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실력이 밥 먹여준다: 낱말편 1 국어실력이 밥 먹여준다
김경원.김철호 지음, 최진혁 그림 / 유토피아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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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을 수록 손해?

 책을 많이 읽는 것이 언어 능력 향상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책을 많이 읽음으로써 어휘력과 문장력, 구성력 등이 두루 향상될 것이라는 믿음은 세대를 불문하고 광범위하게 합의된 진실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지금은 그 믿음이 결코 진실인 것만은 아니란 생각 또한 널리 퍼지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생각은 주로 번역서에 대한 비평 혹은 불만들을 통해 유포된 것으로 보인다. “이해가 안되는 건 어려워서가 아니라 번역이 엉터리라서 그런다”라는 우스갯소리를 대학에 들어와 처음 들은 후 그 농담이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었다. 이런 우스갯소리는 종종 (흔히 일본과 비교되는)우리나라의 후진적인 번역 시스템에 대한 비판과 맞물려서 번역서에 대한 폭넓은 불신을 조장하기도 했다. 이런 불신이 더 구체성을 띈 것은 번역에 대한 논쟁이 학술적인 공간으로 확대되고, 또한 최근 일부 ‘지식인’들의 번역비평 등을 통해 체계적으로, 그리고 대중적으로 확산되면서이다. 

 나 같은 경우도 주로 인문, 사회과학 분야의 번역서나, 번역서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이 해외 유명대학의 석, 박사 출신인 학자들의 연구서를 읽게 되는데, 외국어가 약하다보니 정확한 번역이나 올바른 해석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지만, 비문이나 어색하기 짝이 없는 문장들을 자주 보게 된다. 원문이 무엇인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나라면 이런 식으로 문장을 쓰지 않았을까라는 식으로 자주 생각을 해보게 되는데, 그러다보면 번역이나 내용의 정확성에 대한 의심보다는 한국어 실력(마저..)에 대한 걱정이 앞서곤 한다. 우리말의 다양한 표현력을 배우지 못하거나 잃는 것은 물론이고, 나도 모르는 새에 번역 투의 문장에 감염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어 사용자를 위한 한국어 교재

 번역이라는 장르, 혹은 분과학문으로서의 번역이란 영역 자체가 더 발전하고, 거기에 투자해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만, 한국어를 사용하는 독자들의 입장에서도 의식적으로 한국어 실력을 더욱 계발하고, 한국어에 대한 감수성을 좀 더 다듬는 자체적인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한국어 독자를 위한 우리말 관련 서적이 다양하게 나오고 있는 상황은 반가운 현상이다. 

 그 중에서도 꽤 오래된 편에 속하는 <<국어 실력이 밥먹여준다 - 낱말편 1>>을 최근 읽게 되었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깔끔한 편집과 다양한 예시문, 실무 경험에서 우러나는 저자의 조언들, 한국어의 미묘한 뉘앙스를 잡아내기 위한 노력들이 돋보였다. 특히 “조상언어가 없는(혹은 아직 조상언어를 찾아내지 못한) 한국어의 특수성 탓에” 정확한 어원이나 낱말들 사이의 관계가 학술적으로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상황 아래에서 “직관에 기댄 추측”까지 동원해가며 유사한 낱말들 사이의 관계와 차이들을 밝혀내고자 한 저자들의 노력은 정당히 평가받아야 할 부분이다. 

 

최고의 '덤' : 한국어는 번역된 영어가 아니다 

 이 책에서 가장 돋보이는 부분은 본문보다는 오히려 ‘덤(일종의 부록, 쉬어가는 페이지)’에서 영어 번역 투의 표현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한국어 본연의 자연스러움을 되돌리려고 한 시도들이다. 대표적으로 영어 문장의 'in', 'into'를 굳이 번역하다보니 ‘과일을 내장고 안에 넣다’, ‘수건을 서랍 안에 보관하다’, ‘책을 가방 안에 넣다’와 같이 어색한 표현이 오히려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과일을 냉장고에 넣다’, ‘수건을 서랍에 보관하다’, ‘책을 가방에 넣다’와 같이 원래 보관이 목적인 장소에는 굳이 ‘안에’를 덧붙이지 않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영어의 ‘have'를 ’가지다‘가 아니라 ’있다‘로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부분에서는 무릎을 칠 뻔했다. 한국어에서는 소유의 의미로 ’~을 가지다‘보다는 ’~이 있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일반적이고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난 지금 돈을 가지고 있어‘보다는 ’난 지금 돈이 있어‘ 같은 것이다. ’나는 집이 있다‘, ’나는 차가 있다‘, ’우리 집에는 정원이 있다‘ 같은 경우이다. ’~이 있다‘가 어색할 경우 ’가지다‘, ’소유하다‘라는 식으로 번역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을 읽으면서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한국어 표현의 자연스러움과 다양함이, 영어 단어장이나 번역문을 통해 의식적으로 얼마나 왜곡되었는지 선명히 볼 수 있었다. 

 

한국어에 상상력의 날개를 달아주다 

 책에는 이런 절묘한 자극이 곳곳에 함정처럼 놓여져 있어서 약간 지루한 듯, 거슬리는 듯 책을 읽고 있다가 우연치 않게 기분좋은 발견을 하게 되곤 한다. 가령 ‘가족’과 ‘식구’의 차이를 밝히는 부분도 그랬다. ‘가족’이 집단으로서의 공동체를 지시한다면, ‘식구’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개인으로서의 구성원을 지시한다. 또 ‘새’와 ‘새로운’의 차이 역시 생각보다 크다. ‘새’가 시작, 또는 최초의 의미를 갖는다면 ‘새로운’은 갱신, 변화의 의미가 강하다. ‘또’와 ‘다시’의 경우도 비슷한 말 같지만 ‘또’가 단순 반복의 의미가 강하다면, ‘다시’는 ‘달리’, ‘다르게’와 비슷한 어원을 같는 다는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변화와 차이의 의미가 강하다. 그리고 이런 낱말들의 미묘한 차이들을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의식하지 못한 채 그런 식으로 사용해왔던 것이다.(하지만 말이 아니라 글을 쓰려고 할 때는 이런 무의식적인 언어 기계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래서 의식적인 수준에서의 언어 능력이 글쓰기에서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아주 소소한 수준으로 보여주고 있긴 하지만 낱말의 어원이나, 역사, 낱말 사이의 파생적 관계를 보여주려고 한 시도는 새로운 자극이 될 수 있었다. ‘껍질’에서 ‘질’을 ‘질기다’와, ‘껍데기’에서 ‘데기’를 ‘단단’, ‘딱딱’과 연결짓고, ‘껍데기’의 이형태(異形態)는 많으나 ‘껍질’의 이형태는 거의 없다는 점에서 ‘껍데기’와 ‘껍질’의 역사를 추측해보는 내용은 한국어 사용자에게 많은 상상력을 불어넣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영어나 독일어, 프랑스어권 작가들이 한 개념의 어원을 라틴어, 그리스어까지 추적해 그 본원적 형태나 사용을 되돌이켜 봄으로써 많은 지적 상상력을 공급받고 있었던 것과 비교해보면 한국어를 통해 이런 종류의 상상력을 공급받으려는 시도는 매우 부족하기만 했다. 물론 이는 앞서 언급했던 한국어의 특수성 탓이기도 하지만 그러기에 이런 시도가 더욱 반가울 수 있는 것이다. 

 

단점 1: 무리한 정식화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국어의 특수성 탓이라고만 하기에는, 사소하지만 거슬리는 부분들 역시 존재했다. 일단은 곳곳에서 법칙화에 대한 욕심이 엿보인다는 것이다.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 그리고 실제적이 사용에서의 쓰임의 차이를 밝히는 것에서 더 나아가, 이런 경우에는 이 말, 저런 경우에는 저 말을 사용해야 한다는 식으로, 그러니까 문법적으로 정식화되기에는 아직 우리말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것 같다는 생각이다. 그러다보니 독자들이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생기고 전체적으로 지루함이 발생한다. ‘안’과 ‘속’의 경우 1, 2차원 vs 3차원, 추상명사 vs 보통명사, 빈 공간으로서의 정상 vs 비정상 등, 꽤 정연한 도식을 보여주었지만, 다른 리뷰들을 보건데도 독자들은 그다지 납득하지 못한 것 같다. 이 경우는 오히려 ‘안’과 ‘속’은 한자어 內(내)와 裏(리)의 대응으로서 발달해온 것 같다는 것이 나의 느낌이다.  

 ‘껍질’과 ‘껍데기’의 경우에도 둘을 구분할 수 있는 도식화된 기준을 많이 제시했지만 사실 일상적으로 그에 반하는 경우도 많이 있다. 특히 생물과 무생물이라는 구분 기준은 큰 효용이 없을 듯하다. 특히 식품의 경우에는 일상적인 용법상 별 의미가 없어져 버리는 것 같다. ‘고개’와 ‘머리’의 구분도 비슷한 문제를 갖고 있다. 사람과 동물이라는 구분법을 제시했지만, 동물은 어차피 ‘머리’가 아니라 ‘대가리’를 사용하는 것이고, ‘머리’란 말을 쓸 때는 비유적이거나 의인화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사람과 동물이라는 구분법은 의미가 없어진다. 의도나 목적이라는 기준 역시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납득할 수 있는 부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저자가 제시한 예문 중 몇몇은 ‘머리’와 ‘고개’가 둘 다 사용한 경우로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고개’와 ‘머리’가 서로 다른 신체 부위를 지시한다는 것을 지적함으로써 뉘앙스의 차이를 보려한 것으로 충분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이런 어색함은 이글이 신문 연재기사여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각 챕터마다의 분량 상의 균형을 무리하게 유지하려다보니 발생했다는 인상도 든다. 어떤 낱말들은 좀 더 긴 설명과 다양한 예문들이 필요하고, 입는 입장에서도 재밌는 것이 있을 수 있지만, 어떤 낱말들은 분명한 차이들에도 불구하고, 너무 길게 설명하다보면 오히려 납득하지 못하는 점들이 드러나 의심이 생기게 마련이다. 

 

단점 2: 적절한 쓰임에 대한 자의적인 판단 기준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낱말이 제대로 사용되었는지, 부적절하게 사용되었는지를 판가름하는 데에 있어서 저자들이 취하는 방법이 과학적이라기보다는 지극히 주관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것 역시 한국어의 특수성에서 기인한 것이긴 하지만, 독자들에게 이런 의심을 최대한 줄여줄 수 있는 좀 더 세심한 접근이 필요했던 것 같다. 이런 식으로 표현해보니 ‘어색하다’, ‘자연스럽지 못하다’, ‘부자연스럽다’라는 식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판단을 통해 적절한 쓰임이 아니라고 판결내려진 것중 몇몇은 단지 그 특정한 관용적인 쓰임이 워낙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그런 용법이 굳어져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예를 들어 저자가 ‘기쁘다, 구주 오셨네’는 자연스럽지만, ‘즐겁다, 구주 오셨네’는 어색하다고 했을 때 이것은 캐롤 가사로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과정에서 익숙해진 원인으로 보인다. 경우에 따라서는 ‘즐겁다, 구주 오셨네’도 충분히 가능한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기쁘다’와 ‘즐겁다’의 의미상 차이에 대한 저자의 주장을 충분히 받아들인다고 해도 말이다. 

 

총평 

 상당히 길게 이 책을 독서하면서 느낀 거슬림이나, 어색함을 나열했지만, 최종적으로 말하자면 분명 단점보다는 장점이 훨씬 많은 책이다. 무엇보다도 한국어 사용자들에게 한국어의 가능성과 한국어 사용자로서 가질 수 있는 언어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가장 대중적인 책이라는 점에서, 이 책의 독서는 누구라도 후회하지 않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기회가 되면 그 후속편들도 읽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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