러나 과학과 철학이 분리될 경우, 과학은 기술의 노예로 전락하게 되며 또 철학은 종교나 주관적 사변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철학은 그것이 객관적인 인식에 즉 과학에 토대를 두었을 때 철학이다. 과학의 근본 원리들을 검토, 비판하고 보다 깊은 사유와 실천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 철학의 역할인 것이다....무엇보다도 시급한 일은 19세기 이후 전개되어온 칸트, 헤겔로 대변되는 사변적·주관적 철학 전통이 아닌 오귀스트 콩트, 베르나르, 쿠르노 등에서 연원하는 실증적·객관적 철학 전통이 복구되는 일이다...이 프랑스 메타과학의 전통이 복구될 때 우리의 철학도 올바른 방향을 잡을 수 있는 것이다. p.27~8
들어가면서
모든 과학들은 무엇보다도 우선 어떤 현상에 대한 탐구입니다. 한 과학의 대상이 되는 현상들은 형태학에 의해 파악되는 공간, 즉 우리가 기저공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러한 공간 내에서 발생하는 일정한 형태를 갖춘 사물들로서 등장합니다. p.31
인식론적 관점에서 볼 때, 나는 실험과 단순한 관찰을 구분함으로써 과학들을 대략 두 개의 큰 덩어리로 나누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여기에서도 역시 어떤 이상화가 개입합니다...어쨌든 ‘연구하기’ 위해서는 즉 인식하고 개념화하기 위해서는, 형태학은 어떤 ‘안정성’을 이용해야 하는 것입니다....안정성의 개념은 하나의 직관에, 형태학적 유형에 관련된 모든 탐구들에 있어 요구되는 기본적인 조건에 관련되는 것입니다...중요한 것은 어떤 경우들에 있어서는 안정성이 일종의 보조적인 가설, 하나의 전제 나아가 하나의 도그마가 된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p.36~8
형태학은 모체(카타스트로프적인 점들의 집합 K)가 지니고 있는 고유한 성질들에 있어서의 불연속성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반면 통상적인 양적인 방법들은 이러한 불연속성들을 기술하기에 부적절한 해석학적인(즉 연속적인) 함수들을 사용합니다. 이 불연속적인 경우 환원주의는 난관에 부딪힙니다. P.41
가장 흥미로운 사실은 오늘날 과학이 과거에 종교가 했던 것과 유사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오늘날의 과학은 인류의 종말론적 희망을 담지하고 있는 것이죠. P.48
보다 거대한 이론적 노력을 그리고 과학이 정치적인 요구에 연루되지 않고서도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도록 해주는 학제성을 동반해야 할 것입니다.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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