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사유의 기원
장 피에르 베르낭 지음, 김재홍 옮김 / 길(도서출판)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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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흥미로운 책이지만, 읽어 나가기가 만만치 않은 책이기도 하다. 그리스 사유란 것이 마치 현대 과학적 이성의 시초이기나 한 듯이 생각하기 쉽지만, 저자가 밝히려고 하는 것은 사실상 그리스의 자연철학은 그리스의 정치 제도의 산물이라는 사실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간파했듯이 정치적 인간이란 정치적 이성을 가진 존재라는 뜻이고 이성이란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잘 알다시피 그리스는 폴리스들의 연합이었다. 전제 왕권에 의한 통일된 국가를 형성하지 못했던 그리스는 오리엔트의 영향을 받은 신화적 설화와 제의가 결합된 군주권 개념에서 일찌감치 벗어났다. 해상 무역에 의한 교역이 확대됨에 따라 빈부의 격차와 갈등이 생기자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절제의 덕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폴리스에서 요구된 것은 바로 부자와 빈자의 중간적 위치에 있는 계급이었고, 양자로부터 동일한 거리에 있는 그들의 중심적(중립적) 위치야말로 폴리스에 평형과 조화(코스모스)를 가져오는 진정한 힘이었다.

폴리스의 정치적 실험은 정말 놀라운 것이었다.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평등의 이상에 맞추어서 제도를 만들 정도였으니 참으로 정치적이지 않은가! 개인과 시민을 따로 생각하지 않는 그리스인들에게 공동체의 조화와 질서야말로 중요했고, 그런 정치적 개혁은 자연철학자 아낙시만드로스의 사유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물론 파르메니데스 이후의 그리스 철학은 전혀 다른 길을 갔지만.

그리스 사유의 기원은 폴리스의 정치적 공간이었고, 그 공간은 기하학적 공간이기도 했다. 기하학과 정치학, 교육과 수사학의 그리스였던 셈이다. 그러나 정치적 실험과 함께 사유의 실험도 멈추었을 때 그리스는 몰락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인간과 사회의 상호작용을 인상적으로 보여주는 명저라고 생각한다.

헬라스적 이성은 자연을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신중하게 그리고 체계적으로 인간에 대해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하는 바로 그 이성이었던 것이다. 그 사유의 혁신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그 한계에 있어서도 이성은 도시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 P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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