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아담의 오류-던컨 폴리의 경제학사 강의(던컨 폴리 지음, 김덕민/김민수 옮김, 후마니타스, 2011.05.02.) 

 지난 달 신간추천 페이퍼를 작성할 때부터 눈여겨봐뒀던 책인데, 이 책이 아슬아슬하게 5월 출간도서에 속하는 바람에 한달을 기다리다가 이제야 추천하게 되었다. 최근 몇년 사이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쉬운 해설서들이 많이 출간되었지만, 그 이전에는(그것이 불과 몇년전이란 사실을 생각하면 새삼 놀랍지만) 대학교 1, 2학년생들이 쉽게 이해할 만한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에 관한 해설서가 많지 않았다. 그래서 던컨 폴리의 책을 누군가 번역한 파일이 손에서 손으로 돌면서 읽히곤 했었는데, 내가 봤었던 것은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에 관한 부분이었던 것 같다. 누가 봐도 이해할 만한 방식으로, 참으로 명쾌하게 쓰인 글을 보면서 우리나라에도 이런 책이 나왔으면 하고 바랐었다. 

 그만의 장점이 이 책에도 적용되었다고 한다면, 이제 우리는 마르크스 뿐만 아니라 경제학사 전체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마르크스의 경제학에 대한 서적이 많이 출간되었고, 많이 읽혔지만, 마르크스의 사상은 독자적인 경제학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학 비판으로 존재한다는 점이 간과되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던컨 폴리가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경제학사를 검토하는 것이야말로 경제에의 이데올로기인 경제학에 대한 비판으로서 마르크스주의의 본령을 밝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데리다 평전 (제이슨 포웰 지음, 박현정 옮김, 인간사랑, 2011.05.20.)

 흔히 '해체의 철학자'로 불리는 데리다. 하지만 그의 삶 속에는 20세기 지성사가 '종합'되어 있다. 

 

 

 

 

 

 

 

통치성과 자유 (사카이 다카시 지음, 오하나 옮김, 그린비, 2011.05.25.) 

 인지자본주의의 시대, 우리는 어떻게 통치당하고 있는가? 조정환의 <인지자본주의>와 이 <통치성과 자유>는 동일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조정환의 책이 '자본'에 대해서, 즉 생산과 재생산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면, 이 책은 '통치'에 대해서, 즉 지배와 저항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혀 다른 것을 이야기하는 것일 수 있다. 사실 현 시대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한다면, 모든 것들은 같은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인지자본주의>가 지난 달에 선정된 김에 이 책 역시 함께 선정돼서 같이 다루어졌으면 하는 마음이다. 

 

 

 

 

1492년, 타자의 은폐 (엔리케 두셀 지음, 박병규 옮김, 그린비, 2011.05.20.) 

 그린비의 트랜스 라틴 총서의 다섯 번째 책. 이 책은 "타자의 은폐"라는 제목과 달리 "타자"를 발명하는 유럽적 사고의 기원을 역사적으로 추적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그리고 그 기원을 추적하는 과정은 타자의 관점, 즉 억압받고 수탈당했던 이의 관점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런 점에서 1492년은 상징적이다. 그들은 '신대륙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타자를 발명'한 것이다. '타자를 발명'했다는 것은 '타자를 타자로서 발견'했다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동일자로 은폐'시키는 것이다. 이 책은 그것이 바로 근대성이라고 한다.   

 사실 근대성에 대한 비판은 이제 지겹도록 수행됐다는 느낌이 있다. 근대성이 극복되느냐 안되느냐를 떠나서 이런 '지겨움'은 그 자체로 매우 무서운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에 관심이 가는 이유는 그런 근대성 비판이 서구의 최신 이론의 세례를 통해 형성된 조류이며, 그런 고답적인 논의구조 속에서 오히려 구체적인 물적 존재는, 그러니까 근대성의 최대 피해자이며 피-수탈자였던 그런 물적 존재와 삶들은 오히려 은폐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런 물적 삶과 언어를 회복하고자 한다. 그것이 이 책이 '역사'의 형식을 띄는 이유이기도 하다. 프랑스의 최신 지성의 살아있는 말보다 영어 한마디 할줄 몰랐던 남미의 어느 원주민의 죽은 말이 더 생생한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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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연 2011-06-11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데리다 평전을 추천했는데.. 괜스레 막막한 기분입니다. 이번 책이 너무 어려워서... 한 달 쉬어가는 책 없나, 하는 생각도 들고...

어떻게 2011-06-12 11:40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같은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 생각하면서도 추천 페이퍼 쓸 때는 욕심이 앞서 버리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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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 버트런드 러셀의 실천적 삶, 시대의 기록
버트런드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박병철 해설 / 비아북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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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영 받지 못하는 베스트


이 책은 제9기 알라딘 신간평가단의 첫 번째 인문/사회/과학 분야 평가 도서 중 한권이다. 러셀의 유작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책은, 러셀 생전의 에세이, 연설문, 자서전 등등 다양한 저작에서 특정 대목을 발췌하여 편집한 책이다. 원제는 <Bertrand Russell's Best>인데 국역본 제목은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이다. 정치, 심리, 종교, 교육, 성, 윤리 등을 바라보는 러셀의 관점, 시선을 강조하려는 의도인 듯하다.

하지만 이 책이 그런 주제에 대한 러셀의 예리한 분석이나 깊이 있는 통찰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짧으면 대여섯 줄, 길면 열댓 줄 정도의 분량으로 특정 문제들에 대해 간결하고 유머러스하게 내뱉고 있으니, 경구에 가깝다. 원래는 심오한 텍스트의 한 부분이었을 내용들을, 그것으로부터 베어내 뽑아왔으니, 전체 맥락에서 그 구절이 담당하던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사유의 기능은 박탈당했으나 대신 가벼움과 날카로움을 얻은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지금 다른 많은 서평이 올라왔는데 일일이 확인을 해보지는 못했지만, 내가 확인할 때까지만 해도 이 책에 대한 많은 불만이 있었다. 이 책은 정말 별로인 책일까?



나 역시 이 책을 그다지 재미있게 읽지 못했다. 서평을 쓰려고 하는 동안에도 대체 어떤 식으로 서평을 써야 할지 몰라 오랜 시간 동안 난감해 하고 있었다. 그거는 책의 스타일과도 관계되는 문제인데, 서평이란 것에 익숙하지 못한 탓에 전체가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책에 대해서는 어떻게 서평을 써야 할지 그 방법을 잘 모르겠다. 그래서 애초에 이런 방식(이런 방식을 뭐라고 불러야 하나? 발췌식? 옴니버스식? 백과전서식? 암튼)으로 만들어진 책은 추천하지도 못했다. 그러니 이 책을 받고 약간 당황스러웠고, 읽고도 당황스러웠다.

그런데 읽고 나서는 다른 고민이 또 추가되게 되었다. 이 책의 성격과 관련된 것이다. 이 책은 인문 분야의 서평 도서로 선정되었다. 그런데 이 책은 과연 인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책은 러셀의 철학 작업에 관한 글은 아니다. 이 책이 인용한 원저들은 대부분 에세이로 분류될 수 있는 것들이다. 정치나 종교, 윤리에 대한 진지한 사유가 들어있었다고 하더라도 원저에서 분리되어 조금 더 가벼워진 경구들은 본래의 그런 인문학적 성격마저 희미해진 상태이다. 알라딘에는 이 책을 교양인문학과 철학으로 분류해놨는데, 교양 인문학은 그렇다 쳐도 철학책이라고 보기는 정말 어려운 것 같다. 다른 곳에서는 어떻게 분류했는지 확인해보려고 대학 도서관에 가서 검색해보니 역시나 영미철학으로 분류해놨다.


나는 이 책이 에세이에 조금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에세이로 여기고 러셀이 뭐라고 말하는지 가벼운 마음으로, 그러면서 조금 더 민감하게, 그렇게 읽으려고 했다면 조금 더 재밌었을 것 같다. 하지만 많은 독자들은, 러셀의 이름은 알지만 그러니까 그가 위대한 지성이고, 그가 철학사에 지워지지 않는 족적을 남겼다는 사실은 알지만 실제로 그의 철학이 뭔지는 모르는 그런 많은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러셀의 사유가 무엇인지 맛보기를 원하면서 이 책을 읽을 것이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러셀 철학의 입문서이길 기대하면서 읽을 수도 있고, 혹은 러셀의 사회사상에 대한 소개이길 바랄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 이 책 자체만으로는 그런 기능을 하지 못한다. 독자의 애초의 기대감, 그러니까 인문학 서적으로 이 책을 대하면서 바랐던 그런 기대감을 책은 배반하고 있다. 당연히 평가가 나쁠 수밖에.


출판사 측에서 의도적으로 그런 식의 홍보를 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버트런드 러셀 최고의 재치, 최고의 지혜, 최고의 풍자를 모은 결정판!” 같은 홍보 문구는 어느 책이나 으레 하는 그런 홍보의 수준을 벗어나지도 않았고, 왜곡된 정보를 주지도 않는다. 이 책이 러셀의 철학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거나, 러셀이 특정한 주제에 대해 사유한 것들을 소개하고 있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말 그대로 최고의 재치, 지혜, 풍자를 “모았다”고 말하고 있다. 러셀이라는 이름에 너무 기댄 것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는데, 이 책 애초의 기획 자체가 러셀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책의 내용 자체가 워낙 훌륭해서가 아니라, 다른 누가 아닌 바로 러셀이 말해왔던 것이기에 이렇게 모일 수 있었던 것이다. 이걸 러셀의 이름으로 홍보하지 않으면 어떻게 홍보할 방법이 없다.


내가 보기엔 출판사도 적절한 방식으로 이 책을 홍보했고, 책의 내용도 어느 수준 이상의 훌륭한 재미를 주고 있다. 너무 많은 것들을 기대하고 읽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이것이 본격 인문서적이 아니란 것을 알고 읽는다면, 꽤 흥미 있는 짧은 에세이 모음이 될 것 같다. 더군다나 꼬박 한 세기를 산 러셀이 매 시기 사회적으로 발언을 해왔기 때문에 당시 서구의 역사적 분위기도 파악할 수 있단 점도 적지 않은 재미를 준다.


하지만 꽤 잘 만들어진 이 책이 왜 지금 그다지 환영 받지 못하면서 이 책을 읽은 독자들에게 혹평을 많이 듣고 있을까? 앞서 말했듯이 독자의 기대와 책의 방향이 어긋나 있는 이유가 있겠지만, 그것은 결국엔 이 책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의 출간이 우리 한국 독자들에게 큰 의미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요즘 인문학 대중화의 큰 흐름 아래 다른 많은 철학자들이 재조명되고 대중적으로 많이 소개되고 있는 상황에서, 러셀의 철학에 대한(여기서 러셀의 철학이란 이 책에서 찬양해 마지 않는 기호논리학과 수리철학을 의미한다) 대중적 소개가 많이 시도되지 못한 듯하다. 에세이 같은 그의 다양한 저작들이 꾸준히 출판되고 꽤 널리 읽힌 것에 비해 오늘날의 위대한 철학자 러셀을 있게 한 수리철학과 기호논리학에 대한 그의 업적에 대해서는 상당히 알려진 바가 적다. 지금 사람들은 바로 그런 부분이 궁금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러셀에 대한 입문서 같은 것을 기대하거나 바랐던 것은 아닐까?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약간의 모순이 있다. 어려운 본격 철학책은 아니다. 대중 독자들을 겨냥하고 만들어진 에세이집에 가깝다. 하지만 동시에 지금의 대중 독자들의 요구와는 어긋나 있다. 대중들이 바라는 것은 오히려 러셀의 철학을 맛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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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감옥에서 - 어느 재일조선인의 초상
서경식 지음, 권혁태 옮김 / 돌베개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프리모 레비의 생애가 우리에게 제시한 것은 증언의 불가능성, 다시 말해 이야기하는 것 자체의 불가능성이라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143쪽.


재일조선인인 그에게 글쓰기는 일종의 투쟁이다. 이 투쟁은 이중적이다. 구식민주의 종주국 일본의 언어를 모어로 습득하고 원래 모어였어야 할 조선어를 박탈당한 채, 가해자의 언어로 말하고 읽고 쓰는 것은 물론 사고의 가장 내밀한 면조차 그들의 언어로 수행해야 하는 그 부조리함, 끊임없이 자신의 육체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는 그 “위화감”과의 싸움이 투쟁의 한 면이다. 그리고 “글쓰기를 통해 ‘계속되는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을 지속”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그 투쟁의 또 다른 면이다. 그는 자신이 강렬하게 공감하였던 이탈리아의 문인 프리모 레비처럼 스스로에게 증언자라는 역할을 부여하고 끊임없이 발언토록 한다. 증언자의 비극성에 그 누구보다 깊게 공명하면서도 결코 말하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진정성과 비장함이 우리들로 하여금 그의 말에 귀 기울이게 하고 있다. 하지만 과연 이런 ‘귀 기울임’이 우리를 그의 말로 인도할 수 있을까? 과연 그의 증언은 가능할까?



이 책 <언어의 감옥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서경식의 두 번째 평론집이다. 이 책의 주된 의도는 저자가 밝히듯이 ‘재일조선인’에 대한 이해의 심화와 내셔널리즘 비판이라는 첫 번째 평론집 <난민과 국민 사이>의 문제의식을 계승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에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언어의 문제라는 고민이 내포되어 있다. 그가 짧은 한국 생활에서 느꼈던 “모어와 모국어의 강렬한 상극”의 경험은 ‘언어 내셔널리즘’에 대한 비판으로 심화되고 있다.

식민주의, 내셔널리즘, 일본 리버럴 세력 비판, 언어의 문제 등등 서경식이 다루고 있는 쟁점들을 보면, 이 책은 다소간 학술적이고 다소간은 정치적인 텍스트로 읽힐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글이 지닌 가장 기본적인 성격, 즉 증언으로서의 텍스트라는 성격을 간과한다면 도대체 이 책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구조주의와 포스트 구조주의라는 현대 사상의 가장 주류적인 흐름은 다소간 독자들을 텍스트의 권위로부터 해방시켜주었다. 그건 기존의 지식 교환체계에서 저자와 독자 간의 위계적 질서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런 새로운 ‘읽기’ 방식은 ‘창조적 책읽기’라는 이름으로 혹은 ‘생산적 오독’이라는 겸손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하지만 이런 조류가 동시에 무책임함에 대한 면죄부를 수여할 가능성도 열어 주었다. 증언을 대면하는 피증언자로서의 자세를 방기하는 면죄부말이다.


“살아 돌아온 증인의 증언을 가볍게 여기고 ‘불길한 경종’에 귀 기울이려 하지 않는 사람들―우리들이지 않을까?―” -109쪽.


증언자에게 자신의 의무(살아돌아가 증언해야 한다는)가 있듯이 증언자를 대하는 사람들 역시 자신들만의 의무가 요구된다. 그것은 ‘귀 기울이는 것’이다. 여기서 ‘증언’이 다른 텍스트와 갖는 차별점은 결코 무시되어서는 안 되는데, 그것은 바로 저자가 “살아 돌아온 증인”이라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 이래로 ‘저자의 죽음’이란 것이 하나의 주도적인 이념이 되었지만, 증언의 텍스트에서 증언자는 결코 죽을 수 없는 존재이다. ‘증언해야만 한다’는 것과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핵심이다. 하나의 증언 앞에서 우리들은 저자를 살아있는 존재로 인정해야만 하는 윤리적 책임을 발견한다.

피증언자의 윤리적 책임이란 일종의 ‘타자에 대한 윤리’이기도 하다. 증언자는 타자이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의 상상력 너머에 있는 현실을 경험하도록 강제되었기 때문이다. 프리모 레비나 파울 첼란, 장 아메리 같은 아우슈비츠 경험자들은 그 끔찍함과 잔혹함이 도저히 일반인들이 상상할 수 없는 무언가를 경험하였다. 서경식의 경우에는 내셔널리즘이란 필터에 걸러져 은폐되어 있는 식민주의와 난민의 삶을 경험하였다. 이들은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 감히(혹은 미처) 상상하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들 속에서 실제로 살아 돌아온(혹은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증언을 읽는다는 것은 바로 타자를 대면하는 것이다.

<장송>의 작가 히라노 게이치로는 <책을 읽는 방법>이란 책에서 창조적인 오독의 중요성을 설파하면서도 그 위험성을 경계한다. 오독은 하나의 텍스트에 대한 다양한 책읽기를 의미할 수도 있지만, 정작 독자 자신에게는 틀에 박힌 책읽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이미 자신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독선적으로 텍스트를 해석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경험에 의해서, 자신의 입맛에 의해서,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세계에 근거해서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히라노 게이치로는 독서는 타자와의 만남임을 재차 강조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증언자의 글을 읽는 독자들은 ‘오독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타자와 대면하고, 증언에 귀 기울임으로써 그 증언이 요구하는 것에 접근해야 한다.


이러한 피증언자의 태도는 저자인 서경식 스스로가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이 책의 첫 번째 글 <모어라는 폭력-윤동주를 생각한다>에서 윤동주의 서시 한 구절의 번역을 두고 벌어진 오역 논쟁에 개입한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라는 시구를 역자 이부키 고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사랑해야지”라고 번역한 것이다. 이에 대한 오무라 마스오의 지적에 이부키 고는 “이 실존 응시의 사랑 고백은 군국주의 일본인에 대한 증오심 따위와는 관계가 없다”고 반박한다. 이부키 고는 윤동주의 시 속에서 “실존 응시의 사랑 고백”을 읽은 것이다. 하지만 윤동주가 어떤 시인인가. 식민지 조국의 현실 속에 고뇌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자신의 모어인 조선어로 시를 쓰고, 그 때문에 끝내 군국주의 일본에 의해 살해당한 시인이다. 윤동주는 동시대 그 누구보다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예민한 감수성으로 포착하고, 그 현실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극단적으로 학대했다. 그의 시는 해방 후 조선 청년들의 정체성 형성의 한 축이 되었다. 윤동주의 시는 그 자체로 시대의 증언이다. 식민지의 현실 속에서 고통 받았던 당시 모든 민중들의 공통의 증언이다. 이런 윤동주의 ‘서시’를 타자인 일본인들이 읽을 때에는 타자에 대한 윤리, 증언을 듣는 피증언자의 책임이 요구된다. 하지만 오히려 그는(혹은 그들은) 의도적인 오독을 통해 식민지배의 죗값을 면책하고 싶은 자신의 욕구만을 노출시켰을 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문제의 시 구절로 표현하려 했던 윤동주 시인의 마음에 대해 오직 하나뿐인 진실을 확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시 구절을 두고 작동되는 무의식의 권력관계를 인식해보자는 것이다.” -30쪽.


다수자의 자기 중심적인 오독이 아니라 증언자(타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 마치 타자의 마음 속에 하나의 확정된 의미가 있다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침묵하는 타자를 제치고 타자의 마음 속에 확정되어 있는 하나의 의미를 찾겠다고 설치는 것이야말로 바로 서경식이 말한 가부장적 온정주의이며 다수자의 폭력일 것이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증언자의 증언을 ‘의미 있는 것으로 생명력을 불어 넣는 것’이다. 현실에 은폐된 채 작동하는 무의식의 권력 관계를 탈은폐 시키는 것 역시 그런 것이다.


“그(프리모 레비)의 메시지는 사실 그 자체를 알리기보다 그 사건이 우리에게 지니는 의미에 관해 고찰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146쪽.


다수자로서 주어진 피증언자의 윤리적 책임, 증언에 귀 기울이는 것, 증인을 살아있는 존재로 여기는 것, 증언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 것, 이것은 바로 방관자가 되지 말라는 요구이기도 하다.




이 책을 하나의 증언으로 읽는다면, 저자의 글들은 매번 우리에게 뭔가를 요구하고 있다. 그런 요구들이 독자를 당황스럽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독자들이 그런 요구 자체에 닿지 못하는 것이다. 이 책을 읽은 다른 독자들의 반응을 살펴보았을 때, 많은 사람들은 (이렇듯 오만하게 말하는 나보다 훨씬 더)저자가 제기한 문제들에 접근하고 거기서 의미를 고찰하고자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지만, 또한 적지 않은 경우 저자가 명시적으로 경계하고 있는 반응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이고 있는 듯하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저자 일본어로 써서 일본 독자들을 대상으로 발표한 글을 모아 번역한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한국의 독자들을 대상으로 만들어졌지만, 그 속에 실린 글들은 일차적으로는(저자는 분명 한국의 독자들도 염두에 뒀던 것 같다) 일본의 독자를 대상으로 쓰였다. 이런 점이 이해를 어렵게 하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건 어쩌면 부차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 그가 책 속에서 제기하는 문제들은 이미 일본이라는 국경을 벗어나 조선과 일본, 더 나아가 아시아 전체의 맥락 속에 위치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책의 이해를 어렵게 만드는 지점은 우리 독자들 내부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즉 우리 역시 다수자라는 것, 우리 역시 내셔널리스트라는 것이다. 서경식이 제시한 메시지가 우리에게 지니는 의미에 관해 뿌리깊게 고찰하기보다는 이해되는 방식으로 이해하려는 태도가 있기 때문이다.



1. 모어와 모국어의 상극


서경식은 여기서 모어와 모국어가 다르기 때문에 느끼게 되는 자신의 아포리아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이러한 아포리아를 이해하기 위해 주의해야 할 점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이것을 서경식 개인의 비극, 혹은 재일조선인 집단의 비극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서경식 개인에게 비극일 수 있으며, 재일조선인 집단의 비극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는 “그 경험을 대인적인 차원에 가두어두지 않고 ‘계속되는 식민주의’나 ‘언어 내셔널리즘에’에 대한 좀더 깊은 비판으로 발전시키고자 했다.” 따라서 ‘언어 내셔널리즘’에 대한 비판적 입장에 서지 않은 채, 즉 언어 내셔널리즘에 안주한 채, 서경식과 다른 재일조선인들을 이해하고 위로하려 드는 것이야말로 다수자의 폭력에 다름 아니다. 그 폭력이란 재일조선인의 경험을 특수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서경식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서경식의 말대로 자신은 언어라는 감옥에 갇힌 수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그것이 대다수 재일조선인의 가혹한 현실이다. 하지만 대체 무엇이 그를 언어의 수인으로 만드는가? 모어와 모국어가 다르다는 현실? 구식민지 종주국에 산다는 현실? 그를 수인으로 만드는 것은 끝나지 않고 계속되고 있는 식민주의이며, 이 세계를 둘러싸고 있는 언어-내셔널리즘이다. 한국인이지만 태어날 때 일본어를 배웠고, 일본에서 산다고하는 그 사실 자체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역시 언어의 수인이자 동시에 교도관이다. 모어-모국어-국민의 일치라는 국민화 과정에 성공하여 국민국가에 성공적으로 편입했을 뿐, 그래서 그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할 뿐 우리 역시 국경이란 테두리에 갇혀 있다. 동시에 우리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언어를 기준으로 끊임없이 타자를 차별하고 배제하므로써 경계 밖에 있는 이들이 국민국가에 혼란을 주지 않도록 자발적으로 관리한다. 즉, 언어의 감옥이라는 것은 우리 모두의 현실이며, 보편적인 문제이다.



주의해야 할 또 다른 점은, 모어-모국어의 분리라는 아포리아를 본질주의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무슨 언어를 쓰느냐가 그 사람의 사고와 문화, 정체성을 규정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비자발적으로 일본어를 모어로 습득하게 됨으로써 비자발적으로 일본의 문화와 일본식 사고를 이식당한 꼴이라는 것이다. 겉으로 보면 그럴 듯해 보이는 이런 주장은 사실 재일조선인을 제대로 이해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에게 모욕에 가까운 말이 될 수 있다. 모국어에 대한 권리를 박탈당한 상태로도 수십년간 일본에 동화되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을 모색해온 역사를 부정해버린 것 아닌가. ‘일본에 동화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일본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한 좋든 싫은 이미 일본인의 사고와 문화를 공유해버리게 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서경식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는 이것이 단지 모어-비모어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문제라고 말한다. 자신이 일본어로 사고하고 일본어로 표현할 수밖에 없을 때 느끼게 되는 그 “위화감”은 자신이 일본어를 모어로 습득한 사실 자체가 바로 식민주의 폭력의 결과이며, 그 자체가 계속되는 식민주의의 증거임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한국어가 아닌 말을 모어로 습득한 모든 한국인들, 다른 해외 동포들이 모두 이런 “위화감”을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바로 역사적이고 정치적이며 동시에 윤리적인 맥락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아포리아가 발생하는 것이다.

특수화와 본질주의는 모두 모어-모국어의 불일치 그 자체를 문제시하고 있다. 이럴 경우 해결책은 결국 동화 밖에는 없는 것이다. 한국에 동화되어 한국어 공동체에 성공적으로 편입되거나 혹은 일본에 동화되는 것이다. 하지만 서경식이 말하는 ‘언어의 감옥’이라는 현실은 바로 이런 경험의 특수화와 본질주의적 접근, 양 편향을 경계하며 접근할 때 해결할 수 있다. 그것은 일종의 보편주의라고도 할 수 있다. 서경식은 해결책의 한 예로서, 유토피아일 뿐이라고 선을 긋긴 하지만 다언어․다문화 공동체를 제안한다. 언어 내셔널리즘이 붕괴된 세계, 모어와 모국어가 일치하지 않는 것이 고통이 아니라 다양성으로 이해될 수 있는 그런 세상 말이다.



2. 유토피아의 문제


이 점에서 또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유토피아의 문제, 실현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문제이다. 서경식의 비판과 문제제기에 대해서는 뼛속 깊이 공감한다는 듯한 반응을 보인 독자라도 서경식의 제안 내지는 대안(다언어․다문화 공동체, 통일 상 등)에 대해서는 일정한 거리 두기를 시도하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 그 이유는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 유토피아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다양한 현실적인 이유를 든다. 여기서 그들이 든 이유를 조목조목 비판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지적은 타당한 면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 지적이 잘못됐다고 비판할 만한 능력이 내게는 없을 수도 있다. 그들의 지적은 현실적으로 옳을 수도 있다. 내가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오히려 잣대 그 자체이다.

재일조선인으로서 겪어야 했던 곤란과 모순의 경험들에 대해서는 공감하던 사람들이, 일본의 기회주의적인 리버럴 지식인들의 퇴락에 대해서는 공분하던 사람들이, 모국어의 권리를 박탈당한 디아스포라에 대해 슬퍼하던 사람들이, 왜 국어 공동체 한국을 해체하자는 주장에 대해서는 왜 갑자기 현실주의자가 되어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할까?

우리는 ‘실현불가능성’, ‘유토피아적’이라는 말의 허구성에 주목해야 한다. 단일민족 국가를 구성하겠다는 기획 역시 실현불가능하고 유토피아적이다. 수천 년 동안 이미 다양한 문화와 인종이 융합되며 형성된 역사를 가진 나라이다. 해방 이후에도 우리나라 민족은 다양한 지역으로 이산되고 다양한 이주민들이 유입되어 왔으며, 수십년간 전국 곳곳에서,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문화와 민족이 융합되며 한국의 문화정체성을 형성해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단일민족 국가를 지향해 왔다. 그 과정에서 강제적이고 폭력적인 차별과 배제, 강압적인 국민화 과정이 있었다. 하지만 정작 이러한 단일민족 국가 지향의 허구성은 외면하면서 서경식이 주장하는 다언어․다문화 공동체 지향의 새로운 국가상에 대해서는 현실성의 잣대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단일민족국가 지향이든 다언어․다문화 공동체 지향이든 그것은 어떻게 보면 추구해야 할 이념상이다. 그 안에서는 다양한 문제점들이 발생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지향하고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갈 것인가이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정체성이고 윤리이며 정치이다.


이런 이중 잣대 밑에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대로만 이해하겠다”라는 다수자의 자기중심성이 있을 수 있다. 일본의 퇴락한 리버럴 지식인이 자신의 입맛에 맞게 조선 지식인들의 주장을 선별해 들었듯이, 그렇게 박유하를 자기 멋대로 상찬했듯이, 우리들에게도 자신의 입맛에 맞게 서경식의 글을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보아야 한다.

모국어의 권리에 대해서는 공감하고 주목하면서 모어의 권리에 대해서는 왜 별다른 언급이 없을까?

모어와 모국어가 불일치하는 고통에는 공감하고 이해하려고 하면서, 자신의 모어를 부정할 수밖에 없는 고통에는 주목하지 않을까?

‘일본인으로서의 책임’에는 동의하면서 왜 서경식의 유토피아에는 동의할 수 없는가?

여기에는 모두 이중적인 잣대가 작용하고 있다. 자신에게 익숙한 것,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만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 자체를 비난할 수도 없고, 그런 현실을 인정하기도 해야하겠지만, 어쨌든 그것은 살아돌아온 증인의 증언에 귀 기울이는 태도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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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연 2011-05-21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생각이 나서 이렇게 글들을 읽어보고 있는데.. 제 서평이 마음에 안드셨나봅니다;;ㅎ 음... 몇 몇 부분에 대해선 동감을 하기도 하고, 제가 잘못한 부분도 있구나, 하고 여깁니다만 아무래도 조금은 제가 직접 답을 해야 될 것 같아서 이렇게 댓글을 남깁니다. 글 자체에 대해서 여기서 제가 비판할 만큼의 학식을 갖추고 있지도 못하고, 또한 그러면 말꼬리잡기에 지나지 않게 되버릴 위험이 있어서 그저 제 서평을 변호하자면, 먼저 모어와 모국어의 상극 부분에 대해서는, 음.. 일본어를 모어로 체득하게 되면서 그 문화적 경험을 이식받는다는 제 주장을 그대로 고수할 수 밖에 없네요. 모어를 체득한다는 의미는 단순히 형식으로서의 언어를 체득한다는 의미만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고.. 이는 말씀하신 '위화감' 너머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언어가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를 재단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는 몇 몇 언어학자들의 저서를 참조하시는 게 좋을 듯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유토피아의 문제에 대해서는.. 어... 글 쓰신 것을 읽어보니깐 정말 나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대로만 이해한 것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지만, 그래도 저의 입장을 말씀드려보자면 저는 처음부터 현실주의적이었다고 할 수 밖에 없네요. 또한 단일민족만의 국가를 이루겠다고 서평에 쓴 적도 없고 다른 분들도 그렇게 쓰지는 않으셨으리라고 봅니다. 다만 지금 현재 상황이 단일민족의 국가에 가깝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 제 서평에 쓴 말이고, 이는 앞으로도 단일민족 국가가 되어야 돼, 라는 말과는 전혀 다른 말이지요. 무엇보다도 모국어의 권리를 박탈당한 디아스포라의 입장을 공감하고 슬퍼하는데 굳이 비현실주의적일 필요는 없지요. 그래서 제가 서평에 쓴 것은 그의 소수자적인 시각을 존중하지만 다수로서 다수가 볼 수 있는 부분도 분명히 있다는 겁니다. 에.. 아무래도 의견이 평행선을 달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이렇게 남기지 않으면 제가 어떤 입장에서 책을 바라보고 있는가 하는 기본적 토대마저도 서로 알지 못하는 상태가 될 것 같아서 이렇게 긴 댓글 남깁니다. 이렇게 댓글 남기는 것이 익숙하지가 않아서.. 다음엔 좀 더 짧은 댓글을 남기도록 노력하겠습니다;ㅎ

어떻게 2011-06-07 03:37   좋아요 0 | URL
가연님의 리뷰를 인상적으로 읽긴 했지만, 제가 이 글을 쓸 때 특별히 가연님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다시 가연님의 리뷰를 읽어보니 우연찮게도 제가 가연님을 비판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제가 리뷰를 기한 안에 못써서 급한 마음에 거칠게 썼고, 완성된 것도 아니랍니다. 시간이 나면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여지껏 못하고 있었어요. 특히 위에서 언급한 언어와 정체성의 문제랑 유토피아 문제는 조금 더 신중하게 접근해야할 필요성이 있다고 진작부터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그래도 일단 가연님의 지적에 대해 저 역시 변호를 하자면, 일단 언어와 정체성의 문제에 대해서는 가연님의 주장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언어학에 대해서는 무지하지만 언어와 사고, 정체성의 긴밀한 관계는 상식적인 수준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고, 가연님이 리뷰에서 언급하신 새로운 연구 결과들이 그런 주장에 더 힘을 실어 주고 있는 듯 하네요. 이것을 제가 사실의 문제로서 과학적으로 반박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과학적인 사실이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수준에서 어떻게 문제시 될 수 있을까'하는 것입니다. 과학적인 팩트가 현실에서 효력을 발생시킬 때에는 특정한 문화적, 정치적 구조와 결합된 중층적인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 동일한 언어학적 발견이 언어 내셔널리즘을 강화할 수도 있고, 오히려 그것에 대한 비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것에 대한 '본질주의적 접근'을 경계하고자 한 것입니다.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지에 따라 그 사람의 사고가 제약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이 결정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본질주의적 접근은 오히려 동일한 언어 공동체 내의 다양한 차이들을 은폐하거나 제거할 위험이 있습니다. 한국어를 사용하는 추상화된 집합적 한국인과 일본어를 사용하는 추상화된 집합적 일본인 사이의 사고방식의 차이와, 동일한 한국어 사용자이지만 재벌 총수인 중년 남성과 비정규 노동으로 가족의 생계를 근근히 유지하는 빈곤층 여성 사이의 차이 중 어떤 차이가 더 클까요?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의 차이가 더 크다고만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런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우연히 선택된 두 한국인 사이의 차이가 추상화된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의 차이보다 클 가능성이 높습니다. 흔히 "개체 차이가 집체 차이보다 크다"는 것이죠.
그런데 집체 차이로 한정해서보더라도 어떤 집체, 즉 어떤 집단 정체성이 특권적인 지위를 누리느냐에 따라 다른 기준으로 그어진 차이는 무시될 수 있습니다. 근대 사회는 국가, 민족, 성별 등을 중심으로 동일성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런 동일성의 정치는 차이를 통해 차이를 소멸시키는 정치인데, 그렇게 정치적으로 사용되는 동일성 기제는 다른 기제에 비해 과대평가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언어가 같으니까(혹은 다르니까), 민족이 같으니까(혹은 다르니까), 성별이 같으니까(혹은 다르니까) 동일해야 한다고(혹은 달라야 한다고) 말해집니다. 하지만 그것은 과학적 사실과는 별개의 문제로 정치적인 문제입니다. 어떤 차이를 드러내고 어떤 차이를 은폐할 것이냐 하는 것은 권력에 의해 선택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가령 남녀간 차이에 대한 많은 과학적 증거가 현재까지도 끊임없이 발견되지만(물론 그 반대 증거도 발견되고 있지만요) 그것이 과학을 넘어서서 현실에 작용할 때에는 성별 이분법적 구조를 공고히 하는 방식으로 이용되지요. 그 과정에서 남성 간의 차이, 여성 간의 차이, 그리고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에 포함되지 않은 다양한 차이들이 제거되거나 억압됩니다. 생물학적 차이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이 현실에서 어떤 효과를 발생시키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많은 재일조선인이 일본어를 모어로 습득하면서도 일본인과 다른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는 것 자체가 언어로 포괄되지 못하는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가연님이 언급하신 최근의 발견이나 저보고 참고하시라고 권해주신 그런 언어학 책들이 (아직 안 읽어보았지만)분명 과학적 진실을 담고 있겠지요. 하지만 그 과학적 진실을 넘어서서 그것이 현실에서 서경식이 비판한 언어 내셔널리즘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유토피아의 문제에 대해서는 많이 말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이건 주장의 문제에 가깝고, 가연님이 말씀하신대로 평행선을 달릴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오해를 푸시라고 몇가지 변명을 해보자면, 첫째로 아까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가연님의 글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이 아니라는 걸 다시 말씀드려요. "단일민족만의 국가를 이루겠다고 서평에 쓴 적도 없"다고 하셨는데, 알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다른 분들도 그렇게 쓰지는 않으셨으리라고" 본다고 하셨는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 역시 다른 분들이 그런 주장을 하셨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다룬 것은 '실현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문제에 관해서였습니다. 발리바르나 월러스틴 등에 따르면 국민국가라는 것 역시 허구적일 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도 매우 제한되어 있는 국가형태라는 것입니다. 국민국가는 근대의 일반적인 국가형태라기보다는 특정한 시기에 중심부와 몇몇 반주변부 국가들에게 국한된 특수한 국가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국가형태는 주변부 국가들에 대한 착취와 배제, 내부적인 배제와 포섭 등을 통해 유지되어 왔습니다. 그 전략이 바로 내셔널리즘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 점에 대해 제가 말하고자 한 것 중 하나는 "실현 불가능성"이란 잣대 자체가 매우 이데올로기적으로 적용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단일민족국가를 현실적이라고 말할 근거는 빈약합니다. 우리나라를 단일민족국가로 만드는 것은 '우리나라 국민은 같은 민족이다'라는 사실이 아니라 '그렇게 믿으라'라는 이데올로기이죠. 그 과정에서 국외의 조선인, 국내의 이주민 등에 대한 많은 차별과 배제 억압 은폐 등이 수행됐고, 이 지점에서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가"라는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를 외면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모국어의 권리를 박탈당한 디아스포라의 입장을 공감하고 슬퍼하는데 굳이 비현실주의적일 필요는 없지요."라고 말씀하셨는데, 제가 제 글을 다시 읽어봐도 오해받을 만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시 한번 말씀드리자면 저 역시 가연님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현실주의적이어선 안된다고 말하고자 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마지막 세 번째로 제 변명을 해보자면, 서경식은 모국어의 권리만을 박탈당한 것이 아니라 모어에 대한 권리 역시도 위협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서경식은 자신의 책에서 모어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일본어로 말했다고 썼습니다. 그 장면이 재일조선인이 처한 위치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부분에 대해서 말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미 일본어를 모어로 체득한 재일조선인이 디아스포라의 상황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한국어를 비모어로 사용하는 한국인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유일한 현실적 방법이죠.

정리하자면, 저는 가연님의 주장에 반대한다기보다는 가연님이 말씀하신 것과는 다른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제 서평 제목에서 보이다시피 제 글은 일단 읽는 자의 '윤리'라는 관점에서 작성됐습니다 그래서 책의 내용을 누구나 동의할 수 있게 포괄적으로 아우르지 못하고, 다소 편협해진 것 같습니다. 다시 읽어봐도 너무 거치네요. 가연님 지적 덕분에 제 글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네요.

그런데, 헉, 너무 기네요. 저도 댓글 다는게 처음이라서.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이번 4월 한달 간 출간된 신간 도서 중 인문/사회/과학 분야 중에 관심이 가는 책 다섯 권을 선정해본다. 

1. 군주론, 운명을 넘어서는 역량의 정치학 (정정훈, 그린비, 2011.04.19.)

  얼마 전 좋은 입문서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해 봤었다. 우리나라에 단 하나의 좋은 입문서를 고르라고 한다면, 난 그린비의 <리라이팅 클래식> 시리즈를 꼽겠다. 이 시리즈들은 전통적인 의미의 입문서는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가장 좋은 입문서의 역할을 지금껏 해내고 있다. 

  이 시리즈는 고전을 현대적 감각으로 '다시 쓰기'를 시도한다. 맑스를, 칸트를, 니체를, 장자를 현대 철학의 다양한 면들과 접촉시킨다. 따라서 어떻게 보면, 현대 철학에 오염된 고전이라고 보여질 수도 있다. 하지만 난 이런 오염이 반갑다. 사실 오염(?)된 것은 고전이 아니라 이 현실이다. 역사는 흘러갔다. 그들이 그 고전을 썼을 당시의 문제틀, 이데올로기는 변형되었다. 푸코 식으로 말하면 그 책과 현대의 독자들은 다른 '에피스테메'를 딛고 있다. 그 간극을 무시하고 텍스트에 무조건적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오히려 고전을 죽이는 길이다. 

  열네 번째 리라이팅 클래식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대한 것이다. 저자 정정훈은 이를 맑스주의의 전통 속에서 재술한다. 이미 그람시, 알튀세르 등을 통해 마키아벨리의 사상은 위대한 유물론의 전통이라는 흐름 속에 편입시키려는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마키아벨리에 대한 일반의 통념은 권모술수와 처세의 사상가로 인식되는 것이 지배적이다. 이것은 이론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마키아벨리를 어떻게 사고할 것인가라는, 현대의 요구가 반영된 것이다. 철학보다는 처세술이 필요한 시대인가? 자본주의에 대한 불신과 함께 그런 시대는 저물고 있다. 마키아벨리를 새로운 지적 전통과 결합시키는 것이 시대의 새로운 요구이다. 이 책의 저자 정정훈이 마키아벨리를 혁명적 맑스주의와 어떻게 마주치게 할지 사뭇 궁금하다.  

 

2. 국민과 서사 (호미 바바 엮음, 류승구 옮김, 후마니타스, 2011.04.22.)  

  에드워드 사이드, 가야트리 스피박과 더불어 탈식민주의 3대 이론가로 불린다는 호미 바바. 하지만 난 그 이름을 처음 들었다. 3대 기타리스트니, 4대 미드필더니 하면서 이런 식으로 클래스를 구별하는 걸 좋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호미 바바의 이론이 에드워드 사이드나 가야트리 스피박과 어떤 차별점을 보일지 기대되고 궁금한 것은 사실이다. 

  지금의 탈국가화 추세는 근대질서에 대한 저항이 기획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근대 체제 자체의 한계와 모순으로 촉발된 것이고, 그러한 위기들에 대한 무능력으로 드러난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추세를 마냥 손 놓고 환영할 수만도 없는 것이, 여전히 칼자루는 '그들'이 쥐고 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시대에 형성된 '네이션' 체제가 제국주의 시대가 종결되고(제3세계 식민지의 대대적인 독립) 미국 중심의 새로운 질서 이후에도 변형된 형태로 유지되었던 것처럼, 새롭게 변형된 '네이션'체제에 다시금 갇히게 될 수도 있다. 현 추세를 촉발시킨 것은 '저항'이 아니라 오히려 '패배'에 가까운 것이지만, 이렇게 새롭게 열린 공간을 새로운 가능성으로 적극적으로 사고할 필요성이 있지 않을까 싶다.

 

3. 상대성이란 무엇인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김영사, 2011.04.25.)

 상대성 이론 만큼 '모두가 알지만 누구도 모르는'이란 수식어가 어울리는 이론도 드물다. 아인슈타인을 이역만리 작은 나라의 삼척동자도 알고 있는 세계적 유명인사로 만든 상대성 이론은, 너무나도 유명하지만 감히 도전하기에는 왠지 다른 세상의 이야기 같다. 아마도 우리나라 출판물 중 자연과학 분야에서 가장 많이 출간된 입문서가 상대성 이론에 대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만큼 상대성 이론에 대한 대중의 흥미는 상당하다는 뜻이다. 다만 이해가 안돼서 그러지..

  하지만 상대성 이론이 단지 과학계 뿐 아니라 지성사 전체에 끼친 영향력을 고려해봤을 때, 우리는 이미 저도 모르게 상대성이란 지평 위에 서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다. 

  신간평가단에서 과학 분야가 인문/사회 분야와 함께 다뤄지면서 과학 분야 책이 홀대받는 경향이 있다.(물론 출간되는 책 자체가 인문/사회에 비해 적은 탓도 있지만) 나 역시 과학에 문외한이지만 한번 읽어보고 싶다. 아인슈타인은 재밌고 명쾌한, 새로운 방식의 강의로도 유명했다. 강연집 형식을 띄는 이 책 역시 명쾌하고 재밌기를 바란다.  

 

4. 잊혀진 것들에 대한 기억-1980년대 대학의 하위문화와 대중정치(김원, 이매진, 2011.04.25.) 

  1980년대의 대학 문화와 학생운동을 더듬어 가는 이 책은 "잊혀진 것들"에 대해 기억하자고 말한다. 스스로가 386세대인 저자는 그 시대를 트라우마라는 측면에서 다시 돌아보고자 한다. 하지만 우리 세대에게 그것은 '잊혀진 것들'에 대한 것이기보다는 '단절된 것들'에 대한 기억이다. 유난히 질곡이 많은 우리 현대사 때문인지, 아주 가까운 과거조차도 우리에겐 너무 아득하게 느껴진다. 해방과 분단, 전쟁과 혁명, 독재와 민주화라는 숨가쁜 일련의 과정 아래,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체제가 형성되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우리는, 불과 2,30년이 지난 가까운 과거와 완벽하게 단절되어 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68세대의 극복이 포스트 68세대를 통해 이루어지는 서유럽과 달리 386세대에 대한 비판은 새로운 세대에 의해서가 아니라, 386 그들이 물리친 구시대의 유령에 의해 수행되고 있다.

  저자는 기억의 정치를 말한다. 과거를 복기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를 어떻게 인식하느냐는 바로 지금 우리가 서 있는 현실의 관계를 드러내는 것이며, 앞으로 나아갈 지향점을 설정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세대는 역사와 기억에 대해 너무 무책임(무기력)해왔던 것이 아닐까? 우리는 무언가에 대해 좀 더 적극적으로 기억을 해야 한다.  

 

5. 기억의 공간 - 문화적 기억의 형식과 변천 (알라이다 아스만, 그린비, 2011.04.25) 

   주목 신간도서로 선정할지 말지 무척 고민한 책이다. 단순히 개인적으로 관심있는 책이 아니라 신간평가단 리뷰 도서의 1차적인 후보군을 고르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비싸고 두꺼우며 상당히 어려워 보인다는 점은 은연중 선정을 꺼리게 만든다. 교양서보다는 학술서에 가까운 책은 가급적 제한하려고 했다. 이번 선정 목록 중에서는 앞서 추천한 호미 바바의 <국민과 서사>가 이미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럼에도 이 책을 굳이 선정한 것은, 바로 위에서 <잊혀진 것들에 대한 기억>을 선정하면서 발견한 고민 때문이다. 우리 세대는 기억에 대해 너무 무책임해왔던 것은 아닐까? 정확히 말하면 기억에 대해 너무 무기력해왔던 것은 아닐까? 기억이라는 것이 기성 권력, 기성의 지식, 특히 미디어에 점령당하는 것은 비단 우리들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그런 기억의 점령에 너무 무기력하게 방관해온 것은 아닐런지 다시금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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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성과 젠더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3
권김현영 외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2월
평점 :
절판


  며칠 전 친구에게 이 책을 선물 받았다. 선물, 그것도 책 선물이니 크게 기뻐할 법도 한데 <남성성과 젠더>라는 제목의 다소 딱딱해 보이는 이 책을 받아든 내 표정은 그리 기쁘지 않았었나 보다. 실망한 기색으로 맘에 안 드냐고? 예전엔 이런 거에 관심이 있었던 것 아니냐고 물어보는 친구의 말에 당황하여 크게 기쁜 척을 했다.  

  그 친구가 말한 '이런 거'란 무엇을 의미할까? 이 책은 어떤 책이기에 ‘이런 거’에 포함될까? 이 책은 남성성에 대해 연구하고 있으니 ‘남성학’일까? 하지만 다루는 대상에 따라 그 분야가 결정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 말하면 분과학문과 장르에 대해 고민해봐야 하겠지만, 지금 그럴 이유는 없다. 사실 이 책을 포함하여 이번에 소개된 하이브리드 총서의 슬로건 자체가 “경계 간 글쓰기, 분과 간 학문하기”아닌가? 이 책은 따라서 어떤 영역이나 분과 안에 귀속되지 않고, 그 경계들 사이에 위치하며 그 영토들을 넘나들고자 한다.  

  하지만 이 책은 분명 특정한 무언가에 대해 다루며,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다루기에, 내 친구로부터 ‘이런 거’로 분류되고 말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런 거’는 페미니즘이다. 이 책은 페미니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존의 젠더 질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을 해체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페미니즘의 목소리이다. 나는 아카데믹한 느낌을 풍기는 여성학이란 말보다는 이론과 실천을 아우르는 페미니즘이란 말을 선호한다(여성학과 페미니즘이 상호 대체가능한 용어는 아니지만, 그렇게 부를 수 없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경제학자가 쓴 경제학 책이더라도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썼다면 마르크스주의 책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은가?). 일상적으로는 페미니즘이 여성(권익 혹은 억압)에 대한 것만으로 축소되고 있지만 말이다.  

  그 친구는 지극히 평범한 남성인 내가 페미니즘에 관심을 보였던 것이 퍽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기뻐할 내 모습을 상상하며 이 책을 선물해 준 것 같다. 물론 이 책을 받고 기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다만 약간 당황했을 뿐이다. 긍정적인 시선으로든 부정적인 시선으로든, 페미니즘을 통해(여기엔 피상적이라는 수식이 붙어야겠지만) ‘남성성’에 대한 담론을 경험한 평범한 남자들에게 ‘남성성’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친구는 몰랐을 수 있다. 내가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고 그런 부분과 관계를 맺었던 경험은 일반적인 경우에 비춰 봤을 때 특수한 경험일 수 있지만, 그것이 ‘남성성’의 문제와 관련될 때는 묘하게도 대다수 남성들의 일반적인 경험과 구조적 유사성을 갖게 된다. 그 유사성이란 ‘남성성-부정적’의 도식화다. “남성성은 부정적이다”란 자기부정이거나, “페미니스트들은 남자를 부정적으로 바라본다”라는 타자혐오이다. 사실 이것은 페미니즘이 실제로 무엇을 말했는지와 별개의 문제이다. 페미니즘이 무엇을 말하든 이런 식의 결론으로 흘러가게끔 하는 경향성이 조건 지어져 있다. 그리고 그런 경향성이 페미니즘에 대한 이해를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지금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이 책 <남성성과 젠더>를 통해, 그런 경향성의 조건을 고찰하고, 남성 독자로서 남성성에 접근하는 방법을 모색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 책을 ‘통한다’는 것은 이 책의 내용에 의존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을 읽는 과정에서, 이 책을 읽기 위해서, 이 책을 읽음으로써 등등 안과 밖, 원인과 결과가 없는 접근이다. 이 책 역시 기존의 통념을 여전히 재생산할 수도 있고, 혹은 그것을 해체할 수도 있다. 즉, 기존의 오해 내지는 통념이라고 말한 것은 이 책이 실제로 무엇을 말하고 있느냐와는 관계가 없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이 책을 읽는 것 없이는 불가능하다.  

 

남성성=폭력?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대략 2000년대), 나는 특정한 분위기에서 페미니즘이란 걸 수박 겉핥기식으로나마 접할 수 있었다. 그 분위기란 당시 대학 안에서 페미니즘이 지닌 독특한 위상에 기인한 것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은 당시에도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지만, 동시에 그것은 진보의 표상 내지는 최전선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대학 안에서는 페미니즘에 대한 수용이 자신들의 진보적 성향에 대한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기능했던 것이다.  

  이런 현상은 페미니즘이 다소 권력화된 형태로(얼마간은 왜곡된 형태로) 작동했다는 걸 의미한다. 페미니즘 운동의 실질적인 지향점과는 별개로 그것은 대학이란 공간 안에서 한 조직, 한 개인에 대해 그 진보성은 물론 그 모든 것을 판단하는 최종 법관 역할을 수행했다. 한 조직의 입장이 어떤 것이든 충분히 페미니즘적이지 못하면 비판을 받았고, 한 개인의 주장이 어떤 것이든 충분히 남성적이라면 비판을 받았다.  

  학내의 비정규직 여성노동자 운동을 오랜 기간 헌신적으로 지원했던 학생들은 그들이 여성노동자를 “어머니”라고 부른단 이유로(즉, 가족주의 이데올로기를 강화한다는 이유로) 공개적인 자리에서 충분히 페미니즘적이지 못하다고 비판을 받아야 했다. 반대로 여성주의 단체가 하는 일들에 대해서는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 적절한지, 부적절한지, 예산 낭비가 심하지는 않은지, 혹은 그것이 과연 페미니즘적인지 등에 대해 공적인 자리에서 충분히 논의될 수 없었다. 거기에 태클을 거는 것은 왠지 페미니즘을 이해하지 못하는 보수적인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다.  

  페미니즘이 제한된 영역 안에서나마 권력으로 기능했던 것은, 역으로 그것이 권력에 대한 가장 단호하고 섬세한 비판이었기 때문이다. 정희진의 말(18쪽)처럼 우리에게 페미니즘은 일종의 새로운 인식론이었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보이지도 않고, 보려고도 하지 않았던 부분들이 정치적이고,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기호와 메시지들로서 드러나게 된 것이다. 금강 중류에 불규칙하게 흩어져있는 조약돌들처럼 지극히 자연적인 현상으로 보이는 신체와 습관과 언어와 관념의 배치들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조직된 것이며, 권력을 재생산하고, 타자에 대한 억압을 수행하며, 폭력을 은폐하는지, 페미니즘에는 그 모든 비밀이 담겨 있는 듯 했고, 페미니스트는 이 모든 진실의 담지자와 같았다. 누구도 예상하지 않았던 것에 대해 ‘권력’이란 딱지를 붙일 수 있는 ‘권력’, 즉 지식-권력이 된 것이다.(당연히도 푸코의 말처럼 페미니즘의 ‘권력 효과‘를 부정적으로 볼 수만은 없다.)  

  이런 분위기에서 페미니즘은 말 그대로 ‘기본’이 되었고, 누구나 한번쯤은 ‘배워야’ 하는 당연한 것이 되었다. 그런데 일반적인(?) 남성이 페미니즘 담론을 수용하는 과정은 특수한 감정을 경험하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페미니즘이 ‘새로운’ 인식론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통해 과연 무엇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는가?  

  여기 명문대에 갓 입학한, 어리디어린 엘리트 남성과 엘리트 여성이 있다. 그 둘은 모두 기존의 젠더 규범에 잘 적응해왔고 그로 인해 어떤 불편함도 느끼지 못했었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와 페미니즘이란 새로운 인식틀이 생겼다. 엘리트 여성들에게 그것이, 그동안 미분화된 채 느끼긴 했으나 인식할 수 없었던 어떤 감정, 현상, 모순에 대해 비로소 인식하고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와 가능성을 획득하는 것이라면, 남성들은 반대로 자신들이 무심코 했던 행동들, 당연하게 여겨왔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동참해왔던 문화적 규칙들이 실제로는 남성 중심적으로 구성된 것이며, 그 외의 타자들에 대한 폭력이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인정(혹은 자백)했을 때 은연중 ‘남성성-폭력’이란 도식이 자리 잡고, 모든 부정적인 것들과 함께 남성성 역시 거부되고 극복되어야 하는 무엇으로 남는다. 남성들에게 이는 일정 정도 자신을 ‘가해자화’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남성성이 자신 안에 내재된 어떤 성질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가령 이 책에서 “이들의 ‘여장’은 당시 라이베리아 내전의 전시 집단 성폭력mass rape과 같은 남성성 수행과 전혀 모순을 일으키지 않았다.”(28쪽, 정희진)라는 문장이 쓰이고 읽혔을 때(왜 이렇게 쓰이고 읽혔는지는 아래에서 논하기로 하고), “집단 성폭력”은 단지 폭력이나 범죄가 아니라 “남성성 수행”이다. 그리고 남성성은 자신 역시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건 “라이베리아 반군이 저지른 일이지 나랑은 관계없어”라고 단순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남성들은 자신이 얼마나 남성적이지 않은지를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과제를 떠안게 된다. 앞서 말했듯 당시 특정한 분위기에서는, 이 사람의 말투는 어떤지, 걸음걸이는 어떤지, 술버릇은 어떤지, 어떤 어휘를 사용하며, 어떤 주제에 대해 대화를 하는지 등으로 한 개인의 모든 것들이 판단되어 버리는 경우가 있었다. 페미니스트임을 자처하던 사람들은 종종 “넌 너무 남성적이야.”라는 말 대신에 “넌 너무 폭력적이야.”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종종이 아니라 그것이 일반적이었다. ‘남성적’이란 말과 ‘폭력적’이란 말은 동일한 의미로 받아들여졌을 뿐 아니라, ‘폭력’이란 어휘를 채택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었다. 반대로 폭력적인 무엇에 대해 완곡하게 말하고자 할 때는 ‘남성적’이란 어휘가 사용되었다.   

 

나는 좋은 남성이 될 수 있을까?

  이렇듯 남성성이 폭력, 혹은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상황에서 페미니즘에 동참하고자 하는 남성들은 자신이 타인에게 ‘남성’으로 인식된다는 이유로 자신의 ‘비-남성성’을 전시해야만 했다. 그것은 ‘다른 남성들과 난 다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남성들이 ‘나쁜 남성’인 것과 달리 나는 ‘좋은 남성’이라고 선전하는 것이며, 일종의 자기 PR이다.(이는 ‘폭력’이란 개념에 바탕하지 않아도 마찬가지이다. 규범적 남성성이 사회적으로 선택되고 만들어진 것이라면 ‘다른 남성들’은 기존의 가치체계에 종속되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인식하지도 못하는 ‘미숙한 남성’인 것에 반해 자신은 그렇지 않은 ‘성숙한 남성’이라고 선전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하에서 내게, 페미니즘을 수용한다는 것은 일종의 ‘좋은 남성’이 되는 기획이었다. 그 밑바탕에 깔려있는, 어휘를 거르고, 말투를 가다듬고, 행동거지를 조심하며, 대화주제를 검열하는 것 등을 통해 좋은 남성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은, 불행히도, 기존 질서의 해체와 새로운 질서를 모색한다는 적극성보다는 비판 받지 않아야 한다는 수동성이었지만, 기존의 남성 중심적 질서, 그리고 그것의 신체화된 형태인 남성성이 그랬던 것과는 달리 자신은 폭력적이지 않은 남성이 될 수 있다는 환상에 가려져 있었다.  

  자신의 비-남성성을 전시하기 위해 어휘를 거르고, 말투를 가다듬고, 행동거지를 조심하며, 대화주제를 검열하는 일련의 행동들을 (사실상)강요받았다는 것이 그 자체로 문제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사실 이것은 타인과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해야 하는 기본적인 노력이다.(‘배려’란 것도 사실 이와 다르지 않다) 다만 몇몇 남성들은 그것을 하지 않아도 되는 특권을 누려왔던 것이며, 또 다른 몇몇 남성들은 더 남성적으로 보이기 위해 이런 노력을 해왔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러니까 이런 노력들은 결코 특별한 것도,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며, 불합리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문제는 이런 노력을 통해 자신이 정말로 규범적 남성성을 제어하고 있으며, 보통의 다른 남성들과 자신은 다르다는 믿음을 쉽게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페미니즘과는 관계없이 많은 남성들은 자신이 다른 남성들과는 다르며 그런 일반적인 남성들(마초적 속물성에 물든)과의 관계를 불편해 한다는 것을 종종 느낀다. 그리고 이를 자신의 우월성(성 평등을 추구하는 자신의 속성, 폭력/부정적인 것과 대비되는 ‘좋은’ 남성)을 강화시키는 논거로 삼는다.  

  그러나 사실 이는 여러 남성 집단들, 남성성‘들’ 사이의 차이일 뿐이다.(114쪽, 119쪽, 나영정) 음담패설을 하는 남자 무리들 사이에서 불편함을 느낀다거나, 거친 욕설, 강한 스킨십이 친밀감의 표시가 되고, 동물적 힘으로 남성 간 우열을 가리는 기호 체계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여전히 통념적인 미적 기준에 사로잡혀 쭉쭉빵빵한 연예인들에 눈길이 간다거나, 길거리에 지나다니는 여성들을 여전히 포르노그라피적인 시선으로 본다거나, 전혀 다른 어휘와 어투를 이용해 (자신과 타인은 눈치채지 못할 수도 있지만)여전히 음담패설을 하는 자신, 그리고 전혀 다른 기호들을 이용해 남성 간에 배타적인 친밀감을 강화하거나 때로는 남성 사이에 우위를 판가름하려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지배적 남성성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단지 다른 종류의 지배적 남성성에 속해 있을 뿐이다. 즉, 좀 더 점잖을 뿐이다.  

  마찬가지다. 나 역시 나의 비-남성성을 드러낼 수 있는 방식으로 행동해왔으며, 더 나아가 남성성을 노골적으로 목격했을 때 불편함을 느꼈다. 하지만 이것은 임시적인 행위 전략일 뿐이다. 이것이 본질적으로 내가 ‘새로운’ 남성이 되었다거나, 규범적 남성성을 제거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여전히 규범적인 남성성에 지배되고 있으며,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 어렵다는(혹은 거부하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느끼게 된다. 왜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젠더 질서에 종속되어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될까. 

“따뜻하고 친절한 전문가 남성 이미지로 대체하자거나 21세기형 새로운 남성이 되자는 슬로건…… 등 소위 새로운 남성 유의 등장은 …… 일견 ‘진보’한 것인 양 굴지만, 실상은 젠더 위계와 이원화된 젠더 구분이 희미해지거나 흩어지는 것에 대한 강박적 불안이 만들어낸 담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10쪽, 서론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가!

  자신의 시도가 여전히 기존의 젠더 질서에 갇혀 있으며, 남성성이 벗어날 수 없는 굴레처럼 느껴질 때, 결국 페미니즘을 받아들이고자 했던 노력은 실패한다. 이 실패가 거듭될수록 그들은 선택을 강요받는다. 페미니즘을 받아들이는 것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좋은 남성이 될 수 있다’라는 가능성 자체를 포기하거나. 만약 그 가능성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면(정확히 인정할 수 없다면), 끊임없이 질문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대체 나는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하지만 이 질문은 제대로 된 질문인가? 이 질문은 뭔가와 유사하다. 페미니즘을 거부하는 대표적 논리 중 하나와 비슷하지 않은가.   

“그러니까 나보고 어쩌란 말이야!”  

  이 두 질문은 약간의 시차가 있을 뿐 상당히 유사하다. 후자의 질문이 현재 시점이라면, 전자의 질문은 미래 시점이다. 문법적으로가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하나가 “내가 폭력적인 남성임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라면 다른 하나는 “내가 폭력적이지 않은 남성이 될 수 없음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르면서도 비슷한 이 두 질문은 공통적으로 두 가지 토대 위에 있다. 하나는 페미니즘이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하고 있다는 믿음이며,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이 어떤 특정한 행동 내지는 태도를(하거나 혹은 안하거나를) 통해서 좋은 남성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이 두 가지 믿음이 페미니즘을 이해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물론 이 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나보다 앞서 이 책을 읽고, 서평을 인터넷에 올린 한 남성의 서평에서 한 부분을 인용해본다.  

"책을 읽어보니 확실히 <남성성>이 문제라는 것은 알겠다. …… 좋다. 다 좋다. 그런데 ‘어쩌란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zizi0908), <내게 남은 남성성을 뿌리 뽑아주오> 中 

  이와 같은 불평(?)은 남성들이 페미니즘을 이해할 때 처하게 되는 난점을 정확하게 표현한 것이다. 하나는 ‘남성성’이 문제라는 것, 또 하나는 ‘어쩌란 것’인지 모르겠다는 것.  

 

무엇이 남성성을 부정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나 - 남성의 언어로 쓰인 페미니즘  

  많은 남성들과 여성들이 페미니즘 담론에 거부감(혹은 두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이것이 남성을 부당하게 착취자나 범죄자 취급을 하거나 남성성을 부정적인 것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이다.(이것은 우리 사회가 남성 중심적임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평등한 세상에 살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드물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페미니즘의 한계이자 과제이기도 한데, 바로 이 책에서도 그런 식의 진술들이 종종 눈에 띈다.  

“이러한 대립항들은 …… 남성이 자신을 정의하기 위해, 남성의 입장에서 자신 외의 것들을 배타적으로 구성한 ‘이데올로기’다.” -21쪽, 정희진

  이와 같은 문장들에서는 마치 남성이 세상을 지배하고 조정하는 권력자처럼 묘사되어 있다. 이 문장을 읽는 남성들은 (자신이 남성이라고 확신하기에)문장 안의 “남성”이란 표현이 자신을 지칭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이런 문장을 읽을 때 나 또한 매번 그런 느낌을 받게 된다. 하지만 정희진이 저 문장에서 말하고자 하는 “남성”이란 말은 당연히 ‘나’를 가리키는 것도 아니고, 다수의 남성들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고, 특정한 남성들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저자는 그런 의미로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니다.  

“남성 권력은 현실을 진단하고 정의 내리며 경계를 만드는 힘을 의미하는 것이지, 누군가가 남성성을 ‘가진 것’이 아니다.” -25쪽, 정희진

  바로 몇 페이지 뒤의 설명을 진지하게 읽었다면, 다시 앞 페이지로 소급하여 그것이 일부 남성을 비판하는 것도, 혹은 남성 일반을 비판하는 것도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책에서 이런 식으로 ‘남성’이란 개념이 사용되었을 때, 그것은 현실에 추상적으로 존재하는 힘, 제도, 규범을 구체화시킨 것이지 남성을 비판하려는 의도로 말해진 것이 아니다. 이 서평의 소제목 “남성의 언어로 쓰인 페미니즘”의 “남성”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그걸 알고 있음에도 읽을 때마다 불편한 감정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이런 표현의 문제는 페미니즘이 극복하고 발전시켜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이런 불편함의 핵심은 우리가 속해 있는 언어 체계가 남성/여성의 이분법이라는 젠더 규범적 구조에 종속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규범을 강화시키는 방식으로 수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젠더 이데올로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페미니스트들의 발언조차 그것이 기존 사회의 언어 체계 안에서 수행될 때에는 오히려 그 반대의 기능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들은 무언가를 해체하기 위해, 바로 그 해체되어야 할 대상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이 점을 항상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이 책을 제대로 독해할 수 없을 것이다.   

 

무엇이 남성성을 부정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나 - 유물론으로서의 페미니즘

  이런 한계 안에서는 외과 의학, 생물학, 해부학, 심리학이 과학의 이름으로 젠더 규범을 강화해온 것과 마찬가지로(74쪽, 루인) 여성학 역시 애초의 취지와는 달리 여성은 어떻고, 남성은 어떻고라는 식으로 젠더 이분법을 강화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근대적 주체의 위치는 차이화된 존재로 남았던 여성이 아니라 차이를 어떻게든 극복할 수 있다고 보는 남성들에게 한정되었다.” -55쪽, 권김현영  

“남자가 외양을 더 꾸미지 않았다고 해서 여자로 오해받는 일은 드물다. 하지만 여성은 외양적으로 꾸미지 않을 경우 남자로 오해받기 쉽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성은 남성성을 자기 안에서 끊임없이 제거해야 여성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 ……이에 비해 남성은 남성성의 충만으로 증명되며, 굳이 빈자리를 만들지 않아도 여성성을 덧붙임으로 활용하면 꽃미남, 패셔니스타 등의 칭호를 얻을 수도 있다. 또 없어도 좋다. 없으면 없는 대로 호걸, 마초 등의 늠름함을 획득할 수 있다.” -136쪽, 한채윤  

  이런 진술도 마찬가지로 소외되고 억압된 여성과 특권을 지닌 남성이란 이분법적 구도로 이미지화될 수 있다. 이 역시 언어적 한계로 그 진의가 충분히 전달되기 힘들었다는 점을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그렇기만 한가? 언어적 한계로 인해서 그 의미가 우리에게 잘못 전달되고 있는가? 언어적 한계를 감안하고 보더라도 저 말은 분명 남성과 여성 사이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왜 이들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남성성/여성성을 대비시키며, 여성을 부당하게 소외된 이들로, 남성을 부당하게 특권을 지닌 이들로 판단할까? 이런 질문은 앞서 말했듯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과 혐오의 토대를 이루고 있다. 많은 페미니즘 담론들은 남성을, 그리고 남성성을 권력, 폭력, 특권과 관련시키고 있다. 이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다.   

  과거 마르크스는 자신의 이론이 인간의 노동을 수치화된 노동력으로 환원시키고 있다는 비난에 대해 이렇게 대답했다. 인간을 수량화된 노동력으로 도구화시키는 것은 자신의 이론이 아니라 바로 자본주의라고. 우리는 이런 마르크스의 대꾸를 귀담아 들어야 한다. 남성을 부당한 특권계급으로, 폭력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은 페미니스트들이 아니라 바로 남성 중심 사회이다. 사람들을 여성/남성의 이분법적인 젠더 질서에 강제로 편입시키고, 그런 젠더 질서에서 그 사람이 어디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권리를 불균등하게 배분하는 것, 그리고 이런 현실을 은폐하고 재생산하는 구체적 기관으로 우리의 몸을 부당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의 사회 구조이다.   

  페미니즘은 그런 은폐된 현실을 언어를 통해 불완전하게 드러내며, 더 나아가 그런 지배 구조에 균열을 내고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의식과 이데올로기와 개념과 언어를 문제 삼고 있지만, 그 시작과 끝은 언제나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현실적인 것들이다. 그런 한에서 페미니즘은 유물론적이다. 다만 그것이 어떤 유물론이 될 것인지는 각각의 페미니즘적 실천이 수행하는 역할이 결정할 것이다.(가령 이 책에서 정희진은 메타 젠더적인 접근을 통해 자신의 글이 수행할 역할을 설정한다. “메타 젠더는 남녀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기존에 구축된 젠더화된 담론 체계를 상대화하고 그 장 밖의 사고를 모색하는 것을 의미한다.” -18쪽, 정희진)   

 

페미니즘은 처세술이 아니다  

  자신이 어떤 행동을 통해서 좋은 남성이 될 수도 있고, 나쁜 남성이 될 수도 있다는 믿음 역시 폐기돼야 하는 전제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좋은 남성이 되게 하는 일련의 행위 준칙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런 행위 준칙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런 준칙의 목록표를 작성하는 것은 페미니즘의 역할이 아닐뿐더러 바로 페미니즘이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페미니즘에 어떤 입장을 취하든 종종 “남성성을 혹은 남성을 그렇게 비판하고 있으니, 그렇다면 말해봐라.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를”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 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이것은 페미니즘을 일종의 처세술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포지티브하게 말하면 ‘좋은 남성’이 되는 방법에 대한 것이고, 네거티브하게 말하면 비판받지 않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 이 책이 남성성 혹은 어떤 남성을 비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비판받아야 하는 남성성의 목록을 작성한 것도 아니며, 비판받을 만한 남성들의 유형을 제시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남성의 입장에서는 ‘날 욕하는 건 아니니까’하고 넘어갈 문제는 아니다. 모든 비판적 담론이 그렇듯이 페미니즘 역시 기존의 진리관과 가치 체계를 근본적으로 공격한다. 진리관과 가치 체계라는 것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물리적 실체가 아닌 이상, 즉 그 진리관과 가치 체계라는 것이 각 개인의 신체에 체화된 형태로 존재하는 한, 그 사회적 질서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그 비판에 동의하든 안하든 말이다.   

  하지만 난 그 불편함이 시급히 해소되어야 할 불편함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존 사회 질서의 모순이 해결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공유되어야 하는 불편함이다. 신체에 통증을 느낀다면 어딘가에 문제가 발생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 통증이 일시적인 충격에 의한 것이라면 상관없지만 만약 중병이 난 것이라면? 지금 당장의 불쾌함을 해소할 수 있도록(욕 안 먹도록)하는 행동 준칙을 요구하는 것, 여성학이 처세술화되었을 때 비로소 실용적이며 효용이 있는 것이지 그런 걸 못한다면 비판을 위한 비판일 뿐 아무 의미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위암 환자에게 진통제만 처방해주는 것과 같다.   

  좋은 남성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 혹은 비판받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의미 없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앞서도 말했듯이 어휘를 거르고, 말투를 가다듬고, 행동거지를 조심하며, 대화주제를 검열하는 일련의 행동들을 하는 것은 매우 당연할 뿐 아니라 중요한 일이다. 다만 그것은 이 책과는 관계가 없다.    

 

이론이자 실천으로서의 남성성 연구 

  이 책이 어떤 점에서 우리 같은 평범한 남성에게 의미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은 페미니즘이 이론이자 실천이라는 이중적 성격을 지닌다는 점과 관련지어 생각해봐야 한다. 이 점은 앞서 인용했던 한 블로거가 자신의 서평에서 언급한 내용과 일치한다. “책을 읽어보니 확실히 <남성성>이 문제라는 것은 알겠다. …… 좋다. 다 좋다. 그런데 ‘어쩌란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여기서 문제시 되는 것은 ‘남성성’이 문제라는 것과 ‘어쩌란 것’인지 잘 모르겠다는 점이다. 

  일단 이 책은 ‘남성성’이 문제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남성의 언어로 쓰였다는 한계, 현실과 개념의 관계를 도치시키는 관념론적 경향, 그리고 즉각적인 실용성(불쾌감의 해소)을 요구하는 태도를 치우면, 이 책이 시도하는 남성성 연구의 본모습이 나타난다.   

“젠더 연구로서의 남성 연구는 보편으로서의 남성의 특권적 지위에 대해 다시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이 왜 어떻게 보편자의 자리를 배정받게 되었으며, 이에 대한 협상과 수용, 혹은 일탈과 저항을 누가 어떻게 해왔는지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다.” -57쪽, 권김현영     

  권김현영은 남성성을 연구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읽는 것에서 “보편적이고도 고유한 실재가 되려는 남성성의 욕망만을 비판하게 되고, 보편화의 욕망과 남성적 보편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는 함정”에 빠져버려 “폭력, 전쟁, 권력과 같은 모든 지배체제의 구성 요소들을 곧 남성성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게”(56~57쪽) 되는 것을 경고한다.    

  이 책은 남성성을 비판한다. 그러나 이것은 남성성을 문제 있는 것으로 본다는 것이 아니라, 남성성 자체를 문제 삼겠다는 것이며 남성성을 “해체”한다는 것이다. 남성성을 해체한다는 것은 남성성을 없애버리겠다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남성성은 ‘없다’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존재하지 않음이 아니라 남성이 남성성과 연결되는 것은 당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17쪽, 정희진  

  ‘남성=남성성’으로 이해된 당위를 해체하는 것은 남성성을 ‘역사화’하고 ‘다양화’하는 한편, 그 근거를 ‘불분명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한 이 책의 전략은 “분과 간, 경계 간”이라는 총서의 모토만큼이나, 남성성이라는 영토 안에 머물지 않는 것이다. 특수하고, 비정상적이고, 애매모호한, 그런 시간과 공간(역사와 신체)에 주목함으로써 남성성의 핵심에 질문을 던진다.   

  정희진이 서구의 지배적 남성성의 역사를 추적하고, 권김현영이 식민지 근대 전환기와 식민지 시대의 남성성의 다양한 면모를 드러내며, 루인이 외과 의학이 내과 의학을 대신해 지배적 의학이 되는 과정을 남성성을 통해 설명할 때, 남성성이란 게 사회적 변동에 따라 얼마든지 손상되거나 변형되기 쉬운 것이란 사실이 드러난다. 그리고 나영정이 쓴 성전환 남성에 관한 글과 한채윤이 쓴 레즈비언 부치에 관한 글 역시 주목할 만한데, 남성성이 젠더 규범적인 남성의 신체와는 다른 신체와 결합하는 모습들을 통해, 남성성이 그 자체로 특정한 성에 귀속된 것도 고정된 것도 아니며,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고 변형되어,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렇듯 남성성은 그것이 어떤 시대와 관계하느냐, 어떤 사회와 관계하느냐, 어떤 신체와 결합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인다. 남성성은 확실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남성성의 불확실성이야 말로 이 책의 핵심이다.    

  심지어 ‘어떤 신체와 결합하느냐’를 넘어서 ‘어떤 신체’라는 것조차 불투명한 것이다. 우리는 어째서 “피부 표면을 힐끔 보는 것만으로 상대의 젠더를 알 수 있다”(66쪽, 루인)고 믿을까? 어떤 신체가 남성이며 어떤 신체가 비-남성인지에 대한 과학적인 근거란 빈약하기 짝이 없다. 의사들은 성별이 모호한 신생아에게 자신들의 의료 과학적 지식을 토대로 성별을 부여하지만, 결국 “의학적 처방은 늘 문화적 처방”(81쪽, 루인)이다. 즉, 그 의사가 속한 사회의 문화적 규범이 한 인간의 성을 결정한다. 이것은 성별이 모호한 “비정상적인” 사람에게만 해당된다고 무시할 수 없다. “의료 기술 기획을 통과하지 않는 섹스-젠더는 없으며, 외과 기술 기획이 가공하지 않은 인간은 없다.”(82쪽, 루인)    

  따라서 이 책의 이론적 성과는 남성성을 다양하고 복수적인 것으로 만드는 동시에, 그것이 뿌리 없고, 불확실한 것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여기에는 남성을 비판하기 위한 목록표도 없고, 그런 비판을 피하기 위한 적절한 행동의 목록도 없다. 다만 우리가 당연시해온 것들을 그 뿌리부터 흔들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가! - 새로운 연대의 가능성 

  그렇다면 이것은 아슬아슬한 지적 유희인가? 아니다. 페미니즘의 실천적 면모는 책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 책이 정치 팜플렛이나 정당의 행동강령 같은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다만 이 책에서는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가!”란 질문을 외면한 것도 아니다. 그것이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처세술적인 방식이 아닐 뿐이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남성성은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좋은 남성은 없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실제로 좋은 남성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젠더 문제, 모든 젠더 불평등을 외면한 채 부정적인 것으로 분류되는 특정한 남성성을 허물 벗듯 벗어버리고 홀로 좋은 남성이 될 수 있는 그런 가능성은 배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이 책이 그에 대해 뭔가 단서를 제시한다면 그것은, ‘처세’가 아니라 ‘실천’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실천이란 말이 거창하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정의감이나 양심에 호소하는 것, 도덕적 책무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처세이든 실천이든 그 출발점은 비슷하다. 불안한 것이다. 그 불안은 남성성 해체의 불안이다. 남성성을 해체하는 것은 이 책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에 존재하는 것이며,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남성성을 위협하는 것은 페미니스트들이 아니라 남성성이 특정한 방식으로 특정하게 구성되어 있다는 현실 그 자체이다. 그것은 의료 과학이기도 하고, 현실에 존재하는 다양한 신체들이기도 하며, 신자유주의 같은 사회 변동이기도 하다.

"남성성이 특정하게 구성되고 유지되는 측면은 비성전환남성에게도 남성 되기를 불확실한 것으로 만든다.” -100쪽, 나영정 

  남성들(혹은 비-비남성)이 비남성을 남성의 영역에서 배제해왔던 바로 그 전략으로 인해, 남성들 스스로에게도 남성성이란 것이 불투명해진다. 엄기호는 이 책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만들어낸 불안정한 현실이 남성성을 변모시키고 있다고 진단했다. 현재의 남성성이 특정한 방식으로 유지될 수 있는 조건들로부터 일부 남성들이 차례차례 추방당하고 있다. 노동시장으로부터의 소외, 노동 형태 및 착취 형태의 변형, 소비 자본주의의 확산, 그리고 시민권의 박탈 등을 통해 남성성의 근거는 취약해졌으며, 뿐만 아니라 남성 간의 차이-차별도 확대되고 있다. 이렇게 남성성을 위협받는 자들이 취한 각기 다른 생존 전략(찌질이-속물 되기, 초식남-동물 되기, 마초-괴물 되기)이 바로 처세에 가까운 것이다. 이보다는 좀 더 아름다운 새로운 생존전략을 원하는가? 그래서 찌질이, 초식남, 마초의 옆에 좋은 남성이라는 새로운 전략을 하나 더 추가하고 싶은가?  

  엄기호는 전혀 다른 대안을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남성‘들’ 간의 불평등에 대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깨어져버린 남성들 간의 공동체를 대신하여 불평등하게 취급받고 있는 사람들 ‘간’의 새로운 연대로 옮겨가는 것”(164쪽, 엄기호)이다. 남성성이라는 것이 이미 복수적으로 존재하고, 남성들 간의 차이와 다양성이 실재하는 것이지만, 그런 복수성, 차이, 다양성을 무마하여 남성간의 보편성, 평등을 보장해주는 사회적 역능이 바로 젠더 관계에서 남성 지배의 핵심이었다. 그런데 지금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거치며 그 사회적 역능이 소멸되었다. 이것은 오히려 새로운 가능성이다(“‘국민’을 넘어 연대하고 이 시대의 배제와 추방, 그리고 양극화에 대해 새롭게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 -164쪽, 엄기호) 이것은 새로운 연대이며, 진정한 의미에서의 연대이다.    

 

좋은 남성은 없다! 

  결론적으로 내가 이 책을 통해서 말하고 싶은 것, 이 책을 통해서 비로소 인식하게 된 것은 좋은 남성은 없다는 것이다. 좋은 남성이 되고자 하는 나의 기획, 혹은 남성들의 욕망은, 또 다른 "보편화의 욕망"일 뿐이다. "보편화의 욕망"의 체제 안에서는 남성성에 대한 어떤 근본적인 비판도, 남성성의 다양한 면모도, 불확실성도, 모두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이해될 뿐이며, 자기 존재의 불안을 심화시킬 뿐이다.   

  그러나 이런 "욕망을 버려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건 애초에 자기가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욕망은 내 안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체와 감각이 외부, 타자, 질서 등과 만나며 발생되는 무엇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보편화의 욕망"과 거리를 둔다는 것은, 자신의 신체와 감각이 다양한 외부들에 대해서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새로운 것을 발생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출발점이 바로 남성성 연구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좋은 남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남성성 그 자체를 상대화하고 의심하는 것이다. 그것은 남성성을 혹은 자신의 남성을 나의 것이든 나의 것이 아니든, 무수한 시선과 관점으로, 자기 영토에서 벗어나, 다양한 방향에서, 다양한 방향을 향해, 경계를 넘나들며, 목격하는 것이다. 남성성이란 것이 특정한 신체에 속한 것도 아니며, 특정한 의미를 지니는 것도 아닐 때, 자신이 명명한 남성성은 불확실한 것이 된다. 더 나아가 자신이 남성이라는 것조차 불확실한 것이 된다. 내가 지금까지 단 한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것, 내가 남자라는 것, 내가 "정말 남자인지 확정할 근거가 불확실"해질 때의 당황스러움. 나는 단지 테스토스테론이 좀 더 많이 분비되는 신체이며, 비율상 좀 더 남자에 가까운 것인가?  이것이 정말 일상적인 생활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혼란에 빠뜨린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책을 읽는 순간의 경험(카타르시스)이다. 이 짧은 순간을 통해 단단했던 모든 근거와 전제들이 흔들리는 경험은, 자신이 위협받는다는 불안이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의 발견이다. 자신이 다른 무엇이었을 수도 있다. 자신이 다른 무엇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자신의 처세가 아니라, 자기와 타자의 관계를 새롭게 변형시킴으로써 가능하다. 그것이 바로 "평등 자체를 다시 사고하는 것", "시민권을 사유하는 방식의 대전환"(164쪽, 엄기호), 즉, 새로운 연대의 모색이다.  

 

마치며 

  읽고 나서 다시 읽으면 또 새로워지는 이 책 때문에, 애초의 생각과는 달리 엄청난 분량의 서평이 되고 말았다. 이 서평을 쓴 이유는 나 스스로가, 이 책에 대해, 그리고 페미니즘에 대해 일정한 거리감과 부담이 있었기 때문에, 책을 읽는 과정에서 약간의 자기 분석이 필요함을 느껴서였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 책에 대한 다른 독자들(남성이든 여성이든)의 반응을 보고, 이 책을 그리고 페미니즘을 약간은 변호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건방졌던 것 같다. 이 책을 진지하게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 번이 아니면 두 번, 혹은 세 번. 이 책은 스스로 오해를 생산해내기도 하지만, 스스로 그 본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하이브리드 총서라는 이름답게 매우 다양한 영역, 관점, 스타일이 교차하여 만들어진 이 책은 마치 매우 꾸깃꾸깃 구겨진 종이처럼 펼치면 펼칠수록 더 많은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난생처음 써본 이렇게 긴 글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내용을 반의반도 제대로 다루지 못한 것 같아 여전히 아쉽기만 하다. 또 하나 아쉬운 점은 이 책에서 비판적으로 검토해봐도 좋을 법한 부분들조차 내 스스로가 쳐놓은 울타리에 갇혀 제대로 다룰 수 없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어쨌든 이 서평은 이 책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이 책을 읽는 것에 관한 것이다. 그저, 하나의 독서의 흔적일 뿐. 욕심은 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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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호 2012-10-27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들의 ‘여장’은 당시 라이베리아 내전의 전시 집단 성폭력mass rape과 같은 남성성 수행과 전혀 모순을 일으키지 않았다.”(28쪽, 정희진)라는 문장이 쓰이고 읽혔을 때(왜 이렇게 쓰이고 읽혔는지는 아래에서 논하기로 하고),===
라고 하셨는데, "(왜 이렇게 쓰이고 읽혔는지는 아래에서" 못 찾았어요. ㅠㅠ 죄송해요. 알려주세요. 그게 궁금해서 끝까지 읽었거든요.
멋진 서평 감사합니다. '페미니즘에 자리 찾아주기'에 도움이 되었어요.^^

른느 2015-07-17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