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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더미의 유산 - 한국전쟁에서 이라크전쟁까지 세계 역사를 조종한 CIA의 모든 것
팀 와이너 지음, 이경식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중세의 프리메이슨에서부터 현대의 빌더버그 그룹까지 수 백년의 내력을 지니고 긴 시간 동안 두텁게 쌓아온 방대한 인맥과 막대한 지금, 그리고 치밀한 정보력을 토대로 세계 주요 국가들의 정재계를 배후에서 조종하고 세계사의 주요 사건들을 막후에서 조작하며 실질적으로 세계 정부를 주무르고 있다는 ‘그림자 정부’에 대한 음모론은 지난 수 세기 동안 재야 역사학자들과 음모론주의자들로부터 끊임없는 관심와 호응을 받으며 끈질기게 제기되어 왔다.
하지만 현재까지도 그 실체를 분명하게 입증할 수 없는 그림자 정부론보다도 훨씬 더 노골적이고 분명하게 20세기 전체에 걸쳐 전세계의 정치와 경제에 어두운 검은 손을 뻗쳤던 거대한 음습한 국제적인 규모의 조직이 실존하고 있으니 그것은 바로 미국의 CIA이다.
20세기 후반부 전체에 걸쳐 CIA가 케네디 암살에서부터 이라크의 대량 살상 무기 조작까지 미국 국내 정치에 어두운 손길을 드리웠던 것은 물론이고, 남미와 중동, 아시아는 물론 유럽의 정치에까지 노골적인 형태로 개입하여 암살과 파괴, 유괴, 협박, 심지어는 무력을 동원한 정부 전복까지 자행했다는 사실은 다른 나라들보다도 훨씬 더 강력한 미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우리에게까지도 이제는 의심의 여지조차 없이 폭로되어 있는 상태이다.
하지만 ‘세계 경찰’을 자임하며 2차 대전 이후 세계 최대의 강대국으로, 그리고 최근 20년 동안에는 유일무이한 초강대국으로 군림해 온 미국의 가장 방대한 촉수이자 강력한 실천 수단이었던 CIA의 성립 과정과 연혁, 내부 구조와 의사 결정 시스템, CIA가 반 세기 동안 전지구적 규모로 자행해 온 정보 공작 정치의 구체적인 사건과 형태들, 그리고 그 입안 및 전개 과정의 실상과 내막을 자세하게 파악할 수 있는 신뢰할 만한 서적은 이상하게도 찾아보기 힘들었던 것이 이해하기 힘든 사실이었다.
이런 모순적인 상황에서 출간된 [ 잿더미의 유산 ]은 그러한 CIA에 대한 궁금증과 의혹들을 단숨에 해소시켜 줄 만한 내용들을 1,000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 속에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채워놓아서 가히 ‘CIA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이라고 자신있게 단언할 수 있을 정도이다.
< 뉴욕 타임스 >의 기자인 팀 와이너는 20여년 동안 미국 정보 기관에 대한 기사와 글들을 지속적으로 써왔으며, 1988년에는 미 국방부의 비자금을 파헤친 기사로 퓰리쳐상을 수상함으로써 국가 안보와 정보 기관의 비밀 공작에 관한 한 최고의 전문가로 평가받고 있는 저널리스트이다.
이 책은 그가 수 년 간에 걸쳐 10여 명의 전, 현직 CIA 국장들과 300여 명의 요원들을 직접 인터뷰하고, 5만 건이 넘는 문서들과 2000건이 넘는 증언 자료들, 그리고 수 차례에 걸친 세계 각지의 현장 답사 기록들을 종합하여 정리해 낸 방대한 결과물이다. 저자는 이 책의 모든 내용들은 자신의 신분을 실명으로 밝힌 사람이 직접 말로 하거나 글로 쓴 신뢰성 높은 자료들로만 구성되었기 때문에 익명의 정보 제공자로부터 제공받은 확인할 수 없는 소문이나 추측들로 채워진 기존의 책들과는 분명히 구분되는 1차 보고서와 자료들만을 바탕으로 작성된 ‘최초의 CIA 역사서’라고 밝히고 있다.
저자가 이처럼 이 책의 기초 자료들과 증인 및 증언들에 대한 신뢰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바로 이 책에서 밝히고 있는 CIA의 본 모습이 너무나도 어처구니없고 실망스럽기 때문이다. 저자는 CIA의 태동 자체부터가 2차 대전 이후 새롭게 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이 세계 전체 규모의 정보를 조정하고 통제하기 위해 체계적이고 치밀하게 조직된 것이 아니라, 2차 대전 중 수많은 실수와 실패를 저질렀던 OSS의 인물과 조직을 그대로 이어받은 토대 위에서 무원칙하고 계획성없이 임의로 창설되었고, 그후로도 조직적이거나 효율적인 운영과는 거리가 멀고 전문성에 있어서는 더더군다나 떨어지는 취약한 정보 기관으로 유지, 운영되어 왔다고 폭로하고 있다.
설립 초기부터 영국이나 러시아의 첩보 기관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전문성이 부족하고 훈련이나 운영도 허술하여 수많은 요원들을 무의미하게 희생시켜 온 CIA는 철의 장막 내에 정보원을 침투시키려던 공작에 모두 실패하고, 냉전 이후 처음으로 CIA의 역량을 시험받은 무대가 된 한국 전쟁에서도 전쟁의 발발과 중국의 참전을 전혀 예측해내지 못했으며, 설상가상으로 한국 전쟁 당시에 북한에 침투시킨 수 천명의 한국인 요원들을 모두 잃는 무능력함을 노출시켰다. 한국인 요원들을 통해 입수한 정보들도 모두 거짓이거나 가짜였음을 한참 나중에야 알게 되었고, 심지어는 실수로 이승만을 죽일 뻔 하여 화가 난 이승만으로부터 강제 출국 명령까지 받는 등 무기력하고 무능함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말았다.
현지의 언어를 말할 줄 알거나 이해하는 전문 요원 하나 없음은 물론 현지 인사들의 신상 명세나 전력, 심지어는 현지 지도조차 갖추고 있지 않은 상식 이하의 비전문성으로 점철된 CIA의 해외 공작은 이란과 시리아의 쿠데타 지원과 과테말라와 인도네시아 정부 전복 기도 등이 모두 처참한 실패로 돌아가고, 이라크와 쿠바에서도 미국의 의도와는 정반대의 결과를 낳음으로써 정보와 실행 모두에서 능력이 없음을 만천하에 공개하고 말았다. 이 시기 CIA의 유일한 성공 사례로는 막대한 창당 자금 지원으로 일본의 자민당을 매수한 것 정도 뿐이었다.
케네디 시대에 접어들면서 CIA는 쿠바 침공을 계획하여 피그스만 작전과 카스트로 암살을 실행했으나 역시나 실패하였다. 그리고 쿠바 사태의 해결 역시 케네디가 터키에 있는 미군 미사일 기지를 철수하면 그 교환 조건으로 소련이 미사일 기지를 철수하겠다는 흐루시초프의 타협안을 받아들인 것에 불과하다는 새로운 사실도 이 책을 통해 폭로된다.
CIA는 한국과 쿠바에서의 실패 이후 베트남에서도 여전히 실수를 반복하는데, 고 딘 디엠을 제거하는 쿠데타 세력을 앞뒤 가리지 않고 지원함으로써 고 딘 디엠과 고딘 누를 자살로까지 몰고가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베트남 정부를 무력화시키고 만 것이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 내내 지속된 CIA의 잘못되거나 왜곡된 정보들은 결국 미국을 베트남이라는 수렁 속으로 깊숙이 밀어넣는 역할을 하고 말았다.
CIA는 케네디 암살 사건 때도 오스왈드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FBI와 정보를 공유하지 않고 은폐함으로써 이후 암살 계획의 배후로 지목받는 원인을 스스로 만들었다.
닉슨 시대에 접어들자 CIA는 미국 정치인과 일반 국민들에 대한 대대적인 사찰과 감청을 자행하였는데, 이것은 결국 워터게이트 사건을 통해 폭로됨으로써 CIA의 위상에 치명적인 타격과 불명예를 안겨주었다. 결국 CIA는 캄보디아 폭격과 칠레의 아예데 정권을 전복시키는 악명을 뒤집어 쓴 상태로 닉슨과 포드, 카터 대통령에 의해 백안시되고 영향력이 대폭 축소된다.
레이건과 부시의 공화당 정권이 들어섬에 따라 다시 CIA는 이란에 대한 공작을 시행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이란 콘트라 사건으로 공개적으로 곤경에 처하게 되고, 소련의 붕괴를 사전에 예측하지 못함으로써 정보 수집과 분석에서 무능력함을 만천하에 노출시킨 데다가, 9.11역시 사전에 예측하거나 방지하지 못함은 물론 이라크에 대량 살상 무기가 존재한다는 잘못된 정보를 입증하지 못함으로써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하고 결국 역할이 대폭 축소된 뒤 주요 기능이 국토안보국에 넘어감으로써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밝게 되었다.
50여년에 걸쳐 세계 최강대국의 강력한 검은 손으로 세계의 정보를 좌우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고, 적대국은 물론 우방국의 정치에까지 깊숙이 개입하여 조종을 획책하고, 자신들의 자의적인 필요에 따라 쿠데타 모의나 지원, 군사 개입, 심지어는 암살 시도까지도 서슴치 않는 등 무소불위의 영향력을 시행함으로써 전세계로부터 증오와 공포의 대상이 된 CIA이지만, 그 실상을 들여다보면 정보 기관으로써의 가장 기본적인 요건들조차 거의 충족시키지 못함으로써 자신의 존재의 기반인 정보의 부실함이 미국의 이해를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하고, 결국 그 부실한 정보 수집과 분석 능력이 CIA 자신의 목을 조여 조직의 붕괴를 초래하게 되었음을 저자는 CIA가 50년 동안 자행해 온 굵직굵직한 정치 공작의 내막과 실상을 당시 그 현장에 있었던 CIA 내부 인사의 증언을 토대로 생생하고 자세하게 재생해 보여준다.
이 책이 권위있는 상들을 수상하고 수많은 매체들로부터 절찬을 받은 것은 바로 지금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CIA라는 20세기 후반 세계 정치계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쳤던 정보 집단의 성립에서부터 몰락까지의 과정과 주요 사건들을 적나라하게 파헤쳐 폭로함으로써 ‘CIA라는 거대한 검은 세력의 모든 것’을 밝혀내 보여주고, 그동안 20세기 현대사의 중요한 대목들마다 해명되지 않고 남아있던 수수께끼들을 풀어낼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현대사에 관심이 많은 독자나 연구자라면 결코 빠트릴 수 없는 중요한 필독서이다.
hajin