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실력이 밥 먹여준다: 낱말편 1 국어실력이 밥 먹여준다
김경원.김철호 지음, 최진혁 그림 / 유토피아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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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을 수록 손해?

 책을 많이 읽는 것이 언어 능력 향상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책을 많이 읽음으로써 어휘력과 문장력, 구성력 등이 두루 향상될 것이라는 믿음은 세대를 불문하고 광범위하게 합의된 진실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지금은 그 믿음이 결코 진실인 것만은 아니란 생각 또한 널리 퍼지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생각은 주로 번역서에 대한 비평 혹은 불만들을 통해 유포된 것으로 보인다. “이해가 안되는 건 어려워서가 아니라 번역이 엉터리라서 그런다”라는 우스갯소리를 대학에 들어와 처음 들은 후 그 농담이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었다. 이런 우스갯소리는 종종 (흔히 일본과 비교되는)우리나라의 후진적인 번역 시스템에 대한 비판과 맞물려서 번역서에 대한 폭넓은 불신을 조장하기도 했다. 이런 불신이 더 구체성을 띈 것은 번역에 대한 논쟁이 학술적인 공간으로 확대되고, 또한 최근 일부 ‘지식인’들의 번역비평 등을 통해 체계적으로, 그리고 대중적으로 확산되면서이다. 

 나 같은 경우도 주로 인문, 사회과학 분야의 번역서나, 번역서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이 해외 유명대학의 석, 박사 출신인 학자들의 연구서를 읽게 되는데, 외국어가 약하다보니 정확한 번역이나 올바른 해석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지만, 비문이나 어색하기 짝이 없는 문장들을 자주 보게 된다. 원문이 무엇인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나라면 이런 식으로 문장을 쓰지 않았을까라는 식으로 자주 생각을 해보게 되는데, 그러다보면 번역이나 내용의 정확성에 대한 의심보다는 한국어 실력(마저..)에 대한 걱정이 앞서곤 한다. 우리말의 다양한 표현력을 배우지 못하거나 잃는 것은 물론이고, 나도 모르는 새에 번역 투의 문장에 감염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어 사용자를 위한 한국어 교재

 번역이라는 장르, 혹은 분과학문으로서의 번역이란 영역 자체가 더 발전하고, 거기에 투자해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만, 한국어를 사용하는 독자들의 입장에서도 의식적으로 한국어 실력을 더욱 계발하고, 한국어에 대한 감수성을 좀 더 다듬는 자체적인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한국어 독자를 위한 우리말 관련 서적이 다양하게 나오고 있는 상황은 반가운 현상이다. 

 그 중에서도 꽤 오래된 편에 속하는 <<국어 실력이 밥먹여준다 - 낱말편 1>>을 최근 읽게 되었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깔끔한 편집과 다양한 예시문, 실무 경험에서 우러나는 저자의 조언들, 한국어의 미묘한 뉘앙스를 잡아내기 위한 노력들이 돋보였다. 특히 “조상언어가 없는(혹은 아직 조상언어를 찾아내지 못한) 한국어의 특수성 탓에” 정확한 어원이나 낱말들 사이의 관계가 학술적으로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상황 아래에서 “직관에 기댄 추측”까지 동원해가며 유사한 낱말들 사이의 관계와 차이들을 밝혀내고자 한 저자들의 노력은 정당히 평가받아야 할 부분이다. 

 

최고의 '덤' : 한국어는 번역된 영어가 아니다 

 이 책에서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본문보다는 오히려 ‘덤(일종의 부록, 쉬어가는 페이지)’에서 영어 번역 투의 표현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한국어 본연의 자연스러움을 되돌리려고 한 시도들이다. 대표적으로 영어 문장의 'in', 'into'를 굳이 번역하다보니 ‘과일을 내장고 안에 넣다’, ‘수건을 서랍 안에 보관하다’, ‘책을 가방 안에 넣다’와 같이 어색한 표현이 오히려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과일을 냉장고에 넣다’, ‘수건을 서랍에 보관하다’, ‘책을 가방에 넣다’와 같이 원래 보관이 목적인 장소에는 굳이 ‘안에’를 덧붙이지 않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영어의 ‘have'를 ’가지다‘가 아니라 ’있다‘로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부분에서는 무릎을 칠 뻔했다. 한국어에서는 소유의 의미로 ’~을 가지다‘보다는 ’~이 있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일반적이고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난 지금 돈을 가지고 있어‘보다는 ’난 지금 돈이 있어‘ 같은 것이다. ’나는 집이 있다‘, ’나는 차가 있다‘, ’우리 집에는 정원이 있다‘ 같은 경우이다. ’~이 있다‘가 어색할 경우 ’가지다‘, ’소유하다‘라는 식으로 번역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을 읽으면서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한국어 표현의 자연스러움과 다양함이, 영어 단어장이나 번역문을 통해 의식적으로 얼마나 왜곡되었는지 선명히 볼 수 있었다. 

 

한국어에 상상력의 날개를 달아주다 

 책에는 이런 절묘한 자극이 곳곳에 함정처럼 놓여져 있어서 약간 지루한 듯, 거슬리는 듯 책을 읽고 있다가 우연치 않게 기분좋은 발견을 하게 되곤 한다. 가령 ‘가족’과 ‘식구’의 차이를 밝히는 부분도 그랬다. ‘가족’이 집단으로서의 공동체를 지시한다면, ‘식구’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개인으로서의 구성원을 지시한다. 또 ‘새’와 ‘새로운’의 차이 역시 생각보다 크다. ‘새’가 시작, 또는 최초의 의미를 갖는다면 ‘새로운’은 갱신, 변화의 의미가 강하다. ‘또’와 ‘다시’의 경우도 비슷한 말 같지만 ‘또’가 단순 반복의 의미가 강하다면, ‘다시’는 ‘달리’, ‘다르게’와 비슷한 어원을 같는 다는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변화와 차이의 의미가 강하다. 그리고 이런 낱말들의 미묘한 차이들을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의식하지 못한 채 그런 식으로 사용해왔던 것이다.(하지만 말이 아니라 글을 쓰려고 할 때는 이런 무의식적인 언어 기계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래서 의식적인 수준에서의 언어 능력이 글쓰기에서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아주 소소한 수준으로 보여주고 있긴 하지만 낱말의 어원이나, 역사, 낱말 사이의 파생적 관계를 보여주려고 한 시도는 새로운 자극이 될 수 있었다. ‘껍질’에서 ‘질’을 ‘질기다’와, ‘껍데기’에서 ‘데기’를 ‘단단’, ‘딱딱’과 연결짓고, ‘껍데기’의 이형태(異形態)는 많으나 ‘껍질’의 이형태는 거의 없다는 점에서 ‘껍데기’와 ‘껍질’의 역사를 추측해보는 내용은 한국어 사용자에게 많은 상상력을 불어넣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영어나 독일어, 프랑스어권 작가들이 한 개념의 어원을 라틴어, 그리스어까지 추적해 그 본원적 형태나 사용을 되돌이켜 봄으로써 많은 지적 상상력을 공급받고 있었던 것과 비교해보면 한국어를 통해 이런 종류의 상상력을 공급받으려는 시도는 매우 부족하기만 했다. 물론 이는 앞서 언급했던 한국어의 특수성 탓이기도 하지만 그러기에 이런 시도가 더욱 반가울 수 있는 것이다. 

 

단점 1: 무리한 정식화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국어의 특수성 탓이라고만 하기에는, 사소하지만 거슬리는 부분들 역시 존재했다. 일단은 곳곳에서 법칙화에 대한 욕심이 엿보인다는 것이다.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 그리고 실제적이 사용에서의 쓰임의 차이를 밝히는 것에서 더 나아가, 이런 경우에는 이 말, 저런 경우에는 저 말을 사용해야 한다는 식으로, 그러니까 문법적으로 정식화되기에는 아직 우리말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것 같다는 생각이다. 그러다보니 독자들이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생기고 전체적으로 지루함이 발생한다. ‘안’과 ‘속’의 경우 1, 2차원 vs 3차원, 추상명사 vs 보통명사, 빈 공간으로서의 정상 vs 비정상 등, 꽤 정연한 도식을 보여주었지만, 다른 리뷰들을 보건데도 독자들은 그다지 납득하지 못한 것 같다. 이 경우는 오히려 ‘안’과 ‘속’은 한자어 內(내)와 裏(리)의 대응으로서 발달해온 것 같다는 것이 나의 느낌이다.  

 ‘껍질’과 ‘껍데기’의 경우에도 둘을 구분할 수 있는 도식화된 기준을 많이 제시했지만 사실 일상적으로 그에 반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 특히 생물과 무생물이라는 구분 기준은 큰 효용이 없을 듯하다. 특히 식품의 경우에는 일상적인 용법상 별 의미가 없어져 버리는 것 같다. ‘고개’와 ‘머리’의 구분도 비슷한 문제를 갖고 있다. 사람과 동물이라는 구분법을 제시했지만, 동물은 어차피 ‘머리’가 아니라 ‘대가리’를 사용하는 것이고, ‘머리’란 말을 쓸 때는 비유적이거나 의인화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사람과 동물이라는 구분법은 의미가 없어진다. 의도나 목적이라는 기준 역시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납득할 수 있는 부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저자가 제시한 예문 중 몇몇은 ‘머리’와 ‘고개’가 둘 다 사용한 경우로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고개’와 ‘머리’가 서로 다른 신체 부위를 지시한다는 것을 지적함으로써 뉘앙스의 차이를 보려한 것으로 충분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이런 어색함은 이글이 신문 연재기사여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각 챕터마다의 분량 상의 균형을 무리하게 유지하려다보니 발생했다는 인상도 든다. 어떤 낱말들은 좀 더 긴 설명과 다양한 예문들이 필요하고, 입는 입장에서도 재밌는 것이 있을 수 있지만, 어떤 낱말들은 분명한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너무 길게 설명하다보면 오히려 납득하지 못하는 점들이 드러나 의심이 생기게 마련이다. 

 

단점 2: 적절한 쓰임에 대한 자의적인 판단 기준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낱말이 제대로 사용되었는지, 부적절하게 사용되었는지를 판가름하는 데에 있어서 저자들이 취하는 방법이 과학적이라기보다는 지극히 주관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것 역시 한국어의 특수성에서 기인한 것이긴 하지만, 독자들에게 이런 의심을 최대한 줄여줄 수 있는 좀 더 세심한 접근이 필요했던 것 같다. 이런 식으로 표현해보니 ‘어색하다’, ‘자연스럽지 못하다’, ‘부자연스럽다’라는 식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판단을 통해 적절한 쓰임이 아니라고 판결내려진 것중 몇몇은 단지 그 특정한 관용적인 쓰임이 워낙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그런 용법이 굳어져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예를 들어 저자가 ‘기쁘다, 구주 오셨네’는 자연스럽지만, ‘즐겁다, 구주 오셨네’는 어색하다고 했을 때 이것은 캐롤 가사로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과정에서 익숙해진 원인으로 보인다. 경우에 따라서는 ‘즐겁다, 구주 오셨네’도 충분히 가능한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기쁘다’와 ‘즐겁다’의 의미상 차이에 대한 저자의 주장을 충분히 받아들인다고 해도 말이다. 

 

총평 

 상당히 길게 이 책을 독서하면서 느낀 거슬림이나, 어색함을 나열했지만, 최종적으로 말하자면 분명 단점보다는 장점이 훨씬 많은 책이다. 무엇보다도 한국어 사용자들에게 한국어의 가능성과 한국어 사용자로서 가질 수 있는 언어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가장 대중적인 책이라는 점에서, 이 책의 독서는 누구라도 후회하지 않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기회가 되면 그 후속편들도 읽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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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 - 이론의 쓸모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이택광 지음 / 글항아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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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론의 쓸모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뭘 해주겠다는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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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을 생각한다
김용철 지음 / 사회평론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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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살고 있다면, 일단 읽어야 한다. 이 현실을 외면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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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 철학에의 초대
한자경 지음 / 서광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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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가 어렵다면 이 책부터 읽을 것. 이 책보다 친절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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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방법 - 히라노 게이치로의 슬로 리딩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김효순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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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내 독서 능력이 형편 없음을 깨닫고 도서관에서 도움이 될만한 책을 찾아보다 나루케 마코토의 <책, 열권을 동시에 읽어라>를 발견하게 되었다. 진지하게 읽어볼만한 책인지 훑어보다가 약간의 실망감을 느끼고 다시 제 자리에 꽂고 있는데 그 근처에서 히라노 게이치로의 <책을 읽는 방법>이란 책을 발견했다. 몇년 전 어느 일간지 서평란에서 본 적도 있었고, 일전에 한 친구가 소개해준 적도 있어서 제목은 익숙했다. 당시 친구가 소개해줬을 때에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느리게 읽는 독서를 정당화하고 지금의 속도에 만족해버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었다. 

하여간 꺼내서 서문 정도를 읽어봤는데 읽어볼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앞서 언급한 나루케 마코토의 책과는 다른 느낌을 받았다. 전자의 책은 책을 읽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에 큰 분량을 할애하고 있는데 반해, 이 책은 책을 제대로 읽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나루케 마코토의 글에서는 독서를 하지 않는 사람들, 자기계발서 따위나 읽는 사람들에 대한 혐오감과 자신의 지적 우월감이 느껴졌다면, 히라노 게이치로의 글에서는 양서를 조금 더 즐겁게 깊이 있게 읽고자 하는 선배 독서가의 느낌을 읽을 수 있었다. 

 

제대로 독서하지 못하는 실질문맹

사실 책을 제대로 읽는 방법에 대해서는 조금이라도 지적 욕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해봤을 법한 고민이다. 필독서라고, 좋은 책이라고 하는데 내가 읽자니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필독서랍시고 읽을 책들은 이렇게 많은데 이 책들을 어느 세월에 다 읽나. 이런 것들이다. 이럴 때는 내가 한글만 알지 실질적으로는 문맹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실질문맹이란 개념이 있다. OECD에서는 단순히 글자를 아는지 모르는지를 판가름하는 문맹률이 아니라 4단계로 세분화된 문서독해능력을 실질문맹의 기준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 중 우리나라는 글자를 알고도 일상생활에 필요한 문장들을 독해하지 못하는 1단계에 해당하는, 즉 실질문맹에 해당하는 사람이 40% 가까이 된다고 한다. 이러한 실질문맹률도 놀랍지만, 고급 독해 능력을 지닌 4단계에 해당하는 사람도 전체 성인의 2.4%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니 참으로 놀랍다. 스웨덴의 경우 35.5%이며, 미국의 19%와 비교해도 한참 뒤떨어진다. 이들 나라의 대학진학률과 우리나라의 대학진학률을 비교하면 더욱 한심한 상황이다.

현실이 이러할지니 필독서를 뽑아놓고 읽으라거나, 일주일에 몇 권 씩 책을 꾸준히 읽으라거나 하는 식의 독서권장은 사실 아무 것도 권장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초등, 중등, 고등교육을 거치면서 기본적인 독해력도 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기계적으로 하는 독서 행위가 큰 도움이 될 리 없다. 

 

슬로 리딩: 반(反)속독

이런 맥락에서 히라노 게이치로가 강조하는 '슬로 리딩'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것은 양의 독서에서 질의 독서로의 전환이다. '슬로 리딩'이란 말 그대로 책을 천천히 읽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현실에서는 책을 천천히 읽는다는 시도가 단순히 천천히 읽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여기서 '슬로 리딩'은 대안적인 독서를 의미하게 된다.

일단 여기서 저자 히라노 게이치로가 대척점으로 삼고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는 것은 '속독법'이다. 그리고 '슬로 리딩'은 단지 '천천히 읽는다'는 정립적 형태가 아니라, '반(反)속독'으로서의 슬로 리딩이라는 반정립적 형태를 갖는다. 히라노 게이치로는 책 곳곳에서 속독을 가혹하게 비난한다. 

"속독가의 지식은 단순한 기름기에 불과하다. 그것은 아무 도움도 되지 않으며, 쓸데없이 머리 회전만 둔하게 하는 군살이다"  - p.32

과하다 싶을 정도로 가혹한 비판이다싶기도 하지만, 모든 속독가를 가리킨다기보다는 현재 속독을 강요하는 지식문화의 구조와 그것이 만들어내는 효과들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더 가혹한 비판도 가능할 듯 싶다. 사실 속독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저자도 알고 독자도 안다. 특히 한국의 현실에 비추어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이제 갓 열살이 넘은 청소년들이 매달 수십만원씩 하는 논리속독학원을 다니는 이유는 무엇이며 얻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냉엄한 경쟁과 상호적대의 시대에 생존의 원칙으로 지식이 강요되고, 그 강요된 원칙으로서의 지식이 사람들 사이에 수용되는 속에서 지식은 철저히 파괴되고 왜곡되어 왔다. 그럴수록 지식은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된다. 논술학원에서, 학교에서, 대학에서 혹은 어디에서라도.. 장자를 읽으면서도 조화보다는 적대를 선택하고, 맑스를 읽으면서도 연대보다는 경쟁을 선택하는, 선택하도록 강요받는 사회에서 지식 그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음이 선언되고 만다. 지식이 지배의 도구화가 되는 현실에서 그 상징물이 바로 속독법이다. 상징적으로 속독법은 개인에게 지식을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저자는 속독을 가혹하게 비판하고 그 대척점에 서서 슬로 리딩의 의미를 규정해 나간다. 물론 저자는 독서법을 무리하게 사회적인 문제와 관계 맺기를 피하면서 철저하게 독서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한다. 속독이 양의 독서라면, 슬로 리딩은 질의 독서이며, 속독이 단지 내일을 위한 독서라면, 슬로 리딩은 5년 후, 십년 후를 내다보는 독서이다. 또한 속독이 읽는 순간 끝나버리고 읽었다는 사실만 남는 독서라면, 슬로 리딩은 읽고 나서 비로소 시작하는 독서이다. 속독이 자신의 껍질 안에 갇힌 편협한 독서라면, 슬로 리딩은 타자와의 마주침을 실천하는 독서라는 것이다. 이런 대립 관계 속에서 히라노 게이치로는 슬로 리딩의 의미를 규정해나간다.

 

유기농과 슬로 리딩 - 독서가 사회적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이 책에서 말하는 독서란, 단순히 피상적인 지식으로 인간을 꾸며주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부터 그 사람을 바꾸어 사려 깊고 현명하게 만들며 인간성에 깊이를 더해주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천천히 시간을 들이면 독서는 즐거워진다."  - p.10

여기서 독서란 철저하게 슬로 리딩을 뜻한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이러한 말은 일견 과장되어 보이기도 한다. 사실 독서의 효용에 대해서는 이보다 더 과장된 찬사들이 있었지만, 다른 독서가 아니라 바로 내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슬로 리딩만이 이와 같은 엄청난 효과들이 있다는 듯이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간 책임감 없는 과대광고에 시달린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와 같은 문장들에서 마치 만병통치약을 파는 약장수의 냄새가 느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유기농이나 슬로 푸드 운동, 생태도시 건설과 같은 것들이 모두, 먹거리 이상의 먹거리, 도시 이상의 도시에 대한 실험이었음을 상기해본다면, 슬로 리딩도 단순한 책 읽기가 아니라 독서 이상의 독서를 도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순히 책을 천천히 읽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사회 질서가 강요하는 지식과의 관계가 아니라 새롭게 정립되는 지식과의 관계 맺음을 통해서 사회와의 관계, 타인과의 관계, 더 나아가 바로 자신의 내면에까지 변화를 이끌 수 있다는 주장은 유기농이나 생태주의와 논리적인 동형성을 보인다. 기존의 자본주의 질서가 강요한 식품생산과 먹거리 문화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유기농이나 슬로 푸드/로컬 푸드가 단순히 내 식탁 위에 올라온 음식에서 끝아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질서가 만들어내는 건강 문제, 환경 문제, 노동 문제, 더 나아가 지구적인 불평등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있듯이, 슬로 리딩 역시 단순히 내 눈 앞의 책을 읽는 것을 넘어서서 하나의 대안이 될 수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히라노 게이치로도 전면적인 대안으로서는 아니지만 하나의 보충물로서 슬로 리딩의 의미를 언급하고 있기도 하다. 그는 "슬로 리딩의 출현은 정보화 사회에서 맹스피드로 전달되고 있는 피상적인 지식을 보충한다는 의미에서, 반동이기는커녕 오히려 현대의 필연"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슬로 리딩이 나날이 발전하는 현대 사회에 대한 거부나 과거 회귀적인 퇴행이 아니라 현대사회가 만들어낸 필연적인 귀결로서 적극적으로 요청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발달된 IT 산업을 기반으로 형성된 정보화 사회에서 지식과 정보의 폭발적인 흐름이 갖는 이로움을 전면적으로 부정할 수는 없다. 수많은 대안 언론이나 해외에서 SNS가 보여준 정치적인 가능성들은 결코 부정될 수 없으며, 이 역시 기존의 질서에서 지식이 지배 원리로 기능했던 구조에 대한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슬로 리딩이 대중들의 지식에 대한 대안적 관계 구성의 원리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SNS 등 첨단 IT 시스템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고민해보아야 할 듯 하다.  

 

이것은 독서법이다1 :  독서의 기쁨은 타자와의 만남

애초의 생각보다 벗어난 이야기들이 많았지만, 어쨌든 이 책은 <책을 읽는 방법>이란 제목대로 철저하게 독서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다. 유기농이나 로컬 푸드와 같은 대안적 사회운동들과 논리적인 동형성이 있으며 대안적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지, 슬로 리딩 자체가 하나의 사회운동이 되는 것은 아니다. 누가 뭐래도 이 책은 독서법에 관한 책일 뿐이다. 

저자는 작가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독자로서 다른 독자들과 책 읽는 방법을 공유하고자 한다. 따라서 여기에는 독서에 대한 저자 자신의 철학과 기술이 들어있다. 사전 찾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던가, '왜'라는 의문을 자겨야 한다는 것, 남에게 설명할 것을 전제로 읽는다던지 하는 것들은 기본적인 것이지만 다시 한번 주목해볼 만하다. 이런 다양한 방법들을 관통하는 저자의 주된 믿음은 독서는 '타자와의 만남'이라는 것이다. 거기에 슬로 리딩의 근본적인 문제 의식이 있다. 필독서들을 하나 하나 헤치우듯 읽는 것은 자기 만족만을 위한 편협한 독서가 되기 십상이다. 무엇보다도 자신과는 다른 이, 가장 직접적으로는 타자로서의 작가와의 마주침이 독서의 큰 기쁨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작가의 말을 가장 잘 이해하는 것이 기본이 된다. 하지만 히라노 게이치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창조적인 오독'이란 개념을 제안한다. 모든 텍스트들이 확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만의 창조적인 독해, 어떤 의미에서는 오독일 수 있는 그러한 독해가 독서의 깊이를 풍부하게 해준다. 

이러한 창조적인 오독은 어디까지나 타자와의 만남이란 전제 하에 이루어져야 한다. 여기서 히라노 게이치로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이러한 풍요로움은 어디까지나 책의 입장에서 풍부하다는 것이다." 다양한 독자가 다양한 방식으로 이해하고 해설한다면 하나의 책은 작가가 원래 의도한 것보다 더 풍부하고 다양한 의미를 지닐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오독의 허용을 자신의 독서에 안이하게 적용한다면, 어떤 책을 만나도, 어떤 작가를 만나도, 어떤 주제와 어떤 사실을 만나도, 어떤 인물을 만나도, 곧 자기 방식대로만 해석하고 이해하려는 경향을 띌 수 있다. "그것은 독자로서의 가능성을 편협하게 하는 독서법이다." 저자가 강조하는 '작자의 의도'란 한 텍스트의 의미를 확정시켜주는 절대적 존재로서가 아니라 독자에게 독자로서의 가능성을 풍부하게 열어주는 '타자'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히라노 게이치로는 또한 "독서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감상을 과신하지 않는 태도"라고 말하고 있다. 자신이 과거 읽었던 책에 대한 감상 역시 확정적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다시 읽었을 때에는 전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기도 하며, 안 보였던 부분이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그는 롤랑 바르트의 말을 빌려 진정한 독서는 재독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는 독서를 통해 독자가 만나게 되는 타자가 비단 작가만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이미 만들어졌던 나, 이미 경험했던 나, 이미 느꼈던 나, 그리고 내가 기억하고 있는 나, 무수한 '나' 역시 책을 읽고 있는 그 순간의 독자에게는 타자로서 다가온다. 이러한 재독을 통해 발견하게 되는 타자로서의 나는 결코 보여주기식 독서를 통해서는 경험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독서법이다2 : 무엇보다도 독서의 가장 큰 의미는 즐거움

일견 추상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독서법이 과연 독서법일 수 있을까? 그건 순전히 나의 주관적인 리뷰 탓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이것은 철저한 독서법 책이다. 책장을 앞으로 넘겨서 뒤적거리는 걸 귀찮아 하지 말라던가, 접속사에 주의하며 읽으라던가 하는 구체적이고 세세한 충고들이야 말로 이 책의 큰 줄기가 되어 흐르고 있다. 그런 구체적이고 세세한 방법들 속에 이러한 철학들이 실천될 수 있을 따름이다.

이 책의 3부 슬로 리딩의 실천편 같은 경우는 마치 강독 수업을 듣듯이 독자들을 데리고 천천히 다양한 텍스트들의 의미를 분석해 나간다. 저자의 안내에 따라 슬로 리딩을 직접 실습해보는 것이다. 마지막 예제로 나온 푸코의 <성의 역사 1> 같은 경우는 아예 밑줄을 치고 동그라미와 네모 표시를 하는 방법까지 알려준다. 이대로 따라할 필요는 없겠지만, 나처럼 메모하고 표시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독자라면 기꺼이 연습삼아 따라해볼 만하다. 

책의 중간 중간 저자가 강조하듯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즐거움이다. 슬로 리딩의 가장 큰 의미는 독서를 즐겁게 하는 것이다. 그동안의 기계적이고 양에 치우친 독서의 가장 큰 문제점은 독자의 즐거움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단순한 오락 소설이 아니라 양서를 읽으면서 즐거움을 갖는다는 것, 그것은 앞서 말한, 깊은 이해, 타자와의 만남, 창조적인 오독, 독자 자신의 가능성을 풍부하게 하는 것, 이런 것들과 분리된 것이 아니다.

나도 그동안 속도에 매몰되어 대략적으로 이해될 수만 있다면 굳이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 했었는데(특히 소설 같은 경우), 저자의 안내에 따라 천천히 글의 다양한 주름들을 훑어가보니 하나의 책 속에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놓치고 지나쳤는지 알 것 같다. 책은 정복하는 것이 아니다. 텍스트 속에서 유희하는 것이다. 그 안에는 수많은 장치와 고안, 놀이가 숨겨져 있다. 저자 히라노 게이치로의 말대로 작가는 누구든지 독자들이 자신의 책을 천천히 진지하게 깊이 있게 읽을 것을 기대하고 글을 쓴다. 자신의 작품이 대충 훑어볼 글로 여겨지길 원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게 당연한 것이다.

 

원래 그런 것

이 책을 읽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건 당연한 거잖아. 원래 책은 이렇게 읽는 거 아니야? 이런 것에 굳이 슬로 리딩이네 뭐네 이름까지 붙일 필요가 있나?' 그런데 원래 그런 것이다. 문득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 원래 당연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중요하고 당연한 것들이 점점 밀려나고 사라져 가고 있다. 원래 우리는 항생제와 성장촉진제를 먹인 닭들을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해서 먹지 않았다. 원래 우리는 자동화된 공장에서 돼지고기나 소고기를 생산하지 않았다. 원래 우리는 유전자를 조작한 인공적인 작물들을 생산하지도 먹지도 않았고, 원래 우리는 못생겨서 상품성이 없다고 과일이나 작물을 버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자본의 논리, 경쟁의 논리, 권력의 논리들에 밀려 당연하고 건강하고 조화로운 것들이 밀려나고 어느새 비정상적인 삶의 양식들이 강제되고 있었다. 독서 역시 비슷하지 않았을까?

그런 의미에서 너무 당연한 것들에 다시 이름을 붙이고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슬로 리딩'도 마찬가지다. 전혀 획기적이지도 기발하지도 않지만, 이 책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새롭고 풍요로운 독서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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