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트러스트
에르난 디아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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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다 파르텐자는 자신의 일대기를 왜곡했다며 진실이 담긴 전기를 쓰겠다는 앤드루 베벨에게 고용된 대필 작가이다. 해럴드 배너 작가의 ‘채권’이라는 소설에서 앤드루의 아내 밀드레드가 정신병이 있는 여자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는 내용에 분노하며 밀드레드의 명예를 회복시키려 하지만, 아이다는 앤드루에게 밀드레드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록 그가 숨기는 것이 있다는 의심이 든다. 밀드레드에 대한 진실을 알아내고 싶어하지만 결국 알아내지 못한 아이다는 수십년 후 박물관으로 개조된 베벨 저택에서 밀드레드의 일기를 손에 넣게 된다. 일기장에는 투자의 귀재로 알려졌던 앤드루 베벨은 사실 밀드레드의 예측과 투자감각으로 부를 이룬 것이었으며, 밀드레드가 짚어낸 금융 생태계의 허점을 이용해 불경한 부를 쌓았던 것까지 드러나 있었다.

구성은 해럴드 배너의 ‘채권’과 아이다가 대필한 앤드루 베벨의 자서전, 그리고 아이다가 앤드루 베벨에게 고용되며 전기를 대필하던 과정의 회고록, 그리고 마지막으로 앤드루의 실체가 탄로나는 밀드레드의 일기로 이어진다. 사실 아이다의 회고록까지 읽으면서도 앤드루가 막장 소설의 피해자인 줄 알았던 나에게 밀드레드의 일기는 조금 충격적이긴 했다. 누구에게나 숨기고 싶은 진실이 있지만, 그 진실이 드러나지 않는 게 좋을 경우도 있지만, 우리는 자신의 양심 앞에서, 명예를 잃은 피해자 앞에서 당당해야 한다.
어딜 가나 번역이 문제라는 평이 많은데, 역시나 번역이 정말 고통스러운 수준이다. 영문과 출신 번역가인데, 옮긴이의 말도 번역체로 돼 있는 걸 보고 국어 수준이 얼마나 한심스러운지 알 만했다. 구성도 탄탄한 소설인데 새로운 출판사와 번역을 만나 새롭게 태어나면 좋겠다.

무력함은 종종 적의로 변하고, 자신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사람은 결국 그런 가치 절하를 남 맛으로 돌린다 는 걸 알기에 헬렌은 벤저민의 불안을 해소해주려 최선을 다했다. - P42

사람들은 대부분 각자가 승리에 있어서는 적극적 주체이지만 실패에 있어서는 수동적 객체일 뿐이라고 믿고 싶어한다. 승리하는 건 우리지만, 실패하는 건 우리가 아니다. 우리의 통제력을 벗어난 힘 때문에 망가지는 것뿐이다. - P52

1929년 10월 마지막 주, 맨해튼 중심가의 영향력 큰 금융업자에서부터 샌프란시스코 증권거래소에서 거래하 는 아마추어 주부에 이르는 대부분의 투기꾼들이 오직 자신의 감각과 가차없는 의지 말고는 감사할 대상이 없 는 성공의 주체였다가, 그들의 몰락에 유일한 책임이 있는, 길함이 있는데다 부패하기까지 한 시스템의 피해 자가 되기까지는 단 며질밖에 걸리지 않았다. 지수 하락, 공포라는 전염병, 비관주의에 떠밀리는 매도의 광기, 마진 쿨에 대한 광범위한 응답 불능..... 결국 공황으로 이어진 침체를 일으킨 것이 무엇이든 한 가지만은 분 명했다_버블을 키우는 데 일조했던 사람 중 누구도 그 버블이 꺼진 것에 책임을 느끼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들은 거의 자연재해와 가까운 규모의 재난을 당한, 아무 죄 없는 사상자였다. - P52

격앙된 연설, 잡지와 신문에 실린 만평(여기에서 벤저민은 대체로 흡혈귀나 독수리, 돼지로 묘사됐다), 그리고 그의 경력에 관해 흐릿하거나 노골적으로 조작한 폭로가 만연했음에도,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단 한 사람이 한 나라의 경제 전체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세계 경제 대부분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거의 모든 사람이 희생양을 두는 게 편리하다고 생각했고, 반쯤 은둔자로 살아가는 괴짜는 그런 목적에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아무튼 벤저민 래스크가 직접 위기를 설계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그로부터 계산할 수도 없는 이익을 올렸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이로써 그는 전 세계 금융업계에서 신적인 지위에 올라섰다. 새로 얻은 수많은 적들 사이에서도 그랬다. - P53

헬렌의 죽음이 그의 인생에 아무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본질적으로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애도는 결혼생활에 대한 좀더 근본적인 표현일 뿐이었다. - P82

돈을 준다는 건 힘든 작업이다. 계획과 전략이 아주 많이 필요하다.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 인도주의는 주는 사람에게도 해가 되고 받는 사람의 버릇도 망친다. 더 자세히. 너그러움은 배은망덕의 어머니다. - P111

우리의 행동은 하나하나 경제의 법칙에 지배된다. 아침에 처음 눈을 뜨는 것은 이익과 휴식을 교환하는 것이 다. 밤에 잠자리에 드는 건 이윤이 발생할 수 있는 잠재적 시간을 포기하고 힘을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처럼 하루종일 무수히 많은 교환에 참여한다. 노력을 최소화하고 소득을 높일 방법을 찾을 때마다 우리는 사 업적 거래를 하는 셈이다. 상대가 우리 자신이라도 말이다. 이런 협상은 우리의 일상에 너무도 깊이 배어 있어 거의 눈에 띄지도 않는다. 하지만 사실, 우리 존재는 이윤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 P124

우리 모두는 더 큰 부를 열망한다. 그 이유는 단순하며 과학적으로 밝힐 수 있다. 자연에서는 아무것도 안정적 이지 않으므로, 인간은 자기가 가진 것을 그냥 간직하기만 할 수 없다. 살아 있는 다른 모든 생명체가 그렇듯 우리는 번창하거나 쇠퇴한다. 이것이 살이라는 영역 전체를 다스리는 근본적 법칙이다. 그리고 모든 인간이 욕망하는 이유는 생존 본능 때문으로 - P124

아버지는 가까운 공동체 외부의 사람들과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어둡고 원한에 찬 섬에 고립되어 있었 다. 자신이 떠나왔으며 적개심을 품고 있는 나라와, 자신을 받아주었으나 완전히 수용하지는 않은 나라 사이 에 낀 채로 - P135

권력의 근원에 가까워질수록 주위가 조용해진다는 것이다. 권위와 돈은 침묵으로 스스로를 둘러싸고, 사람은 누군가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를 그들을 둘러싼 침묵의 두께로 측정할 수 있다. - P151

그들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모습이었다. 똑같은 검은 직모에 똑같은 짙은 갈색 눈, 비등비등한 키와 비슷한 체형. 그들의 얼굴은 얼굴에 대한 동일한 관님을 약간 변주한 것이었다. 내 얼굴이었다. 그들을 봄으로써 나는 나 자신도 바로 그 관님의 한 변주라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 셋은 동일한 유형의 다양한 구현이었다. - P151

정해진 형태가 없는 미래라는 블록으로부터 현재를 조각해낸다. - P155

너무도 화가 나서 놀란다. 저택을 개조해 박물관으로 바꿔놓은 건축가들은 원래의 보자르 분위기를 염치없는 현대적 유리상자로 파괴하고, 원래 디자인의 복잡한 과잉을 절제된 직선으로 길들인다는 뻔한 결정을 내렸다.
모든 표지판은 산세리프체로 적혀 있다. 그 시대착오적 간소함으로 불경을 저지르려던 게 틀림없다. - P163

내 일은 정답을 맞히는 거야. 언제나. 조금이라도 틀리면, 나는 모든 수단과 자원을 동원해서 내 실수가 더이 상 실수가 아니게 되도록 하네. 현실을 조정해서 내 실수에 맞도록 구부리지." - P173

내가 타자로 치는 단어는 늘 과거에 있는 반면, 내가 생각하는 단어는 늘 미래에 있었다. 그러므로 현재는 이 상하게도 아무도 살지 않는 공간이 되었다. - P191

베벨은 밀드레드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것보다 그녀를 완전히 특징 없고 안전한 인물로 바꿔놓는 것을 더 원했 던 것 같다. 베벨의 목소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내가 당시에 읽었던 위대한 남자들의 자서전에 나오는 아내들 과 똑같이 말이다. - P197

나는 멈춰 섰다. 그 순간의 경험은 오늘날까지도 내가 증오심을 측정하는 기준으로 남아 있다. 나는 돌아가 테 이블 옆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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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감정의 이해
엠마 헵번 지음, 김나연 옮김 / 포레스트북스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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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감정은 비이성적인 반응이나 골치 아픈 욕망과 열정과 같은 의미로 취급되어 왔기 때문이죠. - P22

감정은 오해받기도 하고, 수치스러운 것으로 묘사되거나 경험해서는 안 되는 부정적인 것으로 묘사되었습니 다. - P22

뇌를 일걸어 ‘불확실한 세상에서 취약한 신체를 이끄는 예측 기관‘이라고 설명합니다. - P31

뇌는 항상 한발 앞서서 앞으로 닥칠 일과 생존을 위해 신체 예산을 가장 잘 사용하는 방법을 예측합니다. - P33

불확실성은 우리 뇌와 신체 예산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뇌는 많은 것 을 요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뇌에 들어오는 데이터가 뇌의 예측과 일치하지 않으면, 뇌는 정보를 재편 성하고 이해하고, 예측을 수정합니다.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불확실성은 우리 뇌를 앞으로 다가올 일에 대 응하기 위한 예측 가능성을 키우기 위해 뇌를 활성화시키며 에너지를 소모하게 만듭니다. 불확실성에 대응하 기 위해서는 많은 인지 자원이 필요하고 이는 신진대사를 소모하고 신체 예산에서의 지출을 유발합니다. 이러 한 상황이 너무 오래 지속되면 신체 예산이 고갈되어, 번아웃이나 각종 건강상의 문제를 겪을 수도 있지요. - P43

스트레스 요인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스트레스를 줄이거나 늘릴 수 있습니다. 누구나 때때로 힘든 감정 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지만, 연구에 따르면 지속적인 회피는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하지만 스트레스 요인을 파악하고 이에 대응할 수 있는 유용한 방법을 찾으면 감정과 기분이 나아질 수 있습니다. - P47

잘못된 과학을 반박해야 하는 것처럼, 도움이 되지 않는 믿음이나 신념에 기반한 우리의 감정적 믿음도 반박 할 필요가 있습니다. - P61

브라운은 7만 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를 설명하면서 많은 사람이 자기 경험을 ‘화가 났다(화), ‘슬프다‘,
"기쁘다(행복)" 등 크게 세 가지 단어로만 명명하고 인식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세부적인 부분까지 들어가기보다는 ‘화가 났다‘, 기분이 좋다", ‘스트레스가 심하다‘와 같이 포괄적인 표현 으로 감정을 정의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 P76

어휘력을 늘리는 것은 감정의 세분성을 높이는 좋은 시작이며, 다른 언어에서 감정이 어떻게 분류되는지 이해 하는 것은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감정을 더 잘 예측하고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더 많은 개념과 범주를 추가 할 수 있습니다. - P77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자부심은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훌륭하다는 것, 우리 모두는 매일 극복해야 할 어려움이 있다는 것, 끊임없이 롤러코스터를 타며 힘든 시기와 감정을 헤쳐 나간다는 것 등 우리의 성취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 P102

오만은 넘어지기 전에 온다"는 속담(또는 신화)처럼, 잘못된 자존심은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종종 자 존심은 자아가 크거나 오만하거나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느끼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즉 우리가 자신의 업적을 감추고 성공을 과대 포장할 때 자존심을 부린다는 뜻이지요 - P102

불안이 닥쳤을 때 우리의 반응은 불안의 파도를 타거나. 빠져나오기 어려운 악순환의 고리에 빠지게 할 수도 있습니다. 불안하면 기분이 좋지 않기 때문에 묻어두려는 마음이 드는 것이 당연하지만, 회피는 문제를 해결 하지 못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뇌가 더 나은 예측을 하는 법을 배움 수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 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실제 마주해야 할 사회적 상황을 회피해버리는 경우도 있는데요. 이 경우 상황 을 직접 겪지 않고 본인의 가설을 실험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생각이 그대로 굳어집니다.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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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원도 - 《구의 증명》이 있기 전 《원도》가 있었다!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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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경험은 쉽게 자신의 삶을 좌우하는 판단의 기준이 되기 쉽고, 이런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평생 ‘삶을 통째로 지배’(144p.)당하고 만다.
원도의 아버지는 원도 앞에서 약을 탄 물을 먹고 자살했다. 어머니의 재혼 이후 새아버지와 어머니가 고아원에서 위탁받았던 같은 반 친구 장민석과 경쟁에서 늘 열패감을 느꼈던 원도의 기억은 그의 어린 시절을 불화만 가득했던 시기로 기억한다. 성인이 돼 다시 만난 장민석이 원도가 가졌던 장민석에 대한 열등감을 알고 있었다고 말하는 순간 수치심이 몰려와 장민석을 죽여버린다.(은유적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전개상 원도가 장민석을 죽인 듯하다.)
원도는 은행을 다니며 공금을 횡령해 자산가가 되지만 퇴직 후 횡령이 드러나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도피생활을 한다. 허름한 여관에 들러 자살을 시도하는 원도는 여관주인에게 발각돼 쫓겨나면서 자신은 왜 죽지 않았는지 계속해서 자문한다. 평생 자신의 살아 있는 이유의 답을 찾지 못하는 원도는 새아버지 친구인 치료사에게 자신의 실제 아버지는 죽은 아버지가 아니라 새아버지라는 얘기를 들었다. 누가 자신의 친아버지인지 끝내 답하지 않는 엄마는 노년이 되어 장민석의 이름도 잘 기억 못하고, 원도는 죽은 아버지가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아버지를 믿으라’는 이야기만 계속 되뇌인다.

왜 사는가.
이것은 원도의 질문이 아니다
왜 죽지 않았는가.
이것이다. - P11

하나하나 옳은 말이라서 딱히 새겨들을 말이 없었다.
그것운 누구에게나 들을 수 있는, 어디에서나 읽을 수 있는, 분명 옳은, 모두의 말이었다. - P13

돈을 빌려달라고 찾아온 사람의 형편을 까다롭게 따지고 심사하다 보면 때론 스스로가 대단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 P20

쓰레기통에 그득 쌓인 종이 쪼가리와 돈이 다를 것 없어 보였고, 늦가을 길바닥에 나뒹구는 노란 은행잎을 보 면서도 저것과 돈이 뭐가 다른가 생각했다. 때가 되면 차고 넘치는 것. 의미를 잃으면 쓰레기에 불과한 것. - P20

초반엔 실패도 했다. 실패의 원인은 신중함에 있다고 원도는 생각했다. 큰돈을 벌기 위해서는 욕심을 내야 했 다. 치밀한 셈보다 과감함이 필요했다. 망설이지 않아야 했다. 셈과 판단은 순식간에 이루어져야 했고, 이성보 다 감각을 믿어야 했다. - P21

생각은 무계가 없다. 유령처럼 존재하는 그것은 유령처럼 사람을 흘린다. 이성이나 논리가 아니라, 들릴 듯 들 리지 않는 숨소리. 보일 듯 보이지 않는 그림자, - P24

완도를 비롯한 남자들은 자기 아닌 모든 것에 무관심한 척하면서도 내심 상대와 자신을 끊임없이 비교하며 자 발적으로 자존심을 다치거나 열등감을 느꼈다. - P26

단 하루도 거를 수 없는 경쟁 속에서 원도는 점점 불평불만이 많은 사람이 되었다. 무엇에 관해서건 평가를 하 고 단점을 찾고 트집부터 잡아야만 손해 보지 않는 기분이었다. 일단 반대하고 거부하여 상대의 마음을 조인 뒤 내키지는 않지만 인정하고 수락한다는 포즈를 취하는 데 익숙해졌다. 얕보이지 않으려면 그래야 한다고 믿 었고, 그 믿음은 원도의 성격을 형성했다. - P29

진인사대천명이라고 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죽을 만큼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며, 그 후 에는 하늘의 뜻을 기다려야 한다고, 그 이치를 받아들이는 순간 비로소 어른이 된다고, 그렇게 인간으로서 성 숙과 성장이 완성된다고들 했다. 하지만 원도는 어른보다, 성숙보다, 성장보다 원하는 그것을 갖고 싶었다. 그 것 아닌 다른 것은 원치 않았다. 볼 수도 만질 수도 들을 수도 없는, 하늘의 뜻 따위로 성공과 실패가 갈리는 것이 경쟁이라면, 그것을 굳이 경쟁이라고 부를 이유가 있는가 생각했다. 죽을 만큼 최선을 다한 뒤 기다리는 것이 고작 하늘의 뜻이어야 하는가. 그럴 바에야 차라리 모든 것을 통째로 운에 맡겨 제비뽑기나 사다리 타기 로 승패를 가르는 편이 훨씬 더 합리적이고 이치에 맞는 것 아닌가. 운이라는, 혹은 우연이라는 여백을 전제하 는, 경쟁의 상황도 조건도 천차만별인, 그래서 그다지 공정하지 않은 경쟁을 공정하다 믿고, 믿으라고 강요하 는 것 아닌가. - P29

어른 원도는 누구보다 경쟁의 물을 정확히 인지하고 이용할 줄 알았다. 경쟁에 깃든 우연이란 함정을 원망하 기보다 그것을 최대한 기다리고 활용하여 자기 몫을 챙겼다. 정정당당하게 실력으로만 경쟁하는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사회는 원도에게 결코 이롭지 않았다. 빈틈과 불합리와 부조리가 있는 곳에 승산도 있었다. - P30

자살은 죽음의 형식일 뿐 내용이 아니다. 내용에 대해서는 모두들 입을 다물었다. - P39

선택을 너무 오래 미루면 결국 누구도 원치 않는 최악의 선택이 나를 선택하게 마련이지. 후회해봤자 소용없 어. 시간을 되돌릴 순 없잖아. - P41

착각하지 마. 우리는 선택하지 않아. 선택당하지. - P41

아무리 불품없고 비천한 것이라도, 그런 입장과 역할이라도, 장민석이 가지는 순간 그것은 무엇보다 좋고 담 나는 것이 되었다. - P49

유경은 잘못을 지적하려고 원도 곁을 지키는 사람처럼 굴었다. 당구 채로, 이해한다는 말로, 몇 대 맞을래라는 말로 원도의 오류와 책임을 지적하면서 원도 아닌 다른 존재를 요구하는 선생이나 부모처럼, 유경은 사랑이라 는 말을 방패 삼아 있는 그대로의 원도를 부정했다. - P55

나는 고장 난 게 아니라 원래 이런 인간이라고, 원도는 생각했다. 원래 이런 인간인데 유경은 나를 고장 난 인 간 취급하고, 이러저러한 것을 고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 P55

앞으로 잘해봐야겠다‘ 라고 생각하는 아이는 드물었으며, 그 말을 따르더라도 ‘잘해보는 것‘의 정의는 그야말 로 제각각이었으니 결국 하나 마나 한 말이었다. - P58

무조건적으로 돈이 되니까 그런 겁니다. 사랑 싫어하는 사람 없죠. 돈 싫어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 그것을 원합니다. 김태경 씨. - P68

산 아버지는 친아버지가 아니어서 자식을 누구보다 반듯하게 키워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고, 그래서 친아버 지 이상으로 애쓴다고 원도는 생각했다. 하지만 ‘친아버지 이상으로 무언가를 해야 한다‘ 라는 생각 자체가 이 미산 아버지를 친아버지와는 거리가 먼 아버지로 만들어버렸다고 - P80

하지만 자유를 생각하지 않는 존재에게 자유는 불필요하다. 자유를 생각하는 존재에게 자유는 불가능하다. 그 러므로 자유는 없다. 자유분 아니다. 평등, 평화, 공정, 정의 등 사람이라면 추구해야 한다고 믿는 것 모두 마 찬가지다. 각자의 마음에 존재하는 그것에 대한 정의는 지문과 같다. 같을 수 없다. - P82

자신의 오해에 대해, 아무도 밝히려 하지 않았던 진실, 흰히 드러나 있기에 밝힐 필요가 없었던 진실, 모두가 알고 원도만 모르는데 원도만 모른다는 것을 아무도 모르는 진실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했다. 오해하고 착각하 는 삶이 나았다. 간단명료한 진실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결론을 내리기 두려웠다. - P86

왜‘라는 질문을 잃어버리는 순간 아이는 어른이 된다. 질문을 제거해버리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 없다. - P89

너는 외동이어서 모르겠지만 엄마의 사랑은 형제와도 나눌 수 없는 거야. 생존 문제니까. 대부분 내가 더 사랑 을 많이 받았다, 혹은 내가 더 사랑받지 못했다고 생각하지 공평하게 사랑받았다고 생각하는 경우는 거의 없 어. 그런데 형제도 아닌 너와 나라면 말이지. - P90

아르바이트생들 푼돈이나 벗어 돈을 모으니까 사정이 나아지지 않는 거라고 원도는 생각했다. 푼돈이나 벗어 봤자 재산은 겨우 그 정도 불어날 뿐이다. 1만큼 벗으면 1만큼 얻고 10만큼 벗으면 10만큼 얻는다. 돈을 많이 벌고 싶다면 10만큼 가진 자를 공략해야 한다. 하지만 사장 주변에는 1만큼 가진 자분이었다. 사장 역시 3정 도 가진 자에 불과했다. 10을 가진 자는 사장이나 원도 주변에 없었다. - P95

잘 사는 기준은 타인의 시선과 인정으로 만들어졌다. - P116

왜 사는가.
이것은 원도의 질문이 아니다.
왜 죽지 않았는가.
이것 역시 아니다.
그것을 묻는 당신은 누구인가.
이것이다. - P120

나는 지금 소통의 불가능을 믿는다. 타인의 몰이해를 믿는다. 그 믿음이 나의 입구며 출구다. - P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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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케이크의 맛 마음산책 짧은 소설
김혜진 지음, 박혜진 그림 / 마음산책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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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써지지않는다고 투덜거리다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 다. 지금 네 나이에 어떻게 글이 잘 써지겠느냐고, 나이가 더 들어야 한다고. 나는 그것이 어른들이 흔히 말하는 어떤 경험치에 관한 이야기라고 여겼다. 너는 아직 숙련공이 아 니므로 요렁과 노하우를 더 쌓아야 한다는 흔하고 뻔한, 그 래서 다소 맥 빠지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더 흐른 뒤 나는 그 말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건 단순히 실력을 쌓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시 간을 감각하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하고. - P7

십 년은 긴 시간일까.
수지는 역사 앞에서 미란을 배웅하며 그런 생각을 했다.
십 년은 서로에 대한 기억을 간직할 수 있는 시간인 동시에 서로에 대한 기억을 지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 P103

희나는 무심하게 대꾸했지만 마음속에서 뿌옇게 자리 잡고 있던 뭔가가 깨끗하게 걷히는 느낌을 받았다. 그 순 간, 어느 때보다 수연의 마음이 투명하게 들여다보였다.
자신이 그런 것처럼 수연 안에도 꺼내지 않았던 수많은 말 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그런 말들이란 기다리면 어느새 또 저절로 사라져버린다는 것을, 그 기다림 덕분에 관계가 이 렇게 이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된 거였다. - P128

하지 않아서 좋았던 것, 하지 않았으므로 그가 지킬 수 있었던 것,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잃지 않았던 모든 것.
케이크의 맛은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응축시켜놓은 것처
럼 아주 진하고 깊다.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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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업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8
강화길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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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라는 가장 작은 단위의 집단 내에서도 비교와 차별이 존재한다. 항상 동생한테 지고 살았던, 엄마에게 늘 비교 대상이고 무시를 당했던 지수가 평생 생각지도 못했던 운동을 시작해 ‘자극점’을 깨닫게 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가족들에게 무시를 당하는 건 지수뿐이 아니다. 지수의 아빠는 계속되는 사업 실패로 고모부에게 무시를 당하고 할머니도 그 둘을 비교하며 고모부의 행패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차별과 억압은 가정에서 제일 만연하게 이루어진다.
운동으로 동기를 찾았다는 부분도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평생 운동에는 소질이 없을 것 같던 사람들이 취미를 찾으며 인생의 관점이 달라지는 일은 생각보다 흔한 것 같다. 누구든 자신과 확신을 찾아내는 일은 좋은 일이니까.

여자는 말했다. 현대인들은 삶에 기대가 너무 많다고. - P18

그래서 어린 시절, 지수는 영애 씨에게 늘 꾸중 을 들었다. 영애 씨도 부모였으니까. 어쩔 수 없었 을 것이다. 원래 부모는 자식을 통해 이상을 추구 하고, 결핍을 보상받으려 하니까. (그러다 아이들 을 망치는 것 역시 부모의 위대한 숙명이다.) 영애 씨는 잔뜩 화가 난 날이면, 지수의 미래에 대해 험 악한 예언을 늘어놓았다. 정신 안 차려? 대체 뭐가 되려고 그래? 너 이러다가 아무것도 못 해. 형편없 는 인간이 되고 싶니? 미수에 대해서는 달랐다. 미 수는 어린 시절부터 공부는 물론, 체육과 음악, 미 술 등등다방면에서 도드라지는 성과를 냈다. - P40

아, 이런 거구나. 우리가 알아서 참고 맞춰주니까, 무슨 말이든 해도 된다고 생각했던 거구나. 무 슨 말을 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구나. 저 사람은 우리가 참지 않았을 때, 그러니까 지금과 같은 상황을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구나. - P65

본래 영애 씨는 누구에게도 신세 지는 사람이 아 니었다.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부탁만 하고 다니다 떠난 남편 때문인지, 영애 씨는 아쉬운 소리를 하 는 걸 누구보다 끔찍해했다. 동시에 누군가의 호 의를 견디지 못했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고 믿 었기 때문이다. 그 믿음 덕에 그녀는 친구들을 하나씩 떠나보냈고, 결국에는 혼자 남았지만 덧없는 신뢰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는 일은 없 었다. 그녀는 독립적이고 강건한 사람으로 나이 먹었다. (동시에 건조하고 어려운 사람으로) 그녀 는 자신의 그런 상태가 꽤 좋았다. 누군가에게 의 지할 필요 없이 오직 자기 자신만 지키며 살면 되 는 삶. - P79

"나 어디 가서 그런 이야기 듣는 사람 아니야. 그건 다 언니 착각이야." 지수는 물러서지 않고 반박했다. "다들 네 눈치 보느라고 말하지 않은 거겠지. 너는 그런 사람 아니면 옆에 안 두잖아?" - P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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